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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평점 :
책 읽기가 힘들다. 물으나마나 게으름 탓이다. 책 말고도 숱한 재미난 것들에 시선이 뺏기고 -친구들과의 수다, 낮잠, 밤잠, 각종 행사, 텔레비전 보기 등 - 난 뒤에야 책을 찾으니 언제나 사들이는 속도에 책 읽는 속도가 따라가질 못한다. 한정된 책꽂이(전면에다 이중 책장이라 책이 많이 들어가긴 한다. 꽂는 게 목적이라면 몰라도 읽는 게 목적인 나 같은 이에겐 이중 책장은 그리 권할 게 못된다.)를 차지하지 못한 채 방안 이곳저곳에 널브러진 새 책들을 보면 한숨부터 나온다. 책 모으는 데 취미가 없으니 새로 사면 안 되는데 도서관 가는 게 귀찮아서 이 지경이 됐다. 알라딘 같은 인터넷 서점의 폐해이기도 하다. 편리한 인터넷 서점이 아니었다면 누군들 읽는 속도보다 사는 속도가 빨랐을 것인가.
어쨌거나 진작 구매한『디어 라이프』를 게으름 탓에 이제야 완독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와 비슷한데 솔직히 그미 작품에는못 미친다. 같은 북미권 단편이라 설정이나 분위기가 꼭 닮아 있는데, 구성이나 문체뿐만 아니라 서사 구조 및 서늘한 느낌이나 강렬한 울림 등은 올리브 키터리지가 낫다. 그래도 이렇게 리뷰를 남기게 하는 앨리스 먼로의 힘은 ‘여성적 시각에서 나오는 공감’ 때문이다. 14작품 중 공감가지 않는 것은 두어 개 뿐, 나머지 모두는 내 이야기였고, 내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제발이지 소설은 도덕 교과서가 아니다. 인간의 마음을 섬세하게 읽고 짚어내는 소산물이 소설이다. 앨리스 먼로의 담담한 이 전언들은 꼰대들의 가르침에 길들여진 영혼들에게는 그닥 공감이 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 삶이 어딘지 불온해, 내 몸에서 언제나 라일락 향기만 나길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면 당신은 이 책을 잘 선택한 경우이다. 소설이 도덕 교과서나 좋은 생각 등의 잡지와 같기를 바란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누군가에게 이 책을 권했을 때 전혀 공감 되지 않아 쩔쩔 매거나 당황스러워한다면 당신은 독서력이 짧거나 길들여진 일상인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사랑은 때론 불온하지만 정직하지.(일본에 가닿기를) 불온하지만 정직한 그 감정의 기로에서 갈등해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의 참맛을 제대로 모르는 거지. 사랑은 달콤하거나 쓴 맛이 나는 그 무엇이 아니라,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불온하기 짝이 없는 그 무엇이지. 끝내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이 내게 오더라도 한 번쯤은 피하지 않고 마구 부딪쳐야만 하는 그 무엇일 수밖에 없지.
사랑에 관한 한 변하는 게 없지.(아문센) 우리가 첫사랑을 잊었다거나,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건 사랑이 변해서가 아니지. 그 변하지 않은 사랑을 현실 속에서 마주치거나 감내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회피하는 것이지. 시간이 지나 우연히 번화한 거리에서 청춘 한 때 사랑했던 당신을 만난다면 아, 사랑에 관한 한 변한 게 없다는 걸, 진정되지 않는 심장 박동 소리와 부자연스런 손동작이 먼저 말해주는 것이지.
한 사랑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다른 사랑이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잖아. (메이벌리를 떠나며) 사랑과 별개로 결핍은 언제나 나의 주인님이고, 그 누군가가 상실의 고통으로 힘겨워 한다면 한 사랑 떠난 계단에 그의 이름을 새길 수는 있잖아. 그렇게 안도하면 사는 게 인생이지 뭘 그래. 사랑은 나눠지는 피자 조각이 아니라 흐르는 물 같은 것이거든.
