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대로 본다는 것

        - 이정재와 신동엽 사이

 

  사진 한 장이 화제다. 배우 이정재의 어떤 사진을 거꾸로 놓고 보면 진행자인 신동엽의 얼굴로 보인단다. 호기심에 사진을 검색해봤다. 정말 그랬다. 착시 현상일 뿐인데도 신기하게 보이는 건 심리학 책 속의 장면이 아니라 친근하게 느껴지는 연예인이 그 예시가 되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제대로 본다고 하지만 실은 잘못 볼 때가 있다.

 

 

  같이 바다 구경을 가도 누군가는 갯바위 사이의 불가사리를 보고 누군가는 수평선에 걸린 고깃배를 본다. 살아있는 불가사리의 색깔이 환상적인 보랏빛이었다는 걸 고깃배를 주목한 사람은 모르고, 고깃배를 밀어내던 노을빛 구름의 잔상이 얼마나 황홀했는지는 불가사리를 주시한 사람 역시 제대로 알지 못한다. 누구나 보이는 대로 보며 보이는 것만 보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며 볼 수 있는 것만 본다. 안타깝게도 이 모든 걸 합해도 ‘제대로 보는 것’에는 한참 못 미친다.

 

 

  양면을 본다는 것, 즉 제대로 본다는 건 삼자의 입장일 때나 가능하다. 당사자는 절대로 양면을 다 볼 수 없다. 당사자가 다 본다는 건 아무 것도 보지 않은 것과 같다. 인간에게 변명이 필요하고, 억울한 감정이 생기는 이유이다. 만약 당사자가 다 볼 수만 있다면 변명할 필요도 억울할 일도 없다. 변명과 억울한 감정은 내 입장의 진심을 말해주는 것이긴 하지만 사안의 실체적 진실과는 무관하다. 이정재의 얼굴을 신동엽 얼굴로 인식하는 건 내 눈이 판단한 진심이지만 그렇다고 그 얼굴의 실체가 신동엽이 되는 건 아니다.

 

 

  사람의 머릿속은 제 나름으로 바쁘고 눈썰미는 저마다의 방향이 있어 모든 걸 다 보지는 못한다. 내 눈의 들보보다 다른 이의 티끌이 먼저 보이고, 내 떡보다 상대 떡이 커 보이는 이유이다. 누구나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자기식대로 판단한다. 그게 잘못은 아니다. 다만 그 ‘자기 식’이 언제나 옳은 게 아니라는 자각은 새길수록 좋다. 내가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겸허한 두려움을 상비약처럼 지니고 다니고 싶다. 숱하게 노출되는 판단의 실수 앞에서 그 약 한 알 삼킨 뒤, 한 호흡을 쉬어 갈 일이다.

 

 

 

 

 

 

 

 

 

 

 

 

 

 

 

 

 

 

 

  2. 물살 건너기

 

  SNS나 블로그에 올라오는 사진과 글이 나 자신을 말해주는 전부는 아니다. 친한 친구가 동유럽 여행을 갔다 치자. 운치 있는 블타바 강의 석양빛이 실시간으로 SNS 상에 오르고, 혀끝에 감도는 네보지젝 레스토랑의 감칠맛이 블로그를 도배한다. 그렇다고 그 친구 삶이 전적으로 낭만적인 것은 아니다. 친구가 남긴 멋진 흔적은 아주 부분적인 것일 뿐이다.

 

 

  생은 전면과 이면으로 구분된다. 각각의 축적된 양은 개별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개 반반이다. 삶에는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다. 보여주고 싶은 부분도 있고 감추고 싶은 부분도 있다. 과시하고픈 장면도 있고 수치스러운 장면도 있다. 우리가 소셜 네트워크에 올리는 것은 단연코 전자이다.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만약 누군가 자신의 알라딘 서재에 커피숍 가서 탐나는 찻잔을 훔쳐왔다거나, 아버지한테 반항하다 가죽허리띠로 맞았다거나, 매일 밤 지치지도 않고 사랑을 나눈다거나 하는 내용만 줄곧 올린다면 그보다 끔찍하고 불편한 것도 없다. 그런 일은 일기장에나 담길 일이다. 정도가 심하면 심리상담소를 찾을 일이지 만천하에 공개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공개하는 개인 정보는 근본적으로 일기장에 기록되는 것들과는 많이 다르다. 은밀하고 내밀해서 보여주기 싫고 보여줘서는 안 되는 것들이 아니라, 더 이상 비밀스러울 것이 없어 보여줘도 되고 보여주고 싶은 것만 공개한다. 따라서 올라오는 타인의 정보에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체코의 레트나 언덕의 아침노을 을 배경으로 한 SNS 속 당신도 알고 보면 나열할 수 없는 숱한 아픔과 좌절과 번민을 안고 가는, 나와 다를 바 없는 소시민일 뿐이다.

 

 

  다 보여주는 게 아니라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공개된 소통 공간의 그 속성을 잠시 놓칠 때 사람들은 잠시 심리적으로 흔들린다. 돈 없다 징징 짜던 자야는 그새 곗돈으로 명품 가방을 샀다고 자랑하고, 어제까지 우울하다던 축이는 시댁의 배려로 훌쩍 괌으로 날아갔단다. 만날 나처럼 남편 흉만 보던 인이는 결혼기념일이라고 남편이랑 호텔 뷔페에 갔다며 인증샷을 날린다. 이쯤 되면 도대체 난 뭐지? 이렇게 스스로를 친구들이랑 비교하게 된다. 이게 인간이다. 이런 심리적 낭패감을 맛보지 않기 위해 잘 나가는 모 작가는 절대 SNS나 블로그를 하지 않는단다. 호호헤헤거리며 선플로 서로의 우의를 결속하는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끼는데다, 그것이 지나치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철학 또는 심리용어 중에 ‘대조효과’라는 게 있다. 같은 대상을 두고 확실하게 비교되는 두 상황이 제시되면 인간은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말한다. 예를 들면 같은 원피스를 옆집에서는 오백 원에 파는데 이집에서는 삼백 원에 판다면 별 망설임 없이 우리는 후자를 택한다. 그 원피스가 삼백 원의 가치가 있나 없나 하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순히 값을 비교한 것만으로 이백 원을 벌었다고 만족해한다. 실은 두 가게 주인이 같고 판매 전략상 그렇게 했을 뿐인 데도 우리는 싸게 샀다고 믿는다.

 

 

  공개된 소통 공간에서도 우리는 인간심리의 이런 단면을 볼 수 있다. 해외여행이다, 고급 레스토랑이다, 비싼 공연이다 등에 관한 정보를 수시로 올리는 친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내가 초라해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내 뜻과는 반하게 내 여건과는 맞지 않게 무리수를 둬 그들을 뒤따라 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몸에 맞지 않는 옷이 어울릴 리 없다. 스스로도 만족스럽지 않고 어색하다. 원해서 한 행위가 아니라 상황에 떼밀려 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조효과는 상대적인 현상이다. 비교하는 상황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내 선택은 확 달라진다. 위를 보고, 겉을 보는 것보다 아래를 보고(그게 아니라면 곁을 보고) 속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대상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는 집중력과 심지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듯 상대도 어떤 한 면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잘못 없는 상대에게 내 심리적 낭패감을 보상하라고 기대할 순 없다. 내가 건전하고 바른 눈을 가지는 만큼의 심리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누군가 말했다. 무심히 강건해지기, 이 요법은 대조효과라는 각종 물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가장 좋은 훈련 방법이다.

 

 

 

 

 

 

3. 모든 건 작은 것에서

 

  작은 것이 큰 것 된다. 모든 문제는 그렇게 시작된다. 당신의 사소한 눈빛 하나, 떨리는 손끝 하나에도 당신의 마음이 들어 있다. 그 마음이 품은 ‘감정의 결’을 제대로 읽는다는 건 쉽지 않다. 내가 읽는 당신의 마음이 실존하는 당신의 마음과 같을 수 없다. 이 두 마음의 간극을 선인들은 ‘착각’ 또는 ‘오해’라는 말로 이름 지었다.

 

 

  우선, 착각이란 말은 여간 귀여운 데가 있는 게 아니다. 상대에 대해 눈치 볼 것 없이 주체의 감정에 보다 충실한 단어이다. 그 대상이 주로 자기 자신인데다 긍정적 평가를 내릴 때 활용되는 이점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잘생겼다는 착각 속에 산다.’ 라거나 ‘그녀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착각한다.’라는 말 등이 좋은 예이다. 당사자의 감정에 충실할 뿐, 상대의 감정과는 그리 상관없는 게 착각 현상이다. 해서 우리는 ‘자뻑’하는 당신에게 여유 띤 웃음을 보여줄 수 있다.

 

 

  오해는 좀 다르다. 똑 같이 뭔가를 잘못 지각했을 때 쓰이는 말이지만 그 느낌은 ‘착각’일 때와는 다르다. 오해는 주체자의 감정뿐만 아니라 상대의 감정까지를 포괄한다. ‘내가 오해했다면 미안해.’, ‘우리는 서로의 오해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등의 예문에서 보듯 오해에는 반드시 그 당사자들이 등장한다. 착각이 자유일 수 있는 건 대상의 눈치를 볼 필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해에는 자유가 없다. 누군가를 오해하는 순간, 또는 누군가의 오해를 받는 순간 그보다 더한 마음의 지옥은 없다.

 

 

  아침 텔레비전에 연륜 깊은 연예인이 나왔다. 자신은 멋있고, 날씬하고, 섹시하게 늙어가는 중이란다. 보는 이에 따라 주책이고, 뚱뚱하고,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반기를 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모습이 당당하고 귀엽게 보이는 건 그 착각이 내 감정을 직접적으로 건드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잘못된 이해라도 착각과 달리 오해가 치명적인 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너와 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착각에는 자유가 허용되지만 오해 앞에서는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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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1-28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알찬 리뷰... ㅋㅋㅋㅋㅋ.
그나저나 신동엽과 이정재 정말 기가 막힌데요.
신기하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다크아이즈 2014-01-29 11:28   좋아요 0 | URL
제가 컴맹인 관계로다가 캡처를 제대로 못했어요ㅠ
원본 사진은 거꾸로 보면 진짜 신동엽으로 보여요ㅋ
투베어원풋님? !도 설 잘 보내시어요~~

세실 2014-02-02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NS는 만천하에 공개되니 부담스럽긴 하더라구요.
그나마 카카오 스토리는 지인들만 보게되니 일상을 적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포장해서 보여주게 됩니다. 누누히 강조하는 건. '보이는게 다는 아니다'......ㅎㅎ
팜므님 편안한 설 명절 되셨죠?
수상한 그녀 가족과 함께 꼭 보시길요^^

다크아이즈 2014-02-02 13:12   좋아요 0 | URL
당연히 포장해야지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면 그건 끔찍해요. 보는 이에 대한 예의도 아니지요.ㅋ

편안하지 못했어요. 딸내미 신종 플루 걸려서 방콕했답니다. 간호한다는 명분 하에^^*
수상한 그녀 좀 미뤄야 될 것 같아요. 꼭 볼게요.
편한 휴일 보내시어요. 세실 관장님^^*

순오기 2014-02-03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페이퍼, 공감 꾸욱~~~~

다크아이즈 2014-02-04 13:08   좋아요 0 | URL
순정하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기 언냐, 명절 뒤끝 없지요?
전 가로늦게 몸살 오려해요.ㅠ
 
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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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읽기가 힘들다. 물으나마나 게으름 탓이다. 책 말고도 숱한 재미난 것들에 시선이 뺏기고 -친구들과의 수다, 낮잠, 밤잠, 각종 행사, 텔레비전 보기 등 - 난 뒤에야 책을 찾으니 언제나 사들이는 속도에 책 읽는 속도가 따라가질 못한다. 한정된 책꽂이(전면에다 이중 책장이라 책이 많이 들어가긴 한다. 꽂는 게 목적이라면 몰라도 읽는 게 목적인 나 같은 이에겐 이중 책장은 그리 권할 게 못된다.)를 차지하지 못한 채 방안 이곳저곳에 널브러진 새 책들을 보면 한숨부터 나온다. 책 모으는 데 취미가 없으니 새로 사면 안 되는데 도서관 가는 게 귀찮아서 이 지경이 됐다. 알라딘 같은 인터넷 서점의 폐해이기도 하다. 편리한 인터넷 서점이 아니었다면 누군들 읽는 속도보다 사는 속도가 빨랐을 것인가.

