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방송에서 휴일 스케치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고궁 나들이 모습입니다. 도심속의 풍경중 유달리 고궁 스케치가 많다는 것은 고궁이 현대를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 있어 빼곡히 들어찬 건물과 빡빡한 삶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는 휴삭처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궁궐(宮闕)이라는 말이 우리의 역사 속에서 아주 오래전의 과거에 사용되던 용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실은 朝鮮이라는 한 시대가 막을 내린지 채 100년도 되지 않았고 신문명을 받아 들인지도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급변하는 문물의 이입으로 사회구조와 우리 생활에 큰 변화와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우리의 궁궐이나 생활은 불과 100년이 채 안되었음에도 저 먼 옛날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로만 인식되고 있는 현실이 바로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처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있는 5대 고궁을 찾습니다.  5大宮이란 昌德宮과 昌慶宮, 그리고 景福宮, 德壽宮, 慶熙宮을 말하는데 이 다섯 개의 궁궐 중에서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에 창덕궁만 유일하게 선정되어 있습니다.     다른 궁들도 있는데 왜? 유독 창덕궁만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조선 중기 이후부터 최근세기까지 지어진 건물에서 다양한 건축 양식을 볼 수 있으며, 특히 後苑(흔히들 秘苑이라고 하지만 이 이름은 일본인들이 격하 시킬 목적으로 붙여준 이름이며 비원 보다는 창덕궁의 후원으로 쓰는 것이 바람직 합니다)은 300여년이나 된 우리 나라의 정원 조경의 두드러진 성격을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역사적, 건축학적 측면에서 그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기에 지정이 된 것입니다.

    창덕궁을 관람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80년대에는 장기간의 공사로 인하여 공개되지 않았었으며, 공사가 끝나고 개방된 이후에는 일정 시간에 맞추어 집단으로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며 관람토록 되어 있습니다.    특히 자주 찾는 일본인 관광객을 위하여는 매 시간 안내를 하며, 기타 외국인의 관람시간.....그리고 내국인의 관람시간은 별도로 설정하여 관람토록 하고 있는데,  이런 이유로 일반 궁궐처럼 혼자 사색을 한다거나 호젓하게 고궁이 갖는 한적한 기분을 느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창덕궁의 관람시에는 아예 상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흔히들 중국 관광을 가서 자금성을 구경하고 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우리 나라 궁궐들은 작고 보잘것이 없다고들 합니다.   하기야.....자금성의 위용을 보고 나서 우리의 궁궐을 보면 그 규모가 비교가 되지 않기에 하는 말들이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형만을 보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중국의 건축물들은 거의 모두가 좌우 대칭형입니다. 대부분이 넓고 평평한 대지 위에 지어져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이들의 건축은 마치 종이에 그린 것 처럼 반으로 양분된 것 같아 접으면 좌우가 딱 맞아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중국의 건물은 크기만 할 뿐 線이나 절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습니다.      우리 궁궐(한옥도 마찬가지입니다만...)의 처마를 보십시요. 그 처마가 얼마나 하늘로 날아 오를 듯 경쾌하게 만들어져 있습니까?  거기다가 건물의 배치는 건물이 놓여진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고 음양오행을 적용하여 건축하였으니 그 경관은 건축물이 어디에 놓이던 자연과 괴리되지 않고 자연 속에 하나 되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左靑龍 右白虎의 風水를 살려 지어진 우리의 宮闕

