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허리케인 ㅣ 미래그림책 33
데이비드 위스너 글 그림, 이지유 옮김 / 미래아이(미래M&B,미래엠앤비)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데이비드 위스너를 가리켜 정말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라고들 합니다.
꿈과도 같은 환상의 세계를 잘 표현해내는 작가라고요.
그의 책 [구름공항]이나 [이상한 화요일], [1999년 6월 29일]을 보면서 이런 수식어가 정말 딱 맞다는 생각 뿐이었는데 이번에 나온 새 책 [허리케인]을 보면서 다시 깨달은 것은 위스너가 단순히 상상력이 풍부해서가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어린 아이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자신의 마음이 어린 아이와 같기 때문에 그의 환상세계가 이렇게 사랑을 받고 있구나 하는 것이었답니다.
이번에 나온 [허리케인]은 전에 소개된 그의 작품에 비해 환상이나 비약의 강도는 다소 약합니다. 위스너의 그 독특함을 잔뜩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러울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사실적이고 현실적입니다만 그런 면에서 저는 아이들의 마음을 어떻게 이렇게 확실하게 짚어낼 수 있었는지 몇번을 감탄을 했고 제 아이 바무 역시 제일 재미있게 보았답니다.
표지를 한번 보세요.
거세게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은 나뭇잎이 휘날리고 빗줄기가 옆으로 흩날리고 있다는 것을 통해 잘 알 수 있는데 환하고 따뜻한 방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두 형제의 얼굴에는 불안함이나 두려움 보다는 호기심만 가득 보여지고 있어요.
음....서울에 살고 있는 저에게는요, 해마다 여름이면 겪는 물난리가 사실....남의 이야기에 그칠 때가 많습니다.
태풍이 북상해서 비가 엄청나게 오고 바람이 불 때 말이죠, 눅눅한 집안을 말리느라 약간 틀어놓은 보일러로 인해 뜨뜻한 방에 앉아 양동이의 물을 쏟아 붓듯이 좍좍 내리는 비를 내다보고 있노라면 밀려오는 그 왠지 모를 안도감...동그마니 둥지에 옹크리고 앉은 자족감....그런 걸 느끼곤 해요.
강원도 어느 지방에서는 온 동네가 물에 잠기고 온통 떠내려가는 그런 물난리를 겪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당장 내 몸이 편하고 걱정할 게 없으니....참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니까...하는 변명을 하면 안될까나요 ^^;;;;;
데이빗과 조지에게도 허리케인은 두렵고 무서운 존재가 아닙니다. 전깃줄이 끊어져서 전기불이 안 들어와도 그건 온가족이 모두 함께 있기 때문이니까요. 조지는 큰아이답게 제법 과학적인 지식을 뽐냅니다. "허리케인의 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지금은 조용한 것이고 아마도 새들은 저기 멀리 대서양까지 날려갔을 거"라고요.
허리케인이 지나간 자리에 형제를 맞이한 것은 뿌리채 뽑혀 옆집 마당으로까지 쓰러져버린 커다란 느릅나무였습니다. 그게 아이들을 얼마나 신나게 했을지 상상만 해도 입가에 빙그레 웃음이 지어지지 않나요?
아이들의 환상세계는 그 어떤 소재라도 순식간에 정글로, 우주로, 바닷속으로 변신을 할 수 있게 해줍니다.
저희집 소파는 바무와 게로 형제에게 무엇보다 좋은 장난감입니다. 소파를 이만큼 끌어내어 등받이에 두 녀석이 올라타고 해적놀이를 하고 우주여행을 떠나곤 합니다. 타고 노는 것만으로는 성에 안차는지 아예 소파를 뒤로 돌려놓고 벽과 소파의 그 좁은 틈새에 들어가 자기들만의 요새라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며 그 속에서 야단법석을 부리곤 하지요. 워낙 좁다보니 끝내 한 녀석이 앙~~ 우는 것이 다반사입니다만 ^^
거기에 덜렁대며 휘둘러대는 막대기 하나는 광선총으로 마법봉으로 순식간에 휙휙 변하지요.
이런 두 녀석에게 데이빗과 조지에게 주어진 커다란 느릅나무가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놀이터에 나갔다 올 적마다 길죽한 나뭇가지를 주워가지고 옵니다. 질색을 하는 엄마 때문에 차마 집안으로 들여놓지는 못한 채 현관에 세워두며 담에 나가놀 적에 꼭 가져가리라 다짐을 하지만....한발 빠른 엄마가 몰래 화단으로 휙 내던지곤 하는데도 또 주워오고..또 주워오고...
집에 휘두를만한 막대기가 없는 것도 아니고 총이며 칼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나뭇가지를 주워오는 거 보면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물이 주는 그 어떤 것이 아이들에게 있나봐요.
우리도 오래전 어릴 적에는 가지고 있었지만 잃어버리고 만 그 어떤 것 말여요. 생각해보면 저도 어릴 적에 제법 근사한 나무를 볼 적마다 제 몸이 개미처럼 작아지는 상상을 하곤 했어요. 그 나무를 멋진 집으로 삼아 요렇게 조렇게 노는 그런 상상을요.
“나무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둘만의 장소였지요. 그 곳은 비밀스러운 꿈을 펼칠 수 있을 만큼 컸고 또 모험이 두렵지 않을 만큼 작기도 했어요”
아~~ 정말 멋진 구절입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이보다 어떻게 더 적절하게 나타낼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아도 아파트 놀이터 옆 519동 건물 뒤에 조그마니 자기들만의 비밀장소를 가지고 있는 제 아이들...
어른들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적당히 나무로 가려졌으면서도 고개만 빠꼼히 내밀면 집이 보이고 언제든 후다닥 집으로 뛰어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그곳....
그들만의 비밀장소를 가지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마음에 이보다 더 좋고 이보다 더 근사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 나무에서라면 다 좋아”라고 하는 데이빗의 말처럼요.
하지만 어른들의 세계는 늘 현실적이고 이성적이지요. 마당에 쓰러진 커다란 나무를 언제까지나 방치해 둘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설령 그곳이 아이들의 기가 막힌 놀이터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두요.
섭섭하고 아쉽지만 그런 것 조차 이해할 수 없는 아이들이 아니기에 “굉장한 나무”였다는 말로 마음을 달래봅니다.
그리고 허리케인이 다시 올거라는 아빠의 말에 하나 남은 늙은 느릅나무를 올려다보는 두 형제의 얼굴은 환희와 기대감으로 가득합니다. 둘만의 은밀한 소망을 담아서 말입니다.
"나무를 치워버리다니.... 아저씨들, 정말 나빠!"
책장을 덮으면서 바무는 투덜거립니다. 그리고 우리도 올 여름 태풍이 올 때 화단에 심겨진 회화나무가 쓰러졌으면 정말 좋겠다고 그러는군요.
비록 바무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이제 앞으로 산에 갈 적마다 쓰러지고 뽑혀진 나무를 보게 되면 얼마나 좋아라 비명을 질러댈지 눈에 선합니다. 그곳에 머물러 신나게 놀고 싶어할테죠.
그때, 얼른 가자고....손에 가시 찔린다고 재촉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마음껏 두 녀석이 그들만의 환상의 나래를 펴도록 가만히 지켜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