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 한 번의 연애

 

 

  지금 대한민국은 스토리텔링 열풍 중이다. 교육, 역사, 문화·관광, 심지어 수학이나 과학에서도 스토리텔링을 접목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고유 영역을 홍보하기에 바쁘다. 사람들 관심을 유도하고 나아가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이야기 형식보다 나은 게 없다. 순간의 미학인 방송 광고조차 등장인물과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 방식을 택했을 때 훨씬 더 구매욕을 자극한다고 하지 않는가.

 

 

  각 지방자치단체도 예외가 아니다. 저마다 지역 알리기와 지역 관광 활성화에 적극적이다. 그 방안으로 스토리텔링이 주목받게 되는데, 각종 보도에 따르면 포항 지역에도 이런 방식이 도입되었다. ‘문화스토리발굴사업’의 일환으로 일억원의 창작 지원금이 지원되었는데, 성석제의『단 한 번의 연애』는 그렇게 탄생한 포항 관련 소설이다. 이 소설이 많은 독자를 만날수록 포항에 대한 간접 홍보 효과 및 문화관광 콘텐츠로서의 활용 가치는 드높아질 것이다.

 

 

  고래잡이 딸을 사랑하는 해녀 아들 이야기가 중심축인데, 그 공간적 배경이 포항지역이다 보니 자연스레 간접 광고 효과를 바라게 된다. 구룡포에서 시작되는 그들의 행적을 따라 가다 보면 포항제철소가 나오고, 송도해수욕장이 보인다. 보경사를 휘돌아 마성까지 접수한 뒤 고래잡이와 먹거리를 살피다 보면 어느덧 순정한 한 남자의 연애사가 마무리 된다. 연애 소설, 후일담 소설, 풍물 기행기 등 세 박자가 어우러진 이야기로 읽힌다.

 

 

  한 발 주춤한 구성, 등장인물에 대한 일관성 부족, 스토리 전개에 대한 개연성 의문 등 몇 가지 독자로서 불만스러운 점도 있었다. 작가로서의 최대한 자유의지가 담보되었다 해도 스토리텔링이라는 부담감을 완전히 떨쳐내기에는 좀 더 숙성된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문화스토리와 작품성 두 마리 토끼를 다 바라는 건 독자로서 과한 욕심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작품의 호불호를 떠나 이 소설이 많은 독자들을 만나 특정지역에 대한 관심과 여행 욕구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건 시민으로서 당연한 소망이다.

 

 

 

2.  아브락사스

 

 『데미안』의 소주제는 ‘알 깨고 나오기’ 이다. 싱클레어가 보낸 새 그림 편지에 대한 답으로 데미안은 다음과 같은 쪽지를 준다.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신학교 시절 분신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 시절 헤세는 선과 악, 신과 악마, 밝음과 어둠 등 이 세상을 이분법적인 세계로 나누는 것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예민하고 조숙한 신학생은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아브락사스를 끌어들였다. 좋은 생각, 신에 대한 의지, 도덕적 잣대 등이야말로 세상을 트집 잡기 쉽고, 인간 내면을 옭아매는 파괴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악덕의 세계 역시 다른 한 세계이고, 그 또한 인간을 지배하는 한 관념으로 보았다.

 

 

  금기에의 내면적 모든 도전은 아브락사스로 불릴 만하다. 저급한 욕망과 성스런 영혼 따위로 인간을 나눌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경직된 사고를 대신해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계를 아브락사스에 담아내고자 했다. 젊은 음악가 피스테리우스를 만나 싱클레어는 그 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주고받는다. 피스토리우스가 음악을 하는 건 단지 음악은 윤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싱클레어,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은 편할 테지만 우리가 가는 길은 험난할 거야. 그래도 한번 가보지 않을래?’ 이렇게 아브락사스를 알리는데 급급한 피스토리우스 역시 낡은 세계에 지나지 않았다. 싱클레어로서는 자신의 내면을 알아가는 게 더 급선무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와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

 

 

  싱클레어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실행하고자 했다. 길들여진 훈계, 윤리적 죄책감 등에 쌓여 있는 한 아브락사스는 영원히 만날 수 없다. 밝고 어둠, 신과 악마, 좋고 나쁨 이 모든 이분법을 버리고, 신인 동시에 악마인 세계를 향해 제 영혼의 날개를 단 모든 것들이 싱클레어에게는 아브락사스였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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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1-29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석제의 소설이 탄생된 배경이 흥미롭네요. 저도 포항은 참 많이 가본 곳이에요. 고모님도 계시고 외사촌도 살고 또 고향친구들도 몇몇 살고 있고요. 포항제철소, 구룡포, 죽도시장뿐만 아니라 동해시장도 가봤고 군대 갔다가 휴가 나왔을 땐(1984년쯤) 북부해수욕장에서 해수욕도 즐겼던 곳이 '포항'이에요. 언제 기회되면 저 소설 좀 읽고 저도 옛추억을 좀 더듬어 보고 싶네요.
* * *
"호머(Homer), 초서(Chaucer), 그리고 세익스피어(Shakespeare) 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전달 매체가 무엇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스토리와 그 스토리를 전달하는 기술이었다." (마이크 아이스너, 월트 디즈니 前 CEO)

다크아이즈 2013-01-30 11:13   좋아요 0 | URL
어쩐지 오렌님은 동해안 쪽하고 인연이 깊으실 것 같았어요.
고향 친구들까지 포항을 접수했다니 산업도시라서 전국구? 이런 생각이 ㅋ

스토리와 전달하는 기술 - 이게 안 되니 글쓰기가 늘 어려운 것인걸요.