  궁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궁궐인 창덕궁은 어떤 구조일까요?    임금이 나라 일을 보던 正殿과 대신들과 국사를 의논하거나 궁을 지키는 군인들이 머물던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는 지역을 外殿이라고 하는데 이 외전이 수행하는 기능을 <闕>이라 하였고,  임금과 그 가족이 거쳐하는 곳으로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과 같이 살고 있는 지역인 內殿을 <宮>이라고 합니다. 궁은 또 다시 '正宮'과 '離宮'으로 구분하며 '정궁'이란 임금과 가족이 생활 할 수 있는 궁이 다 갖추어진 것을 말하며(흔히 6宮이라고 합니다)  '이궁'이란 이러한 6궁을 다 갖추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내전'과 '외전'이 같이 있는 곳을 <궁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창덕궁은 대비나 대왕비는 창경궁에 거처를 두었고 동궁도 다른 곳에 머물렀고 창덕궁에 이들의 거처가 없었기에 창덕궁은 '이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창덕궁에는 임금이 신하들을 모아 외국의 신하들을 맞이한다거나 또는 국가의 커다란 행사를 치루던 인정전(仁正殿)이 있으며,  인정전은 만조백관이 다 모인 가운데 조례를 치루는 장소였기에 종1품, 정1품 등으로 구분된 품계석(品階石)이 정전 마당 좌우에 세워져 있습니다.    건물의 이름도 어진 정치를 편다는 '인정전'이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며 어진 정치를 한다는 의식은  위정자의 포부였었나 봅니다.     인정전과는 문으로 연결되어 임금이 집무를 하며 신하들의 결재를 하고 국사를 논하던 선정전(宣正殿)이 있고 선정전과 담을 하나 두고 임금의 침소인 熙政堂이 있으며 희정당의 뒷편에는 왕비의 침소인 대조전(大造殿)이 있습니다.

   인정전이나 선정전, 희정당등 임금이 잠시라도 머물도록 된 곳에는 모두 어좌(禦座)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임금이 앉는 의자이기에 높임말로 용상(龍床)이라고도 부르는 임금의 자리 뒷편에는 백성을 잘 이끌고 부귀 영화를 누리라는 의미와 임금의 무병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해와 달,  그리고 다섯 봉우리가 그려진 병풍이 있는데 이를 <일월오악병(日月五嶽屛)>이라고 합니다.  창덕궁 내전 건물의 특징은 어느 쪽 방문을 열든 밖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방안에 앉아서도 창문만 열면 밖을 구경 할 수 있도록 되어있음은 물론이고 창문에는 일정한  모양을 갖춘 불발기창이 설치되어 자칫 어둡고 침침할지도 모를 실내에 충분한 빛이 들어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담벼락이나 굴뚝에도 아름다운 기하학적 문양이나 화초 그림을 넣어 단순하고 단조로울수 있는 일상에서 잠시라도 탈피하고자 하는 마음과 궁내 생활의 답답함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자연과 가깝게 배려한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巨木과 연못...그리고 아름다운 조경이 가득한 後苑