사람마다 죽을 때까지 넘을 수 없는 어릴 적 트라우마가 있지. (자갈) 심리상담가를 찾아가도, 누군가를 만나도 해결되지 않는 근원적 슬픔이자 고통인 그것. 누가 대신 그 옹벽을 넘어줄 순 없지만 넘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는 있지. 너와 나라는 밥상과 함께 시간이란 치료제가 더해질 때 어느 정도 넘을 수 있는 그 산. 하지만 모든 걸 받아들이려는 노력에도 목에 가시처럼 걸려 있는 그 실체 없는 헛것의 실체가 트라우마지.
고정된 관습이 사람을 바꾸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지.(안식처) 습관은 관습을 낳고, 관습은 사람마다 고정된 관념을 심어주지. 내가 앨리스 먼로를 격하게 공감하는 것처럼 극동의 어느 독자는 그녀 이야기가 웬 횡설수설이냐고 반문을 할 수도 있지. 그런 게 고정 관념이야. 나는 옳고 너는 그른 게 아닌데도 내 신념대로 내 방식대로 삶은 그렇게 진행되는 거지. 상충하는 두 신념 속에서 공정을 기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지만, 사회적 동물인 우리는 그럭저럭 잘 헤쳐 나가고 있지. 그 헤쳐 나가는 태도조차 우리의 고정 관념이 되어버린 지 오래거든. 삶은 그렇게 지속되고 있어.
사소한 것에서 우리는 따스함을 맛보지.(자존심) 그가 나를 사랑하는지, 내가 그를 사랑하는지 그런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이지는 않았지만 그게 사랑이 아니라고는 말 못해. 우리의 하루란 때론 스컹크가 지나는 앞마당 풍광 앞에서도 감동하고 한없이 즐거울 수 있는 거거든. 그 합일된 시간, 비록 짧고 아쉽지만 그 선명한 시간만큼은 자존심 대신 서로의 자긍심을 확인하게 되는 거지. 그 감정을 서로 망칠 것까진 없잖아.
읽다 보면 단편의 묘미 같은 걸 제대로 느낄 때가 있지.(코리) 누군가에게는 진심이 누군가에게는 배신의 아이콘이 되기도 하는 것이 사랑이지. 특지 돈 앞의 사랑은 완전히 믿을 게 못 되지. 가진 자는 돈으로 사랑을 살 있다고 믿고, 돈이 필요한 자는 그 사랑을 악용하기도 하는 게 현실이지. 솔직해질 수 없는 서로의 사랑에 파국이 찾아오더라도 그 사랑은 진실했노라고 어느 한 쪽이 믿고 싶어 할 그 몹쓸 사랑.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이지. 아니 사랑은 변하는 것이지.(기차) 기차가 내달리듯 누군가의 사랑은 달리는 기차와도 같지. 사랑을 위해 기차를 잡고, 사랑을 위해 기차를 타고, 사랑을 위해 기차를 곁에 두고 눈물짓지만 결국은 사랑은 떠나기 위한 발판의 행보일 뿐. 이 세상에 영원한 사랑 따윈 없지. 기차가 머무는 한, 기차를 떠나 새로운 사랑을 찾는 한 그 사랑에 충실할 뿐. 설령 옛사랑을 만났다 해도 그 사랑은 옛날의 그 사랑이 될 수 없는 것. 다시 우리는 기차를 타고 새로운 세계로 떠나게 되지. 세상은 넓고 사랑은 널렸으니.
산다는 건 꿈이지. 그저 일장춘몽일 뿐이지. (호수가 보이는 풍경) 어느날 호흡이 가빠지고 병상에 눕게 되었을 때, 저마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가 누군가를 만나지. 결국 막다른 골목 앞에서 나를 맞는 건 아무도 없고, 오직 나라는 실존만이 나를 맞이하지. 그래도 행복한 건 그때 그 시절 내겐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그 가족과 함께 보낸 호숫가도 꿈 꿀 수 있다는 거지. 그렇게 행복했던 한 시절이 무의식 속에서 지워지는 거지.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는 거야.