페크pek0501 2013-01-29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의 제목에 끌려서 왔어요. 제목도 내용도 좋네요.
간단명료해서 깔끔한 글 그리고 핵심을 찌르는 글...

제가 4년 동안 서재활동을 했는데 생각해 보면 1년간 글이 잘 써지던 시간들이 있었어요.
글감도 저절로 생겼고 글이 잘 풀렸어요. 그리고 나선 글이 잘 써지지 않더라고요. 요즘도요...
팜 님을 보니 요즘 글이 잘 써지는 시간 같아요. 저처럼 1년으로 끝나지 마시고
계속 이어지시길... 저는 님에게서 배우고 자극을 받겠습니다.ㅋㅋ

아, 오래전에 읽은 데미안을 보니 새롭네요. 지금 읽으면 다른 느낌이겠죠?

다크아이즈 2013-01-30 11:19   좋아요 0 | URL
페크언냐, 이래뵈도 저 서재질 무려 7년이 넘었다는 ㅠ
들락거릴 때보다 방치하는 기간이 훨씬 길어서 탈이지요.
이 짓도 언제 휴면기에 들어갈지 몰라요.
서재 좋은 점이 하고 싶을 때 하고, 말고 싶음 말고. 흐흐~
먼지 좀 쌓여도 금세 탈탈 털고 돌아올 수 있다는 게 매력이에요.
애인 같으면 진작에 패대기 당했겠지만, 개인서재는 충실한 애완견 같아서 안심이 됩니다.^^*

글을 쉽게 쓰는 편이 못되어서 늘 힘들어합니다. 페크언냐처럼 고수들 보면 신기하고,존경스럽고,본받고 싶고... 그런 복합적인 생각이 드는 걸요.^^* 쓰는 동안은 가열차게 따라갈게요.^^*



이쁘니꼬꼬얌 2013-02-26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늘 <단한번의 연애>를 읽고 리뷰를 찾아보다가 들르게 되었습니다. 맨 윗분의 댓글처럼 저 역시 소설의 탄생 배경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포항의 일본마을, 구룡소, 목장..장소들이 반복해서 나오니까 나중에는 정말 궁금해지더라구요. 암튼 글 잘읽었습니다. 리뷰 정말 잘쓰시네요 부럽습니다.
 

 

 

 

 

 

  군중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대의에 따라 움직인다. 남들처럼 하면 적어도 손해날 일은 없으니 묻어가는 편리를 택한다. 인터넷 공간을 예로 들자. 같은 이슈라도 댓글이 없는 쪽보다는 댓글이 한 번 달리기 시작하는 쪽에 더 많은 댓글이 달린다. 또, 첫 댓글이 호의적이면 부정적일 때보다는 훨씬 많은 다른 댓글을 유도한다. 원글 자체보다 다른 댓글의 움직임에 따라, 쓰고자 하는 댓글이 영향을 받기도 한다. 마치 빨간 불인데도 바쁜 누군가가 횡단보도를 건너게 되면 너도나도 우루루 따라하게 되는 것과 같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통상 시장의 95퍼센트는 모방자이며, 단지 5퍼센트만이 창조자’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5퍼센트의 창조자가 되는 위험을 감수하느니 95퍼센트의 모방자로 살아가는 편리를 택한다. 가끔 도저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창조자에 의해 세상은 뒤집어지기도 하는데, 중요한 건 그 혁명의 성공 뒤에도 여전한 나머지 95퍼센트의 모방자가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 물리적 상황이든 심리적 상황이든 대의를 좇을 확실한 군중이 있다는 것.

 

 

  인간의 이런 심리적 상태, 즉 다른 사람의 행동을 따라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믿는 경향을 ‘사회적 증거의 법칙’이라고 한다. 사이비 종교가나 정치꾼은 군중 심리를 잘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도덕이나 경건을 가장한 흰소리로 옳고 그름이 제각각인 군중들을 선동할 수 있는 것도 이 군중 심리를 백 번 활용하기 때문이다. 특정한 날 예언이 실패해 천국행을 가지 못해도 여전히 신도 수는 줄어들지 않고, 청문회 때마다 차마 들어줄 수 없는 비열함의 꼼수가 넘치는 얼굴이 쉼 없이 등장하는 것도 군중보다는 언제나 창조자가 한수 위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의 원인에는 군중의 우매함도 있지만 특유의 ‘귀차니즘’도 한몫한다. 체념의 친구가 된지 오랜 군중은 웬만해선 별다른 자극을 받지 못한다. 군중의 피로지수가 높을수록 위대한 창조자를 만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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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월하기로 한다고?
    from so 2013-01-27 10:46 
    팜므느와르님이 쓰신 글을 어느새 아껴 읽고 있는데 그분의 글은 신문의 칼럼 같은 느낌을 자주 받는다. 신문과는 달리 주로 밤에 그분의 글을 읽게 되는 데 그날 하루 나의 일상을 지켜보고 쓰신 글 같은 글을 만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거나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맑아지거나 어제처럼 "어머 어쩜~~~나도 그 경험 했어요."라며 막 수다를 떨고 싶은 느낌이 들게 하는데 아침에 눈 뜨자마자 팜님의 글을 다시 읽고 간지러움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사람처럼 먼
 