  창덕궁의 내전에서 문 하나를 지나면 후원의 경내에 접어들게 됩니다. 잠시 숲길을 오르다 다시 내리막 길을 내려가면 휴게실이 나타납니다.  이 휴게실은 창덕궁의 유일한 매점을 겸하고 있는데 이곳에 왜?  매점이 있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이곳에서 관광객에는 잠시 쉴 시간이 주어집니다.  시간이 없다고 들르는 곳에서마다 독촉을 하던 안내원도 이곳에서는 잠시 방관을 하는것은 매점의 매상과 관련이 있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실은 이 지역이 창덕궁 후원의 별미라고 할 수 있는 부용지(芙蓉池)와 부용정(芙蓉亭)이 있는 곳이지요.  부용정은 두 발을 부용지에 담근 형태의 아(亞)자형 정자로 내부에 들면 아름다운 불발기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의 산란이 은은한 곳입니다.  관람객들은 이 지역에 들어서면서부터 마음의 푸근함과 여유를 느끼게 될 정도로 아늑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랍니다.  이곳에 매점을 만들고 잠시 쉴 수 있도록 배려한 것도 그만큼 이곳이 편안한 곳이기 때문인 모양입니다.   부용지의 한 쪽에는 영화당(映化堂)이라고 현판이 걸린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 앞에서는 과거 시험을 치뤘었습니다.  그리고 부용정의 맞은 편에는 어수문(魚水門)이라는 담장이 없는 문이 있으며 그 윗쪽에는 2층 누각인 주합루(宙合樓)가 있는데 주합루의 아랫층은 바로 규장각(奎章閣)입니다.  숙종 때 만들어진 규장각을 정조는 왜 창덕궁의 후원으로 옮겼을까?  정조의 문예부흥이 그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규장각은 많은 서적이 보관되었던 일종의 도서관이었으며, 주합루의 서쪽에는 규장각의 도서를 열람하는 희우정(喜雨亭)이 있어 임금도 이곳에 들러 규장각의 도서를 열람하였다고 합니다.   주합루의 이층에서 내려다 보는 부용지 주변의 풍광과 경치는 정말 일품입니다. 봄이며 돋아나는 새싹과 꽃으로 가득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물소리와 녹음이 울창하며, 가을의 낙엽은 세월이 남긴 흔적으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겨울에는 눈덮인 일대의 정적이 가슴속에 아프게 내려 앉는 느낌을 준답니다.  옛 사람들은 이런 것을 어찌 알고 이 곳에 건물을 지었는지 그저 감탄할 따름입니다.  부용지의 풍경은 밝은 햇빛 속에서 보기에는 너무 가볍다고 느껴져 안개비라도 내려 준다면 정말로 분위기가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도 합니다. 그만큼 부용지 주변은 닫혀있는 우리의 마음을 살그머니 열고 풀어놓고 싶은 공간입니다.

아름다움이 날아갈 듯 살아있는 우리의 건축

   영화당을 벗어나 잠시 숲이 우거진 길을 따라가면 작은 연못이 나오고 거기에는 정사각형의 커다란 지붕을 가진 애련정(愛蓮亭)이 나타납니다.  부용지처럼 화려하지도 않은 수수한 연못에 두 발을 담그고 있는 정자인데 한자로 표현하면 그 뜻이 다르겠지만, 주변 분위기 처럼 정자만 달랑 하나가 있는것이 애련하기만 합니다. 어쩌면 정자의 분위기가 그 정자 이름과 같은지 말입니다.(여기에서 말하는 정자 이름은 한문이 아니라 한글로 말함입니다)       부용지나 애련지나 다 마찬가지지만 이곳 연못으로 흘러드는 물은 그저 곱게 흘러들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연못에 몸이 닿기 전에는 반드시 이무기나 용의 입을 통해야 하고 그것도 바로 떨어지는것이 아니라 몇 차례나 멈추었다가 떨어지게 만들었으니 아마도 우리 조상의 여유로움이 이런 조형물에 까지도 담겨 있는것은 아닐지요?

