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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영의 재테크 다이어리- 재테크 전문가도 깜짝 놀란 현영의 재테크 비법
현영 지음, 정복기 감수 / 청림출판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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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스  /프리츠 랑 감독 -비합리의 합리화-

 메트로폴리스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우선 독일의 나치즘과 사회적 배경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독일 나치즘에 대한 논의에는 통상 두 가지의 대립되는 견해가 존재한다. 하나, 나치즘은 독일의 경제/사회운동의 결과로써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현상이라는 견해가 있고, 둘째로 정치적/사회적 요인을 배제한 채 심리학에 의해서만 설명하려는 견해가 있다. 에리히 프롬은 이를 두고, 심리적 요인 역시 사회경제적 요인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고 경제 정치적인 문제도 그것이 실현되는 심리적인 기반이 있어야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 언술한다. 말하자면 사회적 현상과 심리적 요인은 어느 하나가 개별적으로 독립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뜻이다.

 나치즘의 심리적 측면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 독일사회의 계층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당시의 독일은 군주정치의 권위의 붕괴, 패전, 인플레이션 등을 겪으면서 사회적으로 내적인 피로와 체념의 상태에 젖어 있었다. 시대적 대세에 대한 반응은 계층별로 달랐는데 노동자계층은 군주정치의 붕괴로 인해 과거보다 한층 나아진 -계층 내에서의 한계는 존재하나- 노동여건을 쟁취하였지만 구 중산계급은 사정이 그와 같지 않았다. 그들은 노력해서 축재한 재산이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목도했고, 자신들의 힘으로 그것을 막을 방도가 없다는 사실에 무력함을 느꼈다. 중산층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과거보다 악화된 자신들의 경제적 상황과, 군주제의 몰락으로 인한 권위의 상실과 더불어 패전으로 안정감 있는 사회적 지위를 상실했다. 불안감이 엄습한 그들은 새로운 권위에 일치감을 느끼고 싶어 했고, 적극적으로 나치즘에 동조하는 세력이 되었다.

 근대유럽 부르주아의 기본정신은 기독교 사상에 있다. 청교도적인 윤리와 근검절약 정신은 근대 자본주의 발전에 주요한 동력인 만큼, 기독교의 권위는 그들 계층이 심리적인 허약함을 감추고 기댈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도 안락한 권위였다. 그러나 세기말 기독교 정신의 붕괴에 이어 군주제의 붕괴 -이는 가부장적 권위의 붕괴를 뜻하기도 한다-와 사회적 정치적 권위의 붕괴는 부르주아지에게 정신적인 공황을 가져다 주었다. 프롬이 설명하기를, 개인이 극심한 무력감과 고독감에 빠질 때 절대적인 권위에 기대고 복종하고자 하는 강력한 욕구가 생겨나는데, 시의 적절하게 히틀러가 등장하여 이러한 대중의 심리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적 권위/ 가부장적 권위/정치적 권위는 나치즘의 권위로 대체되고 구원의 메시아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히틀러이다. 메시아=히틀러=자본주의라는 등식, 영화에서 이를 의미하는 상징은 곳곳에 심어져 있다. 여자 주인공의 이름인 마리아와 프레더슨의 사무실인 바벨탑은 직접적이고, 자본가의 아들인 프레더가 공장 노동자를 구원할 메시아라는 설정은 간접적인 상징이다.

 영화라는 장르는 대중암시라는 전체 최면의 목적으로 이용하기에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수단이다. 모종의 정치적 목적으로 제작되는 프로파간다 영화들은 관객의 의지를 박탈하고 주관을 상실하게 하여 권력 유지를 용이하게 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집단적인 암시는 비합리를 합리화 시키는 마술적인 힘을 가지는데, 이런 점을 히틀러는 간과하지 않았다. 그는 선전의 본질적인 요소란 연설자의 탁월한 힘에 의해 청중의 의지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했다. 히틀러를 비롯하여 소련에서 많은 선전영화들이 제작되었던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기 생각이 자기 생각인지 외부로부터 주입된 견해인지조차 모르게 판단기능을 마비시키는 것이 궁극의 목표인 선전영화라고 해서 예술적인 질과 분리되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선전영화 아닌 선전영화 -결과적으로 선전영화인 것처럼 보여지지만- 인 메트로폴리스에서 연극 무대를 상기시키는 세트의 구성, 그로테스크한 분장, 삽입된 음악은 1920년대라는 제작연대를 무색케 했으니 말이다. 정치/사회적인 요소가 사회 구성원의 심리적인 기반 위에서 움직이고, 그 심리적인 요소가 다시 예술에 반영되어 사회적인 발언을 하는 순환논리는 내가 관심을 가지는 부분이다. 그러한 점은 영화를 감상하고 생각하는데 있어서 즐거움을 주는 요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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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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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소설을 처음 접한 건 가장 널리 알려진 단편인 '키친' 에서이다. 손으로 살포시 쥐어들기에 딱 알맞은 책의 두께와 앙증맞은 일러스트가 박힌 겉표지,  바나나라는 과일이름을 연상시키는 귀여움직한 필명에다 그에 절묘하게 어우러진 소설의 제목까지. 자신들의 소녀취향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겠노라 작심해온 여성들 혹은 그냥 제 나이에 알맞은 정도의 정서를 유지하고 있는 숱한 십대소녀들의 관심이 혹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 또한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많지 않은 분량의 그 소설을 단숨에 (예의 비슷한 분량의 소설들에 비해) 해치워 버렸다. 마치 편의점에 들어가서 컵라면 한개 뚝딱 해치우듯이 간편하고 쉬운 일이었다. 막힘없이 술술 읽어내려간후 최후의 한 페이지를 가볍게 넘기고는, 책을 읽느라 잠시 앉았던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난다.