 

 

  어쨌거나 진작 구매한『디어 라이프』를 게으름 탓에 이제야 완독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와 비슷한데 솔직히 그미 작품에는못 미친다. 같은 북미권 단편이라 설정이나 분위기가 꼭 닮아 있는데, 구성이나 문체뿐만 아니라 서사 구조 및 서늘한 느낌이나 강렬한 울림 등은 올리브 키터리지가 낫다. 그래도 이렇게 리뷰를 남기게 하는 앨리스 먼로의 힘은 ‘여성적 시각에서 나오는 공감’ 때문이다. 14작품 중 공감가지 않는 것은 두어 개 뿐, 나머지 모두는 내 이야기였고, 내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제발이지 소설은 도덕 교과서가 아니다. 인간의 마음을 섬세하게 읽고 짚어내는 소산물이 소설이다. 앨리스 먼로의 담담한 이 전언들은 꼰대들의 가르침에 길들여진 영혼들에게는 그닥 공감이 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 삶이 어딘지 불온해, 내 몸에서 언제나 라일락 향기만 나길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면 당신은 이 책을 잘 선택한 경우이다. 소설이 도덕 교과서나 좋은 생각 등의 잡지와 같기를 바란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누군가에게 이 책을 권했을 때 전혀 공감 되지 않아 쩔쩔 매거나 당황스러워한다면 당신은 독서력이 짧거나 길들여진 일상인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사랑은 때론 불온하지만 정직하지.(일본에 가닿기를) 불온하지만 정직한 그 감정의 기로에서 갈등해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의 참맛을 제대로 모르는 거지. 사랑은 달콤하거나 쓴 맛이 나는 그 무엇이 아니라,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불온하기 짝이 없는 그 무엇이지. 끝내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이 내게 오더라도 한 번쯤은 피하지 않고 마구 부딪쳐야만 하는 그 무엇일 수밖에 없지.

 

 

  사랑에 관한 한 변하는 게 없지.(아문센) 우리가 첫사랑을 잊었다거나,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건 사랑이 변해서가 아니지. 그 변하지 않은 사랑을 현실 속에서 마주치거나 감내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회피하는 것이지. 시간이 지나 우연히 번화한 거리에서 청춘 한 때 사랑했던 당신을 만난다면 아, 사랑에 관한 한 변한 게 없다는 걸, 진정되지 않는 심장 박동 소리와 부자연스런 손동작이 먼저 말해주는 것이지.

 

 

  한 사랑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다른 사랑이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잖아. (메이벌리를 떠나며) 사랑과 별개로 결핍은 언제나 나의 주인님이고, 그 누군가가 상실의 고통으로 힘겨워 한다면 한 사랑 떠난 계단에 그의 이름을 새길 수는 있잖아. 그렇게 안도하면 사는 게 인생이지 뭘 그래. 사랑은 나눠지는 피자 조각이 아니라 흐르는 물 같은 것이거든.

 

 

  사람마다 죽을 때까지 넘을 수 없는 어릴 적 트라우마가 있지. (자갈) 심리상담가를 찾아가도, 누군가를 만나도 해결되지 않는 근원적 슬픔이자 고통인 그것. 누가 대신 그 옹벽을 넘어줄 순 없지만 넘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는 있지. 너와 나라는 밥상과 함께 시간이란 치료제가 더해질 때 어느 정도 넘을 수 있는 그 산. 하지만 모든 걸 받아들이려는 노력에도 목에 가시처럼 걸려 있는 그 실체 없는 헛것의 실체가 트라우마지.

 

 

  고정된 관습이 사람을 바꾸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지.(안식처) 습관은 관습을 낳고, 관습은 사람마다 고정된 관념을 심어주지. 내가 앨리스 먼로를 격하게 공감하는 것처럼 극동의 어느 독자는 그녀 이야기가 웬 횡설수설이냐고 반문을 할 수도 있지. 그런 게 고정 관념이야. 나는 옳고 너는 그른 게 아닌데도 내 신념대로 내 방식대로 삶은 그렇게 진행되는 거지. 상충하는 두 신념 속에서 공정을 기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지만, 사회적 동물인 우리는 그럭저럭 잘 헤쳐 나가고 있지. 그 헤쳐 나가는 태도조차 우리의 고정 관념이 되어버린 지 오래거든. 삶은 그렇게 지속되고 있어.

 

 

  사소한 것에서 우리는 따스함을 맛보지.(자존심) 그가 나를 사랑하는지, 내가 그를 사랑하는지 그런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이지는 않았지만 그게 사랑이 아니라고는 말 못해. 우리의 하루란 때론 스컹크가 지나는 앞마당 풍광 앞에서도 감동하고 한없이 즐거울 수 있는 거거든. 그 합일된 시간, 비록 짧고 아쉽지만 그 선명한 시간만큼은 자존심 대신 서로의 자긍심을 확인하게 되는 거지. 그 감정을 서로 망칠 것까진 없잖아.

 

 

  읽다 보면 단편의 묘미 같은 걸 제대로 느낄 때가 있지.(코리) 누군가에게는 진심이 누군가에게는 배신의 아이콘이 되기도 하는 것이 사랑이지. 특지 돈 앞의 사랑은 완전히 믿을 게 못 되지. 가진 자는 돈으로 사랑을 살 있다고 믿고, 돈이 필요한 자는 그 사랑을 악용하기도 하는 게 현실이지. 솔직해질 수 없는 서로의 사랑에 파국이 찾아오더라도 그 사랑은 진실했노라고 어느 한 쪽이 믿고 싶어 할 그 몹쓸 사랑.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이지. 아니 사랑은 변하는 것이지.(기차) 기차가 내달리듯 누군가의 사랑은 달리는 기차와도 같지. 사랑을 위해 기차를 잡고, 사랑을 위해 기차를 타고, 사랑을 위해 기차를 곁에 두고 눈물짓지만 결국은 사랑은 떠나기 위한 발판의 행보일 뿐. 이 세상에 영원한 사랑 따윈 없지. 기차가 머무는 한, 기차를 떠나 새로운 사랑을 찾는 한 그 사랑에 충실할 뿐. 설령 옛사랑을 만났다 해도 그 사랑은 옛날의 그 사랑이 될 수 없는 것. 다시 우리는 기차를 타고 새로운 세계로 떠나게 되지. 세상은 넓고 사랑은 널렸으니.

 

 

  산다는 건 꿈이지. 그저 일장춘몽일 뿐이지. (호수가 보이는 풍경) 어느날 호흡이 가빠지고 병상에 눕게 되었을 때, 저마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가 누군가를 만나지. 결국 막다른 골목 앞에서 나를 맞는 건 아무도 없고, 오직 나라는 실존만이 나를 맞이하지. 그래도 행복한 건 그때 그 시절 내겐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그 가족과 함께 보낸 호숫가도 꿈 꿀 수 있다는 거지. 그렇게 행복했던 한 시절이 무의식 속에서 지워지는 거지.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는 거야.

 

 

  노년의 질투가 이토록 사랑스러울 수 있다니!(돌리) 늘그막에 찾아오는 이런 식의 질투라면 맘껏 해주겠어. 질투할 거리조차 되지 않는 일상의 한 조각을 부여잡고 우리는 황혼의 시간을 소비하겠지. 싸울 여력조차 없는, 질투가 될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질투할 필요조차 없는 이 사랑스런 에피소드 앞에서 독자는 빙그레 웃게 되겠지. 싸울 여력조차 없다는 걸 잊은 채 잠시나마 생의 활력을 환기시켜주는 이 사랑스런 장면이라니.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를 담은 나머지 네 작품은 앨리스 먼로를 이해하는 주요 키워드가 되어 주지. 권위적이고 다소 허영심 있는 엄마(시선), 채찍으로 훈육할 만큼 보수적인 생활 태도를 지녔지만 아빠의 무거운 어깨를 이해하게 된 진심(밤), 처음으로 에로틱한 성적 감흥을 공감하게 되는 사춘기의 한 장면(목소리들), 한 가계의 흥망성쇠를 서로 다른 기억이 변주해내는 묘사 (디어 라이프)등으로 갈무리하지.

 

 

  아직 읽지 않은 독자들이여,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착실하게 살아왔고, 착실하게 살 것을 주문하는 당신이라면 이 책은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 이 책을 통해 내 삶은 어땠고,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진행될지 그저 지켜보기를 원하는 당신이에게 이 책은  맞춤하다. 

 

* 키워드 - 전쟁(1,2차 세계대전), 엄마, 종교, 타운, 성, 사랑, 트라우마, 기차, 여자와 남자, 쓸쓸함 등

 

 

 

 

<1. 일본에 가닿기를>

  밴쿠버에 사는 시인 그레타는 딸 케이티와 함께 토론토행 기차를 탔다. 유럽 여행으로 빈 집을 써도 좋다는 지인의 연락을 받고 남편은 두고 떠나는 중이다. 벤쿠버에서 어떤 편집자의 주선으로 문인 파티에 간 적이 있다. 홀대를 받았지만 거기에서 파티 주선자의 사위이자 기자인 해리스를 알게 된다. 이번 여행을 계기로 해리스에게 시적인 편지를 쓴다.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유리병 속에 편지를 넣는 것과 같아요. 그리고 바라죠. 편지가 일본에 가 닿기를.’ 아픈 그의 아내가 퇴원해서 그 편지를 보더라도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기차 안에서 촌극 배우인 그레그와 로리를 알게 된다. 그들은 케이티를 즐겁게 해준다. 로리가 애인을 만나기 위해 목적지에서 내린다. 그레그와 불이 붙은 그레타는 객실 안에서 쾌락의 충격을 맛본다. 순간 케이티가 없어진 것을 알고 당황한다. 객차 사이 금속판에 앉아 있던 케이티를 보고 안심한다. 그레그는 목적지인 새스커툰에서 내린다. 케이티는 뾰로통해진다.

밤기차 안에서 그레타는 피터에게 편지를 쓴다. 아이를 잃어버릴 뻔한 얘기는 물론 한마디도 쓰지 않는다. 잡념을 몰아내고 온통 시를 구상했던 시간을 떠올리고 아이와 남편에 대한 배반을 반성하기도 한다. 소모적인 토론토 남자도 떠올려본다. 다른 것에 관심을 기울인 자체가 죄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날 오전 기차가 역에 닿았다. 누군가 여행 가방을 들어주며 그녀에게 키스를 한다. 해리스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다. 케이티 손을 놓치 않으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아이는 그녀에게 멀어지며 손을 놓는다. 그녀는 피하지 않고 다가올 일을 기다린다.

 

 

 

34그레타는 미칠 것만 같았다. 케이티만한 아이가 베개로 몸을 가릴 수 있기라도 하듯 베개를 홱 들어올렸다. 케이티가 담요 속에 숨어 있기라도 하듯 손으로 담요를 툭툭 쳤다.

40처음에는 놀랐고, 그다음엔 그레타의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고, 이어서 한없이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케이티의 손을 놓지 않으려 했지만 바로 그 순간 아이는 그녀에게서 떨어지며 손을 놓았다. 그녀는 피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다음에 다가올 일을 기다렸다.

 

 

 

 

<2. 아문센>

  결핵 요양원 교사 일자리를 찾아 나는 토론토에서 기차를 탄다. 기차역에서 메리라는 수다쟁이 여자애를 만나고 그 아이가 요양원에서 일을 돕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교육적 가치보다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지리멸렬한 그곳에서 요양원 외과의사를 만나 결혼까지 약속한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의사는 결혼 의사를 번복하고 나는 아문센을 떠나게 된다. 기차 안에서 메리를 만난 게 지금 와서는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의사에게 매달리지 않은 수치심을 막는 계기는 되었으니. 오랜 세월 뒤 토론토 길에서 그와 재회한다. 별일 없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아문센을 떠나올 때와 똑 같은 감정을 느낀다. 사랑에 관한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는 걸.

 

 

71 ...대신 그 자리에 어마어마한 기쁨이 아니라 팽팽하고 신경을 건드리는 기쁨을 채울 것이다. 나는 춥지 않아도 몸의 떨림을 멈추지 못할 것이고, 과연 단어 하나라도 제대로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80내가 절대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그가 외과의사라는 사실이 나를 흥분시킨다. 그가 섹스를 요구한다면 당장에라도 그를 위해 습지나 지저분한 구덩이에 드러누울 수도 있다. 내 척추가 길가 돌멩이에 으스러질 듯 눌려도 괜찮을 것 같다. 이 느낌을 혼자 간직해야 한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85아마도 언젠가 당신은 이날이 당신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의 날이었다고 생각하게 될 거요.

85발목에 쇠사슬을 감은 것처럼 기차에 올라탄다.

88내가 기억하는 것처럼 왼쪽 눈이었다. 언제나 그 왼쪽 눈. 그 눈빛은 늘 오묘하고 경계하는 듯하고 놀라는 듯했다. 전혀 불가능한 어떤 일이.