  애련지의 우측 조금 높은 곳에는 임금이 사대부 생활을 경험하기 위해 지은 99칸짜리 집이 있으니 연경당(演慶堂)입니다. 사대부 집은 집앞에 개울이 흐릅니다. 그리고 그 개울을 건너야 대문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연경당의 대문인 장락문(長樂門)도 그 절차를 밟은 후 출입토록 되어 있습니다.  연경당의 구조는 겉문은 들개창으로 만들어 밖을 시원하게 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안채에서는 방안에 앉아서도 사랑채와 행랑채가 한 눈에 보이게 만들어졋고, 대문에서는 약간 비껴앉은 안채가 바로 들여다 보이지 않도록 배려한 모양입니다. 방안에 앉아서도 마당의 꽃을 구경하도록 되어 언제나 방문만 열면 화단에 핀 꽃을 볼 수 있는데,  마침 하얗게 소복처럼 단장한 찔레꽃의 향기가 방안으로 스며듭니다.      이밖에도 후원에는 아름다운 정자가 많이 있습니다. 연경당 뒷편 축대위에 있는 농수정(濃繡亭), 육각형의 지붕 모양이 아름다운 존덕정,  고인 물이 한 바퀴를 돌아 떨어지게 만든 옥류천, 바닥면이 부채꼴 모양인 관람정(觀纜亭) 등 우리가 잊고 있은지 한 세기가 안되는 우리의 정원 조경 문화와 건축 문화가 이곳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도심속의 섬이라고 부를만한 별천지.....창덕궁과 후원은 그 아름다움 만큼이나 수난도 많았습니다. 수 차례 불이 났으며, 조선조 말에는 서구의 신문명이 들어와 고종 때에는 임금이 자동차에 오르내리기 쉽도록 하기 위하여 궁의 입구를 다시 곳추세워 만들어야 했으며, 자가발전 시설이 도입되어 궁내 흐늘거리던 촛불이 전등으로 바뀌는 등 옛 것과 새 것이 공존하는 형태로의 변화가 있었지만 인구 1200만의 복작거림, 그 한가운데 조용히 "세계문화유산"으로 영원히 우리의 가슴속에 남겨지게 될 것입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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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는 조각에 신라인은 어떻게 미를 접목시켰나에 대해 말씀드렸고, 오늘은 신라 회화에 나타난 미의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신라의 회화를 이해하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선은 현존하는 신라의 회화가 거의 전무하다는데 그 이유가 있답니다. 사실, 신라는 국가에서 채전(彩典)이라 하여 국가에서 관장하던 일종의 화원 양성소도 설치하였었고, 덕만공주(德曼公主)의 예에서 나타나듯 당시에 당나라와 빈번한 왕래를 통한 회화의 교류가 있었음을 판단하면 회화에 대한 신라인의 열의는 고구려나 백제 못지않게 활발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며, 회화의 발전된 모습 또한 대단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아 있는 신라의 회화라고 할 수 있는것은 경주의 천마총(天馬塚)과 98호 고분에서 출토된 공예품들 뿐입니다. 여기 말이 나왔으니 하고 싶은 말입니다만, 우리가 천마도라고 하는것은 지금은 천마라기 보다는 기린이라는 동물이 아닐까 하는 점이랍니다. 왜냐하면 천마와는 달리 기린은 서기(상서로운 기운)을 내 뿜는 상상의 동물인데 천마도는 일반적인 말이라고 보기 보다는 기린이라고 보는것이 합당한것 같습니다. 이런 천마도나 기마, 인물도, 서오도(瑞烏圖), 우마도 등 출토품의 수준은 고구려나 백제의 회화와 비교하면 상당히 그 수준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분에서 출토된 미술품을 단순하게 일반 미술품과 비교할 수 없다는 비교 방식의 차이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고분 출토품들은 고구려 고분 벽화와 같은 회화라기 보다는 공예품에 그려진 공예화로서 신라 회화의 본 모습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천마도를 살펴보면 고구려 벽화의 말 그림 처럼 강렬함이나 위풍당당한 기세가 없으며, 백제의 산수문전(山水文塼)처럼 부드러운 느낌을 받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천마도에서는 무엇인가 할말을 다 하지 않고 할 말을 담고 있는듯한 그림으로 우리는 고요와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는 