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단 한마리뿐인 얼짱 강아지입니다. 합성사진이라고는 하지만 어쩜 이런 아이디어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강아지의 눈 빛이나 입 모양...어디하나 어색한 구석이 없이 완벽에 가까운 얼짱 숫강아지인데...여기 어울리는 암강아지가 있다면 맺어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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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ylontea 2004-05-31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무서워요.. 얼짱 강아지라 해서 귀엽고 예쁜 강아지를 잔뜩 기대했었는데.... ㅠ.ㅜ (수수께끼님 미오...흑흑)

비로그인 2004-05-31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기에도 눈매부터 무섭군요...인간 얼짱은 강아지 나라에서는 얼짱축에도 못 끼는 모양이지요? 거...참.... 처다보는 눈매도 별로 좋은 인상이 아니지요? 조금 놔 뒀다가 시간이 되면 지우겠습니다.(어차피.....초, 중, 말 머시기도 가까워 오고 하니....자연히 그 때쯤이면 사라질겁니다 ^^~)

sunnyside 2004-05-31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앗, 엽기적이다... 저 눈이 누군건지 궁금해요. 어디 의류 카탈로그에 나오는 모델 같기도 하군요.. ^^;

비로그인 2004-05-31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다...눈매가 무서운게 아니라 정말 엽기적이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리는것 같군요...숨겨진 사람이 누군지 현상 공모라도 해야하나? 아님 검은비님처럼 이벤트로 주인공을 찾아야 하나? 고민되네요....
 
일본의 역사 - 이야기로배우는
가쿠 고조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5년 12월
평점 :
절판


  이웃나라인 일본의 역사는 개인적으로 별로 흥미가 없는 일이다. 그들의 역사 왜곡 행태가 이런 마음을 부추키고 있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마음속에는 일본은 우리로 부터 많은것이 전래된 문화속에서 지금의 세계 일류 국가로 성장했다는 일종의 문화 후진국이었다는 과거사가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 저 책을 통하여 일본에 전해지고 또 일본에서 이루어진 일 중에서 한반도로 부터 건너갔거나 한반도에서 유입된 백제인등에 의하여 조성된 문화재를 접하면서 일본사를 약간씩은 맛 볼 수 있었으나 그 때마다 꼭 일본의 역사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싫든 좋든 일본은 우리의 이웃이고 과거는 물론 미래에도 일본과의 교류는 문화적이건 산업적이건 지속될 것이기에 간단하게나마 일본을 알고자 이 책을 구매했었는데 그동안 책꽂이에 꽂힌 상태로 10년 가까이 흘러왔다.

  이 책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간략하게 되어있다. 쉽게 말하자면 깊이는 없지만 일본의 역사 전반에 걸쳐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어 외국인들의 시각에서 접하고자 하는 일본 역사 알기에는 매우 적합하게 기술하고 있다. 모두 여섯 개의 꼭지로 이루어진 이 책은 일본의 시조가 누구인가를 묻는 물음으로 시작하여 2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경험하는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가에 대하여 까지를 시대순으로 구성하였다. 일본 사람들은 역동적인 그들의 역사를 즐기며 다양한 역사물이 출간되고 있는데 외국인의 입장에서 등장하는 인물이나 인간관계를 이해하기가 벅찬데, 이 책은 그런 수고를 덜어주면서도 일본 역사의 흐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다.

  전반적인 역사의 전개과정을 시기별로 주요한 내용을 뼈대로 하여 당시의 등장인물이나 사회적 배경, 사건 등을 간략간략하게 설명하여 일반 역사서처럼 골치 아프게 읽지 않도록 되어 있다는것이 이 책이 갖는 장점일 것이다. 이 책에서 한반도는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 간혹 중국과의 관계에서 한반도에서의 우위 확보를 위한 내용은 있으나 문화의 전래과정 등에서 한반도를 이토록 배제하고 있는것은 저자 "가쿠 고조"의 원본이 그런것인지...아니면 옮긴이의 우리 정서에 대한 배려인지가 궁금하다. 저자의 의도가 어떠하든 가까운 나라 한반도와의 교역은 일본 역사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었음이 틀림없을진데 거의 언급이 없음은 읽는 사람에게는 답답함을 주지만 역사적 갈등속에 놓여있는 두 나라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차라리 책의 내용에 포함이 되어 반감을 불러 일으키는것 보다는 낫다고 하겠다.

