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아야, 지아야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은 웃음을 줄 때가 많다. 드라마는 습관이 되지 않아 지겨워서 못 보고, 텔레비전 영화는 작정하고 보는 것이 아니면 잠이 와서 포기하기 일쑤이다. 그나마 예능과 다큐멘터리에 쉽게 빠지는데, 예능은 일상의 스트레스를 날리는데 그만이고, 다큐멘터리는 경험하지 못하는 여러 상황에 대한 의문을 해소해주니 즐기게 된다.
요즘 신설된 예능 <아빠, 어디가>덕에 웃다가 울다가 한다. 큰 즐거움이다. 아이들과 아빠들이 오지 마을 자연 속에서 여러 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우선, 등장하는 아이들이 하나 같이 순진무구하다. 어린이의 외관만 가졌을 뿐, 성인 연기자 저리가랄 정도의 탤런트 기질을 뽐내는 여타 프로그램 아이들과는 좀 다르다. 시청자로서는 돈 들이지 않고 청량 음료를 마시는 기분이랄까.
얼굴만 귀엽고 천진한 게 아니라 캐릭터 자체가 살아있다. 이유 있는 떼를 쓰다가도 의젓한 형 노릇을 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매사에 긍정적인 마인드로 넉살좋은 붙임성을 보여주는 아이도 있다. 청아한 모습으로 새침한 듯 무심한 매력을 발산하는 여자애가 있는가 하면, 애틋하고 난만한 모습으로 그 애를 따라다니며 보호하려는 아이도 있다. 그 어떤 가공된 연기 없이 아이들은 즉흥적이고, 순간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그 중 윤후는 어린아이가 내뿜을 수 있는 좋은 캐릭터를 다 가지고 있다. 개구쟁이이면서 의젓하고, 호기심이 많으면서도 배려가 깊다. 이성에 대한 숨길 수 없는 관심이 있으면서도 남자애들 사이엔 의리도 있다. 매순간마다 ‘지아야, 지아야’를 외치며 여자애를 챙기는 윤후를 보면서 시청자들은 한 때 저마다 순수했을 어린 시절을 돌이키게 된다.
살다 보면 세상이 동심을 잃게 하겠지만, 그 고운 천성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룻밤 기획으로 끝날 게 아니라 그 순수함이 시청자에게 통할 때까지는 살아남는 프로그램이 되어줬으면 한다. ‘지아야, 지아야’ 외치는 투명한 동심이 큰 위로가 되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2. 까뮈와 사르트르
까뮈와 사르트르가 결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견해차이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주의에 다가간 사르트르는 공산주의와의 연합을 꾀했지만, 공산당에서 탈퇴한 뒤 도덕적 대원칙에 충실했던 까뮈는 사르트르의 이러한 노선에 염증을 느낀다. 사르트르는 어느 순간 까뮈를 ‘완전히 참을 수 없는 사람’으로까지 여기게 되었다. 까뮈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간직할수록 자기 자신을 그와는 반대의 이미지로 규정하려 애썼다. 한 때 카뮈를 열렬히 부추겨주었던 사르트르를 생각한다면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까뮈가 스승 그르니에의 저서『섬』재판 서문에서 ‘의식은 예외 없이 다른 의식의 죽음을 추구한다.’고 사실상 사르트르를 지적했을 때, 사르트르의 입장은 희곡『닫힌방』을 빌려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다.’고 맞받아치는 격이 되었다. 까뮈는 진리에 반대되는 것들에 많은 지식인들이 매혹되었다는 것을 사르트르에 빗대 경고한 것이었고, 빈정대기 좋아하는 사르트르는 이런 까뮈를 인정할 수 없었다. 추도사에서조차 사르트르는 ‘당신은 완전히 참을 수 없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나와 가까운 사람’이라고 까뮈에겐 모독적인 태도를 취하기에 이른다.
노벨문학상을 거부한 사르트르의 표면적 이유는 그 상이 냉전의 도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었지만 다분히 까뮈를 의식한 점도 있었을 것이다. 7년 앞서 까뮈가 ‘정의보다 앞에 있는 내 어머니’라는 수상 소감으로 그 상을 받고 상금으로 집을 산 것과는 대조적이다. 겉으로 보기엔 알제리의 가난한 집안 출신인 까뮈와 파리의 유복한 가정 출신인 사르트르 딱 그만큼의 다른 행보이다.
개인적으로 까뮈 쪽에 정감이 더 간다. 하지만 누가 더 옳은가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당대의 석학 둘이 이런 논쟁을 벌일 수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갈등하는 맞수의 삶이 더할 나위 없이 인간적이라는 데 묘한 위안과 쾌감을 느낀다. 위대하나 평범하나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갈등하며 성장하는 존재인 것을.
3. 우리나라 여자의 사회적 이름은 언제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여성들은 공식적인 이름이 없었다. 하층민부터 상류층 여성까지 필요에 의한 호칭·애칭·별호 등은 있었겠지만, 결혼하면 이마저도 출신 마을에 빗댄 택호나 아이의 호칭에 붙어 누구 엄마로 불렸다. 상류층에서는 친정의 성씨를 따라 박씨 부인, 김씨 부인 등으로 지칭되는 것이 통례였다. 정약용의 부인은 홍씨 부인이고, 유희춘의 부인은 송씨 부인이 되는 식이다. 송씨 부인 호가 ‘덕봉’이라 해서 그게 공식적인 이름인 것은 아니었다. ‘송덕봉 부인’이나 ‘송덕봉 씨’로 불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구한말 재야 지식인 황현이 남긴『매천야록』에 이러한 여성의 이름과 사회 진출에 관한 부분이 나온다. 을사오적 중의 한 명인 이지용의 아내가 일본 사교계에 진출을 하면서 ‘이홍경’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이 여성 이름의 시초라고 황현은 적고 있다.
국운이 기울면서 상류층 부인들도 저항파와 친일파로 나뉘기 시작했다. 나중에 독립운동을 돕게 되는 우국부인회와 이지용 부인 등이 소속된 친일부인회가 그 둘이다. 남편 따라 일본 나들이를 가면서 원래 홍씨였던 이지용의 부인은 자신의 성을 버리고 일본식으로 남편 성을 따라 ‘이홍경’이란 이름을 썼다. ‘예부터 우리나라 부녀자들은 이름을 쓰지 않고 다만 아무개 씨라고만 했다. 이때 왜국 풍속을 본받아 저마다 자기 이름을 써서 사회에 진출했는데, 이홍경에서 시작된 것이다.’라고 매천야록은 기록하고 있다.
이홍경은 품행 문란으로 매국하는데 앞장섰다. 일본 실무자들과 상대를 바꿔가며 연애를 했다. 질투를 느낀 하기하라에게 혀를 깨물리자, 장안 사람들은 ‘작설가’(嚼舌歌)를 지어 비웃었다. 기왕 여성으로서 제 이름이 불리길 원했다면 좀 더 당당한 것이 그 시발점이었으면 좋으련만, 하필이면 매국의 사교장에서 그 첫 이름이 쓰였다니 아쉽기만 하다. 당시 여성 일각이 제 이름을 찾으려 맹렬히 나선 것은 응원할 만하나, 친일의 수레에 그 불명예의 이름을 싣게 되었으니 안타까울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