노년의 질투가 이토록 사랑스러울 수 있다니!(돌리) 늘그막에 찾아오는 이런 식의 질투라면 맘껏 해주겠어. 질투할 거리조차 되지 않는 일상의 한 조각을 부여잡고 우리는 황혼의 시간을 소비하겠지. 싸울 여력조차 없는, 질투가 될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질투할 필요조차 없는 이 사랑스런 에피소드 앞에서 독자는 빙그레 웃게 되겠지. 싸울 여력조차 없다는 걸 잊은 채 잠시나마 생의 활력을 환기시켜주는 이 사랑스런 장면이라니.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를 담은 나머지 네 작품은 앨리스 먼로를 이해하는 주요 키워드가 되어 주지. 권위적이고 다소 허영심 있는 엄마(시선), 채찍으로 훈육할 만큼 보수적인 생활 태도를 지녔지만 아빠의 무거운 어깨를 이해하게 된 진심(밤), 처음으로 에로틱한 성적 감흥을 공감하게 되는 사춘기의 한 장면(목소리들), 한 가계의 흥망성쇠를 서로 다른 기억이 변주해내는 묘사 (디어 라이프)등으로 갈무리하지.
아직 읽지 않은 독자들이여,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착실하게 살아왔고, 착실하게 살 것을 주문하는 당신이라면 이 책은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 이 책을 통해 내 삶은 어땠고,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진행될지 그저 지켜보기를 원하는 당신이에게 이 책은 맞춤하다.
* 키워드 - 전쟁(1,2차 세계대전), 엄마, 종교, 타운, 성, 사랑, 트라우마, 기차, 여자와 남자, 쓸쓸함 등
<1. 일본에 가닿기를>
밴쿠버에 사는 시인 그레타는 딸 케이티와 함께 토론토행 기차를 탔다. 유럽 여행으로 빈 집을 써도 좋다는 지인의 연락을 받고 남편은 두고 떠나는 중이다. 벤쿠버에서 어떤 편집자의 주선으로 문인 파티에 간 적이 있다. 홀대를 받았지만 거기에서 파티 주선자의 사위이자 기자인 해리스를 알게 된다. 이번 여행을 계기로 해리스에게 시적인 편지를 쓴다.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유리병 속에 편지를 넣는 것과 같아요. 그리고 바라죠. 편지가 일본에 가 닿기를.’ 아픈 그의 아내가 퇴원해서 그 편지를 보더라도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기차 안에서 촌극 배우인 그레그와 로리를 알게 된다. 그들은 케이티를 즐겁게 해준다. 로리가 애인을 만나기 위해 목적지에서 내린다. 그레그와 불이 붙은 그레타는 객실 안에서 쾌락의 충격을 맛본다. 순간 케이티가 없어진 것을 알고 당황한다. 객차 사이 금속판에 앉아 있던 케이티를 보고 안심한다. 그레그는 목적지인 새스커툰에서 내린다. 케이티는 뾰로통해진다.
밤기차 안에서 그레타는 피터에게 편지를 쓴다. 아이를 잃어버릴 뻔한 얘기는 물론 한마디도 쓰지 않는다. 잡념을 몰아내고 온통 시를 구상했던 시간을 떠올리고 아이와 남편에 대한 배반을 반성하기도 한다. 소모적인 토론토 남자도 떠올려본다. 다른 것에 관심을 기울인 자체가 죄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날 오전 기차가 역에 닿았다. 누군가 여행 가방을 들어주며 그녀에게 키스를 한다. 해리스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다. 케이티 손을 놓치 않으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아이는 그녀에게 멀어지며 손을 놓는다. 그녀는 피하지 않고 다가올 일을 기다린다.
34그레타는 미칠 것만 같았다. 케이티만한 아이가 베개로 몸을 가릴 수 있기라도 하듯 베개를 홱 들어올렸다. 케이티가 담요 속에 숨어 있기라도 하듯 손으로 담요를 툭툭 쳤다.
40처음에는 놀랐고, 그다음엔 그레타의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고, 이어서 한없이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케이티의 손을 놓지 않으려 했지만 바로 그 순간 아이는 그녀에게서 떨어지며 손을 놓았다. 그녀는 피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다음에 다가올 일을 기다렸다.