한편, 의도적으로 통제되고 절제된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느낌은 반가사유상에서 느끼듯 "내재된 세계의 함축미"라고 논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신라인의 회화 작품으로 신라인의 미의식을 담고 있는 회화로는 유일하게 국보 제 196호로 지정된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大方光佛華嚴經變相圖)"가 있는데 감지에 金銀泥로 그려졌으며 여기에서 나타나듯 화려하고 풍요로운 화풍은 신라 회화의 주류를 이루었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 특히 인체 표현에 나타난 부드러운 곡선과 후덕한 얼굴, 몸매의 유연한 자태, 호화로운 분위기 등은 신라 예술이 불교와 더불어 극도로 세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大方光佛華嚴經變相圖)"는 현재 호암미술관에 소장중인데 변상도의 가운데 부분은 모두 녹아 없어지고 양쪽 갓쪽만 남아 있으나 이 부분에 나타나있는 회화만으로도 신라인의 회화적 솜씨가 상당하다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2회에 걸쳐 신라의 조각과 회화에 나타나는 신라인의 미의식을 살펴보았는데, 신라는 통일전인 삼국시대부터 당나라와 활발한 교역을 통하여 당나라의 문화를 수용하였으며, 특히 통일 이후에는 철저한 불교 신앙을 바탕으로 정치적인 안정 속에서 더욱 포근하고 풍요롭게 아름다운 미의식으로 활발한 문화활동을 했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정치적 불안 속에서 조성된 작품들이 상당히 흔들리고 있음을 볼 때 신라인의 미의식 또한 정치적 불안과 더불어 많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의 예술은 불교라는 교리를 바탕으로 불법을 이루려는 의지 아래 하나의 완성된 미의식으로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라인의 예술적 감각은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에 걸쳐 불교를 대상으로 신앙심의 절정에 이르면서 예술품 또한 절정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신라의 예술은 불교의 정신적 바탕위에 이룩된 하나의 결정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불교를 받아 들여 정신적 지주로 삼으며 인간이 이루지 못하는 세상을 부처가 이루고, 인간의 고통과 속박에서 벗어난 부처로서의 승화된 형상을 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예술의 꾸준한 발전을 가져 왔으며, 그 발전의 결정체로 신라 예술은 절정의 꽃을 피우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신라인의 미의식은 불교와 더불어 그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며 지극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다양하고 풍부한 표현방법으로 정착하며 보다 세련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라인의 미의식을 알아 볼 수 있는 작품의 수가 많지는 않지만 한정된 미술품이라도 충분한 연구를 통하여 조금 더 考察해야 하겠으며 앞으로는 상대적으로 고구려, 백제인의 미의식과 비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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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5-29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해박함에 날로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다만 천마가 아니라 '기린'이 아닐까 하는 학설에 대해서 전 의구심을 품고 있습니다.
이재중씨의 주장이 근거가 없는 건 아니지만,
예로부터 부장품에 저승세계에 가는 길잡이로서 '천마'가 즐겨 그려졌고,
더군다나 그려진 위치가 말장식이었음을 감안할 때
전 오히려 기존의 '천마설'이 상식적인 수준에서 받아들여집니다.

