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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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58-60
효과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물론 쉽지 않다. 이야기를 하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남들이 그 이야기를 믿게 만드는 게 어렵다. 역사의 많은 부분은 이 질문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어떻게 한 사람이 수백만 명에게 국가에 대한 특정한 이야기, 혹은 유한회사를 믿게 만드는가? 그러나 일단 성공하면, 사피엔스는 막강한 힘을 갖게 된다. 서로 모르는 사람 수백 명이 힘을 모아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매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중략)
대부분의 인권 운동가들은 인권이 존재한다고 진지하게 믿는다. 2011년 유엔이 리비아 정부에 시민의 인권을 존중하라고 요구했을 때 거짓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령 유엔도 리비아도 인권도 우리의 풍부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일지라도 말이다. 인지혁명 이후, 사피엔스는 이중의 실재 속에서 살게 되었다. 한쪽에는 강, 나무, 사자라는 객관적 실재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신, 국가, 법인이라는 가상의 실재가 존재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상의 실재는 점점 더 강력해졌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강과 나무와 사자의 생존이 미국이나 구글 같은 가상의 실재들의 자비에 좌우될 지경이다.

117
수렵채집인의 확산과 함께 벌어졌던 멸종의 제1의 물결 다음에는 농부들의 확산과 함께 벌어졌던 멸종의 제2의 물결이 왔고, 이 사실은 오늘날 산업활동이 일으키고 있는 멸종의 제3의 물결에 대한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 우리 조상들이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았다는 급진적 환경보호운동가의 말은 믿지 마라. 산업혁명 훨씬 이전부터 호모 사피엔스는 모든 생물들을 아울러 가장 많은 동물과 식물을 멸종으로 몰아넣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는 생물학의 연대기에서 단연코 가장 치명적인 종이라는 불명예를 갖고 있다.


147
아마도 좁은 상자 안에 갇혀서 살을 찌우다가 육즙이 흐르는 스테이크가 되어 짧은 삶을 마감하는 송아지보다는 멸종 위기에 처한 희귀한 야생 코뿔소가 더 만족해할 것이다. 만족한 코뿔소는 자신이 자기 종족의 마지막 개체라는 데 아무 불만이 없다. 송아지의 종이 수적으로 성공한 것은 개별 개체들이 겪는 고통에 그다지 위안이 되지 못한다.
진화적 성공과 개체의 고통 간의 이런 괴리는 우리가 농업혁명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일 것이다. 우리가 밀이나 옥수수 같은 식물의 이야기를 조사할 때는 순수한 진화적 관점이 타당할지 모른다. 하지만 소나 양, 사피엔스처럼 각자 복잡한 기분과 감정을 지닌 동물의 경우, 진화적 성공이란 거싱 개체의 경험에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도 우리는 우리 종이 집단적으로 힘을 키우고 외견상 성공을 구가한 것이 개개인의 큰 고통과 나란히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될 것이다.

169-177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나 민주주의, 자본주의 같은 상상의 질서를 믿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첫째, 그 질서가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사회를 지탱하는 질서는 위대한 신이나 자연법에 의해 창조된 객관적 실재라고 늘 주장해야 한다. (중략) 또한 사람들을 철저히 교육시켜야 한다. 그들이 태어나자마자 세상 만물에 스며들어 있는 상상의 질서 원리들을 끊임없이 주지시켜야 한다. (중략)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조직화하는 질서가 자신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주된 요인은 세 가지이다. 1. 상상의 질서는 물질세계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 (중략) 2. 상상의 질서는 우리 욕망의 형태를 결정한다. (중략) 3. 상상의 질서는 상호주관적이다. (중략) 상상의 질서를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우리가 감옥 벽을 부수고 자유를 향해 달려간다 해도, 시상은 더 큰 감옥의 더 넓은 운동장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일 뿐이다.