<2. 아문센>
결핵 요양원 교사 일자리를 찾아 나는 토론토에서 기차를 탄다. 기차역에서 메리라는 수다쟁이 여자애를 만나고 그 아이가 요양원에서 일을 돕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교육적 가치보다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지리멸렬한 그곳에서 요양원 외과의사를 만나 결혼까지 약속한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의사는 결혼 의사를 번복하고 나는 아문센을 떠나게 된다. 기차 안에서 메리를 만난 게 지금 와서는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의사에게 매달리지 않은 수치심을 막는 계기는 되었으니. 오랜 세월 뒤 토론토 길에서 그와 재회한다. 별일 없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아문센을 떠나올 때와 똑 같은 감정을 느낀다. 사랑에 관한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는 걸.
71 ...대신 그 자리에 어마어마한 기쁨이 아니라 팽팽하고 신경을 건드리는 기쁨을 채울 것이다. 나는 춥지 않아도 몸의 떨림을 멈추지 못할 것이고, 과연 단어 하나라도 제대로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80내가 절대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그가 외과의사라는 사실이 나를 흥분시킨다. 그가 섹스를 요구한다면 당장에라도 그를 위해 습지나 지저분한 구덩이에 드러누울 수도 있다. 내 척추가 길가 돌멩이에 으스러질 듯 눌려도 괜찮을 것 같다. 이 느낌을 혼자 간직해야 한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85아마도 언젠가 당신은 이날이 당신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의 날이었다고 생각하게 될 거요.
85발목에 쇠사슬을 감은 것처럼 기차에 올라탄다.
88내가 기억하는 것처럼 왼쪽 눈이었다. 언제나 그 왼쪽 눈. 그 눈빛은 늘 오묘하고 경계하는 듯하고 놀라는 듯했다. 전혀 불가능한 어떤 일이.
그때 나는 아문센을 떠나올 때와 똑 같은 감정을 느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아 여전히 멍한 상태의 나를 기차가 태우고 떠나올 때와 같은 감정을.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
<3. 메이벌리를 떠나며>
모건이 고용한 리아는 영화관의 매표인이고, 경찰관 레이는 모건의 부탁으로 그녀를 토요일 밤마다 집에 안전하게 데려다 준다. 레이에게는 사랑해서 이혼까지 한 아픈 부인 이저벨이 있다. 크리스마스 무렵 리아가 실종되었다. 며칠 뒤 리아에게서 편지가 왔다. 다림질을 도와주던 목사네가 수신인이었는데 그집 아들과 결혼을 한단다. 외지에 있던 색소폰 주자인 목사 아들과 딱 한 번만에 눈이 맞아 떠난 리아에게 레이는 서운한 감정이 생긴다.
결혼 후 리아는 아이가 둘이고 목사관에서 시부모와 살게 된다. 어느날 우체국 앞에서 레이는 리아를 만난다. 이저벨에게 리아 얘기를 자주 했는데 들려줄 수 있어서 좋겠다고 생각한다. 새로온 신임목사와 리아는 바람이 났다. 리아는 아이들도 시댁에 뺏기고 쫓겨났다. 이저벨은 병세가 심해지고, 간호를 위해 레이는 새 일을 찾았다. 레이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한 번씩 그녀를 찾아가다 나중에는 점점 횟수가 줄어들었다.
병원의 암환자들에게 레크리에이션 지도를 하는 리아를 레이가 우연히 만났다. 전남편은 알콜 중독자가 되었고, 바람났던 목사는 여자 목사와 재혼했단다. 리아는 결국 떠났다. 그에게 남은 것은 결핍뿐이었다. 한 때 알았던 아가씨 리아 역시 상실 전문가였다. 주변인들을 다 잃었으니. 레이가 집에 와 계단을 올라가는데 그녀 이름이 떠올랐다. 그녀 이름은 리아. 이루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그를 감쌌다.
118 그가 지닌 것은 오직 결핍뿐이었다. 산소 결핍이나 심폐 기능의 결핍 같은 그런 것. 그 증상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다. 예전에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아가씨, 한때 그가 알았던 그 여자 - 그녀가 그녀의 아이들에 대해 말했었다. 아이들을 상실한 것에 대해. 그 사실에 익숙해지는 것에 대해. 저녁때가 되면 겪는 괴로움에 대해.
