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방송에서 휴일 스케치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고궁 나들이 모습입니다. 도심속의 풍경중 유달리 고궁 스케치가 많다는 것은 고궁이 현대를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 있어 빼곡히 들어찬 건물과 빡빡한 삶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는 휴삭처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궁궐(宮闕)이라는 말이 우리의 역사 속에서 아주 오래전의 과거에 사용되던 용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실은 朝鮮이라는 한 시대가 막을 내린지 채 100년도 되지 않았고 신문명을 받아 들인지도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급변하는 문물의 이입으로 사회구조와 우리 생활에 큰 변화와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우리의 궁궐이나 생활은 불과 100년이 채 안되었음에도 저 먼 옛날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로만 인식되고 있는 현실이 바로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처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있는 5대 고궁을 찾습니다. 5大宮이란 昌德宮과 昌慶宮, 그리고 景福宮, 德壽宮, 慶熙宮을 말하는데 이 다섯 개의 궁궐 중에서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에 창덕궁만 유일하게 선정되어 있습니다. 다른 궁들도 있는데 왜? 유독 창덕궁만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조선 중기 이후부터 최근세기까지 지어진 건물에서 다양한 건축 양식을 볼 수 있으며, 특히 後苑(흔히들 秘苑이라고 하지만 이 이름은 일본인들이 격하 시킬 목적으로 붙여준 이름이며 비원 보다는 창덕궁의 후원으로 쓰는 것이 바람직 합니다)은 300여년이나 된 우리 나라의 정원 조경의 두드러진 성격을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역사적, 건축학적 측면에서 그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기에 지정이 된 것입니다.
창덕궁을 관람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80년대에는 장기간의 공사로 인하여 공개되지 않았었으며, 공사가 끝나고 개방된 이후에는 일정 시간에 맞추어 집단으로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며 관람토록 되어 있습니다. 특히 자주 찾는 일본인 관광객을 위하여는 매 시간 안내를 하며, 기타 외국인의 관람시간.....그리고 내국인의 관람시간은 별도로 설정하여 관람토록 하고 있는데, 이런 이유로 일반 궁궐처럼 혼자 사색을 한다거나 호젓하게 고궁이 갖는 한적한 기분을 느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창덕궁의 관람시에는 아예 상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흔히들 중국 관광을 가서 자금성을 구경하고 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우리 나라 궁궐들은 작고 보잘것이 없다고들 합니다. 하기야.....자금성의 위용을 보고 나서 우리의 궁궐을 보면 그 규모가 비교가 되지 않기에 하는 말들이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형만을 보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중국의 건축물들은 거의 모두가 좌우 대칭형입니다. 대부분이 넓고 평평한 대지 위에 지어져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이들의 건축은 마치 종이에 그린 것 처럼 반으로 양분된 것 같아 접으면 좌우가 딱 맞아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중국의 건물은 크기만 할 뿐 線이나 절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습니다. 우리 궁궐(한옥도 마찬가지입니다만...)의 처마를 보십시요. 그 처마가 얼마나 하늘로 날아 오를 듯 경쾌하게 만들어져 있습니까? 거기다가 건물의 배치는 건물이 놓여진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고 음양오행을 적용하여 건축하였으니 그 경관은 건축물이 어디에 놓이던 자연과 괴리되지 않고 자연 속에 하나 되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左靑龍 右白虎의 風水를 살려 지어진 우리의 宮闕
궁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궁궐인 창덕궁은 어떤 구조일까요? 임금이 나라 일을 보던 正殿과 대신들과 국사를 의논하거나 궁을 지키는 군인들이 머물던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는 지역을 外殿이라고 하는데 이 외전이 수행하는 기능을 <闕>이라 하였고, 임금과 그 가족이 거쳐하는 곳으로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과 같이 살고 있는 지역인 內殿을 <宮>이라고 합니다. 궁은 또 다시 '正宮'과 '離宮'으로 구분하며 '정궁'이란 임금과 가족이 생활 할 수 있는 궁이 다 갖추어진 것을 말하며(흔히 6宮이라고 합니다) '이궁'이란 이러한 6궁을 다 갖추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내전'과 '외전'이 같이 있는 곳을 <궁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창덕궁은 대비나 대왕비는 창경궁에 거처를 두었고 동궁도 다른 곳에 머물렀고 창덕궁에 이들의 거처가 없었기에 창덕궁은 '이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창덕궁에는 임금이 신하들을 모아 외국의 신하들을 맞이한다거나 또는 국가의 커다란 행사를 치루던 인정전(仁正殿)이 있으며, 인정전은 만조백관이 다 모인 가운데 조례를 치루는 장소였기에 종1품, 정1품 등으로 구분된 품계석(品階石)이 정전 마당 좌우에 세워져 있습니다. 건물의 이름도 어진 정치를 편다는 '인정전'이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며 어진 정치를 한다는 의식은 위정자의 포부였었나 봅니다. 인정전과는 문으로 연결되어 임금이 집무를 하며 신하들의 결재를 하고 국사를 논하던 선정전(宣正殿)이 있고 선정전과 담을 하나 두고 임금의 침소인 熙政堂이 있으며 희정당의 뒷편에는 왕비의 침소인 대조전(大造殿)이 있습니다.