그때 나는 아문센을 떠나올 때와 똑 같은 감정을 느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아 여전히 멍한 상태의 나를 기차가 태우고 떠나올 때와 같은 감정을.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

 

 

 

<3. 메이벌리를 떠나며>

  모건이 고용한 리아는 영화관의 매표인이고, 경찰관 레이는 모건의 부탁으로 그녀를 토요일 밤마다 집에 안전하게 데려다 준다. 레이에게는 사랑해서 이혼까지 한 아픈 부인 이저벨이 있다. 크리스마스 무렵 리아가 실종되었다. 며칠 뒤 리아에게서 편지가 왔다. 다림질을 도와주던 목사네가 수신인이었는데 그집 아들과 결혼을 한단다. 외지에 있던 색소폰 주자인 목사 아들과 딱 한 번만에 눈이 맞아 떠난 리아에게 레이는 서운한 감정이 생긴다.

 

 

  결혼 후 리아는 아이가 둘이고 목사관에서 시부모와 살게 된다. 어느날 우체국 앞에서 레이는 리아를 만난다. 이저벨에게 리아 얘기를 자주 했는데 들려줄 수 있어서 좋겠다고 생각한다. 새로온 신임목사와 리아는 바람이 났다. 리아는 아이들도 시댁에 뺏기고 쫓겨났다. 이저벨은 병세가 심해지고, 간호를 위해 레이는 새 일을 찾았다. 레이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한 번씩 그녀를 찾아가다 나중에는 점점 횟수가 줄어들었다.

 

 

  병원의 암환자들에게 레크리에이션 지도를 하는 리아를 레이가 우연히 만났다. 전남편은 알콜 중독자가 되었고, 바람났던 목사는 여자 목사와 재혼했단다. 리아는 결국 떠났다. 그에게 남은 것은 결핍뿐이었다. 한 때 알았던 아가씨 리아 역시 상실 전문가였다. 주변인들을 다 잃었으니. 레이가 집에 와 계단을 올라가는데 그녀 이름이 떠올랐다. 그녀 이름은 리아. 이루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그를 감쌌다.

 

 

 

118 그가 지닌 것은 오직 결핍뿐이었다. 산소 결핍이나 심폐 기능의 결핍 같은 그런 것. 그 증상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다. 예전에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아가씨, 한때 그가 알았던 그 여자 - 그녀가 그녀의 아이들에 대해 말했었다. 아이들을 상실한 것에 대해. 그 사실에 익숙해지는 것에 대해. 저녁때가 되면 겪는 괴로움에 대해.

상실 전문가, 그녀를 그렇게 불러도 좋으리라. 그녀와 비교하면 그는 초보였다. 지금 그는그녀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예전에 그렇게 잘 알고 있었던 그녀의 이름을 상실했다. 상실한다. 상실되었다. 그를 놀리고 싶다면, 놀려라.

리아.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내는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그를 감쌌다.

 

 

 

 

<4. 자갈>

  바람난 엄마가 임신을 한 채 따로 살림을 차렸다. 일곱 살인 나와 아홉 살 언니 카로는 아빠가 아닌 엄마를 따라 트레일러에서 산다. 키우던 개 블리치와 함께 자갈 채석장에서 카로는 익사한다. 트레일러 문 앞에 다다라도 즉각적으로 이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카로는 블리치가 물에 빠졌다고 집에 가서 말하라고 나에게 시켰다.) 엄마는 물에 뛰어들지 않았고, 닐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일주일 뒤 쯤에 동생 브렌트가 태어났다. 브렌트는 닐이 아니라 아버지를 더 닮았다.

 

 

  성인이 된 뒤 닐을 만났다. 취해 있고 수영을 못했다고 변명했다. 언니의 익사 건은 나를 평생 괴롭힌다. 심리상담가가 말한다. 카로도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모를 수 있고, 관심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고. 어쩌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엄마를 움직여 아빠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려주려고 그랬을 수도. 얼른 알리지 못한 나를 자책하지 말라고 닐은 말한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것에 붙들려 있다.

 

 

 

142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거야. 뭐가 어떻든 간에 그냥 그러려고 해봐. 주변 상황과는 아무 상관 없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넌 모를 거야.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그가 어떤 의미로 그 말을 했는지 나는 안다. 그러는 것이 정말로 옳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서 카로는 여전히 물을 향해 달려가 의기양양하게 자기 몸을 던지고, 나는 여전히 그것에 붙들려 있다. 그녀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라면서. 첨벙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리면서.

 

 

 

 

<5. 안식처>

  아프리카로 간떠난 부모를 대신해 이모네가 나를 돌봐준다. 의사 이모부에겐 자라온 환경이 다른 누나가 있었다. 이모부는 누나 이야기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모는 이웃집을 초대할 때 트리오로 활동하는 누나팀도 이모부 몰래 초대했다. 이모는 자신이 주도한 이 일에 기분이 업되어 있었다. 학회에 갔던 이모부가 돌아오면서 분위기는 엉망이 된다. 이모부는 이런 짓거리가 고상한 척 하는 거라 경멸했다. 얼마 뒤 이모부의 누나인 모나가 죽었다. 사람들은 음악 자체와 음악에 헌신하는 모나 같은 사람을 괴짜로 취급했다. 여자들은 무엇에 헌신하든 그것 때문에 바보 취급을 받는다. 이모부는 서로 다른 방식의 종교로 진행되는 장례식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인을 추모하려다가 낭패하기도 한다. 나는 부모(자유)와 이모네(보수) 사이에서 균형적 시각을 견지한다.

 

 

 

162-163 남자들은 싫어하는 것이 아주 많았다. 그 말은 정확히 사실이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쓸모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들은 그런 것을 싫어했다. 아마도 대수학에 대해 내가 느끼는 감정과 같을 것이다.

 

 

 

 

 

<6. 자존심>

  백화점 부기원인 나는 길거리에서 이웃인 오나이다를 만난다. 은행원 출신 아버지가 물려준 집을 팔기 위한 조언을 얻기 위해 오나이다가 말을 건넨 것을 계기로 친하게 된다. 그녀와 텔레비전을 함께 보고 내가 아플 때 간호도 해준다. 나도 그녀처럼 집을 판다. 마지막 짐을 정리하면서 스컹크가 있는 마당을 보고 오나이다는 도심지에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감동한다. 그 순간이 한없이 즐겁다.

 

 

200 맙소사, 오나이다가 말했다. 도심지에서. 그녀의 표정이 황홀해진다. 이런 광경 본 적 있어요? 나는 없다고 했다. 단 한 번도. 나는 그녀가 또다른 말을 해서 그 순간을 망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우리 둘 다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그 순간이 한없이 즐거웠다.

 

 

 

 

<7. 코리>

  구두공장을 하는 아버지를 둔 덕에 코리는 부유했다. 소아마비를 앓는 것 빼고. 유부남 하워드와 사귀는 것을 가정부 릴리언이 알고 돈을 뜯어낸다. 도서관에 취직한 그녀는 여전히 하워드와 밀애를 즐긴다. 릴리언은 죽었고, 하워드는 여느 때처럼 가족 여행을 떠났다. 문득 그녀는 깨닫는다. 사서함을 열었다는 릴리언에게 돈이 전해진 게 아니라, 돈은 곧장 은행계좌나 지갑으로 들어갔을 거란 확신. 릴리언이 죽었다고 편지를 보내자 하워드의 답이 온다. 다 잘돼서 기쁘다고. 곧 만나자고.

 

 

 

226-227 릴리언은 중요하지 않고, 중요했던 적도 없으니까. 사서함도 없다. 돈은 곧장 은행계좌로 들어갔거나 어쩌면 지갑으로 들어갔을 테니까. ---스페인 여행, 가족, 여름 산장, 교육시킬 자식들, 지불할 청구서가 수북한 사람들 -그들은 그만한 액수의 돈을 어디에 쓸 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녀는 집에 있는 모든 방을 돌아다니며 이 새로운 사실을 벽과 가구들에게 전한다. 어디에나 구멍이 있다. 특히 그녀의 가슴에. 그녀는 커피를 내리지만 마시지는 않는다. 그녀는 결국 또다시 침실로 돌아오고, 다시 처음부터 지금의 현실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8. 기차>

  달리던 기차에서 내린 군인 잭슨은 농가에 스며든다. 벨이라는 열 여섯 살 많은 여자와 지낸다. 세월이 지나 1962년 그들은 벨의 종양을 제거하러 토론터로 갔다. 도시 풍광에 격세지감을 느끼기도 하고, 환자와의 관계에 친구라고 적기도 한다. 병실에서 벨은 아버지의 죽음이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성적 자책감 때문이란 걸 얘기한다.

 

 

  이 일을 계기로 잭슨은 다른 일자리를 찾아 떠나고(왜 떠났는지) 얼마 뒤 그녀의 부음을 듣는다. 새로운 일터에서 딸을 찾으러 주인을 만나는 일린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녀는 학창시절 친하게 지내던 여자이다. 잭슨은 군대로 갔고 유럽이 승리하자 일린이 있는 곳으로 귀향을 꿈꿨다. 하지만 그녀에게 되돌아가지 않았다. 건물 관리를 하는 새 일터에서도 그는 떠난다. 밤새 기차를 타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설 것이다.

 

 

 

 

<9. 호수가 보이는 풍경>

  낸시는 상담 받을 의사를 만나기 위해 다른 마을로 간다. 시간만 흐르고 쇠락한 듯 보이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지만 찾지 못한다. 그러다 찾아들어간 요양원에는 아무도 없었고, 낸시는 그 안에 갇히는 상황에 빠지고 만다. 낸시는 정신질환으로 병원에 있다. 병상에서 꿈을 꾸었다. 호수가 있고, 남편이 살아 있고, 운전을 할 줄 알던 시절의 꿈을.

 

 

 

<10. 돌리>

  프랭클린과 나는 인생 늘그막을 준비 중이다. 프랭클린은 시인이고 나는 수학 교사 출신의 전기 작가이다. 우연히 찾아온 화장품 판매원 돌리가 옛날 프랭클린과 만난 적이 있는 사이라는 걸 알게 되자 나는 질투심에 편지를 쓰고 가출을 한다. 잠깐 배회하다 집에 와보니 프랭크는 고장난 돌리 차 대신 새 차를 사줬단다. 하지만 그게 다일 뿐 ‘싸울 여력’조차 없다는 프랭크의 진심을 이해한다. 질투심에 편지 부친 것을 절대 읽지 말라는 내 부탁을 남편은 실천할 것이다. 나라면 뜯어 봤겠지. 화가 나지만 이런 남편이 존경스럽다. 평생 그랬다.

 

 

 

 

<11. 시선>

  어린 시절 권위적인 엄마와 소통이 힘들었던 나는 세이디와 많은 얘기를 나눴다. 지역 라디오 방송에서 자작곡을 부를 만큼 끼가 있는 세이디는 우리집에서 일을 도와주던 아가씨였다. 남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혼자서 춤추기를 좋아하던 세이디는 댄스홀에 갔다 오다 교통사고로 죽는다. 굳이 보고 싶지 않은 죽은 세이디의 모습을 엄마와 함께 조문을 가서 보게 된다.

 

 

351 나는 그 일을 그렇게 쉽게 믿었다. 어느 날, 아마 십대였을 때, 마음 속에 어두운 구멍을 간직한 내가 지금의 나는 더 이상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까지.

 

 

 

 

<12. 밤>

  낮 동안 활동량이 적었던 나는 -심지어 맹장 수술 등 아팠다- 불면에 시달린다. 밤에 밖에 나가보면 아버지는 외출복인 채로 시가 연기를 내뿜곤 했다. 영리해서 말대꾸를 하는 통에 아버지에게 가죽띠나 벨트로 맞아 본 적도 있지만 그 밤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삶에 대한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게 된다. 아버지는 최선을 다하고 있고, 대출금 상환기한을 연장하기 위한 은행 출입용으로 단정한 옷을 입었고, 엄마가 몸을 떠는 병도 이해하고 있었을 거라고. 어쩌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여자를 사랑했을 지도.

 

 

370 아마 아버지는 그날 아침 은행에 볼일이 있어서 더 단정한 작업복을 입었겠지만, 예상했던 대로 대출금 상환을 연장할 수 없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했지만 경기는 회복되지 않았다. 우리를 부양하고 그 당시 지고 있던 빚을 갚으려면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어쩌면 아버지는 어머니가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에 정식 명칭이 병명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증상이 멈추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여자를 사랑했다는 것을.

 

 

 

 

<13. 목소리들>

  나와 엄마와 잘 맞지 않는다. 춤 추기 좋아하는 엄마를 따라 댄스 파티를 여는 집에 가곤 했다. 엄마 옷을 가지러 파티집 2층으로 올라가다가 페기(아마 매춘부)를 달래는 영국 출신 군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여자들 중 누군가가 페기에게 비열한 행동을 했을 것이다. 허벅지를 더듬으며 남자들은 페기를 중요한 사람 달래는 듯한 목소리를 낸다. 그 모습에서 감정 이입을 하는 나를 발견한다.