 
라로 2013-01-27 0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오늘 남편의 페이스북을 보면서 첫 단락에 올리신 글에 대한 얘기를 했었어요!!ㅎㅎㅎ
아니 어제구나. 암튼
그래서 저도 요즘은 알라딘에서 댓글이나 추천에 초월하기로 했어요. 예전에는 전전긍긍햇었거든요,,ㅎㅎㅎㅎ
그런데 딱 꼬집으신 것처럼 댓글이나 추천의 의미가 그렇게 크지 않은 거에요. 하지만 저는 반대로 열심히 댓글달고 추천하는 사람이 이 일년동안 되어보자고 결심했어요. 뒤돌아보니 제가 받은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하지만 저역시 비겁한 군중임에는 어쩔 수 없다요.ㅠㅠ
늘 정곡을 꼭 찌르는 간결하면서 조리있는 글 감사드려요.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면서,,ㅋㅋㅋ

2013-01-27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7 1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7 2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3-01-28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생활에서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지나치는데,
인터넷은 흔적이 남으니 아주 확연히 인간의 행동 패턴이 보여서 재미있어요.
뭐 가끔, 냉소적이 되기도 하고, 인간의 한계에 실망하기도 하지만요.

개인과 군중이 다르다는 점은, 제게 항상 불안을 안겨주었던거 같아요.
학교 다닐 때 교우 관계가 원활하지 못한 점도 작용하는거 같구요,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 관련 심리학 책을 읽으면 별별 생각이 다 나거든요.

다크아이즈 2013-01-29 10:26   좋아요 0 | URL
달여우님 한 마디씩에 저 가끔씩 쫄아요.^^* 전공자답게 제 안을 다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ㅋ 그래서 더 의지하게 되기도 하구요. 제 행동 패턴도 어느 순간 읽으셨을 테니 전 달여우님 앞에선 무조건 무장해제요.~~ 잘 봐주시어요. 헤헤.

개인과 군중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페르소나 없는 사회적 관계란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견딜만큼의 가면이 이 사회를 유지하는 힘이 아닐까 싶어요. 따라서, 심하면 안 되지만 뒷담화 역시 적당한 정신 건강을 위한 필요악이라 생각해요. 개인과 군중의 괴리감을 해소하는 최후의 언덕 같은 것이 되어줄 때가 있잖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9-01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찌 한 다리 건너 건너 가다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요걸 침묵의 나선이론이라고 하더라고요. 마침 제 블로그에 쓴 글이 있어서 복사했습니다.


침묵의 나선 이론



침묵의 나선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궁금하신 분은 직접 찾아보시라.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사회적 찬반 양론이 갈리는 블로그 글에 첫 번째 방문자는 덧글'을 달 때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최초의 의사 표시자'이기 때문이다. " ㉠ 페루애, 병신 새끼 ! 한심하다, 한심해 ! " 두 번째 방문자 또한 첫 번째 방문자와 의견이 같다면 첫 번째 덧글에 동조하는 글을 남길 것이다.. " ㉡ 맞아, 꼴에 사내랍시고 으르렁거리기는... 병신 ! " 그런데 세 번째 방문자는 1,2번 째 방문자와는 의견이 전혀 다르다. 하지만 그는 두 번째 방문자와 같이 덧글로 1,2번째 방문자의 의견을 반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자신의 의견은 소수이기 때문에 그냥 덧글을 안 달고 나간다. 쓸데없는 충돌을 피하려는 경향 때문이다. 첫 번째 침묵이다.



네 번째 방문자도 덧글들에 반대하지만 세 번째 방문자의 심리 때문에 침묵한 후 그냥 나간다. 이번엔 다섯 번째 방문자가 들어온다. 그는 덧글의 주장에 동조한다. 그래서 세 번째 덧글을 단다. " ㉢ 페루애 남미 새끼 ! 너희 나라로 돌아가 색휘야 ! "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첫 번째 올라온 덧글의 주장이 대세'가 되게 되어 있다. 비록 그들의 의견에 반대하는 침묵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많아도 그것은 소수가 되고 오히려 숫자가 더 작은 소수가 다수가 되는 경향이 있다. 조중동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전송할 것이다. ■ 조선일보 : 페루애, 알고 보니 씹선비. 네티즌에게 무차별 난타당해 ! ■ 중앙일보 : 점입가경, 페루애 여론에 뭇매 ! ■ 동아일보 : 페루애 사태 일파만파, 제 2의 마녀사냥 되나 ? 1%의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경향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1%의 소수가 다수가 되는 이유는 재벌들이 언론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워에서 파업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천문학적이라며 파업할 때마다



재벌 언론에서 그 기사를 송출하면 그 메시지가 다수의 목소리인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자신의 의견이 소수일 때는 소수 의견을 감추고 다수 의견일 때에만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심리가 바로 침묵의 나선 이론'이다. 쉽게 말하면 인간은 머릿수에 민감하다는 결론이다. 침묵하는 쪽수가 다수이고 1%의 목소리가 소수라고 해도 결국 보여지는 데이터'는 소수가 대세가 된다. 왜냐하면 침묵은 데이터 값 제로이기 때문이다. 한 번 흐름을 타기 시작하면 무섭다. 혹시 < 종이배 이론 > 이라고 들어보았는가 ? 아마 들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방금 내세운 가설 이론이기 때문이다. 동력 없는 종이배는 물살의 방향에 따라 떠다니게 되어 있다. 나는 이 침묵의 나선 이론'을 비단 대중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국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확대하면 의외로 재미있는 이론이 바로 침묵의 나선 이론'이다.