247
‘우리 대 그들’이라는 이분법적 진화적 구분을 처음으로 어찌어찌 초월했고 인류의 잠재적 통일을 내다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상인, 정복자, 예언자들이었다. (중략) 지난 3천 년간 사람들은 이런 지구적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 점점 더 야심 찬 시도들을 했다. 이어지는 세 장에서는 화폐와 제국과 보편종교가 어떻게 퍼져나갔고 어떻게 오늘날의 통합된 세계의 기초를 닦았는가를 이야기할 것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역사상 최대의 정복자, 극도의 관용과 융통성을 지녔으며 사람들을 열렬한 사도로 만들었던 정복자에 대한 것이다. 이 정복자는 바로 돈이다. 같은 신을 믿거나 같은 왕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도 기꺼이 같은 돈을 사용하려 한다.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의 문화, 미국의 종교, 미국의 정치를 그토록 증오했지만 미국 달러는 매우 좋아했다. 돈은 어떻게 신과 왕이 실패한 곳에서 성공할 수 있었을까?

267
돈은 두 가지 보편적 원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1. 보편적 전환성: 돈이 있으면 당신은 마치 연금술사처럼 땅을 충성심으로, 사법을 건강으로, 폭력을 지식으로 변환할 수 있다.
2. 보편적 신뢰: 돈을 매개로 삼으면 임의의 두 사람은 어떤 프로젝트에도 협력할 수 있다.
이런 원리 덕분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무역과 산업에서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해롭지 않아 보이는 이 원리에도 어두운 면이 존재한다. 모든 것이 변환 가능할 때, 그리고 신뢰의 기반이 익명의 동전과 별보배고둥일 때, 돈은 지역 전통, 친밀한 관계, 인간의 가치를 부식시키고 이를 수요와 공급의 냉정한 법칙으로 대체한다. 인간 공동체와 가족들은 늘 명예, 충성심, 도덕, 사랑처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삼았다. 이런 것들은 시장 영역의 바깥에 있었으며, 돈으로 사거나 팔려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다. 설령 시장이 값을 잘 쳐주겠다고 하더라도, 어떤 것은 그냥 해서는 안된다. 부모는 아이를 노예로 팔아서는 안 되고, 경건한 기독교인은 대죄를 범해선 안 되고, 충성스러운 기사는 영주를 배반해서는 안 되며,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부족의 땅을 낯선 사람에게 팔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돈은 언제나 이런 장벽을 돌파하려고 댐의 틈새에 스며드는 물처럼 기를 써왔다. (중략) 돈이 공동체, 신앙, 국가라는 댐을 무너뜨리면, 세상은 하나의 크고 비정한 시장이 될 위험이 있다.

272
우리는 약자가 이기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역사에 정의란 없다. 과거에 존재했던 문화 대부분은 늦든 이르든 어떤 무자비한 제국의 군대에 희생되었고, 제국은 이들 문화를 망각 속에 밀어 넣었다. 제국도 마침내 무너지지만, 대체로 풍성하고 지속적인 유산을 남긴다. 21세기를 사는 거의 모든 사람은 어디가 되었든 제국의 후예이다.

291
세상에는 인간의 문화에서 제국주의를 제거하고 죄에 더렵혀지지 않은 소위 순수하고 진정한 문명만을 남기자는 취지의 학파와 정치운동이 있다. 이런 이데올로기들은 잘해봐야 순진할 따름이고, 나쁜 경우에는 노골적인 민족주의와 편견을 가리려는 표리부동한 눈속임으로 기능한다. (중략) 인류의 모든 문화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제국과 제국주의 문명의 유산이며, 어떤 학술적, 정치적 외과수술을 한다 해도 환자를 죽이지 않고 제국의 유산만을 도려낼 수는 없다.

345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는 문화를 건축하는 벽돌로서 ‘밈meme‘이 아니라 ‘담론discourse‘을 들먹이지만 이들 역시 문화는 인간의 이익과 무관하게 스스로 퍼져나가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가령 민족주의를 19세기와 20세기에 퍼져서 전쟁, 압제, 증오, 인종청소를 일으킨 치명적 전염병으로 묘사한다. 한 나라의 사람들이 거기 감염되는 순간, 이웃 나라의 사람들도 그 바이러스에 감염될 가능성이 컸다. 민족주의 바이러스는 스스로가 인간에게 혜택이 된다고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주로 자기 자신에게만 이익이 되었다.