상실 전문가, 그녀를 그렇게 불러도 좋으리라. 그녀와 비교하면 그는 초보였다. 지금 그는그녀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예전에 그렇게 잘 알고 있었던 그녀의 이름을 상실했다. 상실한다. 상실되었다. 그를 놀리고 싶다면, 놀려라.
리아.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내는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그를 감쌌다.
<4. 자갈>
바람난 엄마가 임신을 한 채 따로 살림을 차렸다. 일곱 살인 나와 아홉 살 언니 카로는 아빠가 아닌 엄마를 따라 트레일러에서 산다. 키우던 개 블리치와 함께 자갈 채석장에서 카로는 익사한다. 트레일러 문 앞에 다다라도 즉각적으로 이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카로는 블리치가 물에 빠졌다고 집에 가서 말하라고 나에게 시켰다.) 엄마는 물에 뛰어들지 않았고, 닐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일주일 뒤 쯤에 동생 브렌트가 태어났다. 브렌트는 닐이 아니라 아버지를 더 닮았다.
성인이 된 뒤 닐을 만났다. 취해 있고 수영을 못했다고 변명했다. 언니의 익사 건은 나를 평생 괴롭힌다. 심리상담가가 말한다. 카로도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모를 수 있고, 관심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고. 어쩌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엄마를 움직여 아빠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려주려고 그랬을 수도. 얼른 알리지 못한 나를 자책하지 말라고 닐은 말한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것에 붙들려 있다.
142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거야. 뭐가 어떻든 간에 그냥 그러려고 해봐. 주변 상황과는 아무 상관 없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넌 모를 거야.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그가 어떤 의미로 그 말을 했는지 나는 안다. 그러는 것이 정말로 옳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서 카로는 여전히 물을 향해 달려가 의기양양하게 자기 몸을 던지고, 나는 여전히 그것에 붙들려 있다. 그녀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라면서. 첨벙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리면서.
<5. 안식처>
아프리카로 간떠난 부모를 대신해 이모네가 나를 돌봐준다. 의사 이모부에겐 자라온 환경이 다른 누나가 있었다. 이모부는 누나 이야기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모는 이웃집을 초대할 때 트리오로 활동하는 누나팀도 이모부 몰래 초대했다. 이모는 자신이 주도한 이 일에 기분이 업되어 있었다. 학회에 갔던 이모부가 돌아오면서 분위기는 엉망이 된다. 이모부는 이런 짓거리가 고상한 척 하는 거라 경멸했다. 얼마 뒤 이모부의 누나인 모나가 죽었다. 사람들은 음악 자체와 음악에 헌신하는 모나 같은 사람을 괴짜로 취급했다. 여자들은 무엇에 헌신하든 그것 때문에 바보 취급을 받는다. 이모부는 서로 다른 방식의 종교로 진행되는 장례식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인을 추모하려다가 낭패하기도 한다. 나는 부모(자유)와 이모네(보수) 사이에서 균형적 시각을 견지한다.
162-163 남자들은 싫어하는 것이 아주 많았다. 그 말은 정확히 사실이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쓸모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들은 그런 것을 싫어했다. 아마도 대수학에 대해 내가 느끼는 감정과 같을 것이다.
<6. 자존심>
백화점 부기원인 나는 길거리에서 이웃인 오나이다를 만난다. 은행원 출신 아버지가 물려준 집을 팔기 위한 조언을 얻기 위해 오나이다가 말을 건넨 것을 계기로 친하게 된다. 그녀와 텔레비전을 함께 보고 내가 아플 때 간호도 해준다. 나도 그녀처럼 집을 판다. 마지막 짐을 정리하면서 스컹크가 있는 마당을 보고 오나이다는 도심지에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감동한다. 그 순간이 한없이 즐겁다.
200 맙소사, 오나이다가 말했다. 도심지에서. 그녀의 표정이 황홀해진다. 이런 광경 본 적 있어요? 나는 없다고 했다. 단 한 번도. 나는 그녀가 또다른 말을 해서 그 순간을 망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우리 둘 다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그 순간이 한없이 즐거웠다.