 

 

 

388 나는 그저 그 축복에 대해. 그런 축복을 받는다면 얼마나 근사할지에 대해, 그럴 가치가 없는 페기라는 여자가 그런 행운을 누린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지에 대해 생각했다. 춥고 어두운 내 침실에서 그들이 나를 살살 흔들어 잠재웠다. 나는 스위치를 켜듯 그들을 불러내 그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렸다. 오, 그 어느 때보다 더, 그들의 목소리는 나와 상관없는 제삼자가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이 내 가는 허벅지를 축복하고, 그들의 목소리가 나도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확인시켜주었다.

 

 

 

 

<14. 디어 라이프>

  아버지는 농장 일을 했고, 엄마는 농장집 딸에서 교사로 신분 상승을 했다. 친척들은 엄마의 교사연한 태도를 불편하게 받아들였다. 아버지는 겸손한 편이었다. 말대꾸하는 나 때문에 엄마가 고자질을 하면 아버지는 허리띠로 나를 때렸다. 모피 사업 등도 망하자 아버지는 경비일까지 해야 했다. 사십대의 엄마가 파킨슨병에 걸렸다. 조금 성장하자 엄마에 대한 반감도 줄었다. 엄마는 농장에서 자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를 원해서 시댁 식구들도 못마땅해했다. 미친 동네 할멈 네터필드로부터 나를 구한 영웅담도 엄마의 레퍼토리이다. 그 가족은 한때 아버지의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네터필드 딸이 투고한 한 편의 시를 통해 알게 된다. 네터필드 할멈은 자신을 떠나간 딸의 모습을 나를 통해 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편지 투고한 그녀를 만나고 싶었지만 정작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게 진심이었다. 엄마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용서할 수 없는 삶은 없다.

 

 

 

415-416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리고 장례식에도 나는 집에 가지 않았다. 내게는 어린 자식이 둘 있었는데 밴쿠버에는 아이를 맡길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거기까지 갈 경비가 없었고 내 남편은 의례적인 행동을 경멸했다. 하지만 그것이 왜 그의 탓이겠는가. 내 생각도 같았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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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1-26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을 다 읽고서도 아직 리뷰를 못올리고 있어요. 글자는 다 읽었으되 작품속에 담긴 작가의 의도를 충분히 읽어냈는지 아직 모르겠어서요. 더 묵힌다고 나아질 것 없지만 그래도 좀 더 생각하는 시간을 두자는게 핑계인지 팜므님 말씀하신 게으름인지 잘 모르겠네요.
어떤 작품은 내 얘기 같기도 하고 어떤 작품은 금방 공감이 가지 않기도 한데, 확실히 작가는 보통 사람들이 그냥 겪고 지나갔을 일을 명료한 언어로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인 것 같아요. 어쩌면 그래서 더 읽는 사람의 마음을 쓰리게 하는지도 모르고요.
용서할 수 없는 삶이 없는 이유는, 아마 우리 자신도 누구에겐가 용서를 구해야 할 일을 저지르며 살고 있기 때문 아닐까 싶네요.
잘 읽었습니다.

다크아이즈 2014-01-28 10:04   좋아요 0 | URL
<보통 사람들이 그냥 겪고 지나갔을 일을 명료한 언어로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역할>을 잘하는 게 작가 맞는 것 같아요.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니 누구는 독자가 되고, 특별한 누군가는 작가가 되는 거겠지요?
나인님께서도 깊이 홀렸음에 틀림없어요,부지런한 님이 아직 리뷰를 못 올리실 지경이라면... 나인님 식으로 읽은 앨리스 먼로를 기다릴게요. 명절 잘 보내시어요.^^*

페크pek0501 2014-01-26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마음을 섬세하게 읽고 짚어내는 소산물이 소설이다. "
- 그렇다면, 인간이 이렇구나, 하고 느끼게 인간을 제대로 보여 주는 소설이겠군요.
그것이 소설의 임무이고 그래서 소설은 인간학일 테지요.
그런데 어떤 소설은 어려워서 뭘 말하는 것인지 모를 때가 있어요.

그런데 팜 님, 아주 꼼꼼한 독서, 꼼꼼한 리뷰에 감탄합니다.
저는 이 저자의 다른 책을 갖고 있는데, 이 책도 사야 할까, 생각중이어요. ^^

다크아이즈 2014-01-28 10:11   좋아요 0 | URL
소설의 정의는 잘모르겠지만 일단 인간 마음을 있는 그대로 짚어내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좋은 소설을 쓰는 건 맞는 것 같아요. 아니, 좋은 소설 뿐만 아니라 글 잘 쓰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통찰을 갖고 있겠지요.
우리글로 된 소설이 어려운 건 작가가 잘못 썼을 확률이 높고(단정 지어서 죄송해요ㅠ 독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점에서.) 번역한 소설이 어렵게 느껴지는 건 번역자의 책임도 반 이상은 된다는 게 제 개인적 견해입니다.

가진 책을 읽으신 뒤, 언니 취향에 맞으면 이 책을 구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설 잘 맞이하시고, 명절증후군 따위는 곁에 두지도 마시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1-27 0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게 공감합니다. 소설이 꼭 거대 담론만을 생산해야 하는 장르는 아니잖아요.
거대 담론보다는 미시적 관점으로 촘촘히 엮는
서사야말로 재미가 있는데 우린 너무 소설을 거창하게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크아이즈 2014-01-28 10:14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그러니까... 음, 곰발님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니까요.
여러 분야를 다 섭렵하고 계시지만, 전 개인적으로 곰발님이 소설로 전향해서(아니 매진해서!) 일가를 이루시길 간절히 바라는 걸요. 뭐, 소설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만.

제 바람을 뒤로 하고 왠지 님의 첫 책(? 죄송해요. 어쩌면 여러 권의 책을 냈을지도 모르는데)은 독서 관련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해요.^^* 흐흐~~

순오기 2014-01-27 0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앨리스 먼로, 고등학교 독서회 엄마들에게 대출만 하고 있네요~ ㅠ
잘 지내죠?
그동안 뜸해서 근황이 궁금하네요.

다크아이즈 2014-01-28 10:17   좋아요 0 | URL
독서회 엄마들 반응이 어떨지 궁금해요.
실은 저도 시청독서회 팀과 이 책을 토론했거든요.
저보단 공감을 덜하시는 것 같아 내심 서운했지 뭡니까!
사람 생각 다 같을 순 없잖아요. ㅋ
오기 언냐도 설 잘 맞이하시고, 설 가사노동은 조금만 하세요.^^*

세실 2014-01-27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체 이런 분석적인 장편의 글은 언제 쓰시나요? 새벽 3시? ㅎㅎㅎ
팜므님 글 읽고 나니 마치 이 책 한권 읽은거 같아요~~~ 굿!!!!!!!
해피 설날 되시어요^^

다크아이즈 2014-01-28 14:55   좋아요 0 | URL
뭐, 딱히 분석적이라고까진 할 수 없구요. 제 식으로 앨리스 먼로를 이해한 거지요.
근데 참 좋더라는. 공감 팍팍 땡기면서 이런 소설 쓰고 싶다, 막 이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지지 뭐에요.

근데 이보다 더 좋은 책이 프레이야님과 시아님이 권했던 <올리브 키터리지>에요.
도서관에서 사신 걸로 아는데, 다 읽어 갈지도...
그날 시아님이 잠자리에서 올리브 키터리지 원어 파일 녹음을 틀어주는데 뭔 말인지는 몰라도 막 가슴이 쿵쿵 뛰더라구요. 첫 편에 나오는 약국, 편이라는데 영어가 술술 들리면 참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지 뭐에요.

세실관장님은 가사 노동에서 면제? 명절에 도서관은 문 안 열지요?

세실 2014-02-02 09:56   좋아요 0 | URL
오늘은 도서관 문 열어요.
관장이 되서 좋은 것중 하나는 주말 근무할 일이 없다는거? 호호호~~~
요즘 주말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답니다^^

다크아이즈 2014-02-02 13:09   좋아요 0 | URL
문은 열어도 관장님은 안 나가셔도 되니 이런 좋을 데가.ㅋ
바지런하면 오늘 같은 날 도서관 가서 책 좀 빌려오면 되는데, 귀찮아서 그냥 사버립니다. 다 낭비예요.ㅠ

oren 2014-01-27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앨리스 먼로의 단편이 얼마나 뛰어났으면 노벨문학상을 받았을까요? 그리고 페이퍼 하나에 14편의 단편을 모두 소화하신 팜므 님은 어떤 상을 받을 수 있을지요? 하여간 두루 놀랍습니다.

저는 소설과 너무 멀어진 제 독서 경향이 아주 가끔씩 서글플 때가 있답니다. 예전에 젊을 땐 그래도 '소설'을 나름 열심히 읽었던 듯한데 말예요.(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소설이라도 저는 장편에 훨씬 더 매력을 느꼈던 듯싶네요. 대략 <파우스트>, <카라마조프 형제들>, <백경> 등은 [上,中,下]로, <죄와벌>, <적과흑>,<아들과연인> 등은 [上,下]로 된 책들을 읽었던 듯해요. 단편은 기껏해야 <한국근대문학전집-전5권세트>와 <안톤 체호프 단편선> 정도밖에 기억나는 게 없으니...쩝)

다크아이즈 2014-01-28 10:28   좋아요 0 | URL
오렌님은 소설과는 어울리지 않아요. ㅋ
혹 읽으시더라도 밑에 언급한 것처럼 웅장한 고전 쯤은 어울리실 것 같네요.
어쩜, 이런 잔잔하고, 섬세하고, 후벼파고, 속 뒤집고, 잘잘하고.... 기타 등등의 정서를 지닌 이런 단편들은 오렌님이 견뎌내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확실히 여성적 취향의 단편이거든요.
실제 성격은 제가 모르지만 독서 편력에서 상남자인 오렌님은 오렌님 스타일을 고수하시는 게 훨씬 멋지다고 사료되옵니다.^^*

이번 설에 영양 또는 안동에 가시는지요?
고향에 집안 어른들이 계신다면 당연 가실듯.
명절 잘 보내시어요.^^*

Jeanne_Hebuterne 2014-02-02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발이지 소설은 도덕 교과서가 아니다. 인간의 마음을 섬세하게 읽고 짚어내는 소산물이 소설이다.'

저 이 말이 무척 좋아요. 소설은 도덕 교과서가 아니라는 말, 특히요. 그 본질이 그런데 가르치고 교화하고 깨닫게 하는 것이 많다고 믿는 이들이 많은 요즘, 작가에게는 팜므 느와르님과 같은 독자 한 명이 소설을 도덕 교과서로 읽고 남을 가르치려 드는 독자 천 명보다도 소중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디어 라이프는 워낙 급히 나온 책인듯 하여 조금 꺼리게 되었는데 팜므느와르 님의 정성어린 주석을 보니 갑자기 궁금해지는군요. 어느날 이 책을 읽게 되면, 필연적으로 팜므느와르 님을 떠올리게 될 듯합니다.

다크아이즈 2014-02-04 13:12   좋아요 0 | URL
전 앨리스 먼로의 또 다른 소설을 기대하게 된 걸요. 에뷔님 덕이라고 고백하겠어요. 갑자기 소설 제목이 생각 안 나네요. 검색 들어갈게요.^^*
생각 외로 앨리스 먼로 소설에 공감하지 않는 분들이 많아서 좀 당황스럽긴 해요.
아마 북미 정서와 우리 정서가 달라서 그렇지 않을까 싶어요.

아직까진 우리 독자들은 뭔가 남는 것, 뭔가 깨우침이 있는 것 등을 소설에서 기대하는 게 분명한 것 같아요. 글 쓴다는 게 두려워지기 시작합니다.^^*

Jeanne_Hebuterne 2014-02-04 15:05   좋아요 0 | URL
행복한 그림자의 춤, 읽고나면 리뷰 기대할게요! :)

다크아이즈 2014-02-05 09:50   좋아요 0 | URL
맞아요. 행복한 그림자의 춤 ㅋ
일단 보관함에 담았답니다.
에뷔님 멋진 하루^^****

냉이 2018-01-30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유려한 리뷰에 친추하고 갑니다.
소설을 읽으며 느낀 막연함이 있었는데,...
종종 들르겠습니다.
 