  이 책에는 현재의 일본의 각종 제도나 법률의 성립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고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비교적 소상하게 설명을 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근대사에 있어서는 중국의 <남경대학살>등에서 자행되었던 일본 관동군의 반행을 살륙행위로 표현하는등 비교적 객관적인 기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는 반복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반복의 역사는 똑 같은 일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되는 일이기에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며 미래를 개척해 나갈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자칫 수박 겉핥기식의 일본 역사로 오인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웃나라 일본의 간략한 역사만 알아도 우리는 일본의 실체를 어느정도 파악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도 후반부에 저자는 일본이 향후 세계속에서 어떻게 발전해 나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나름대로 일본의 위치를 설정하고 있다. 그만큼 일본은 과거의 역사를 미래와 어떻게 연관지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이 일본 역사의 모든것을 다 말해줄 수는 없다해도 이 책을 통하여 간략하나마 일본의 역사를 맛 볼 수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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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방송에서 휴일 스케치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고궁 나들이 모습입니다. 도심속의 풍경중 유달리 고궁 스케치가 많다는 것은 고궁이 현대를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 있어 빼곡히 들어찬 건물과 빡빡한 삶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는 휴삭처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궁궐(宮闕)이라는 말이 우리의 역사 속에서 아주 오래전의 과거에 사용되던 용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실은 朝鮮이라는 한 시대가 막을 내린지 채 100년도 되지 않았고 신문명을 받아 들인지도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급변하는 문물의 이입으로 사회구조와 우리 생활에 큰 변화와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우리의 궁궐이나 생활은 불과 100년이 채 안되었음에도 저 먼 옛날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로만 인식되고 있는 현실이 바로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처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있는 5대 고궁을 찾습니다.  5大宮이란 昌德宮과 昌慶宮, 그리고 景福宮, 德壽宮, 慶熙宮을 말하는데 이 다섯 개의 궁궐 중에서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에 창덕궁만 유일하게 선정되어 있습니다.     다른 궁들도 있는데 왜? 유독 창덕궁만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조선 중기 이후부터 최근세기까지 지어진 건물에서 다양한 건축 양식을 볼 수 있으며, 특히 後苑(흔히들 秘苑이라고 하지만 이 이름은 일본인들이 격하 시킬 목적으로 붙여준 이름이며 비원 보다는 창덕궁의 후원으로 쓰는 것이 바람직 합니다)은 300여년이나 된 우리 나라의 정원 조경의 두드러진 성격을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역사적, 건축학적 측면에서 그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기에 지정이 된 것입니다.

    창덕궁을 관람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80년대에는 장기간의 공사로 인하여 공개되지 않았었으며, 공사가 끝나고 개방된 이후에는 일정 시간에 맞추어 집단으로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며 관람토록 되어 있습니다.    특히 자주 찾는 일본인 관광객을 위하여는 매 시간 안내를 하며, 기타 외국인의 관람시간.....그리고 내국인의 관람시간은 별도로 설정하여 관람토록 하고 있는데,  이런 이유로 일반 궁궐처럼 혼자 사색을 한다거나 호젓하게 고궁이 갖는 한적한 기분을 느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창덕궁의 관람시에는 아예 상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흔히들 중국 관광을 가서 자금성을 구경하고 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우리 나라 궁궐들은 작고 보잘것이 없다고들 합니다.   하기야.....자금성의 위용을 보고 나서 우리의 궁궐을 보면 그 규모가 비교가 되지 않기에 하는 말들이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형만을 보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중국의 건축물들은 거의 모두가 좌우 대칭형입니다. 대부분이 넓고 평평한 대지 위에 지어져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이들의 건축은 마치 종이에 그린 것 처럼 반으로 양분된 것 같아 접으면 좌우가 딱 맞아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중국의 건물은 크기만 할 뿐 線이나 절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습니다.      우리 궁궐(한옥도 마찬가지입니다만...)의 처마를 보십시요. 그 처마가 얼마나 하늘로 날아 오를 듯 경쾌하게 만들어져 있습니까?  거기다가 건물의 배치는 건물이 놓여진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고 음양오행을 적용하여 건축하였으니 그 경관은 건축물이 어디에 놓이던 자연과 괴리되지 않고 자연 속에 하나 되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左靑龍 右白虎의 風水를 살려 지어진 우리의 宮闕