<7. 코리>
구두공장을 하는 아버지를 둔 덕에 코리는 부유했다. 소아마비를 앓는 것 빼고. 유부남 하워드와 사귀는 것을 가정부 릴리언이 알고 돈을 뜯어낸다. 도서관에 취직한 그녀는 여전히 하워드와 밀애를 즐긴다. 릴리언은 죽었고, 하워드는 여느 때처럼 가족 여행을 떠났다. 문득 그녀는 깨닫는다. 사서함을 열었다는 릴리언에게 돈이 전해진 게 아니라, 돈은 곧장 은행계좌나 지갑으로 들어갔을 거란 확신. 릴리언이 죽었다고 편지를 보내자 하워드의 답이 온다. 다 잘돼서 기쁘다고. 곧 만나자고.
226-227 릴리언은 중요하지 않고, 중요했던 적도 없으니까. 사서함도 없다. 돈은 곧장 은행계좌로 들어갔거나 어쩌면 지갑으로 들어갔을 테니까. ---스페인 여행, 가족, 여름 산장, 교육시킬 자식들, 지불할 청구서가 수북한 사람들 -그들은 그만한 액수의 돈을 어디에 쓸 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녀는 집에 있는 모든 방을 돌아다니며 이 새로운 사실을 벽과 가구들에게 전한다. 어디에나 구멍이 있다. 특히 그녀의 가슴에. 그녀는 커피를 내리지만 마시지는 않는다. 그녀는 결국 또다시 침실로 돌아오고, 다시 처음부터 지금의 현실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8. 기차>
달리던 기차에서 내린 군인 잭슨은 농가에 스며든다. 벨이라는 열 여섯 살 많은 여자와 지낸다. 세월이 지나 1962년 그들은 벨의 종양을 제거하러 토론터로 갔다. 도시 풍광에 격세지감을 느끼기도 하고, 환자와의 관계에 친구라고 적기도 한다. 병실에서 벨은 아버지의 죽음이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성적 자책감 때문이란 걸 얘기한다.
이 일을 계기로 잭슨은 다른 일자리를 찾아 떠나고(왜 떠났는지) 얼마 뒤 그녀의 부음을 듣는다. 새로운 일터에서 딸을 찾으러 주인을 만나는 일린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녀는 학창시절 친하게 지내던 여자이다. 잭슨은 군대로 갔고 유럽이 승리하자 일린이 있는 곳으로 귀향을 꿈꿨다. 하지만 그녀에게 되돌아가지 않았다. 건물 관리를 하는 새 일터에서도 그는 떠난다. 밤새 기차를 타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설 것이다.
<9. 호수가 보이는 풍경>
낸시는 상담 받을 의사를 만나기 위해 다른 마을로 간다. 시간만 흐르고 쇠락한 듯 보이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지만 찾지 못한다. 그러다 찾아들어간 요양원에는 아무도 없었고, 낸시는 그 안에 갇히는 상황에 빠지고 만다. 낸시는 정신질환으로 병원에 있다. 병상에서 꿈을 꾸었다. 호수가 있고, 남편이 살아 있고, 운전을 할 줄 알던 시절의 꿈을.
<10. 돌리>
프랭클린과 나는 인생 늘그막을 준비 중이다. 프랭클린은 시인이고 나는 수학 교사 출신의 전기 작가이다. 우연히 찾아온 화장품 판매원 돌리가 옛날 프랭클린과 만난 적이 있는 사이라는 걸 알게 되자 나는 질투심에 편지를 쓰고 가출을 한다. 잠깐 배회하다 집에 와보니 프랭크는 고장난 돌리 차 대신 새 차를 사줬단다. 하지만 그게 다일 뿐 ‘싸울 여력’조차 없다는 프랭크의 진심을 이해한다. 질투심에 편지 부친 것을 절대 읽지 말라는 내 부탁을 남편은 실천할 것이다. 나라면 뜯어 봤겠지. 화가 나지만 이런 남편이 존경스럽다. 평생 그랬다.
<11. 시선>
어린 시절 권위적인 엄마와 소통이 힘들었던 나는 세이디와 많은 얘기를 나눴다. 지역 라디오 방송에서 자작곡을 부를 만큼 끼가 있는 세이디는 우리집에서 일을 도와주던 아가씨였다. 남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혼자서 춤추기를 좋아하던 세이디는 댄스홀에 갔다 오다 교통사고로 죽는다. 굳이 보고 싶지 않은 죽은 세이디의 모습을 엄마와 함께 조문을 가서 보게 된다.