인정전이나 선정전, 희정당등 임금이 잠시라도 머물도록 된 곳에는 모두 어좌(禦座)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임금이 앉는 의자이기에 높임말로 용상(龍床)이라고도 부르는 임금의 자리 뒷편에는 백성을 잘 이끌고 부귀 영화를 누리라는 의미와 임금의 무병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해와 달, 그리고 다섯 봉우리가 그려진 병풍이 있는데 이를 <일월오악병(日月五嶽屛)>이라고 합니다. 창덕궁 내전 건물의 특징은 어느 쪽 방문을 열든 밖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방안에 앉아서도 창문만 열면 밖을 구경 할 수 있도록 되어있음은 물론이고 창문에는 일정한 모양을 갖춘 불발기창이 설치되어 자칫 어둡고 침침할지도 모를 실내에 충분한 빛이 들어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담벼락이나 굴뚝에도 아름다운 기하학적 문양이나 화초 그림을 넣어 단순하고 단조로울수 있는 일상에서 잠시라도 탈피하고자 하는 마음과 궁내 생활의 답답함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자연과 가깝게 배려한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巨木과 연못...그리고 아름다운 조경이 가득한 後苑
창덕궁의 내전에서 문 하나를 지나면 후원의 경내에 접어들게 됩니다. 잠시 숲길을 오르다 다시 내리막 길을 내려가면 휴게실이 나타납니다. 이 휴게실은 창덕궁의 유일한 매점을 겸하고 있는데 이곳에 왜? 매점이 있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이곳에서 관광객에는 잠시 쉴 시간이 주어집니다. 시간이 없다고 들르는 곳에서마다 독촉을 하던 안내원도 이곳에서는 잠시 방관을 하는것은 매점의 매상과 관련이 있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실은 이 지역이 창덕궁 후원의 별미라고 할 수 있는 부용지(芙蓉池)와 부용정(芙蓉亭)이 있는 곳이지요. 부용정은 두 발을 부용지에 담근 형태의 아(亞)자형 정자로 내부에 들면 아름다운 불발기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의 산란이 은은한 곳입니다. 관람객들은 이 지역에 들어서면서부터 마음의 푸근함과 여유를 느끼게 될 정도로 아늑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랍니다. 이곳에 매점을 만들고 잠시 쉴 수 있도록 배려한 것도 그만큼 이곳이 편안한 곳이기 때문인 모양입니다. 부용지의 한 쪽에는 영화당(映化堂)이라고 현판이 걸린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 앞에서는 과거 시험을 치뤘었습니다. 그리고 부용정의 맞은 편에는 어수문(魚水門)이라는 담장이 없는 문이 있으며 그 윗쪽에는 2층 누각인 주합루(宙合樓)가 있는데 주합루의 아랫층은 바로 규장각(奎章閣)입니다. 숙종 때 만들어진 규장각을 정조는 왜 창덕궁의 후원으로 옮겼을까? 정조의 문예부흥이 그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규장각은 많은 서적이 보관되었던 일종의 도서관이었으며, 주합루의 서쪽에는 규장각의 도서를 열람하는 희우정(喜雨亭)이 있어 임금도 이곳에 들러 규장각의 도서를 열람하였다고 합니다. 주합루의 이층에서 내려다 보는 부용지 주변의 풍광과 경치는 정말 일품입니다. 봄이며 돋아나는 새싹과 꽃으로 가득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물소리와 녹음이 울창하며, 가을의 낙엽은 세월이 남긴 흔적으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겨울에는 눈덮인 일대의 정적이 가슴속에 아프게 내려 앉는 느낌을 준답니다. 옛 사람들은 이런 것을 어찌 알고 이 곳에 건물을 지었는지 그저 감탄할 따름입니다. 부용지의 풍경은 밝은 햇빛 속에서 보기에는 너무 가볍다고 느껴져 안개비라도 내려 준다면 정말로 분위기가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도 합니다. 그만큼 부용지 주변은 닫혀있는 우리의 마음을 살그머니 열고 풀어놓고 싶은 공간입니다.