  궁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궁궐인 창덕궁은 어떤 구조일까요?    임금이 나라 일을 보던 正殿과 대신들과 국사를 의논하거나 궁을 지키는 군인들이 머물던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는 지역을 外殿이라고 하는데 이 외전이 수행하는 기능을 <闕>이라 하였고,  임금과 그 가족이 거쳐하는 곳으로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과 같이 살고 있는 지역인 內殿을 <宮>이라고 합니다. 궁은 또 다시 '正宮'과 '離宮'으로 구분하며 '정궁'이란 임금과 가족이 생활 할 수 있는 궁이 다 갖추어진 것을 말하며(흔히 6宮이라고 합니다)  '이궁'이란 이러한 6궁을 다 갖추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내전'과 '외전'이 같이 있는 곳을 <궁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창덕궁은 대비나 대왕비는 창경궁에 거처를 두었고 동궁도 다른 곳에 머물렀고 창덕궁에 이들의 거처가 없었기에 창덕궁은 '이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창덕궁에는 임금이 신하들을 모아 외국의 신하들을 맞이한다거나 또는 국가의 커다란 행사를 치루던 인정전(仁正殿)이 있으며,  인정전은 만조백관이 다 모인 가운데 조례를 치루는 장소였기에 종1품, 정1품 등으로 구분된 품계석(品階石)이 정전 마당 좌우에 세워져 있습니다.    건물의 이름도 어진 정치를 편다는 '인정전'이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며 어진 정치를 한다는 의식은  위정자의 포부였었나 봅니다.     인정전과는 문으로 연결되어 임금이 집무를 하며 신하들의 결재를 하고 국사를 논하던 선정전(宣正殿)이 있고 선정전과 담을 하나 두고 임금의 침소인 熙政堂이 있으며 희정당의 뒷편에는 왕비의 침소인 대조전(大造殿)이 있습니다.

   인정전이나 선정전, 희정당등 임금이 잠시라도 머물도록 된 곳에는 모두 어좌(禦座)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임금이 앉는 의자이기에 높임말로 용상(龍床)이라고도 부르는 임금의 자리 뒷편에는 백성을 잘 이끌고 부귀 영화를 누리라는 의미와 임금의 무병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해와 달,  그리고 다섯 봉우리가 그려진 병풍이 있는데 이를 <일월오악병(日月五嶽屛)>이라고 합니다.  창덕궁 내전 건물의 특징은 어느 쪽 방문을 열든 밖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방안에 앉아서도 창문만 열면 밖을 구경 할 수 있도록 되어있음은 물론이고 창문에는 일정한  모양을 갖춘 불발기창이 설치되어 자칫 어둡고 침침할지도 모를 실내에 충분한 빛이 들어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담벼락이나 굴뚝에도 아름다운 기하학적 문양이나 화초 그림을 넣어 단순하고 단조로울수 있는 일상에서 잠시라도 탈피하고자 하는 마음과 궁내 생활의 답답함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자연과 가깝게 배려한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巨木과 연못...그리고 아름다운 조경이 가득한 後苑