351 나는 그 일을 그렇게 쉽게 믿었다. 어느 날, 아마 십대였을 때, 마음 속에 어두운 구멍을 간직한 내가 지금의 나는 더 이상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까지.
<12. 밤>
낮 동안 활동량이 적었던 나는 -심지어 맹장 수술 등 아팠다- 불면에 시달린다. 밤에 밖에 나가보면 아버지는 외출복인 채로 시가 연기를 내뿜곤 했다. 영리해서 말대꾸를 하는 통에 아버지에게 가죽띠나 벨트로 맞아 본 적도 있지만 그 밤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삶에 대한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게 된다. 아버지는 최선을 다하고 있고, 대출금 상환기한을 연장하기 위한 은행 출입용으로 단정한 옷을 입었고, 엄마가 몸을 떠는 병도 이해하고 있었을 거라고. 어쩌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여자를 사랑했을 지도.
370 아마 아버지는 그날 아침 은행에 볼일이 있어서 더 단정한 작업복을 입었겠지만, 예상했던 대로 대출금 상환을 연장할 수 없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했지만 경기는 회복되지 않았다. 우리를 부양하고 그 당시 지고 있던 빚을 갚으려면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어쩌면 아버지는 어머니가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에 정식 명칭이 병명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증상이 멈추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여자를 사랑했다는 것을.
<13. 목소리들>
나와 엄마와 잘 맞지 않는다. 춤 추기 좋아하는 엄마를 따라 댄스 파티를 여는 집에 가곤 했다. 엄마 옷을 가지러 파티집 2층으로 올라가다가 페기(아마 매춘부)를 달래는 영국 출신 군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여자들 중 누군가가 페기에게 비열한 행동을 했을 것이다. 허벅지를 더듬으며 남자들은 페기를 중요한 사람 달래는 듯한 목소리를 낸다. 그 모습에서 감정 이입을 하는 나를 발견한다.
388 나는 그저 그 축복에 대해. 그런 축복을 받는다면 얼마나 근사할지에 대해, 그럴 가치가 없는 페기라는 여자가 그런 행운을 누린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지에 대해 생각했다. 춥고 어두운 내 침실에서 그들이 나를 살살 흔들어 잠재웠다. 나는 스위치를 켜듯 그들을 불러내 그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렸다. 오, 그 어느 때보다 더, 그들의 목소리는 나와 상관없는 제삼자가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이 내 가는 허벅지를 축복하고, 그들의 목소리가 나도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확인시켜주었다.
<14. 디어 라이프>
아버지는 농장 일을 했고, 엄마는 농장집 딸에서 교사로 신분 상승을 했다. 친척들은 엄마의 교사연한 태도를 불편하게 받아들였다. 아버지는 겸손한 편이었다. 말대꾸하는 나 때문에 엄마가 고자질을 하면 아버지는 허리띠로 나를 때렸다. 모피 사업 등도 망하자 아버지는 경비일까지 해야 했다. 사십대의 엄마가 파킨슨병에 걸렸다. 조금 성장하자 엄마에 대한 반감도 줄었다. 엄마는 농장에서 자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를 원해서 시댁 식구들도 못마땅해했다. 미친 동네 할멈 네터필드로부터 나를 구한 영웅담도 엄마의 레퍼토리이다. 그 가족은 한때 아버지의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네터필드 딸이 투고한 한 편의 시를 통해 알게 된다. 네터필드 할멈은 자신을 떠나간 딸의 모습을 나를 통해 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편지 투고한 그녀를 만나고 싶었지만 정작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게 진심이었다. 엄마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용서할 수 없는 삶은 없다.
415-416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리고 장례식에도 나는 집에 가지 않았다. 내게는 어린 자식이 둘 있었는데 밴쿠버에는 아이를 맡길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거기까지 갈 경비가 없었고 내 남편은 의례적인 행동을 경멸했다. 하지만 그것이 왜 그의 탓이겠는가. 내 생각도 같았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