 

 

                                  

    

   1. 슈퍼마켓 안에 갇히기

 

  사람 사이에 이상적인 궁합은 무엇일까. 충고하기 보다는 들어주는 관계일 때가 가장 바람직하다. 거기다 맞장구까지 쳐주면 더 바랄 게 없다. 옳은 말은 아낄수록 좋다. 어쩌다 바른 말을 하더라도 상대가 받아들이면 더할 나위없겠지만, 이때도 원칙은 될 수 있으면 바른 말은 하지 않는 거다. 정답은 이미 너나 나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옳은 말을 하는 이가 아니라 내 말을 들어줄 친구가 필요하다.

 

 

  모든 이로부터 옳은 말을 들어야 한다면 이보다  더한 스트레스는 없다. 그래서일까. 누구든지 빈틈없는 사람이 쏟아내는 충고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또한 내 말에 무심한 리액션으로 화답하는 친구들과는 자연스레 멀어지게 된다. 그건 인지상정이다. 자고로 사람이라면 흉도 보고 욕도 하면서 살아야 제격이다. 어딘지 맹탕이고, 알고 보면 허당이고, 배워도 기계치고, 작심해도 사흘파인 범부범부들에게 완벽한 사람은 부담스럽기만 하다. 자중자애하는 사람들은 말문을 트기 어렵다. 흉도 잘 보고 욕도 거하게 하는 맘 편한 사람이 제일이다.

 

 

  사람 사이에는 궁합이란 게 있다. 흔히 이런 경험을 한다. 어떤 사람과 만나면 나는 슈퍼에 갇힌 피의자이고, 상대는 투명 창을 사이에 둔 슈퍼 주인 같다는 느낌. 한 마디로 궁합 맞지 않는 관계일 때 이런 기분이 든다. 이 감정은 상대적이라 내가 피의자 역할일 때도, 상대가 피의자 역할 일 때도 있다. 물론 감정이입이 더 잘 되는 쪽은 아무래도 내가 피의자 입장일 때다. 왜냐면 잘난 슈퍼 주인 입장일 때는 사방 천지가 열려 있어 거리낄 게 없다. 하지만 코너에 몰린 피의자 입장 일 때는 사방이 벽이니 갑갑할 수밖에 없다. 당당하거나 잘났다고 생각할 때보다 수치심이 일거나 자괴감이 들 때 생각이 많아지는 건 당연하다.

 

 

  슈퍼 주인은 피의자를 감히 덮치지는 못하고 경찰을 부를 기회만 엿본다. 슈퍼 안 물건에 손댈 의향이 전혀 없던 피의자는 무슨 잘못을 한지도 모른 채 자책한다. 출구가 없다는 걸 알게 된 피의자는 자포자기한 채 급기야 슈퍼 안 물건에 눈을 돌린다. 진열된 에이스나 다이제 비스킷을 먹고, 나아가 냉장고안 박카스와 콜라마저 마셔버린다. 시간이 지나면 슈퍼 안의 모든 물건을 해치우고 만다. 슈퍼 주인이 경찰에 신고해봤자 때는 늦다. 쌀 다 퍼먹은 독안의 쥐가 주인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런 슈퍼 안팎의 느낌이 드는 관계일 때는 맹렬히 맞설 자신이 없으면 서서히 정리하는 게 맞다. 얼굴 맞대고 힘들어 하느니 덜 보고 자유로운 게 정신 건강에 좋다. 맞는 사람 만나기에도 우리 생은 너무 짧다.

 

 

 

 

   

2. 각질은 없애는 게 아니더라

 

  뒤꿈치가 갈라졌다. 부옇게 각질도 일었다. 찬바람 몰아치고 공기가 건조한 겨울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청 현상이다. 물기 부족한 뒤꿈치에는 부스스한 각질이 돋고 나뭇잎맥 같은 잔금이 서렸다. 심한 곳은 골이 푹 파였다. 뒤꿈치가 거칠어지고 지저분해지는 데는 짧은 시간만이 필요하다. 각질이 증식하지 못하도록 연화제 화장품만 발라주면 되는데 그조차 귀찮다고 방치하다 생긴 일이다.

 

 

  어릴 적 풍경 하나, 겨울 대중탕에는 둥근 돌이 비치되어 있었다.(원래 있었는지 개인이 준비해왔는지는 확실치 않다.) 중년의 엄마들은 물에 불린 뒤꿈치의 각질을 일차로 면도칼로 도려냈다. 그런 뒤엔 뒤꿈치를 돌에다 대고 문지르고 문질렀다. 고정 그라인더 역할을 하는 돌 위에서 뒤꿈치를 갈고(?) 나면 일주일은 개운할 것이었다. 하지만 다음번 목욕탕을 찾을 때 각질은 다시 증식하고 골은 더욱 파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엄마들은 다시 물에 불린 뒤꿈치를 돌 위에다 갈곤 했다. 뒤꿈치 갈기의 악순환이었다.

 

 

  젊었을 때는 엄마들의 그런 풍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건강한 청춘의 뒤꿈치에는 각질이 잘 생기지도 않았고 골이 패지도 않았다. 해서 생업에 전력투구하는 엄마들의 고단한 땀이당신들 발을 거칠게만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뒤꿈치가 망가지는 건 열심히 산 흔적이라기 보단 노화 현상의 하나라는 걸 알겠다. 그 시절 엄마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온한 일상이지만 내 뒤꿈치는 그때의 엄마들처럼 물기를 잃고 살비듬을 만들었다.

 

 

  게을러서 방치한 뒤꿈치에다 보습제를 바른다. 뒤꿈치 보호용 양말도 챙겨 신었다. 물기 품은 화장품은 하룻밤 새 발을 파고들어 온 발바닥이 부들부들해졌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점점 생기를 잃기 마련이다. 푸석해지고 거칠어진 그것들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달래서 함께 가야 한다. 그 옛날 엄마들이 면도칼로 도려내고 돌에다 문질렀지만 근본적으로 각질이 사라지진 않았다.

 

 

  맘에 들지 않는 무언가를 없앤다고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다. 없어진 것 같은 그것은 어느 순간 증식해 어김없이 우리 곁에 와있다. 각질은 잘라내고 갈아내야 할 쓰레기가 아니라 부드럽게 숨죽여 함께 가야할 동반자이다. 연화제를 바른 뒤꿈치가 부드러워진 건 각질이 떨어져 나가서가 아니라 그것을 부드럽게 진정시킨 화장품의 원리 덕이다. 부끄러움이나 회한이나 까칠함이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그게 내 것이 아니라고 도려내고 깎아낼수록 더 두툼한 삶의 각질이 내 안에 자리 잡는다. 불편하고 까칠한 것들도 없애는 게 능사가 아니다.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함께 가는 것이란 걸 부드러워진 뒤꿈치가 말해준다.

 

 

 

 

 

 

3.춥지 않아도 떨리는 것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 - 작품집『디어 라이프』의「아문센」단편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말이다. 앨리스 먼로의 그 선언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결핵 요양원의 교사 일자리를 찾아 나선 나는 토론토에서 시골로 향하는 기차를 탄다. 기차역에서 열한 살의 메리라는 수다쟁이 여자애를 만나고 그 아이가 요양원에서 일을 돕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교육적 의미 부여보다는 하루하루 시간 죽이기에 가까운 그곳이 지리멸렬하지만 숨통 틀 곳은 있다. 평판이 그다지 나쁘지 않은, 흉곽 수술을 전담하는 외과의사와 데이트를 하고 결혼까지 약속한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결혼 의사를 번복한다. 발목에 쇠사슬을 감은 심정으로 나는 그곳을 떠나는 기차를 타게 된다.

 

 

  기차 안에서 우연히 메리 일행을 만난 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고마울 뿐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감정에 충실한 나머지 그에게 달려가기 위해 기차를 내렸을지도 모른다. 의사에게 매달리지 않은, 수치심을 막는 계기가 되었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여러 해 동안 나는 언젠가 그와 마주치리라 생각한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토론토 북적대는 길에서 그와 재회한다. 별일 없는 것처럼 덤덤히 얘기하지만 그곳 아문센을 떠나올 때와 똑 같은 감정을 느낀다. 격한 울음도 없고, 내 어깨를 잡는 손도 없지만 멍한 상태의 나를 기차가 태우고 떠나올 때와 같은 감정을.

 

 

  사랑의 감정이 시간이 흘렀다고 없어지진 않는다. ‘팽팽하고 신경을 건드리는 기쁨’, ‘춥지 않아도 몸의 떨림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 그 한때의 사랑! 하지만 운명처럼 헤어짐 앞에서 어느 한쪽은 ‘이 날이 당신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 될 거라고 발뺌을 하게 되리라. 그렇다고 그 사랑이 잊힐 리가. 어느 날 문득 그가 내 앞에 나타난다면 집으로 돌아오던 그 기차안의 심정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건 없다. 변하는 건 현실이지 사랑했던 그 감정이 어떻게 변할까.

 

 

 

 

 

 

 

3. 통제라는 시선

 

  가끔 텔레비전 국제 뉴스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어느 지역에 주민들 소요 사태가 생긴다. 건물 곳곳에 방화가 일어나고 거리엔 부서진 집기들로 가득하다. 거리로 몰려나온 수많은 인파 사이에 꼭 남의 물건을 약탈해가는 군상들이 있다. 무단이나 불법으로 취한 그 물건들을 카메라 앞에 들이대며 마치 개선장군이나 되는 것처럼 희희낙락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평화와 안전이 보장된 나날들에서는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질서와 규범이라는 합의 체제 안에서 세상은 별 탈 없이 굴러간다. 하지만 그 합의 체제에 조그만 균열이 생기면 그 틈새를 비집고 인간의 비양심적 근성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고 만다. 위의 장면은 인간의 온전한 양심이 얼마나 유지, 발휘하기 어려운가를 말하는 좋은 예시가 되어준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통제’를  부르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다. 인간의 행동 양식이 양심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재해 앞에서, 또는 질서 유지가 전제된 공공 서비스에 혼란이 오면 인간 세상에는 약탈과 폭력이 급증한다. 사회적 합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상태에서 몇몇 집단들은 자신들의 사적 이익에 혈안이 되고 안달을 한다.

 

  들킬 염려가 적거나 처벌 받을 확률이 낮을수록 일탈 행위에 가담하는 횟수나 강도가 높아진다. 멀쩡한 배기통을 새것으로 갈아야 한다고 정비사는 거짓말을 하고, 실수로 거스름돈을 덜 줬다는 걸 알고도 가게 주인은 그냥 넘기며, 거리에 휴지를 버리고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다. 강력한 통제가 뒤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게 그 어떤 동물보다 통제나 강제된 규율을 싫어하는 게 인간이란 피조물인데, 막상 통제가 없거나 그것이 느슨한 경우에 양심 불량을 자청한다는 것이다. 양심만으로 우리 사회를 지탱할 수 없다는 걸 인간 스스로 인정하기에 통제라는 사회적 규율을 만들어 놓았다. 그것이 무너지는 순간 다시 양심 불량이 되는 인간 심리의 오묘함.

 

 

 

 

 

 

   4. 도덕적으로 보이고 싶을 뿐

 

  학교 때 가정 선생님이 말했다. 가구 파트 부분을 공부할 때였다. 침대의 길이는 180센티미터니 그것을 교과서 아랫부분에 적어 넣으라고.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부분이지만 혹시라도 대입시험에 나올까 첨가하는 형식으로 선생님은 참고 교재에 나오는 그 내용을 학생들에게 적어 넣기를 강요했다.

 

 

  몇몇 학생이 그 내용을 적지 않고 군소리를 했다. 아마는 이런 웅성거림이었을 게다. 키가 180센티미터 넘는 사람도 많은데, 왜 침대 길이를 180센티미터라고 규정하는 것일까. 설사 참고서에 그렇게 적혀 있더라도 선생님 선에서 그런 건 걸러버리는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시험에 이런 불합리한 내용이 나올 턱도 없는데. 뭐 이런 내용의 불만이었을 게다. 물론 침대 길이를 교과서 밑 여백에 적으라는 선생님 지시 내용을 따르지 않은 학생들은 손바닥을 맞았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수학 시간이면 선생님은 일명 ‘ 빡빡이’라 불리는 숙제를 검사했다. 연습장 앞뒤로 빡빡하게 몇 장씩 수학 문제를 풀어오는 것이었다. 역시 몇몇 학생들은 일찌감치 숙제를 포기하고 손바닥 맞는 길을 택했다. 나머지 숙제를 해온 학생들도 제 스스로 문제를 풀어온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습관처럼 참고서 풀이내용을 그저 앞뒤로 빡빡하게 베꼈을 뿐이다.

 

 

  이제 도덕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은 군사부일체에 대해 열변을 토하신다. 좀 부당하고 불합리하더라도 부모에 효도하고 스승을 존경하는 일이야말로 도덕적 인간이며, 나아가 애국하는 시민이라는 논리이다. 앞선 두 시간에 손바닥을 맞지 않은 대부분의 아이들은 뿌듯한 심정이 된다. 자기들도 가정선생님과 수학선생님이 불합리하고 부당하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선생님이 시킨 것은 그게 옳든 그르든 일단 하는 게 맞는다고 본다. 뭐 이런 취지에서 오는 뿌듯함이다.