  창덕궁의 내전에서 문 하나를 지나면 후원의 경내에 접어들게 됩니다. 잠시 숲길을 오르다 다시 내리막 길을 내려가면 휴게실이 나타납니다.  이 휴게실은 창덕궁의 유일한 매점을 겸하고 있는데 이곳에 왜?  매점이 있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이곳에서 관광객에는 잠시 쉴 시간이 주어집니다.  시간이 없다고 들르는 곳에서마다 독촉을 하던 안내원도 이곳에서는 잠시 방관을 하는것은 매점의 매상과 관련이 있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실은 이 지역이 창덕궁 후원의 별미라고 할 수 있는 부용지(芙蓉池)와 부용정(芙蓉亭)이 있는 곳이지요.  부용정은 두 발을 부용지에 담근 형태의 아(亞)자형 정자로 내부에 들면 아름다운 불발기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의 산란이 은은한 곳입니다.  관람객들은 이 지역에 들어서면서부터 마음의 푸근함과 여유를 느끼게 될 정도로 아늑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랍니다.  이곳에 매점을 만들고 잠시 쉴 수 있도록 배려한 것도 그만큼 이곳이 편안한 곳이기 때문인 모양입니다.   부용지의 한 쪽에는 영화당(映化堂)이라고 현판이 걸린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 앞에서는 과거 시험을 치뤘었습니다.  그리고 부용정의 맞은 편에는 어수문(魚水門)이라는 담장이 없는 문이 있으며 그 윗쪽에는 2층 누각인 주합루(宙合樓)가 있는데 주합루의 아랫층은 바로 규장각(奎章閣)입니다.  숙종 때 만들어진 규장각을 정조는 왜 창덕궁의 후원으로 옮겼을까?  정조의 문예부흥이 그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규장각은 많은 서적이 보관되었던 일종의 도서관이었으며, 주합루의 서쪽에는 규장각의 도서를 열람하는 희우정(喜雨亭)이 있어 임금도 이곳에 들러 규장각의 도서를 열람하였다고 합니다.   주합루의 이층에서 내려다 보는 부용지 주변의 풍광과 경치는 정말 일품입니다. 봄이며 돋아나는 새싹과 꽃으로 가득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물소리와 녹음이 울창하며, 가을의 낙엽은 세월이 남긴 흔적으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겨울에는 눈덮인 일대의 정적이 가슴속에 아프게 내려 앉는 느낌을 준답니다.  옛 사람들은 이런 것을 어찌 알고 이 곳에 건물을 지었는지 그저 감탄할 따름입니다.  부용지의 풍경은 밝은 햇빛 속에서 보기에는 너무 가볍다고 느껴져 안개비라도 내려 준다면 정말로 분위기가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도 합니다. 그만큼 부용지 주변은 닫혀있는 우리의 마음을 살그머니 열고 풀어놓고 싶은 공간입니다.

아름다움이 날아갈 듯 살아있는 우리의 건축

   영화당을 벗어나 잠시 숲이 우거진 길을 따라가면 작은 연못이 나오고 거기에는 정사각형의 커다란 지붕을 가진 애련정(愛蓮亭)이 나타납니다.  부용지처럼 화려하지도 않은 수수한 연못에 두 발을 담그고 있는 정자인데 한자로 표현하면 그 뜻이 다르겠지만, 주변 분위기 처럼 정자만 달랑 하나가 있는것이 애련하기만 합니다. 어쩌면 정자의 분위기가 그 정자 이름과 같은지 말입니다.(여기에서 말하는 정자 이름은 한문이 아니라 한글로 말함입니다)       부용지나 애련지나 다 마찬가지지만 이곳 연못으로 흘러드는 물은 그저 곱게 흘러들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연못에 몸이 닿기 전에는 반드시 이무기나 용의 입을 통해야 하고 그것도 바로 떨어지는것이 아니라 몇 차례나 멈추었다가 떨어지게 만들었으니 아마도 우리 조상의 여유로움이 이런 조형물에 까지도 담겨 있는것은 아닐지요?