몇 년 전에 포장마차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포장마차 주인이 요즘 경기가 최악이라며 장사가 되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는 소리'를 들었다. 설상가상 포장마차 하나가 더 늘어서 장사가 더욱 안 된다는 소리도 했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매출의 20%를 올릴 수 있는 간단한 아이디어를 알려드릴 테니 안주 서비스'로 달라고 했다. 리트리버의 귀처럼 축 늘어진 귀가 토끼처럼 쫑긋 세워졌다.



- 뭐요, 총각 ?

- 의상실 가셔서 마네킹 몇 개 얻어오세요. 아님 고물상 가서 사오시던가 말이죠. 흠흠...

- 마네킹 ? 그게 매출 하고 무슨 상관이람, 총각 ?

- 저녁이 되면 십오촉 알 전구 불 켤 때 같이 마네킹을 의자에 앉히면 매출 20% 상승 보장합니다.

- ??!

- 사람들 심리가 포장마차 안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보다는 안에 사람이 있는 곳에 가려는 심리가 있잖아요.



인간은 시각적 동물이다. 포장마차 안에, 식당 안에 손님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은 부정적 정보'를 제공한다. 반면 사람들이 북적거리면 긍정적 정보를 제공한다. 여기서 식당 안에 손님은 음식의 맛에 동조하는 덧글 하나'처럼 보인다. 두 사람은 두 개의 덧글이고, 세 사람은 세 개의 덧글이 된다. 결국은 대세가 된다. 이처럼 시각 정보는 맛 정보만큼 중요하다. 그러므로 텅 빈 상태로 손님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마네킹을 세워 두면 밖에서 보기엔 네다섯 명의 손님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다는 노하우가 필요하다. 당신이라면 어느 쪽을 찾아가겠는가 ? 하여튼 결론은 서비스 안주'를 받았다는 훈훈한 이야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지금부터다. 내 블로그 글에 반대 의견은 하나도 없고 찬성 의견만 주르륵 달렸다고 해서 내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은 그냥 침묵의 나선 이론에 따라서 침묵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자신의 사진을 걸어둔 포스트'에 달린 덧글에 < 예뻐요 > 라는 멘트가 포도처럼 주저리 주저리 달렸다고 해서 자신이 정말 예쁘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수백 명의 반대자들은 그냥 일베의 < 민주화 버튼 >이 없어서 침묵하고 있을 뿐이니깐 말이다. 그것은 " 식사하셨어요 ? " 라고 묻는 상투적 질문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잠시 매력 있다는 말에 혹한 적이 있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라는 단순한 성의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여자에게 매력 없는 놈은 글이나 지식으로 유혹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잘생긴 놈은 얼굴로 승부한다. 글 잘 쓰는 남자, 믿지 마라. 팔 할이 병신이다.

다크아이즈 2013-09-11 08:26   좋아요 0 | URL
와우, 곰발님... 어쩌면 요런 귀에 쏙쏙 들어오는 말만 내뱉으실까요?
곰발님을 능가할 알라디너는 현재 없사옵니다. 흐흐~~
본문 자체야 완전 공감이구요.


잘난 척하지 않고 자신을 객관화하려는 그 태도까지 곰발님의 매력.
곰발님이 소위 연예인 삘나게 잘 생겼다면 결코 지금의 곰발님이 못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미인들 접수하러 가느라 ㅋ
여기 알라딘에 오래 머물러계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MBC 아빠 어디가 - 강    ‘아빠어디가’, 박명 

 

1.   지아야, 지아야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은 웃음을 줄 때가 많다. 드라마는 습관이 되지 않아 지겨워서 못 보고, 텔레비전 영화는 작정하고 보는 것이 아니면 잠이 와서 포기하기 일쑤이다. 그나마 예능과 다큐멘터리에 쉽게 빠지는데, 예능은 일상의 스트레스를 날리는데 그만이고, 다큐멘터리는 경험하지 못하는 여러 상황에 대한 의문을 해소해주니 즐기게 된다.

 

 

  요즘 신설된 예능 <아빠, 어디가>덕에 웃다가 울다가 한다. 큰 즐거움이다. 아이들과 아빠들이 오지 마을 자연 속에서 여러 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우선, 등장하는 아이들이 하나 같이 순진무구하다. 어린이의 외관만 가졌을 뿐, 성인 연기자 저리가랄 정도의 탤런트 기질을 뽐내는 여타 프로그램 아이들과는 좀 다르다. 시청자로서는 돈 들이지 않고 청량 음료를 마시는 기분이랄까.

 

 

  얼굴만 귀엽고 천진한 게 아니라 캐릭터 자체가 살아있다. 이유 있는 떼를 쓰다가도 의젓한 형 노릇을 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매사에 긍정적인 마인드로 넉살좋은 붙임성을 보여주는 아이도 있다. 청아한 모습으로 새침한 듯 무심한 매력을 발산하는 여자애가 있는가 하면, 애틋하고 난만한 모습으로 그 애를 따라다니며 보호하려는 아이도 있다. 그 어떤 가공된 연기 없이 아이들은 즉흥적이고, 순간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그 중 윤후는 어린아이가 내뿜을 수 있는 좋은 캐릭터를 다 가지고 있다. 개구쟁이이면서 의젓하고, 호기심이 많으면서도 배려가 깊다. 이성에 대한 숨길 수 없는 관심이 있으면서도 남자애들 사이엔 의리도 있다. 매순간마다 ‘지아야, 지아야’를 외치며 여자애를 챙기는 윤후를 보면서 시청자들은 한 때 저마다 순수했을 어린 시절을 돌이키게 된다.