 

 

  그들은 순간적이나마 손바닥을 맞은 친구들에 비해 훨씬 도덕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그날 아침 집단상담 시간에 그들의 개인적 가치를 물었을 때 그들은 스스로 손바닥 맞은 친구들에 비해 그다지 도덕적이라고 자부하지는 않았다. 어떤 불합리한 상황에 맞닥뜨리고 그것을 따랐을 때, 그것에 응원이 실릴 경우 우리는 스스로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포장하게 된다. 인간은 그저 비도덕과 도덕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인간적인’ 존재일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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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4-01-22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옳은 말하는 사람에 관한 어떤 사람이 그 사람 말이 전적으로 다 맞긴한데, 그 사람이랑은 관계맺기가 싫더라. 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어요. 그땐 옳은 말하는 사람이랑 왜 관계 맺기가 싫지 했는데, 피곤한거겠더라구요. 그냥저냥 넘기도 싶은 일들까지 시시콜콜 따지고드니 스트레스 받겠더라구요. 전 요새 말을 많이 아껴야겠단 생각을 많이 하는데도 여전히 잘 따지고, 여전히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고 들어요.ㅜㅜ 조심해야겠어요. 더더욱.

다크아이즈 2014-01-23 10:19   좋아요 0 | URL
ㅋ 저도 옳은 말 잘 안 하려고 노력해요.
옳은 말은 상대가 더 잘 알거든요. 알고 있는 그 말을 리바이벌하면 상대를 찌르는 것과 같잖아요. 잘 들어주려고 노력해요. 노력하는데도 물론 잘 안 될 때도 있어요.
(도저히 내 저질 인격으론 못 받쳐주는 상황이 발생할 땐) 조용히 접어요.
잘 들어주기, 공감하기 이것만 되어도...
해서 저는 제가 말해야 하는 쪽보다 제가 말을 들어야 하는 쪽 사람들이 더 편해요.
침묵은 싫으니 누군가 말은 해야겠고, 근데 상대가 말이 없으면 제가 해야하니 그런 상황이 너무 싫은 거예요. 해서 말 많고 잘하는 사람들 무리가 훨씬 제겐 편하답니다. 참고로 저도 말을 잘하고 많은 편이거든요. ㅋ

oren 2014-01-22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제목을 단 팜므 님의 이 글을 읽으니 "빈말은 친구를, 진실은 증오를 낳는다."는 말이 문득 떠오르네요. 이 말은 자신의 친구(테렌티우스)가 쓴 희곡 《안드로스에서 온 아가씨》에 나온다고 키케로가 알려주던데, 그 작품을 직접 읽어보려고 《테렌티우스 희곡선》을 샀더니 정작 그 책에는 엉뚱한 작품들만 여럿 담겨 있더군요.

다크아이즈 2014-01-23 10:36   좋아요 0 | URL
오렌님, 정말이지 어떨 땐 제가 슈퍼마켓에 갇힌 용의자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니까요. 아, 어쩐다, 어쩐다 이러면서 그 불편한 상황을 벗어나고플 때가 있어요.
빨리 집에 가서 잠자고 싶다, 이런 느낌 드는 상황 누구나 경험하잖아요.

빈말은 친구를, 진실은 증오를 낳아요. 확실해요. 현명한 테렌티우스에 더 현명한 키케로 할배 ㅋ
진실은 실은 상대도 알고 있잖아요. 그러니 잘 들어주는 게 더 필요하지요.^^*

Shining 2014-01-2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님 글은 정말 좋아요 매번 언제나 항상. 단단하고 온도가 분명한데도 보들보들한 느낌이 구멍위로 따뜻한 숨이 퐁퐁 올라오는, 그런 기분이 들어요. 오늘처럼 심란하고 울적한 날, 팜님의 글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요 :)

다크아이즈 2014-01-23 10:27   좋아요 0 | URL
샤이닝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ㅠ
제가 꼽은, 글 잘쓰는 십대 알라디너에 속하는 님께서 이런 말씀 하시면 기분 좋아지잖아요. ㅋ
특히 님은 섬세한 사람의 감정에 대해 묘파를 잘하시지요. 깜짝깜짝 놀라 밑줄 긋고 싶은 부분이 한두 번이 아니란 걸 제가 고백한 것 같은데요.
자주 알라딘 들러주시어요. 저도 노력할게요.^^*

페크pek0501 2014-01-22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굴 맞대고 힘들어 하느니 덜 보고 자유로운 게 정신 건강에 좋다."

"불편하고 까칠한 것들도 없애는 게 능사가 아니다.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함께 가는 것이란 걸 부드러워진 뒤꿈치가 말해준다. "

팜 님의 글은 저로 하여금 여러 번 읽게 만들어요. 아니 베껴쓰기를 하고 싶게 만들어요.
어느 정도로 공부하면 이런 필력을 보여 줄 수 있는 건가요?

저는 그런 역량이 없으니 요즘 글에 '재미'를 넣는 것에 치중하고 있사와요. ^^
많이 배우고 갑니다. ^^

다크아이즈 2014-01-23 10:34   좋아요 0 | URL
페크 언냐, 제가 좀 덜 떨어졌지요? 적극적 해결법을 모색해라, 가 아니잖아요.
무슨 말인고 하니 <힘들어 하느니 덜 만나라> 이런 요지는 심리학에서 치유하는 방법에 나오는 공식 같아요. 시간을 벌어라, 덜 만나라, 자신을 돌아봐라, 치유 되면 만남을 재개해라, 뭐 이런 식의 공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정도가 심하면 아예 안 만나면 되니 그건 더 쉬운 방법일까요?

글 역량하면, 필력하면 페크언닌데, 거기다 재미까지 섭렵하시면 페크님 블로그 난리 나는 거 아네요? 저야말로 언니 글에서 많은 걸 얻습니다. 서로 힘을 얻자요~~~^^*
 

 

 

 

   

 

  1. 구기고 구긴다

 

  왼발을 삐끗했다. 밤길, 움푹 팬 아스팔트 웅덩이를 미처 보지 못해 발을 헛디뎠다. 창피한 것도 잠시, 이런 생각이 스쳤다. 어둠 속 허방이야말로 신의 한수가 아닐까 하는. 밝을 때 길을 걷는 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웅덩이나 돌부리가 보이더라도 건너뛰고 돌아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길을 걷는 건 조금 다르다. 잘 보이지 않아 허방에 빠지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확률이 낮보다 높다.

 

 

  허방 자체는 밝으나 어두우나 그 자리 그대로 있다. 하지만 허방이 제 가치를 발하려면 인간이 그 속에 제대로 빠져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둠의 조건이 낫다. 헛디디지 않기 위해선, 환할 때보다는 눈조리개를 더 열고 무릎이나 발목 관절도 더 굽혀야 한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삐딱한 시선과 뻣뻣한 관절로 밤길 걷다가는 허방 앞에서 제대로 고꾸라지고 만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밝은 면이 펼칠 때는 앞도 잘 보여 뻣뻣한 발걸음이라도 허방을 쉽게 피할 수 있다. 하지만 흐린 날에는 장막이 눈앞을 가려 웅덩이를 피할 길이 없다. 그럴수록 무릎관절을 꺾어 조심스런 행보를 해야 한다. 고영민 시인의 말처럼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에 이를 수 있도록.

 

 

  미숙한 관용을 지닐수록 타인에게 엄격한 발소리를 내기 쉽다. 뻣뻣한 그 소릴랑은 제 속을 향할 때 제격이다. 허방 앞에서 고꾸라지는 건 내 무릎을 덜 굽혔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선 조심조심 부드러운 발걸음이라야 발밑 웅덩이를 제대로 보게 된다. 원칙보다 나은 건 상식이고, 상식보다 나은 건 이해이다. 원칙을 들먹이며 핏대를 올리기보다 이해할 수 있겠다며 손 맞잡는 일이 내겐 더 필요하다.  멋진 시가 적힌 뻣뻣한 책으로는 현실이란 똥구멍을 닦을 수 없다. 밑바닥 깊숙한 그곳을 닦기 위해선 그 종이 찢어 구기고 구겨야 한다. 마침내 부들부들해진 그것이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갈 수 있을 때 진짜 시의 날들을 맞는 거다.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고영민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 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 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치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 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 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2. 풍경을 읊는 재미

 

  문학적 눈썰미를 키우는 데는 사진만큼 좋은 것도 없다. 전혀 낯선 분야지만 맘에 드는 사진을 들여다보노라면 저 깊은 곳에서부터 파문이 일다 마침내 지층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일찍이 롤랑 바르트는 사진 읽기의 정서를  ‘스투디움’과 ‘푼크툼’으로 정의했다. ‘스투디움’ 은 사진에 대한 보편적 정서를 말한다. 예를 들어 일몰 사진을 보고 ‘햐, 기막힌 풍경이구나.’ 단순히 이렇게 느꼈다면 이는 스투디움에 속한다. 반대로 사진의 구름 모습에서 어릴 적 술이 취해 살아있는 뱀 대가리를 조여잡고 휘두르던 옆집 아저씨를 떠올리게 된다면 이는 푼크툼에 해당한다. 스투디움이 보편적 일반적인 정서라면 푼크툼은 특수성과 개별성의 요소를 지닌다. ‘나를 끊임없이 찔러대는 그 무엇’이 푼크툼의 정서이다.

 

 

  롤랑바르트의 이 두 개념을 문학에서의 알레고리와 상징의 개념에 대입해도 무리가 없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알레고리는 어떤 보편적 정서를 이끌어내기 위해 다른 것으로 빗댄 것을 말한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는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를 구별하기 위한 교훈으로 기능한다. 이 알레고리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비교적 명확하다. 이는 롤랑바르트가 사진에 대해서 말한 스트디움의 정서에 가깝다. 반면 상징은 좀 더 다의적이고 개별적이다. 김춘수의 ‘꽃’은 한 가지로 해석되는 게 아니다. 독자 개별자에게 가닿아 폐부 깊숙한 ‘찌름’을 유발한 채 저마다의 꽃으로 재탄생 된다. 롤랑 바르트 식 ‘푼크툼’이 되는 것이다.

 

 

  어느 시인이 말했다. 문학의 위치는 어디인가? 예술과 알레고리라는 양끝에서 예술 쪽에 가까운 게 문학이라고 했다. 문학을 이처럼 이분법으로 도식화할 수는 없겠지만 맞춤한 예시이긴 하다. 내 식으로 덧붙이자면 예술 옆에 괄호 열고 ‘상징’이라고 쓰겠다. 교훈을 일삼는 오른쪽과 완전한 예술인 왼쪽 사이에서 왼쪽으로 치우치는 자리에 문학이 있다. 이 문학이란 매혹적인 노동 가치를 위해 오늘도 눈썰미를 키우는 중이다. 나만의 푼크툼과 상징체계가 온전히 나를 찔러주기를 바라면서.

 

 

 

 

  3. 감정 동물 사람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단언컨대’ 내가 아는 한 이성적인 사람은 단 한 명도 만나 본 적이 없다. 인간이 동물과 다르게 이성을 지녔다는 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은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보기보다 허술하고 솔직하며 단순한 동물이다. 이성이란 갑옷으로 아무리 무장을 해도 부지불식간에 감정이란 빨간 내복이 삐져나오기 마련이다.

 

 

  짐승은 본능에 충실하고, 괴물은 본능을 관장한다. 그러면 그 중간인 인간은? 본능을 억제하는 순간적 능력이 뛰어난 동물일 뿐이다. 짐승은 아예 번민이 없고, 괴물은 타자로 하여금 번민을 유발할 때 인간은 그 번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본능 억제 능력이 영구적이 아니라 순간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성적 판단을 빙자할 뿐 결코 이성적인 동물은 못 된다. ‘감정’에 따라 자신의 이성을 정당화하는 조작적 능력이 뛰어난, 이성적인 체하는 피조물일 뿐이다.

 

 

  그 책임은 하느님도 면키 어렵다. 성경에서 묘사되는 하느님조차도 온전한 이성으로 세상과 인간을 판단하지는 않았다. 당신 기준으로 인간을 비롯한 세상 피조물들의 생사를 관장했다. 이성보다 당신의 감정에 따라 그 잣대를 들이댄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기준이란 것도 인간의 눈으로 봤을 때 결코 완벽히 ‘이성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당신 닮은 인간을 창조했다고 말한 하느님의 말씀은 솔직한 건지도 모르겠다.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우리는 흔히 ‘감정 섞지 말고 이성적으로 판단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이성적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이성이 항상 실천적 행동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이성적 판단은 결국 감정을 덜 섞는 타협으로 행동화될 뿐 이성 그 자체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한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착각한다. 나는 감정적이지 않으며 이성적인 판단을 유지하고 있다고. 어림없는 소리다.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는 결정적인 부분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라는 사실만 확인할 뿐이다. 행불행을 관장하는 인간적인 단어, 그 이름 감정!