  애련지의 우측 조금 높은 곳에는 임금이 사대부 생활을 경험하기 위해 지은 99칸짜리 집이 있으니 연경당(演慶堂)입니다. 사대부 집은 집앞에 개울이 흐릅니다. 그리고 그 개울을 건너야 대문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연경당의 대문인 장락문(長樂門)도 그 절차를 밟은 후 출입토록 되어 있습니다.  연경당의 구조는 겉문은 들개창으로 만들어 밖을 시원하게 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안채에서는 방안에 앉아서도 사랑채와 행랑채가 한 눈에 보이게 만들어졋고, 대문에서는 약간 비껴앉은 안채가 바로 들여다 보이지 않도록 배려한 모양입니다. 방안에 앉아서도 마당의 꽃을 구경하도록 되어 언제나 방문만 열면 화단에 핀 꽃을 볼 수 있는데,  마침 하얗게 소복처럼 단장한 찔레꽃의 향기가 방안으로 스며듭니다.      이밖에도 후원에는 아름다운 정자가 많이 있습니다. 연경당 뒷편 축대위에 있는 농수정(濃繡亭), 육각형의 지붕 모양이 아름다운 존덕정,  고인 물이 한 바퀴를 돌아 떨어지게 만든 옥류천, 바닥면이 부채꼴 모양인 관람정(觀纜亭) 등 우리가 잊고 있은지 한 세기가 안되는 우리의 정원 조경 문화와 건축 문화가 이곳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도심속의 섬이라고 부를만한 별천지.....창덕궁과 후원은 그 아름다움 만큼이나 수난도 많았습니다. 수 차례 불이 났으며, 조선조 말에는 서구의 신문명이 들어와 고종 때에는 임금이 자동차에 오르내리기 쉽도록 하기 위하여 궁의 입구를 다시 곳추세워 만들어야 했으며, 자가발전 시설이 도입되어 궁내 흐늘거리던 촛불이 전등으로 바뀌는 등 옛 것과 새 것이 공존하는 형태로의 변화가 있었지만 인구 1200만의 복작거림, 그 한가운데 조용히 "세계문화유산"으로 영원히 우리의 가슴속에 남겨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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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는 조각에 신라인은 어떻게 미를 접목시켰나에 대해 말씀드렸고, 오늘은 신라 회화에 나타난 미의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신라의 회화를 이해하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선은 현존하는 신라의 회화가 거의 전무하다는데 그 이유가 있답니다. 사실, 신라는 국가에서 채전(彩典)이라 하여 국가에서 관장하던 일종의 화원 양성소도 설치하였었고, 덕만공주(德曼公主)의 예에서 나타나듯 당시에 당나라와 빈번한 왕래를 통한 회화의 교류가 있었음을 판단하면 회화에 대한 신라인의 열의는 고구려나 백제 못지않게 활발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며, 회화의 발전된 모습 또한 대단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아 있는 신라의 회화라고 할 수 있는것은 경주의 천마총(天馬塚)과 98호 고분에서 출토된 공예품들 뿐입니다. 여기 말이 나왔으니 하고 싶은 말입니다만, 우리가 천마도라고 하는것은 지금은 천마라기 보다는 기린이라는 동물이 아닐까 하는 점이랍니다. 왜냐하면 천마와는 달리 기린은 서기(상서로운 기운)을 내 뿜는 상상의 동물인데 천마도는 일반적인 말이라고 보기 보다는 기린이라고 보는것이 합당한것 같습니다. 이런 천마도나 기마, 인물도, 서오도(瑞烏圖), 우마도 등 출토품의 수준은 고구려나 백제의 회화와 비교하면 상당히 그 수준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분에서 출토된 미술품을 단순하게 일반 미술품과 비교할 수 없다는 비교 방식의 차이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고분 출토품들은 고구려 고분 벽화와 같은 회화라기 보다는 공예품에 그려진 공예화로서 신라 회화의 본 모습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천마도를 살펴보면 고구려 벽화의 말 그림 처럼 강렬함이나 위풍당당한 기세가 없으며, 백제의 산수문전(山水文塼)처럼 부드러운 느낌을 받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천마도에서는 무엇인가 할말을 다 하지 않고 할 말을 담고 있는듯한 그림으로 우리는 고요와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는 