 

 

  살다 보면 세상이 동심을 잃게 하겠지만, 그 고운 천성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룻밤 기획으로 끝날 게 아니라 그 순수함이 시청자에게 통할 때까지는 살아남는 프로그램이 되어줬으면 한다. ‘지아야, 지아야’ 외치는 투명한 동심이 큰 위로가 되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2. 까뮈와 사르트르

 

 

  까뮈와 사르트르가 결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견해차이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주의에 다가간 사르트르는 공산주의와의 연합을 꾀했지만, 공산당에서 탈퇴한 뒤 도덕적 대원칙에 충실했던 까뮈는 사르트르의 이러한 노선에 염증을 느낀다. 사르트르는 어느 순간 까뮈를 ‘완전히 참을 수 없는 사람’으로까지 여기게 되었다. 까뮈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간직할수록 자기 자신을 그와는 반대의 이미지로 규정하려 애썼다. 한 때 카뮈를 열렬히 부추겨주었던 사르트르를 생각한다면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까뮈가 스승 그르니에의 저서『섬』재판 서문에서 ‘의식은 예외 없이 다른 의식의 죽음을 추구한다.’고 사실상 사르트르를 지적했을 때, 사르트르의 입장은 희곡『닫힌방』을 빌려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다.’고 맞받아치는 격이 되었다. 까뮈는 진리에 반대되는 것들에 많은 지식인들이 매혹되었다는 것을 사르트르에 빗대 경고한 것이었고, 빈정대기 좋아하는 사르트르는 이런 까뮈를 인정할 수 없었다. 추도사에서조차 사르트르는 ‘당신은 완전히 참을 수 없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나와 가까운 사람’이라고 까뮈에겐 모독적인 태도를 취하기에 이른다.

 

 

  노벨문학상을 거부한 사르트르의 표면적 이유는 그 상이 냉전의 도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었지만 다분히 까뮈를 의식한 점도 있었을 것이다. 7년 앞서 까뮈가 ‘정의보다 앞에 있는 내 어머니’라는 수상 소감으로 그 상을 받고 상금으로 집을 산 것과는 대조적이다. 겉으로 보기엔 알제리의 가난한 집안 출신인 까뮈와 파리의 유복한 가정 출신인 사르트르 딱 그만큼의 다른 행보이다.

 

 

  개인적으로 까뮈 쪽에 정감이 더 간다. 하지만 누가 더 옳은가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당대의 석학 둘이 이런 논쟁을 벌일 수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갈등하는 맞수의 삶이 더할 나위 없이 인간적이라는 데 묘한 위안과 쾌감을 느낀다. 위대하나 평범하나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갈등하며 성장하는 존재인 것을.

 

 

 

                                                      

 3. 우리나라 여자의 사회적 이름은 언제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여성들은 공식적인 이름이 없었다. 하층민부터 상류층 여성까지 필요에 의한 호칭·애칭·별호 등은 있었겠지만, 결혼하면 이마저도 출신 마을에 빗댄 택호나 아이의 호칭에 붙어 누구 엄마로 불렸다. 상류층에서는 친정의 성씨를 따라 박씨 부인, 김씨 부인 등으로 지칭되는 것이 통례였다. 정약용의 부인은 홍씨 부인이고, 유희춘의 부인은 송씨 부인이 되는 식이다. 송씨 부인 호가 ‘덕봉’이라 해서 그게 공식적인 이름인 것은 아니었다. ‘송덕봉 부인’이나 ‘송덕봉 씨’로 불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구한말 재야 지식인 황현이 남긴『매천야록』에 이러한 여성의 이름과 사회 진출에 관한 부분이 나온다. 을사오적 중의 한 명인 이지용의 아내가 일본 사교계에 진출을 하면서 ‘이홍경’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이 여성 이름의 시초라고 황현은 적고 있다.

 

 

  국운이 기울면서 상류층 부인들도 저항파와 친일파로 나뉘기 시작했다. 나중에 독립운동을 돕게 되는 우국부인회와 이지용 부인 등이 소속된 친일부인회가 그 둘이다. 남편 따라 일본 나들이를 가면서 원래 홍씨였던 이지용의 부인은 자신의 성을 버리고 일본식으로 남편 성을 따라 ‘이홍경’이란 이름을 썼다. ‘예부터 우리나라 부녀자들은 이름을 쓰지 않고 다만 아무개 씨라고만 했다. 이때 왜국 풍속을 본받아 저마다 자기 이름을 써서 사회에 진출했는데, 이홍경에서 시작된 것이다.’라고 매천야록은 기록하고 있다.