 

 

 

  

 

 

4. 이해와 소통을 쉽게 말하기

 

  어려운 것을 쉽게 말하는 것도 능력이다. 인문학 열풍을 타고 여기저기 좋은 강좌들이 넘쳐난다. 더 이상 의식주 해결만이 목적이 아닌 세상을 살고 있다는 이 느꺼운 호사. 신나고 감사할 일이다. 내게 관심 있는 주제거나 입소문이 난 강사의 강의는 아무래도 눈여겨보게 된다. 바지런을 떨어 강연장을 찾을 때도, 메모했다가 텔레비전으로 시청할 때도 있다. 타이밍을 놓친 경우는 인터넷을 뒤져서라도 보게 된다. 내용에서 명약관화니 그 명성이 명불허전임을 맛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쩜 하나 같이 저리도 똑떨어지면서도 유쾌한 강의를 하는지.

 

 

  사실 인문학 강좌라 해서 특별히 어려운 철학적 이해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학문이나 학술을 위한 강의가 아닌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향한 목소리다 보니 그들은 될 수 있으면 쉽게 얘기한다. 왜냐하면 그 인문학이란 게 결국 ‘소통과 이해’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살이에 소통과 이해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학문적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실생활에서 나온 예시들만으로도 훨씬 공감도를 높일 수 있다. 사람답게 소통하고 이해하는 데는 인간 자체에 대한 경험적 사유가 필요한 것이지 거창한 이론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학자가 아니더라도 대중 강연에서 성공적 데뷔를 하는 일반인(?)들이 많다. 그 중 유명세를 타는 분 중에 김창옥 강사가 있다. 변변한 스펙조차 없이 ‘언변과 사람에 대한 이해’ 하나로 이 업계에 뛰어든 이다.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그의 미니 특강을 인터넷에서 찾아본다. 어떤 격조 높은 인문학 강좌 못지않게 울림을 준다.

 

 

  앞에서 말했듯이 인문학도 결국 소통과 이해와 공감에 관한 것이다. 그것을 깊게 파고들어 학문이란 미로로 이끄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고, 현실과 접목시켜 숨통 트게 하는 역할은 김창옥 같은, 이제는 전문 강사가 된 이들의 몫이 되어도 좋다. 노랫길 보다는 말길이 트여버린 그의 쉽고, 유머 깃든 말들의 향연 앞에서 너무 편안하게 ‘위로’라는 선물을 받아가는 게 어쩐지 미안해지는 하루다.

 

 

 

 

5. 케이크는 어떻게 나눌까?

 

  사람마다 처한 상황에 따라  정의의 개념은 다르다. 부자는 부자의 논리에 따라, 빈자는 빈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그것을 주장하게 된다. 그 모순적 상황을 없앤 정의의 원칙으로 존 롤스는 ‘원초적 입장’이라는 가상적인 상황을 설정했다. 이를 ‘무지의 베일(the vail of ignorance)’이라 한다.

 

 

  예를 들면 내가 거지일지 백만장자일지, 장애자일지 건장한 사람일지 등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제대로 된 정의의 원칙을 도출할 수 있다. 계급장도 떼고, 지갑도 없앤 채 발가벗은 상태라면 사람들은 자신이 처하게 될 최악의 상태를 면하기 위해서라도 공정한 룰을 만들게 되기 때문이다.

 

 

  원초적 입장에서 도출된 합리적 생각은 두 가지 정의의 원칙을 지녀야 한다. 존 롤스는 이를 평등의 원칙과 차등 분배의 원칙으로 나누었다. 모든 사람은 기본적 자유에 대한 동동한 권리를 누린다는 것이 첫 번째이고, 균등한 기회 속에서라면 사회적 ․ 경제적인 차등 분배는 인정될 수 있다는 게 두 번째 원칙이다. 단, 불평등의 전제조건으로 ‘최소 수혜자에게 이익이 보장될 것’을 강조한다.

 

 

  쉬운 예로 케이크를 어떻게 나누는 게 좋을까? 존 롤스의 답은 이렇다. “칼을 잡고 케이크를 나눈 사람이 가장 마지막에 남은 조각을 가지는 것이 정의다.” 칼자루 쥔 자가 케이크를 많이 가져가는 세상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가진 자들이 최소 수혜자, 즉 약자를 최우선으로 배려한다는 전제하의 차등 분배를 인정하겠다는 존 롤스의 이론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인간의 선택된 능력이나 조건이 우연의 산물이지 그 자체의 우월성을 말해주는 게 아니라는 게 존 롤스의 생각이다. 필연이 아닌 시대나 상황이 만들어준 ‘칼자루 쥔 자’는 자신의 케이크를 약자에게 좀 더 나눠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 그것이 인간사 가장 풀기 어려운 숙제이기도 하다. 정의와 분배의 문제 때문에 누군가는 차디찬 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찬바람 맞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게 현실이니.

 

 

 

 

6. 소크라테스의 질문

 

  소크라테스는 거리의 철학자였다. 아고라 광장에서, 지중해 바닷가에서, 또는 술집에서 사람들과 격렬한 토론을 할 때 애제자 플라톤은 스승의 말을 문자로 생중계했다. 그것이 플라톤의『대화편』이다. 철학을 골방 깊숙한 사색의 장에서 본격적인 격렬한 토론의 장으로 이끈 장본인이 소크라테스이다.

 

 

  왜 철학이 거리로 나왔을까. 소크라테스의 주장 요지는 이렇다. 참된 지식은 글이나 문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대화를 통해서만 전달된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무, 들판을 뛰어다니는 토끼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그건 더 이상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살아있는 말을 문자로 기록한다면 그것 역시 죽은 거나 마찬가지로 보았던 것이다. 질문과 대답이 자유롭지 못한 문자를 빌린 철학 방식은 소크라테스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플라톤이 스승의 말을 대화 형식으로 옮긴 건 스승을 따라 한 셈이다.

 

 

  소크라테스 철학을 흔히 대화법 또는 산파술이라 한다. 산파가 산모로 하여금 아이를 잘 낳을 수 있도록 돕듯이 소크라테스는 대화상대자가 깨달음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질문하는 형식을 취했다. 말하자면 소크라테스는 답을 내놓는 자가 아니라 오직 질문하는 자였다. 가르치려는 자가 아니라 질문으로써 답을 숨기는 자였다. 논리의 허점을 파고들어 대화 상대자가 제 모순에 빠져 우물쭈물할 때까지 묻고 또 물었다. 당혹감과 혼란에 빠진 상대방은 지친 나머지 소크라테스의 입만 바라본다. 결론을 듣기 위해서다. 하지만 답을 내놓을 리 없다. 찜찜한 미완의 숙제만 떠안은 채 뚜렷한 결론 없이 대화는 마감되고 만다.

 

 

  해결되지 않고 끝난 문제, 이것을 철학 용어로 아포리아(aporia)라고 한단다. 그리스어로 ‘통로가 없다’는 뜻인데 소크라테스 대화법을 설명하는 좋은 예가 되어준다. 통로 없는 그 지점은 종착점이 아니라 새로운 사유의 출발점이 된다.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집요하게 질문을 던진 이유도 이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대화의 막장까지 내려가 봐도 속 시원한 출구가 보이는 건 아니라는 것. 하지만 그 지점이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향한 출발점이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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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4-01-17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님 오랜만에 들러 정말 멋진 페이퍼에 넋을 빼고 읽었네요.^^

다크아이즈 2014-01-18 09:36   좋아요 0 | URL
뭐, 멋지진 않고 건조한 스똬일이죠 ㅋ
꿈섬님 무척 오랜 만이에요. 잘 살고 계시지요?

oren 2014-01-18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 님께서는 글을 한번씩 올릴 때마다 한 보따리의 책을 풀어놓으시는군요. ㅎㅎ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아포리아'를 통해 새로운 사유를 이끌어낸 이야기도 무척 흥미롭군요. 등산에 있어서도 그런 철학을 도입한 사람이 있었어요. '머메리즘'의 창시자이며 1895년에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밧(8,125m)에서 영원히 잠든 알버트 프레드릭 머메리가 주인공이지요.

그가 남긴 명언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등산은 시작된다."였어요.

다크아이즈 2014-01-19 02:07   좋아요 0 | URL
제 단상에서 보다시피 오렌님처럼 깊이 있게 다 다루는 건 아니고, (제 글이 짧은 글이니)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끼적이고 있어요. 그래서 오렌님이 대단하게 보이는 거랍니다.^^* 머메리즘 관심 가네요. 일단 검색부터 들어갑니다. ㅋ

oren 2014-01-19 13:53   좋아요 0 | URL
저는 머메리를 '산'에서 처음 만났어요. 2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요. 제가 등산학교에 입학해서 암벽 등반을 배울 때 '이론 수업' 시간에 선생님들로부터 그 분의 '등산 철학'을 배웠었지요. 그리고 그가 쓴 명저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도 그때 사서 읽었고요.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존 메이나드 케인즈가 쓴 명저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이라는 책을 읽을 때, 그 속에 그가 여러 훌륭한 논문을 쓴 '경제학자'로서 다시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는 수많은 옛시인들의 시를 줄줄 암송하던 사람이었고 여러 철학자들의 책을 두루 섭렵한 인물이었어요. 많은 사람들은 그저 그를 '불세출의 등반가'로만 알고 있지만요.

2014-01-19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19 0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19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캐릭터 소설 쓰는 법 - 개정증보판 오쓰카 에이지의 강의 시리즈 2
오쓰카 에이지 지음, 김성민 옮김 / 북바이북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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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쓰고 싶었다

 

 

 

  누구나 욕망한다, 그 무엇을. 하지만 아무나 욕망을 위해 제 실천력을 발휘하지는 않는다. 독한 자는 끝내 이기고, 어리바리한 이는 겨우 이런 글줄만 남긴다. 경험으로 미루어 보자면 실천을 방해하는 두 요인은 단연코 ‘의지박약’과 ‘의기소침’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 둘을 극복할 자신이 없으니 자기합리화하기에만 바쁘다. ‘나만 이러는 게 아닐 거야. 다른 사람들도 이 겨울 지날 때까지는 그냥 빈둥거릴 거야. 새봄이 오면 그 욕망을 행동화하면 되지 뭐.’

 

 

  개뿔! 당연히 오산이다. 세상은 넓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많다. 그들은 신나게 달린다. 그렇다고 앞뒤 돌아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앞과 뒤, 잘 맞춰가면서도 여유 있게 달린다. 의지박약이나 의기소침 같은 건 애초에 맘에 담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를 신뢰하고 제 미래를 확신한다. 머뭇거리며 시도하지 않았을 때의 실망감보다, 재지 않고 저질렀을 때의 성취감이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신기하게도 누구든 남의 결점을 찾아내어 지적하는 건 잘한다. 나는 쥐뿔도 모르는 필자들이 미스터리 호러 소설의 서평을 쓰면서, 이 플롯은 엉망이라며 아는 척 평하는 걸 읽을 때마다 혀를 차게 된다. 그런 지적이나 하는 것이 ‘평론’은 아니다. 비록 이야기 구성은 엉성할지라도 독자들이 읽게 만드는 힘이야말로 프로 작가의 역량이다. 독자이면서 장차 작가를 꿈꾸는 여러분은 절대 ‘이야기가 엉망이다’라느니 하며 잘난 척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보고 배워선 안 된다. 남의 작품의 ‘결점’은 자신의 기술을 갈고 닦는 데만 활용할 일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이라면, 이야기 구성을 치밀하게 설계해서 쓴다고 다 재미있는가 하면 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프로가 쓴 작품 중에도 도중에 옆길로 새거나 조역이면서도 주인공보다 더 눈에 띄는 캐릭터가 나오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138-139쪽

 

 

 

  들머리가 길었다. 그렇다. 내 최대의 욕망은 ‘글 한 번 잘 써보기’이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평생 과업은 이 하나밖에 없다. 돈도 많으면 원이 없겠고, 좋은 친구들도 곁에 있으면 더할 나위없겠지만 이 모든 걸 포기(?)하고서라도 글 한 번 제대로 쓸 수 있다면 바랄 게 없다는 생각을 하루에 몇 번씩은 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지 주제’를 제대로 안다. 스스로 얼마나 글을 못 쓰고 나아가 글쓰기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세상엔 글 잘 쓰는 사람들이 널렸다. 경상도 버전으로 ‘천지빼까리’다. 이곳 알라딘만 해도 그렇다. 어쩜 전문 작가들이 제 한몸 숨기고 싶을 정도로 내공을 가진 분들이 부지기수이다. (차마 한 분 한 분 거명을 하진 못하겠다. 내가 드나드는 서재는 한정 되어 있다. 그분들만 언급하면 아직 내가 발견하지 못한(?)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므로) 내 로망을 너무 가비얍게(!) 실천하고 있는 그런 분들을 보면 괴물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무작정 열심히 읽고 쓴다고 ‘잘 쓰게 되는 것’이 아님을 그들을 통해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열심히 쓴 적도 없지만, 쓴다 해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근원적 절망감이 나를 힘들게 한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잘 쓰도록) 태어난 사람이다. 그냥 읽고 쓰다 보니 어느날 그렇게 잘 쓰게 된 것도 있겠지만 원래 남들보다 ‘문리’가 잘 터지도록 하느님이 ‘만들어주셨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이야기의 기본 법칙 - 무언가 모자란다, 과제가 주어진다, 과제를 달성한다, 모자라던 것이 채워진다. -->주인공의 행동 원리가 일관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자주 나오는 건, 주인공이 ‘모자라는 것’(돈이든 사랑이든)을 손에 넣기 위해 ‘시련’에 도전하다가 ‘모자라는 것’이 무엇이었느지 주인공도 작가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176쪽

 

 

  다 제쳐두고 ‘결여’와 ‘결여의 해소’라는 핵심만 외워도 어떤 장면에 사용하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인상은 크게 변한다.