한편, 의도적으로 통제되고 절제된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느낌은 반가사유상에서 느끼듯 "내재된 세계의 함축미"라고 논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신라인의 회화 작품으로 신라인의 미의식을 담고 있는 회화로는 유일하게 국보 제 196호로 지정된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大方光佛華嚴經變相圖)"가 있는데 감지에 金銀泥로 그려졌으며 여기에서 나타나듯 화려하고 풍요로운 화풍은 신라 회화의 주류를 이루었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 특히 인체 표현에 나타난 부드러운 곡선과 후덕한 얼굴, 몸매의 유연한 자태, 호화로운 분위기 등은 신라 예술이 불교와 더불어 극도로 세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大方光佛華嚴經變相圖)"는 현재 호암미술관에 소장중인데 변상도의 가운데 부분은 모두 녹아 없어지고 양쪽 갓쪽만 남아 있으나 이 부분에 나타나있는 회화만으로도 신라인의 회화적 솜씨가 상당하다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2회에 걸쳐 신라의 조각과 회화에 나타나는 신라인의 미의식을 살펴보았는데, 신라는 통일전인 삼국시대부터 당나라와 활발한 교역을 통하여 당나라의 문화를 수용하였으며, 특히 통일 이후에는 철저한 불교 신앙을 바탕으로 정치적인 안정 속에서 더욱 포근하고 풍요롭게 아름다운 미의식으로 활발한 문화활동을 했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정치적 불안 속에서 조성된 작품들이 상당히 흔들리고 있음을 볼 때 신라인의 미의식 또한 정치적 불안과 더불어 많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의 예술은 불교라는 교리를 바탕으로 불법을 이루려는 의지 아래 하나의 완성된 미의식으로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라인의 예술적 감각은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에 걸쳐 불교를 대상으로 신앙심의 절정에 이르면서 예술품 또한 절정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신라의 예술은 불교의 정신적 바탕위에 이룩된 하나의 결정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불교를 받아 들여 정신적 지주로 삼으며 인간이 이루지 못하는 세상을 부처가 이루고, 인간의 고통과 속박에서 벗어난 부처로서의 승화된 형상을 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예술의 꾸준한 발전을 가져 왔으며, 그 발전의 결정체로 신라 예술은 절정의 꽃을 피우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신라인의 미의식은 불교와 더불어 그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며 지극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다양하고 풍부한 표현방법으로 정착하며 보다 세련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라인의 미의식을 알아 볼 수 있는 작품의 수가 많지는 않지만 한정된 미술품이라도 충분한 연구를 통하여 조금 더 考察해야 하겠으며 앞으로는 상대적으로 고구려, 백제인의 미의식과 비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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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5-29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해박함에 날로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다만 천마가 아니라 '기린'이 아닐까 하는 학설에 대해서 전 의구심을 품고 있습니다.
이재중씨의 주장이 근거가 없는 건 아니지만,
예로부터 부장품에 저승세계에 가는 길잡이로서 '천마'가 즐겨 그려졌고,
더군다나 그려진 위치가 말장식이었음을 감안할 때
전 오히려 기존의 '천마설'이 상식적인 수준에서 받아들여집니다.