비로그인 2004-05-29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린설은 이재중씨 뿐만 아니라 장충식 교수등 일부 학자들도 조심스럽게 꺼내고 있습니다. 비록 마구에 사용된 그림이지만, 중국의 마구에서 우리 천마와 동일한 그림이 발견이 되었으며, 이것을 말이 아닌 기린으로 명문화 되었다는데서 이재중씨도 이론을 제기했던 것인데, 원래 상상의 동물의 시원은 우리 나라가 아니기에 그 시원을 따져 쫒는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으로 다수의 학자들이 기린설에 동조를 하는 입장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천마총은 그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는 무덤이나 무덤의 규모로 보았을 때 상당한 지위의 인물로 판단할 수 있으며, 따라서 사후 세계를 동경하는 입장에서의 염원으로 기린이라는 상상의 동물을 그렸다고 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에 대한 연구는 향후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도 공동 연구가 추진된다면 밝혀질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중국에서 기린이 상상의 동물이 아닐것이라는 추측이 나오는데, 그 이유는 기린의 뼈로 추측되는 짐승의 머리 뼈가 발견 되었기 때문이랍니다. 조선인님의 반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조선인 2004-05-31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다 자세한 말씀에 대해 제가 더 감사드립니다.
 

 신라인의 미의식을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삼국시대의 신라 미술품과 통일 신라시대의 미술품을 접할 수 있어야 하나, 우리가 접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다고 보겠습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신라인의 미술품으로도 당시 성행했던 신라인의 문화를 엿볼 수 있음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삼국 중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의 문화는 정치적 안정을 이루는 통일신라 이후에는 더욱 융성한 불교를 바탕으로 고구려, 백제의 문화를 융합하면서 발전을 해 왔으며, 특히 당나라 문화의 유입을 통하여 독창적인 신라인만의 문화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신라사람들에게 있어 의식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던 불교를 바탕으로 불교 문화는 여러 가지 교리적 해석과 더불어 다양하고 풍부한 표현방법과 더불어 세련된 기술에 의한 양식으로 발전하여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불상을 중심으로 한 조각 작품들은 아름다움에 관심을 두면서도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세련미를 갖추게 되었는데, 이런 발전을 통해 이루어진 신라의 예술에 담긴 신라인의 미의식을 간단하게나마 조각과 회화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예술의 발전에 있어서 그 내용의 완전한 이해와 새로운 의식의 변화가 있어야 표현이나 기술적 발전에 의한 숙달된 기법이 발전을 하게 되는데, 신라는 불교라는 정신적 바탕위에 새로운 형태로서의 문화의 발전을 가져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불교를 국교로 숭배하며 일반 국민은 물론이고 지도층의 의식에 불교가 커다란 작용을 하였기에 일체가 되어 이룰 수 있었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가 하나의 숭배적인 종교로 정신적 지주의 형태를 갖게 되므로써 그에 따라 불상 등 불교 중심의 문화가 발전하는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즉, 불교라는 종교에 대한 열성이 고조되고 깊은 신앙심이 팽배함에 따라 이를 바탕으로 한 문화적 소산물로서 예술의 꽃을 피우게 되는것이 신라 문화의 특성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신라의 예술을 조각과 회화로 나누어 설명을 하겠습니다. 먼저 조각을 살펴보면 새로운 종교의 수용 초기에는 그 종교의 이념에 따른 철저한 수행이나 정신적, 탈속적(脫俗的)인 요소가 강조됨에 따라 종교로서의 대상은 상징적으로 예배되는 경향이 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본위의 구체적 형상으로 재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것은 단기간에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얼마간의 시일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따라서 신앙심의 절정에 이르면 그 정신적 전통을 이어받아 예술은 가장 아름다움의 극치로 펼쳐진다고 할 것입니다. 신라의 조각은 바로 이러한 불교의 정신적인 바탕 위에 이룩된 하나의 결정체이며 신앙심이 깊어짐에 따라 불상 표현의 원칙이 세워지고 이러한 신라인의 불상 표현에 대한 미의식의 변화는 삼국시대 불상의 인간적인 표현에서 조금 더 위엄이 서리고 자비로운, 즉 인간과는 구별되는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조형의식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예로 경주 九黃洞의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순금製 "아미타여래좌상(阿彌陀如來座像)"은 현실 세계를 떠나서 사색의 경지에 몰입한 부처의 자비스러운 미소를 곁들임으로해서 신라인의 의식이 투영된 불상 표현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불상 표현의 소재를 찾던 상징적인 단계에서 한 단계 올라 조금 더 형이상학적인 불교 교리의 본질적 문제에 접근하여 그 개념을 시각적인 조형물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의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특정적인 佛身 표현의 강조나 설명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인체의 형상을 빌은 조형을 통하여 無量한 法門을 전달하려는 것이라고 하겠으며 이러한 사실적이면서도 이상화된 인체 표현을 빌어 깊은 사색과 法悅의 경지에 이르고 중생을 계도하는 표정에서 정신력의 실체를 모색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런것으로 판단하면 불교가 신라인의 의식에 깊게 잠재하여 조형물을 만드는 사람이나 그 만들어진 조형물에 예배하는 사람 모두가 공감하는 조형 예술의 세계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삼존판불(金銅如來三尊板佛)"이나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에서도 마찬가지로 균제(均濟)된 불신의 형태나 정교한 주조기술로 조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런 조각을 통하여 불법의 실체를 체험하고 구현하려는 신라인의 미의식이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미의식은 신라인의 균제와 조화의 예술 표현이 순수한 종교성과 하나로 융합하여 조각 양식의 절정을 이루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석굴암의 본존불과 주변의 불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석굴암 본존불에 나타난 단순하면서도 정제(淨濟)된 불신의 표현과 형태는 중생이 갖는 고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무아의 경지에 이른 숭고한 얼굴 표정으로 존엄무비(尊嚴無比)한 종교 조각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조형예술은 단시간내에 이루어 진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연마된 조형기술의 뒷받침속에 신앙과 결부되어 이루어졌다 할 것입니다.