356-360
과학혁명은 지식혁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무지의 혁명이었다. 과학혁명을 출범시킨 위대한 빌견은 인류는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모른다는 발견이었다. 근대 이전의 전통 지식이었던 이슬람, 기독교, 불교, 유교는 세상에 대해 알아야 할 중요한 모든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고 단언했다. 위대한 신들, 혹은 전능한 유일신, 혹은 과거의 현자들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지혜가 있었고, 그것을 문자와 구전 전통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고대의 문헌과 전통을 파고들어 적절하게 이해함으로써 지식을 얻었다. 성경이나 코란, 베다에 우주의 핵심 비밀이 빠져 있다고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피와 살을 가진 피조물들이 앞으로 발견할지도 모르는 비밀이 말이다. (중략) 현대 과학은 무지를 기꺼이 받아들인 덕분에 기존의 어떤 전통 지식보다 더 역동적이고 유연하며 탐구적이다. 덕분에 우리는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능력과 새로운 기술을 발명할 역량이 크게 확대되었다.

506-507
가족과 공동체 품 안에서 사는 삶은 이상적이진 않았다. 가족과 공동체의 억압은 오늘날 국가와 시장의 그것보다 덜하지 않았다. 그 내적 역학은 긴장과 폭력으로 가득하기 일쑤였지만, 사람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1750년경 가족과 공동체를 잃은 여성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직업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했으며, 병들고 곤궁할 때 도와줄 곳이 없었다. 돈을 빌려줄 사람도, 분란이 생겼을 때 옹호해줄 사람도 없었다. 경찰이나 사회복지사, 의무교육은 없었다. 살아남으려면 새로이 소속될 가족이나 공동체를 즉시 찾아야 했다. 집에서 도망친 소년 소녀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다른 집안의 하인이 되는 것이었다. 최악의 경우 군대나 매춘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략) 낭만주의 문학은 곧잘 개인을 국가와 시장을 대상으로 투쟁하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사실 이보다 진실에서 먼 이야기는 없다. 국가와 시장은 개인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이며, 개인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들 덕분이다.

588
이보다 더욱 나쁜 것은 인류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무책임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친구라고는 물리법칙밖에 없는 상태로 스스로를 신으로 만들면서 아무에게도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의 친구인 동물들과 주위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든다. 오로지 자신의 안락함과 즐거움 이외에는 추구하는 것이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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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8-01-24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아는 게 많다 보니 예로 드는 얘기들이 넘넘 다채롭고 재미있어서 푹 빠져서 읽었다. 큰 줄거리에도 대체로 공감이 갔는데, 특히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인간을 지배한다는 생각이 아주 신선했다.
 
쓰가루.석별.옛날이야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5
다자이 오사무 지음, 서재곤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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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과 <사양>, <달려라 메로스>를 20대 초반에 읽었지만 크게 관심이 가지는 않았는데, 미시마 유키오가 다자이를 그렇게나 싫어했다는 얘기에 호기심이 끓어 올라 읽고 있다.

 

생각보다 너무 좋다.

 

이 책에 실린 세 편은 모두 2차대전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성 상실의 위기 속에서 쓰여진 작품들이다.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글들이다. 그런데도 작가는 괴롭다고 울부짖지 않는다. 담담한 진술, 때로는 자조적인 유머. 그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고결함이 느껴지는 것이 신기하다.