아름다움이 날아갈 듯 살아있는 우리의 건축
영화당을 벗어나 잠시 숲이 우거진 길을 따라가면 작은 연못이 나오고 거기에는 정사각형의 커다란 지붕을 가진 애련정(愛蓮亭)이 나타납니다. 부용지처럼 화려하지도 않은 수수한 연못에 두 발을 담그고 있는 정자인데 한자로 표현하면 그 뜻이 다르겠지만, 주변 분위기 처럼 정자만 달랑 하나가 있는것이 애련하기만 합니다. 어쩌면 정자의 분위기가 그 정자 이름과 같은지 말입니다.(여기에서 말하는 정자 이름은 한문이 아니라 한글로 말함입니다) 부용지나 애련지나 다 마찬가지지만 이곳 연못으로 흘러드는 물은 그저 곱게 흘러들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연못에 몸이 닿기 전에는 반드시 이무기나 용의 입을 통해야 하고 그것도 바로 떨어지는것이 아니라 몇 차례나 멈추었다가 떨어지게 만들었으니 아마도 우리 조상의 여유로움이 이런 조형물에 까지도 담겨 있는것은 아닐지요?
애련지의 우측 조금 높은 곳에는 임금이 사대부 생활을 경험하기 위해 지은 99칸짜리 집이 있으니 연경당(演慶堂)입니다. 사대부 집은 집앞에 개울이 흐릅니다. 그리고 그 개울을 건너야 대문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연경당의 대문인 장락문(長樂門)도 그 절차를 밟은 후 출입토록 되어 있습니다. 연경당의 구조는 겉문은 들개창으로 만들어 밖을 시원하게 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안채에서는 방안에 앉아서도 사랑채와 행랑채가 한 눈에 보이게 만들어졋고, 대문에서는 약간 비껴앉은 안채가 바로 들여다 보이지 않도록 배려한 모양입니다. 방안에 앉아서도 마당의 꽃을 구경하도록 되어 언제나 방문만 열면 화단에 핀 꽃을 볼 수 있는데, 마침 하얗게 소복처럼 단장한 찔레꽃의 향기가 방안으로 스며듭니다. 이밖에도 후원에는 아름다운 정자가 많이 있습니다. 연경당 뒷편 축대위에 있는 농수정(濃繡亭), 육각형의 지붕 모양이 아름다운 존덕정, 고인 물이 한 바퀴를 돌아 떨어지게 만든 옥류천, 바닥면이 부채꼴 모양인 관람정(觀纜亭) 등 우리가 잊고 있은지 한 세기가 안되는 우리의 정원 조경 문화와 건축 문화가 이곳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도심속의 섬이라고 부를만한 별천지.....창덕궁과 후원은 그 아름다움 만큼이나 수난도 많았습니다. 수 차례 불이 났으며, 조선조 말에는 서구의 신문명이 들어와 고종 때에는 임금이 자동차에 오르내리기 쉽도록 하기 위하여 궁의 입구를 다시 곳추세워 만들어야 했으며, 자가발전 시설이 도입되어 궁내 흐늘거리던 촛불이 전등으로 바뀌는 등 옛 것과 새 것이 공존하는 형태로의 변화가 있었지만 인구 1200만의 복작거림, 그 한가운데 조용히 "세계문화유산"으로 영원히 우리의 가슴속에 남겨지게 될 것입니다.
< 如 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