    *  다음글은 회화에 나타난 미의식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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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무 야구가 전국 종합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했습니다. 대회의 성격은 전국의 아마츄어와 대학팀, 그리고 프로야구 2군들이 참석하는 대회입니다. '종합'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듯 현재 프로팀이 아닌 나머지팀이 총 출동해서 치루는 경기입니다. 이 대회에서 상무는 연전연승을 거듭하고는 우승기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저희 상무가 이겼으니 기분이 나쁠리야 없겠지만, 사실 이 대회의 성격이 조금은 애매모호하더군요. 아마츄어는 아마튜어끼리 대결을 하고 프로는 2군이라도 프로끼리 대결을 해서 결승전에서 만나 대결을 치루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니 결승전까지 오르기전에는 모두 프로야구 2군과의 시합을 치뤄야 하는 셈이랍니다. 말이 프로야구 2군이지 실은 1군과 2군은 왔다갔다 하면서 유지가 되는 팀이기에 특별히 다르다고 할것도 없는 셈입니다만, 다른 2군팀과는 달리 상무는 프로 2군과 아마츄어가 혼재된 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특별히 잘 하는 아마선수가 아니라면 상무에서는 프로 선수라고 하더라도 빛을 보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리고 실제 입대하는 선수는 아마츄어보다는 프로 선수들 위주가 되고 있습니다.

  상무라는 아마츄어팀에서 프로 선수를 입대토록 한다는 것이 원래의 취지와는 다른것입니다. 상무는 엘리트 체육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병역을 필 할 징집대상 자원에게 지속적으로 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부대입니다. 여기는 축구나 야구와 같은 프로 선수들은  받아서는 안되는것이 맞는것 같습니다. 그들이 상무에 입대하게 됨으로써 앞으로 더 커나가야 할 대학 졸업을 마친 아마츄어의 자리가 좁아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우수 선수들은 대학 졸업후에 바로 프로를 택하기에 다른쪽으로 생각하면 입대할 우수 자원이 부족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나 선수의 기량이 대학 졸업당시가 최고가 아닐것이며 대기만성형 선수는 그보다 조금 시간이 지나야 제 기량을 발휘할 수도 있는데 대학 졸업 당시에 실력이 변변치 못하다고 강제 도태시키는것 같아 안타깝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여간, 상무는 이런 이유로 프로에 입단한 선수들의 병역을 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될 수도 있고, 그러다보니 우수한 각 프로구단의 2군 선수들이 많이 지원을 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그렇다면 "상무가 우승하는것이 당연하겠네..." 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프로 2군도 성적이 중요하기에 2군 감독이나 코치진에서는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하여 우수한 자원은 병역 연기기한까지 선수를 입대시키지 않습니다. 선수 개개인의 앞 날 보다는 감독의 목이 성적과 관련되어 위태위태 하니 어느 감독이 우수한 선수를 입대토록 하겠습니까?  한편으로는 감독이 뭐라하던 입대를 하면 될것 아니냐는 의문도 있을 것입니다만, 프로구단 생리상 그렇게 마음먹는 선수가 있다면 그렇게 마음먹는 순간 그 선수는 프로구단과는 영원히 이별을 해야 한답니다.