<석별>, 204-205
센다이 사람들도 도호쿠 방언이 심했지만 내가 살던 시골은 훨씬 심해 무리해서 도쿄 표준어를 사용하려고 하면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어차피 시골 출신이라는 것이 알려져 있는데 아니꼽게 표준어를 사용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것은 시골 출신만이 알 수 있는 심리로 시골 사투리를 그대로 써도 비웃음을 하고 또 애써 표준어를 사용하면 더 큰 비웃음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결국은 무뚝뚝한 과묵거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 무렵 다른 신입생들과 소원했던 것은 이와 같은 언어 문제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하나는 나도 의학전문학교 학생이라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까마귀도 한 마리 홀로 나목(裸木)에 앉아 있으면 그 모습이 그리 나쁘지 않고 새까만 날개가 멋지게 빛나 보이기도 하지만 수십 마리가 모여서 떠들면 쓰레기같이 보이는 것처럼, 의학전문학교 학생도 떼를 지어 큰 소리로 웃으면서 거리를 활보하면 사각모의 권위도 떨어지고 정말로 바보스럽고 불결하게 보였다. 어디까지나 고급 학생으로서 자부심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에 그들을 피해 다녔다고 하면 모양새가 좋겠지만, 한 가지 더 자백하면 나도 입학 당시에는 그저 흥분해서 무턱대고 센다이 시내를 돌아다녔고 실은 학교 수업도 종종 무단결석을 했다. 그랬기에 다른 신입생들과 소원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고 마쓰시마 유람선에서 그 신입생과 마주쳤을 때, 가슴이 철렁했고 왠지 모르게 거북했다. 나는 승객 중에서 유일하게 고고한 학생으로서 크게 폼 잡으며 마쓰시마를 구경하고 싶었는데, 또 한 사람, 나와 같은 교복과 교모 차림의 학생이 있어서는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 학생은 도시인처럼 세련되었고 아무래도 나보다 수재인 것 같아 풀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매일 성실하게 등교해서 공부를 하는 학생임에 틀림없었다. 맑고 시원한 눈으로 내 쪽을 흘끗 보았기에 나는 비굴한 웃음으로 답했따. 아무래도 안 좋아. 까마귀 두 마리가 뱃전에 앉아 있는데 한 마리는 여위어 초라하고 날개 색도 좋지 않으니 전혀 돋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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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소리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2
미시마 유키오 지음, 이진명 옮김 / 책세상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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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의 <파도 소리>를 이제서야 읽었다.

유명한 "그 불을 넘어 와"의 앞뒤 상황도 알게 되었는데, 굉장히 의외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젊은이들이 이렇게 순결하게 사랑하는 소설이 세상에 존재했었구나!

매우 훌륭한 작품.

 

 

79-81

"하쓰에!"
신지가 외쳤다.
"그 불을 넘어와. 그 불을 넘어오면."
소녀는 숨을 헐떡거리며 맑디맑은 목소리로 가쁘게 말했다. 맨살의 신지는 주저하지 않았다. 불빛에 비친 그의 몸은 불길 속을 날아올랐다. 그 다음 순간 그는 이미 소녀 바로 앞에 당도해 있었다. 신지의 상체가 하쓰에의 가슴에 가볍게 스쳤다.
"이거야. 이전에 빨간 스웨터 아래로 내가 상상했던 것은 바로 이 탄력이야."
신지는 감동했다. 그리고 둘은 껴안았다. 소녀는 앞으로 부드럽게 쓰러졌다.
"솔잎 때문에 아파." 라고 소녀가 말했다. 손을 뻗어 하얀 속옷을 집어든 신지는 그것을 소녀의 등 밑에 깔려고 했다. 하지만 소녀는 한사코 이를 거부했다. 하쓰에의 양손은 더 이상 신지를 안으려 하지 않았다. 마치 어린애가 풀숲에서 벌레를 잡았을 때와 같이 무릎을 움츠리고 양손으론 속옷을 말아넣으며 완강하게 몸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하쓰에는 도덕적인 말을 했다.
"싫어. 시집가기 전의 처녀가 그런 일을 하면 안 돼."
맥이 풀린 신지는 힘없이 말했다.
"도저히 안 되겠니?"
"안 돼."
소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모습은 훈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위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금은 안 돼. 나, 너에게 시집가기로 마음먹었어. 시집가기 전까지는 정말로 안 돼."
신지의 마음 속에는 도덕적인 것에 대한 지고지순한 경건함이 있었다. 첫째로 그는 아직 여자를 몰랐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여자라는 존재가 지니고 있는 도덕적인 해4심을 건드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강요하지 않았다.
신지가 팔로 소녀의 몸을 꼭 감싸안은 채 둘은 서로의 맨몸으로 전해오는 고동을 들었다. 오랜 입맞춤은 채울 수 없는 젊음에 고통을 주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그 고통은 신비하게도 행복감으로 승화되었다. 이제야 장작불이 잦아드는지 이따금씩 튀기 시작했고 그 소리와 높은 창문을 스쳐드는 폭풍의 휘파람이 두 사람의 고동에 섞였다. 그러자 신지는 오래도록 깨어날 수 없을 듯한 취한 기분과 문밖의 파도 소리, 나무 끝을 뒤흔드는 바람의 반향이 자연 속에서 서로 동등하게 고조되어 물결치고 있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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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없는 불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5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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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1
<가난>이란 단어는 아름답고, 왠지 고귀한 단어 같았다. 그 단어를 보면 마치 옛 교과서에서 풍기는 이미지들, 즉 가난하지만 청결하다는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가난한 사람들은 청결하였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있었다. 사회적 진보는 청결 교육에 있었다. 빈곤한 사람들이 일단 청결해지면 <가난>이라는 것은 명예 훈장이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궁핎한 사람들의 눈에도 궁핍에서 오는 불결함은 다른 나라에 사는 하층민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었다.
<창문은 그 집에 사는 사람의 명함이다.>
그래서 무산자들은 당국에서 환경 개선을 하라고 준 돈을 꼬박꼬박 자신들의 집을 깨끗이 하는 데 썼다. 비참한 상황에서 그들은 역겹지만 바로 그 때문에 구체적으로 체험 가능한 모습으로 사회 통념들을 교란시켰다면 이제는 개선되고 깨끗해진 <가난한 계층>으로서 그들의 삶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추상적이어서 예전에 비참했던 모습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궁핍에서 오는 비참함은 구체적인 말로 묘사될 수 있지만 가난은 그저 상징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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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
노베르트 로징 글.사진, 이순영 옮김 / 북극곰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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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7
이누이트 족이 이글루비쿠스라고 부르는 굴 안에서 어미 곰은 지난겨울에 축적한 지방을 소비하며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겨울잠 속에서 출산을 기다립니다. 새끼들은 11월과 12월 사이에 태어납니다. 어미 곰은 보통 한 마리나 두 마리의 새끼를 낳아 전형적인 북극곰 가족을 이룹니다. 가끔은 세 마리를 낳는 경우도 있습니다.
북극곰은 막 태어날 당시에는 다람쥐보다 더 작으며 몸무게는 1킬로그램 정도입니다. (중략) 6주 정도가 지나면 눈을 완전히 뜨고 10주가 되면 무게가 11킬로그램에 이르고 몸의 균형도 잡을 수 있게 됩니다. 마침내 굴 밖으로 나갈 준비를 마친 것이지요.