비로그인 2004-05-29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린설은 이재중씨 뿐만 아니라 장충식 교수등 일부 학자들도 조심스럽게 꺼내고 있습니다. 비록 마구에 사용된 그림이지만, 중국의 마구에서 우리 천마와 동일한 그림이 발견이 되었으며, 이것을 말이 아닌 기린으로 명문화 되었다는데서 이재중씨도 이론을 제기했던 것인데, 원래 상상의 동물의 시원은 우리 나라가 아니기에 그 시원을 따져 쫒는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으로 다수의 학자들이 기린설에 동조를 하는 입장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천마총은 그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는 무덤이나 무덤의 규모로 보았을 때 상당한 지위의 인물로 판단할 수 있으며, 따라서 사후 세계를 동경하는 입장에서의 염원으로 기린이라는 상상의 동물을 그렸다고 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에 대한 연구는 향후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도 공동 연구가 추진된다면 밝혀질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중국에서 기린이 상상의 동물이 아닐것이라는 추측이 나오는데, 그 이유는 기린의 뼈로 추측되는 짐승의 머리 뼈가 발견 되었기 때문이랍니다. 조선인님의 반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조선인 2004-05-31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다 자세한 말씀에 대해 제가 더 감사드립니다.
 
금동불 Korean Art Book 1
곽동석 지음 / 예경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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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도서출판 "예경"이 오늘날의 삶 속에서 새로운 눈으로 우리의 문화유산을 살펴보며 서재가 아닌 마음속에 담아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출간된 KOREAN Art Book 씨리즈로 출간된 첫 번째 도서이다.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는 금동불을 한 책으로 엮었다는 의미 이외에도 문고판으로 만들어 누구나 쉽게 손에 넣고 볼 수 있도록 하였는데 오랜동안 불상을 연구해온 곽동석 저서로 이 책은 금동불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불상은 초기 불교의 형태와는 다소 다른 의미로 발전을 하게 되었다. 신을 표현한다는 자체가  오히려 신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다는 사고로 석가모니 입멸 후 오랜 동안 불상이 제작되지 않았으며, 그 경배의 대상은 부처의 뼈를 일컫는 불사리였다. 불상이 조성되는 시기는 간다라 지방으로 초기 불상의 형태는 서구인의 형태(이는 만드는 사람들의 인물을 기준으로 조성하였기 때문이다)로 조성되었으며 불상이 만들어지기 이전까지의 시기를 無佛像시기라고 우리는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숭배의 대상물로서 상징적인 의미를 담는 불상이 만들어지고 이러한 불상은 중국을 거쳐 우리 나라에 들어 오면서 삼국에는 제각기 자국민의 형상을 본 뜬 불상으로 조성되어져 백제시대의 "서산마애삼존불"의 미소는 "백제인의 미소"라는 말을 낳기까지 하였다.

  종교적 숭배의 대상인 불상을 논함에 있어 저자는 제련과 합금, 주물과 도금으로 이루어진 금동불을 제목으로 정했지만 책의 내용은 철불을 비롯하여 목불, 소조불, 건칠불 그리고 목탱화도 함께 설명하고 있다. 종류별로 설명하기에 앞서 간략하게 우리 나라에서의 각 불상의 특징과 역사를 설명하여 이해를 돕고 있는 한편으로는 그 조성 방법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설명하여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알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책은 각 박물관에 흩어져 있는 도록을 대신하도록 제작되었으며, 특히 중요한 불상에 관해서는 명문을 포함한 불상 부분 부분의 사진을 첨부하여 불상이 소재하고 있는 곳에 가지 않더라도 책 만으로도 자세히 살필 수 있는 배려를 하고 있다. 명문이 있는 불상은 그 명문을 본문에 표기하여 명확한 원문을 알 수 있게 해 주고 있어 개설서로서의 역할은 물론이고 일반인들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안내서를 겸하고 있다. 특히 구성상 한면은 설명을, 그리고 한면은 도판을 담고 있어 도판을 이해하기 쉽도록 제작되었다.

 책의 뒷쪽에는 부록으로 32상 80종호라는 부처의 얼굴 표현과 수인, 대좌, 옷차림, 중국 불상의 양식 변천을 실어 앞 쪽에 실린 도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구성은 출판사 "예경"이 지향하는 "아름다움은 그것을 알아보고 아끼고 간직하는 이들의 것"이기에 우리 조상의 슬기를 이야기 하며, 문화의 새로운 세기를 여는 뜨거운 애정과 정성으로 엮었음을 느낄 수 있는 세심한 배려로 인문학이라는 어려움으로 별로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음을 알면서도 이러한 도서의 출판에 매진하는 출판사에게 뜨거운 격려를 보내고 싶다.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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