 

 

  이홍경은 품행 문란으로 매국하는데 앞장섰다. 일본 실무자들과 상대를 바꿔가며 연애를 했다. 질투를 느낀 하기하라에게 혀를 깨물리자, 장안 사람들은 ‘작설가’(嚼舌歌)를 지어 비웃었다. 기왕 여성으로서 제 이름이 불리길 원했다면 좀 더 당당한 것이 그 시발점이었으면 좋으련만, 하필이면 매국의 사교장에서 그 첫 이름이 쓰였다니 아쉽기만 하다. 당시 여성 일각이 제 이름을 찾으려 맹렬히 나선 것은 응원할 만하나, 친일의 수레에 그 불명예의 이름을 싣게 되었으니 안타까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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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01-25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존철학하면 까뮈와 사르트르가 생각나는데,
실은 두 사람 사이가 그랬군요... 크... 이런.... 문득요,
상담을 하는 분들은 다들 배려하고 말하고 싸우지도 않고 타인을 이해할거라 생각되잖아요,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거든요. 자신의 내담자에게야 노력하지만,
다들 똑같은 인간일 뿐인지라 상담하는 분들끼리도 계파가 다르면 다투기도 하고
따르는 이론이 다르면 다시 안 보기도 하고 머 그런 일도 있다 하는데....
그 생각이 나요. 다들 사람 맞네요, 그죠~

다크아이즈 2013-01-26 00:07   좋아요 0 | URL
사람 다 똑 같은 건 맞는 것 같아요. 크~
훈련되고, 단련되고, 절제하고, 인내할 것 같은 상담가들끼리도
갈등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했어요. 그래도 일반인들하곤 그 과정이나
방식이 조금은 다를 거라 생각해요. 좀 더 많이 생각했다가 터질 것 같은 느낌.
내담자들께 자제심을 발휘하는 것만 해도 어딥니까. 그래야 안심하고 상담할 수 있잖아요.
달여우님 덧글 덕에 상담료 안 내고 치유 받는 느낌 월매나 많은데요. 다른 알라디너 분들도 그런 걸 느낄 걸요.^^*



프레이야 2013-01-25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한다는 남녀사이에도 정치적 입장이 기본적으로 다른 경우 힘든 거 같아요. 울집은다행히 그렇진 않은데 그런 경우 있더라구요. 까뮈와 사르트르, 이런 비하인드스토리가 있었군요.
매천야록 재미있어보여요. 눈독 들여요. 매국노 여인 이홍경은 그럼 원래 홍홍경이었던거에요? 아님 이름까지 바꾼거에요? 중요한 건 난 팜님 글이 참 좋아요^^

다크아이즈 2013-01-26 00:14   좋아요 0 | URL
프레님 부부 정치적 성향이 같다니 부럽부럽^^*
전 달라도 넘 달라서 분위기 험악할 때 많아요.
이젠 꾀가 나서 제가 자제합니다. 긁어 부스럼 만드는 쪽이 저였으니ㅠ

매천야록 - 일부분에 저런 얘기 나온거지 내용은 너무 단편적이라 많이 건질 건 없어요. 당시의 풍문, 기사, 경험 등을 짧고, 넓게 기록한 책이라 두서가 없어요.

프레님, 이홍경은 아예 이름이 없었겠지요. (아명이 홍경일 수도 있겠네요) 당시 전통을 따랐다면 <이씨 부인>으로 불렸겠지요. 크~

2013-01-26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7 0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13-01-26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카뮈가 더 좋아요. 좀 더 인간적이라 느껴져서 그럴까요???
근데 그당시 신여성이라고 불리웠을 이홍경이라는 여성이 품행문란으로 매국하는데 앞장을 섰다니 매국을 하는 길도 여러가지군요.ㅠㅠㅠ

다크아이즈 2013-01-27 02:40   좋아요 0 | URL
그쵸, 그쵸? 유치하다고 놀려도 저도 까뮈가 더 좋아요.
이홍경 여사는 시대가 낳은 희생양 쯤이라고 해줍시다. 누군들 그 시대에 태어나면 옳은 행동만 할 수 있었을까요?
역사 관련 책들 읽으면 지금이 얼마나 태평성대인가(!?)를 실감할 정도로 처절하고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그나저나 나비님 잘 견디시는 것 맞지요?
소식 궁금하지만 올라올 때까지는 꾹 참을게요. 힘내시어요^^*

순오기 2013-01-28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후와 지아 이야기를 다른 프로에서 귀동냥하고 어제는 일부러 찾아서 보았어요.
시간을 잘 챙기지 못해서 끝부분만 조금 봤지만...그래도 행복했어요.
우리도 한때 저렇게 해맑은 아이였구나, 부모에게 기쁨이었겠구나~ 생각하면서요!^^

다크아이즈 2013-01-29 10:29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도 보셨군요. 아래께도 보면서 저 아이들이 <붕어빵> 아그들처럼은 안 되어야 할텐데 하는 생각했어요. 그런 시점이 오는 날 이 프로는 접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답니다. 넘흐 아그들이 사랑스럽더군요. 므흣한 미소와 때론 박장대소로 지켜봤어요. 전 저럴 때 어땠을까 생각하면서요. 크~~
오늘도 상큼한 하루 맞이하시어요. 순오기님^^*
 

 

 

 

 

 

 

 

  사랑은 어떻게 올까? 대개 찰나적이고 때론 서서히 다가오는 게 사랑이다.