  이야기의 법칙을 익힐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을 가르쳐주자면 민담이나 옛날이야기를 무조건 많이 읽어라. 반지의 제왕의 세계관이 고전 문학이나 신화를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영화의 히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또한 ‘이야기의 법칙’에 관한 연구가 각국의 민담 분석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듯 민담이나 옛날이야기를 다독하는 것만큼 좋은 훈련은 없다. 179쪽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한다. 잘 쓰는 그들은 그들의 글에 만족할까? 남들이, 아니 내가 그들의 글을 인정하는 것처럼 그들 스스로도 잘 쓴다고 생각할까? 자만하지는 않겠지만 잘 쓴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을 것 같다. 자신의 글을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각종 공모전 당선작의 심사평 또는 소설이나 시집의 평론조차도 원글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쓰지는 못한다. 원작자 말고는 그 글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직 글쓴이만이 제 글에 대한 전부를 꿰차고 있다. 그 온전하게 이해되지 않는 글들이 좋은 글이 되려면 ‘이해와 공감’이라는 부분집합의 스펙트럼이 넓어야 한다. 소설에서라면 한 마디로 이걸 ‘재미’라고 뭉뚱그려 말 할 수 있겠다. 입체적이고도 구체적인 내용에서 독자를 설득하고 이해시킬 수 있을 때 그 글은 잘 쓴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자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글은 자신도 만족할 수 없다. 잘 쓴 글은 자신도 만족하고 독자도 이해시킨다. 일기장에 쓰는 글이 아니라 독자를 의식하는 글이라면 당연히 독자를 배려하는 글을 써야 한다.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한 글을 쓸 때 글쓴이는 자괴한다. 스스로 못 쓰는 사람이라고 좌절하고 만다. 그렇다고 자신을 만족시키는 모든 글이 잘 쓴 글도 아니다. 주변에 보면 자신이 쓴 글에 대해 무조건적인 신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솔직히 이런 부류가 부럽다. 오직 쓰는 데 희열을 느끼기 때문에 그들은 최선을 다해 쓴다. 잘 쓰고 못 쓰고는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비문투성이에다, 감성적 문투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열심히 쓴다는 자체에서 만족감을 느끼니 그들이 부러울 수밖에. 만족하는 그들은 스트레스가 없으니 자괴하는 나 같은 그룹보다는 빨리 글 고지에 닿기도 한다. 어느 작가가 말하는 걸 똑똑히 지켜봤다. ‘잘 쓰는 자가 아니라 오래 쓰는 자가 이긴다’고.

 

 

  자기긍정과 자기 확신, 그 대척점에 있는 의지박약과 의기소침. 이 모든 것은 습관의 산물이다. 동기부여가 확실한 사람일수록 전자의 신념을 행동으로 축적한다. 자연스레 성과도 높고 만족감도 높다. 반대로 불투명한 동기부여로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자일수록 후자에 얽매여 시간만 낭비한다. 내게 재능이 있을까. 난 왜 이 정도밖에 안 되지. 이런 쓸 데 없는 고민으로 스스로를 옭아맨다. 자신을 너무 잘 아는 게 무기가 되어 스스로를 찌른다.

 

 

 

 

  옛날이야기와 <센과 치히로>에서도 공통된 ‘이야기의 법칙’;을 찾을 수 있다. 옛날이야기나 민담을 읽다 보면 <센과 치히로>에서 본 에피소드들과 ‘어딘지 모르게 닮은 부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미야자키가 <센과 치히로>를 만들면서 상당한 양의 옛날이야기 책을 읽었다는 흔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어딘지 모르게 닮은 부분’을 ‘발견하는 힘’이 ‘이야기의 법칙’을 깨닫게 하며 나아가 자신의 작품 속에 응용하는 힘이 된다. (182)

 

 

 

  자고로 장기판이나 바둑판에서는 구경꾼이 판을 더 잘 읽는다.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들은 구경꾼을 의식하지 않는다. 판을 아무리 잘 읽는다 해도 구경꾼은 구경꾼일 뿐이니까. 하지만 자기연민에 갇힌 사람들은 스스로 구경꾼이 되어 버린다. 주관적 당사자이자 객관적 관찰자의 역할 그 둘을 감당하자니 힘겨울 수밖에 없다. 주관적 뚝심으로 제 욕망을 밀고 나가기보다 객관적 공정성을 스스로에게 먼저 묻게 된다. 욕망이 답보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욕망하는 자는 겸손하기 보다는 뻔뻔할 지어다. 스피노자의 통렬한 한 마디,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자신이 그걸 하기 싫다고 되뇌는 것과 같다.”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욕망하기 때문에 번민하는 이 아이러니한 일상! 제발이지 뻔뻔해지고 싶다. 글 한 번 잘 써보고 싶다!

 

  이처럼 ‘이야기의 문법’을 채용하는 기법은 쓰는 이의 오리지널리티를 뺏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성을 드러내는 공정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글쟁이가 되려는 사람은 ‘이야기’에도 ‘문법’이 있구나, 하고 어느 정도 의식하면서 남의 작품을 접할 필요가 있다. 문법을 너무 의식해도 말하기 힘들지만 때로는 의식하는 가운데 표현 기술도 향상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318쪽  - 비교하는 책 옛날 이야기 <노파 가죽>, 가와바타 야스나리 <이즈의 무희>,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여러분의 목적은 ‘이야기’의 ‘분석’이 아닌 ‘쓰기’이므로 필요 이상으로 ‘문법’을 의식할 필요는 없지만 ‘의식’해서 손해 볼 일은 없다. 아무튼 한번쯤 ‘이야기에는 문법이 있다’라는 관점을 가져보는 것도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루카스의 성공과 내가 만화 원작자로서 여기까지 왔다는 너무나도 스케일 다른 두 사례가 증명해준다. 3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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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01-10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최근에 읽은 어떤 책에서는 참으로 놀라운 '실용적 조언'을 해주기도 하더군요. 너무나도 스케일이 달라서 그 말이 우리를 다소 의기소침하게 만들지라도 우리는 또 그 말을 조언 삼아 자신의 글을 가다듬는 데 힘을 보탤 필요도 있지 싶어요.

* * *

실용적 조언

따라서 우리도 숭고한 표현과 고매한 사상을 요구하는 구절을 쓸 때는, 호메로스는 이것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플라톤이나 데모스테네스나 또는 역사에서 투퀴디데스는 이것을 어떻게 숭고하게 만들었을까 하고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것이 좋소. 왜냐하면 경쟁심은 이 위대한 분들을 우리 눈앞에 데려다줄 것이고, 그러면 그 분들이 우리의 생각들을 우리가 정해놓은 수준으로 끌어올려줄 것이기 때문이오. 나아가 호메로스나 데모스테네스가 여기 있었다면 나의 이 구절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또는 나의 이 구절이 그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을까 하고 자문해본다면 그것은 더욱더 그러할 것이오. 우리가 그러한 배심원들과 청중이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영웅적인 심사원들과 증인들에게 우리의 작품을 꼼꼼히 살펴보도록 맡긴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큰 경쟁이 될 것이기 때문이오. 그리고 그대가 "내가 이렇게 쓰면 후세 사람들이 모두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고 덧붙인다면 그것은 더 고무적일 것이오. 누군가가 자신의 생애와 시대보다 오래 지속될 것을 말하기를 두려워한다면 그의 마음속 구상들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하고 발육이 부전하여 유산되고 말 것이며, 후세의 명성의 날을 위하여 결코 완전하게 태어나지 못할 것이오. (310∼311쪽)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中에서

다크아이즈 2014-01-13 11:27   좋아요 0 | URL
와우, 명불허전 오렌님.
이렇게 제게 필요한 말씀으로 용기 주시다니.
오렌님 없는 알라딘은 눈 없는 겨울 태백산이야요.ㅋ

잘 쓰고 싶다는 번민 앞에서 언제나 무너지는 제 일상이라니ㅠ
자학하는 것도 지겹습니다.^^*

페크pek0501 2014-01-10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꽤 유익한 페이퍼입니다.

"민담이나 옛날이야기를 무조건 많이 읽어라."
- 셰익스피어의 작품들도 알고 보면 다 옛 이야기의 모방으로 씌어진 것이죠.
그래서 모방의 천재 작가라고 하죠.
"‘잘 쓰는 자가 아니라 오래 쓰는 자가 이긴다’고."
- 이 말은 저 같은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데요...
"뻔뻔해지고 싶다"
- 이건 제가 페이퍼로도 올린 적이 있는, 제가 그러고 싶은 말이에요.

오렌 님이 댓글로 옮겨 주신 <시학>의 글도 유익한 글이네요.
<시학>을 오래 전에 읽었는데, 다시 펼쳐 봐야겠어요. ^^

다크아이즈 2014-01-13 11:29   좋아요 0 | URL
이 책 실은 (장르)만화를 위한 입문서지만 꽤 건질 게 많더라구요.
순문학하는 사람들이 읽어도 전혀 손색없을 만큼 유익한 정보들이 꽤 있어요.
결국 뻔뻔해질 수 있는 자가 이기는 데 이것도 쉬운 게 아니에요.
페크 언니만 따라할게요. 늘 앞서가시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1-10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잘 쓰고 계시는 분이 잘 쓰고 싶었다고 투정부리면 얄밉습니다... 허허허...

다크아이즈 2014-01-13 11:36   좋아요 0 | URL
곰발님이 이 말을 했기 때문에 제게 위안이 안 된다는 것 아시지요? ㅋ
현재 알라딘에서는 님을 따를 자가 없다는 게 제 개인 견해입니다.^^*
알라딘 접수한 곰발님 새해에도 파이팅하시어요.

논리만 되느냐 감성도 돼, 문장만 되느냐 사유도 돼, 그렇다고 진중한 성찰만 있느냐 통렬한 해학도 있어...
모든 걸 갖춘 님의 글이 저는 참 좋습니다.

순오기 2014-01-10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엔 알라딘에 충실하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을 요렇게 풀어주시는군요!^^
실천력이 모자란 사람이라, 나를 위해서도 새겨둘게요.
좋아요~~ ^^

다크아이즈 2014-01-13 11:52   좋아요 0 | URL
마자요. 실천이 중요해요.
작심삼일을 삼일마다 실천하면 된다는데 이것도 어려우니ㅠ
서로의 파이팅을 이 연사 외칩니다~~

프레이야 2014-01-10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런 책이 다있군요. 공감! ^^

다크아이즈 2014-01-13 11:38   좋아요 0 | URL
은근 건질 게 몇 개 있었어요.
사길 잘했나 하면 것까지는 하는 정도...

노이에자이트 2014-01-15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을 많이 읽다보면 작법을 연구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해요.그러다 보면 세계의 민담이나 전설들의 이야기 전개 유형에도 관심이 가고요.저는 천일야화를 읽으면서 이 이야기를 현대소설에 써먹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다크아이즈 2014-01-17 10:41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님도 소설에 관심이 많군요.
결국 세계의 민담이나 전설의 새로운 버전이 '지금이 소설'이라는 데 공감합니다. 그 범주에 천일야화가 으뜸군이겠는걸요. 천일야화를 접수해야겠어요. 고맙습니다.ㅋ

2014-02-11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11 2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