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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소설 쓰는 법 - 개정증보판 ㅣ 오쓰카 에이지의 강의 시리즈 2
오쓰카 에이지 지음, 김성민 옮김 / 북바이북 / 2013년 10월
평점 :
잘 쓰고 싶었다
누구나 욕망한다, 그 무엇을. 하지만 아무나 욕망을 위해 제 실천력을 발휘하지는 않는다. 독한 자는 끝내 이기고, 어리바리한 이는 겨우 이런 글줄만 남긴다. 경험으로 미루어 보자면 실천을 방해하는 두 요인은 단연코 ‘의지박약’과 ‘의기소침’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 둘을 극복할 자신이 없으니 자기합리화하기에만 바쁘다. ‘나만 이러는 게 아닐 거야. 다른 사람들도 이 겨울 지날 때까지는 그냥 빈둥거릴 거야. 새봄이 오면 그 욕망을 행동화하면 되지 뭐.’
개뿔! 당연히 오산이다. 세상은 넓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많다. 그들은 신나게 달린다. 그렇다고 앞뒤 돌아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앞과 뒤, 잘 맞춰가면서도 여유 있게 달린다. 의지박약이나 의기소침 같은 건 애초에 맘에 담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를 신뢰하고 제 미래를 확신한다. 머뭇거리며 시도하지 않았을 때의 실망감보다, 재지 않고 저질렀을 때의 성취감이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신기하게도 누구든 남의 결점을 찾아내어 지적하는 건 잘한다. 나는 쥐뿔도 모르는 필자들이 미스터리 호러 소설의 서평을 쓰면서, 이 플롯은 엉망이라며 아는 척 평하는 걸 읽을 때마다 혀를 차게 된다. 그런 지적이나 하는 것이 ‘평론’은 아니다. 비록 이야기 구성은 엉성할지라도 독자들이 읽게 만드는 힘이야말로 프로 작가의 역량이다. 독자이면서 장차 작가를 꿈꾸는 여러분은 절대 ‘이야기가 엉망이다’라느니 하며 잘난 척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보고 배워선 안 된다. 남의 작품의 ‘결점’은 자신의 기술을 갈고 닦는 데만 활용할 일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이라면, 이야기 구성을 치밀하게 설계해서 쓴다고 다 재미있는가 하면 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프로가 쓴 작품 중에도 도중에 옆길로 새거나 조역이면서도 주인공보다 더 눈에 띄는 캐릭터가 나오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138-139쪽
들머리가 길었다. 그렇다. 내 최대의 욕망은 ‘글 한 번 잘 써보기’이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평생 과업은 이 하나밖에 없다. 돈도 많으면 원이 없겠고, 좋은 친구들도 곁에 있으면 더할 나위없겠지만 이 모든 걸 포기(?)하고서라도 글 한 번 제대로 쓸 수 있다면 바랄 게 없다는 생각을 하루에 몇 번씩은 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지 주제’를 제대로 안다. 스스로 얼마나 글을 못 쓰고 나아가 글쓰기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세상엔 글 잘 쓰는 사람들이 널렸다. 경상도 버전으로 ‘천지빼까리’다. 이곳 알라딘만 해도 그렇다. 어쩜 전문 작가들이 제 한몸 숨기고 싶을 정도로 내공을 가진 분들이 부지기수이다. (차마 한 분 한 분 거명을 하진 못하겠다. 내가 드나드는 서재는 한정 되어 있다. 그분들만 언급하면 아직 내가 발견하지 못한(?)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므로) 내 로망을 너무 가비얍게(!) 실천하고 있는 그런 분들을 보면 괴물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무작정 열심히 읽고 쓴다고 ‘잘 쓰게 되는 것’이 아님을 그들을 통해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열심히 쓴 적도 없지만, 쓴다 해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근원적 절망감이 나를 힘들게 한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잘 쓰도록) 태어난 사람이다. 그냥 읽고 쓰다 보니 어느날 그렇게 잘 쓰게 된 것도 있겠지만 원래 남들보다 ‘문리’가 잘 터지도록 하느님이 ‘만들어주셨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이야기의 기본 법칙 - 무언가 모자란다, 과제가 주어진다, 과제를 달성한다, 모자라던 것이 채워진다. -->주인공의 행동 원리가 일관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자주 나오는 건, 주인공이 ‘모자라는 것’(돈이든 사랑이든)을 손에 넣기 위해 ‘시련’에 도전하다가 ‘모자라는 것’이 무엇이었느지 주인공도 작가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176쪽
다 제쳐두고 ‘결여’와 ‘결여의 해소’라는 핵심만 외워도 어떤 장면에 사용하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인상은 크게 변한다.