 소설은 숨막히는 인생역정도, 고요한 삶의 성찰도, 유식한 체하는 현학적인 이야기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아기자기한 따스함과 간지러움을 살짝 느꼈을 뿐이다. 또 아주 잠깐 낯이 붉어졌을라나? 만화책을 즐겨보던 감수성 풍부했던 한 계집애가 훗날 소설가가 되어 소설 한편 쓰기를 희망하던 철없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흡사 만화시나리오나 드라마 시나리오를 소설의 형식으로 재구성 해놓은 듯한 바나나의 작품들에, 나는 그리 후한 점수를 줄 수 없다. 그녀의 문학을 편의점에 빗대어 표현한 일본문인의 말은, 그녀의 소설들이 부담없이 선택하여, 간편하게 소화할 수 있고, 텍스트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재빨리 빠져나올 수 있는 특성이 있음을 감안할때 적절한 지적인듯 하다. 그런 특유의 매커니즘이 가져다 주는 편안함. 그편안함의 미덕이 바나나를 다시 찾게 만드는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문학이 지닌 장점이 (만약에라도) 있다면 그것인지도. 벌써 나부터도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과 엄청난 중압감의 스트레스에 눌릴때면, 지옥에서 빠져나올 구멍이라도 찾듯이 바나나의 책들 앞에 서서 애꿎은 책만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아. 가볍게 팔랑거리는 그 편안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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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의 세계 1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장영은 옮김 / 현암사 / 199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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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속적인 세상사를 그저 그렇게만 관망하며 살아가는 남들과 조금 달라지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당연시 해오던 관념이나 통상적인 형식, 평범한 사물을 한번쯤 비틀어 보거나, 보이지 않는 이면 어딘가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 숨어 있으리라 진지하게(혹은 장난스레) 추측해본 경험을 분명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소박한 우리들도 알고보면 철학자가 될 자질을 갖추고 있다.

 '훌륭한 철학자가 되려는 우리에게 필요한 오직 한가지는 놀라워 할줄 아는 능력이다' 라고 우리를 설득하고 위로하는가 하면, 사실 부추기는 저자는 방대한 서양의 철학사를 쉽게 읽히도록 저술했다. 범위는 탈레스부터 시작해서 헬레니즘의 철학,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 계몽주의, 낭만주의, 현대의 실존주의에 이르기까지 전체 철학사를 거의 아우르지만 소설의 형식을 빌어 결코 지루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꽤나 흥미진진하게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세상이 어디로부터 비롯되는지, 나는 누구인지, 그와 같은 인식은 이성으로 하는 건지 아니면 경험이 나를 일깨우는 건지. 작가가 끌어주는 철학의 길을 따라 허겁지겁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그 끝에는 '지금 여기' 존재 하는 현대의 우리 모습이 있다.

 이책은 철학책이라기보다 철학의 역사에 대한 책이다. 그러나 철학사에 대한 지식전달에만 그쳤다면 이처럼 유명한 책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하는 방법과 우리가 생각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 그리고 삶에 대한 반성을 하라며 끊임없이 마음을 찔러대는 무엇인가가 담겨 있다. 마치 저자는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지 않느냐 말하는 듯 하다. 철학을 처음 접한다면, 이 책을 한번쯤 읽어 보기를 권한다. 많은 곳에서 청소년 권장 도서로 분류되어온 이 책을 20대라는 어설픈 자존심 때문에 외면하려 했던 나 같은 철학 문외한들에게 추천!

 인상깊은 구절: 마술사의 텅 빈 모자에서 흰 토끼가 나온다. 그것은 매우 큰 토끼이니까  이 마술을 하는 데는 수십억 년이 걸리겠지. 모든 아기들은 가느다란 털 끝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이 불가능해 보이는 마술을 보고 감탄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 토끼 가죽 털 깊숙한 곳으로 기어들어가 그 안에 머물게 되지. 그 곳은 지극히 편해서 가죽에 박힌 털을 붙잡고 위로 다시 기어오르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어지지. 오로지 철학자들만이 언어와 존재의 극한에 도달하는, 이 위험천만한 여행을 감히 실행에 옮기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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