 

  캠퍼스 느티나무 그늘에서 희고 긴 손가락으로 무심하게 고스톱 패를 돌리는 여학생의 특이함에 남학생은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도무지 그 긴 손가락과 고스톱과 무심한 얼굴이 왜 떠오르는지도 모르는, 그 부조리한 상황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며 단박에 사랑에 빠져버리는 것. 거기엔 이유도 조건도 없다. 반면에 몇 년 간 알고 지내던 여학생이 서서히 여자로 보이기도 한다. 취업과 결혼을 해야 하고, 부모님과 2세 걱정도 하는 시기가 맞물려 사랑이란 감정이 자연스레 싹튼다. 이유와 조건이 충분한 사랑이다.

 

 

  사랑의 흔한 두 예를 들어 보았다. 그 중 사랑의 염결성에 더 가까운 쪽은 찰나적 사랑이다. 적확하고 조리 있는 눈을 가진 자는 즉흥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흐린 눈으로 봐야 첫눈에 반할 수 있다. 계산 없는 사랑은 ‘사랑을 하는 단계가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후자의 필요에 의한 사랑도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 시작은 ‘찰나적’ 사랑만큼 순도 높은 건 아니다.

 

 

  불교 용어 중에 돈오(頓悟)와 점오(漸悟)라는 말이 있다. 수행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단박에 깨치는 것이 돈오이고, 수행의 공을 쌓아 서서히 깨닫는 게 점오이다. 사랑으로 견주자면 돈오의 사랑이야말로 순수한 사랑의 시작이라 할 만하다. 흔히 나이 들도록 사랑 한 번 못해 봤다고 말했을 때 이는 돈오의 사랑을 못해봤다는 의미이다. 점오의 그것은 타협의 의미가 깃들어 있기 때문에 그 시작이 돈오의 사랑만큼 강렬하지는 않다.

 

 

  돈오든 점오든 그 사랑의 시작은 창대하나 그 끝은 제 각각이다. 하늘과 부처가 아닌 이상 그 사랑의 유지와 책임은 오롯이 당사자들에게 있다. 한 눈에 반하든, 서서히 반하든 서로 물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과정에 필요하다. 깨지기 쉬운 사랑의 속성 앞에서 갈등하는 갈대로 스치듯 스미듯 살아가는 게 필부필부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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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01-21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님, 오랜만에 인사 드려요. 제가 좀 뜸했지요.^^
돈오와 점오에 대해 생각하게 해 주시네요.
사랑의 본질도 과정도 중요하겠어요.
태그의 두번째, 심오한걸요. 죽은사랑도 견디는 것.
도대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견디지 않아도 될 사항은 뭘까요? 없나봐요.ㅎㅎ
1월도 중반으로 들어섰는데 날마다 행복하게 건강하게 잘지내고 계실거라 믿어요.

다크아이즈 2013-01-24 21:59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보면 더 반갑잖아요.
그래도 자주자주 알라딘에 들러주세요.
며칠 정신 없다 저도 이제야 들렀어요.
프레님 글 보면서 공감하고, 녹음 작업도 막 상상했네요.^^*

견디는 것도 사랑이려니 하고 내공을 쌓고 있는 중입니다. 흐흐~~
그래도 사랑은 돈오지, 점오 따위가 무슨 사랑이려니 하는 맘도 여전하지요.
돈오적 사랑은 거짓을 모르지만 그 끝을 장담할 수 없고, 점오적 사랑은 구라를 연마하는 과정인데, 그게 또 짠한 거 같아요.

2013-01-22 15: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4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수수가 붉어졌네

 

 

  모옌이 노벨문학상을 받지 않았다면『홍까오량 가족』을 사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 ‘붉은 수수밭’의 강렬한 인상이 모옌의 원작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에 호기심을 느꼈다. ‘홍까오량’은 ‘붉은 수수’를 뜻하는데, 이 책 1,2장「붉은수수」및「고량주」부분이 영화의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영화는 어디까지나 감독 ‘장이모우’와 배우 ‘공리’를 위한 것이었다.

 

 

  관람객 입장에서 원작가인 모옌까지 주목하기는 쉽지 않다. 원작을 떠난 영화는 그 자체로 독립된 예술이기를 원하고, 개봉 당시는 모옌이 전 지구촌 작가도 아니었다. 웬만한 이슈가 되지 않고는 영화의 원작가를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모옌은 행운 작가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이란 쾌거 하나로 장이모우나 공리 못지않게 ‘붉은수수밭’ 하면 떠오르는 인물로 거듭나게 되었으니.

 

 

  연작 중편들로 이루어진『홍까오량 가족』은 항일 무장 투쟁, 애달픈 민중들의 삶, 한 가족의 애증사 등이 일렁이며 붉어가는 수수밭 사이로 교차 편집되어 있다. 읽을수록 울림이 큰 것은 우리의 일제강점기 역사 또한 그 작품 속 궤도와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서걱대는 수수잎에 손가락이 베일만큼, 익어가는 고량주에 온몸이 취할 만큼 아련하고 강렬한 이야기지만 이야기를 풀어놓는 방식은 조금 아쉬웠다.

 

 

  소설가를 이야기꾼과 문장꾼으로 나뉜다면 모옌은 전자에 속했다. 할 말이 넘치다 보니 구성이 산만해져버렸다. 중복되는 에피소드와 반복되는 묘사 때문에 피로함이 몰려왔다. 생생하고 사실적인 표현도 너무 잦으면 독자는 지루해진다. 몸과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자유롭게 쓰는 작가이다 보니 곁가지치기를 덜한 것 같다.