  상무는 이런 선수들로 구성된 각 프로야구단의 2군들과 경기를 치루면서 승승장구 하였고, 결승전에서는 대학부에서 올라 온 순수 아마팀인 건국대와 대결을 하게 되었고, 결과는 8 :4로 승리를 하였습니다. 이겼으니 다행이지만 사실 준 프로팀이 아마츄어인 대학팀을 상대로 해서 이겼다고 해서 별로 큰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겠지만, 상무의 코치진은 대학팀과의 경기라도 쉬운일이 아니며, 언제 뒤짚일지 모르는 점수는 경기가 끝나는 순간까지 긴장을 풀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하긴 준 프로팀이 아마츄어에게 패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대단한 망신이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객관적인 면에서 우수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상무가 결승까지 올라오느라 경기를 치룬 여타 2군 팀과의 경기는 한 경기 한 경기가 힘들었다는데는 동의를 하지만 결승전에서 맞붙은 대학팀에게 혹시라도 져서 망신 당할까봐 전전긍긍한다는 것은 얼마나 웃기는 일이겠습니까?

  프로 2군은 나름대로 리그를 벌이고 있습니다. 저희 부대 야구장에서도 가끔 경기가 벌어지는데 말 그대로 <그 들만의 잔치>입니다. 관중이라야 부대 장병중 시간이 나는 점심시간에 관전하는 장병, 그리고 볼일이 있어 그곳을 지나가는 장병들이 유일한 관중이지만 <그 들만의 잔치>에 임하는 2군 선수들의 경기 모습은 매우 진지하답니다. 2군 리그도 프로야구 리그가 끝나는 기간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종료하게 됩니다. 그 리그에 참가하는 2군 선수들은 저마다의 꿈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어서 빨리 1군으로 올라가 관중들 앞에서 멋진 경기를 펼쳐야지...." 하는 것이 2군 선수 모두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꿈 일 것입니다. 수많은 관중의 환호성을 받으며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돌고 홈에 들어오는 야구 선수의 꿈, 9이닝 동안 전 선수를 상대로 퍼팩트 게임을 꿈꾸는 투수들의 야망.....그런것들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제대로 된 관중하나 없는 야구장에서 <그 들만의 잔치>임을 알면서도 매진하는 선수들에게 뜨거운 격려를 보내주고 싶습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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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심이 2004-05-27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구뿐만이 아니라 모든 운동선수들에게 존경을 표합니다. 그 한게임을 위해 보이지 않는 땀을 얼마나 많이 흘리는지..개인적으로 고교야구도 좋아합니다만, 그들만의 리그를 펼치는것이 때로는 가슴아플때도 있습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조선 선조 때 옥천군수의 庶女였던 李玉峰이라는 여류 시인이 있었습니다. 여자가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시기에도 그녀는 뛰어 난 필치로 당시에도 시집을 만들만큼 훌륭한 시상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지금 전하는 그 녀의 시들은 모두 32편으로 <옥봉집>이라는 시집에 담겨 있습니다. 

   夢(꿈)

  님이여, 요즘은 어찌 지내시나요

 달이 창에 들 때면 제설움 끝이 없네

 만일 제 꿈이 다니는 자취 있다면

 님의 문 앞 돌길이 반은 모래 되었으리

님이 그리워 꿈 속에서라도 님의 집앞에서 서성거리니 님의 집 앞이 온통 돌이라 하더라도 그 돌이 닳고 가루가 되어 절반 정도는 모래가 되었을 것이라는 이 시가 주는 의미는 님을 기다리는 여인네의 애절함이 가득 담겨 있다고 보겠습니다. 직접적이지도 않으면서 은근하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이 여류시인의 싯귀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거부감을 느낄 수 없는 애절함이 가득 담겨 있어 요즘처럼 감각적이고 즉흥적인 사랑 타령과는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을것입니다.  우연치 않게 책꽂이에서 눈에 띄인 <한국漢詩>라는 책을 다시 뒤적이며, 수 백편의 詩 중에서도 당시에 제 가슴속에 긴 여운을 남겨주었던 한 편의 시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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