이야기의 법칙을 익힐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을 가르쳐주자면 민담이나 옛날이야기를 무조건 많이 읽어라. 반지의 제왕의 세계관이 고전 문학이나 신화를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영화의 히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또한 ‘이야기의 법칙’에 관한 연구가 각국의 민담 분석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듯 민담이나 옛날이야기를 다독하는 것만큼 좋은 훈련은 없다. 179쪽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한다. 잘 쓰는 그들은 그들의 글에 만족할까? 남들이, 아니 내가 그들의 글을 인정하는 것처럼 그들 스스로도 잘 쓴다고 생각할까? 자만하지는 않겠지만 잘 쓴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을 것 같다. 자신의 글을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각종 공모전 당선작의 심사평 또는 소설이나 시집의 평론조차도 원글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쓰지는 못한다. 원작자 말고는 그 글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직 글쓴이만이 제 글에 대한 전부를 꿰차고 있다. 그 온전하게 이해되지 않는 글들이 좋은 글이 되려면 ‘이해와 공감’이라는 부분집합의 스펙트럼이 넓어야 한다. 소설에서라면 한 마디로 이걸 ‘재미’라고 뭉뚱그려 말 할 수 있겠다. 입체적이고도 구체적인 내용에서 독자를 설득하고 이해시킬 수 있을 때 그 글은 잘 쓴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자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글은 자신도 만족할 수 없다. 잘 쓴 글은 자신도 만족하고 독자도 이해시킨다. 일기장에 쓰는 글이 아니라 독자를 의식하는 글이라면 당연히 독자를 배려하는 글을 써야 한다.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한 글을 쓸 때 글쓴이는 자괴한다. 스스로 못 쓰는 사람이라고 좌절하고 만다. 그렇다고 자신을 만족시키는 모든 글이 잘 쓴 글도 아니다. 주변에 보면 자신이 쓴 글에 대해 무조건적인 신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솔직히 이런 부류가 부럽다. 오직 쓰는 데 희열을 느끼기 때문에 그들은 최선을 다해 쓴다. 잘 쓰고 못 쓰고는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비문투성이에다, 감성적 문투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열심히 쓴다는 자체에서 만족감을 느끼니 그들이 부러울 수밖에. 만족하는 그들은 스트레스가 없으니 자괴하는 나 같은 그룹보다는 빨리 글 고지에 닿기도 한다. 어느 작가가 말하는 걸 똑똑히 지켜봤다. ‘잘 쓰는 자가 아니라 오래 쓰는 자가 이긴다’고.
자기긍정과 자기 확신, 그 대척점에 있는 의지박약과 의기소침. 이 모든 것은 습관의 산물이다. 동기부여가 확실한 사람일수록 전자의 신념을 행동으로 축적한다. 자연스레 성과도 높고 만족감도 높다. 반대로 불투명한 동기부여로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자일수록 후자에 얽매여 시간만 낭비한다. 내게 재능이 있을까. 난 왜 이 정도밖에 안 되지. 이런 쓸 데 없는 고민으로 스스로를 옭아맨다. 자신을 너무 잘 아는 게 무기가 되어 스스로를 찌른다.
옛날이야기와 <센과 치히로>에서도 공통된 ‘이야기의 법칙’;을 찾을 수 있다. 옛날이야기나 민담을 읽다 보면 <센과 치히로>에서 본 에피소드들과 ‘어딘지 모르게 닮은 부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미야자키가 <센과 치히로>를 만들면서 상당한 양의 옛날이야기 책을 읽었다는 흔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어딘지 모르게 닮은 부분’을 ‘발견하는 힘’이 ‘이야기의 법칙’을 깨닫게 하며 나아가 자신의 작품 속에 응용하는 힘이 된다. (182)
자고로 장기판이나 바둑판에서는 구경꾼이 판을 더 잘 읽는다.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들은 구경꾼을 의식하지 않는다. 판을 아무리 잘 읽는다 해도 구경꾼은 구경꾼일 뿐이니까. 하지만 자기연민에 갇힌 사람들은 스스로 구경꾼이 되어 버린다. 주관적 당사자이자 객관적 관찰자의 역할 그 둘을 감당하자니 힘겨울 수밖에 없다. 주관적 뚝심으로 제 욕망을 밀고 나가기보다 객관적 공정성을 스스로에게 먼저 묻게 된다. 욕망이 답보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욕망하는 자는 겸손하기 보다는 뻔뻔할 지어다. 스피노자의 통렬한 한 마디,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자신이 그걸 하기 싫다고 되뇌는 것과 같다.”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욕망하기 때문에 번민하는 이 아이러니한 일상! 제발이지 뻔뻔해지고 싶다. 글 한 번 잘 써보고 싶다!
이처럼 ‘이야기의 문법’을 채용하는 기법은 쓰는 이의 오리지널리티를 뺏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성을 드러내는 공정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글쟁이가 되려는 사람은 ‘이야기’에도 ‘문법’이 있구나, 하고 어느 정도 의식하면서 남의 작품을 접할 필요가 있다. 문법을 너무 의식해도 말하기 힘들지만 때로는 의식하는 가운데 표현 기술도 향상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318쪽 - 비교하는 책 옛날 이야기 <노파 가죽>, 가와바타 야스나리 <이즈의 무희>,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여러분의 목적은 ‘이야기’의 ‘분석’이 아닌 ‘쓰기’이므로 필요 이상으로 ‘문법’을 의식할 필요는 없지만 ‘의식’해서 손해 볼 일은 없다. 아무튼 한번쯤 ‘이야기에는 문법이 있다’라는 관점을 가져보는 것도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루카스의 성공과 내가 만화 원작자로서 여기까지 왔다는 너무나도 스케일 다른 두 사례가 증명해준다. 3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