 

 

  목마르다고 끊임없이 두레박질만 할 수는 없다. 효율적인 두레박질은 목을 충분히 축일 때까지 만이다. 선명한 이야기에 분명한 호흡을 기대한 독자라면 책 두께가 조금 더 얇아도 좋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홍까오량 가족』은 이야기와 구성을 동시에 바라는 걸 버린 뒤에야 더 잘 몰입하게 되는 작품이다.

 

 

 

2. 괜한 걱정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을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많은 시간을 걱정하는데 허비한다. 건강 문제부터 시작해 밑도 끝도 없는 온갖 걱정을 달고 산다. 하지만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건 없다. 오히려 걱정한다는 그 걱정 때문에 골치만 아플 뿐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 역시 걱정이 많다. 가족들이 좀 더 건강하기를 바라고, 자식들 미래가 평탄하기를 원하며, 경제적으로 힘들지 않기를 욕망한다. 얼마나 현실적 이기심으로 가득한 걱정인가.

 

 

  알고 보면 모든 걱정은 괜한 짓거리이다. 그 말 속엔 미래적 함의가 숨겨져 있다. 오지도 않은 일을 가불해서 생각하는 것이니 비생산적인데다 영혼을 갉아먹는 행위이다. 과거를 말할 때 우리는 걱정이란 표현을 쓰지는 않는다. 과거는 ‘후회’는 할 수 있을지언정 ‘걱정’할 대상은 아니다. 걱정이란 오롯이 현재 이후의 다가오지 않은 시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일어나지도 않은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지나지 않으니 얼마나 쓸모없는 짓인가.

 

 

  한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걱정을 끌어안고 산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끊임없이 되새기고, 법륜 스님의 강의를 열심히 쫓아다니고, 혜민 스님의 어록을 쉴 새 없이 밑줄 그어도 걱정에서 해방되기는 어렵다. 담백하게 자신을 버리는 게 쉽지는 않다. 어느 누군들 자유를 얻기 위해 팽팽한 삶의 밧줄을 쉽게 놓아버릴 수 있을 것인가. 갖춘 종교인의 경지를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걱정이란 일상의 부담이 많이 줄어들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하는 걱정은 타인에겐 사소하게 보일 때가 더 많다. 제 삼자에게 설득시키지 못하는 걱정은 걱정으로서의 값어치가 없다. 걱정은 부정을 전제하는 것이지 긍정을 사는 행위는 아니다. 우리가 걱정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걱정을 이만큼 하고 있다’ 는 자기 보상 심리 때문일 것이다. 소심한 자가 쓸데없이 걱정할 때 적극적인 사람은 보란 듯이 행동한다. 걱정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날들을 꿈꾼다.

 

 

 

* 홍까오량 가족 - 번역조차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종결어미 방식에 일관성이 없다. 번역의 기본일 터인데.

                         이유없이, 설명없이 내레이터의 종결어미 방식이 왔다갔다 한다.

                         원작에서 그랬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 ~습니다, ~지요, ~했다 >등이 적절한 설명 없이 마구 혼재되어 있다.

                         내가 보기에 존칭 종결어미 다 버리고 그냥 <~했다>로 통일하는 게 가장 깔끔한 것 같다. 원작가의 의중이 있었다면 부연 설명이 필요했던 부분이다. 구성이 산만한데 번역까지 정돈이 안 되니 독자도 갈팡질팡. 별 것 아닌데, 문학과지성사는 까다로운 독자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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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01-22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과 지성사, 라면 꽤 괜찮은 출판사인데요...

걱정에 대한 글에 공감해요. 저만 해도 쓸데없는 걱정을 할 때가 있어요.
"제 삼자에게 설득시키지 못하는 걱정은 걱정으로서의 값어치가 없다."
- 이 말을 제게 하고 싶어요. ㅋㅋ

다크아이즈 2013-01-24 22:12   좋아요 0 | URL
페크님, 원작이 어떤지 모르겠는데, 여하튼 부연 설명없이 종결어미를 통일하지 않은 부분은 일차적으로 번역자께서 설명 좀 해줬음 좋겠어요. 거기다 큰 의미를 두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더 큰 문제지요.

넘 쓰잘데기 없는 걱정을 달고 사는 저인지라 채찍질하고 싶었어요^^*

마녀고양이 2013-01-22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타인을 설득하지 못하는 걱정이 과연 걱정이 아닐지에 대해서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 생각으로 인해, 나 자신을 더 괴롭히게 되는게 아닐까 생각도 들구요.
아마 타자도 동일한 고민을 가진다면, 그것이 자신의 고민이라면 고민할 거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듭니다. 나의 타당화는 내가 해야지, 타인이 해주어야만 한다면 너무 힘들어요...

음, 제가 횡설수설하는 거 같아요.... 실은
바탕 화면이 제 컴터에서는 진한 감빛으로 나와서,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팜언니~ ^^

다크아이즈 2013-01-24 22:17   좋아요 0 | URL
달여우님 말씀 들으니 그렇네요. 열심히 그 쪽으로 연구하시다 보니 절로 깊은 생각이 따라오는 걸까요?^^*
<내가 걱정되니 걱정하는 것>이지, 남들이 <그 걱정은 걱정 아니다>라고 말한다고 그 말에 휘둘릴 필요는 없다, 그 말씀이지요? 이렇게 명쾌한 답을 얻다니? 그럼 걱정한다고 스스로 넘 쫄지 않아도 되지요? 감사합니다.홍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