그때가 되면 낮이 점점 길어지고 따뜻해져 어미 곰은 밖으로 기어 나와 기지개를 켭니다. 어미 곰의 털은 굴속에서 수개월을 지난 터라 흙이 많이 묻어 있고 얼음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혼자 몇 번 밖에 나갔다 온 후에 어미 곰은 별로 따라나서고 싶지 않은 새끼들을 유인하여, 곰의 일생 중에 처음이자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계절을 보낼 바깥세상으로 데리고 나옵니다. 처음에는 새끼 곰들이 어미 곁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지만 곧 눈 위에서 장난을 치기 시작합니다. 새끼들은 이런 놀이를 통해서 점점 강하게 자라며 신체 조정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처음에는 새끼들의 굴 근처에서만 놉니다. 위험에 처하거나 갑자기 날씨가 나빠질 경우에는 재빨리 굴속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지요. 겨울 환경에 순응하는 것은 북극에서 사는 모든 생명체들의 숙명입니다. 새끼들 역시 겨울 환경에 빨리 적응하면 할수록 생존할 가능성도 더 높아집니다.

한번은 깊이 파인 토굴에서 50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새로 판 눈으로 된 굴을 발견했습니다. 그 토굴의 입구에는 곰 가족의 입김 때문에 발생하는 서리가 보였습니다. 모리스는 3개월이 지난 후에 어미 곰이 기존의 오래된 굴에 싫증이 나서 깨끗하고 밝은 주거 공간을 찾았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어미 곰은 주변 경관이 잘 보이는 남향의 긴 적설 언덕을 발견하고 그 한가운데에 새로운 글을 파기 시작했을 겁니다. 어미의 긴 발톱 자국이 굴 주변에 여기저기 찍혀 있고 쌍둥이 새끼 곰의 작은 발자국도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1-2주 후에 어미와 새끼 곰은 허드슨 만으로 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이누이트 족은 그 여정을 ‘아틱톡(ah-tik-tok, 바다로 가는 여행자들)’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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