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중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대의에 따라 움직인다. 남들처럼 하면 적어도 손해날 일은 없으니 묻어가는 편리를 택한다. 인터넷 공간을 예로 들자. 같은 이슈라도 댓글이 없는 쪽보다는 댓글이 한 번 달리기 시작하는 쪽에 더 많은 댓글이 달린다. 또, 첫 댓글이 호의적이면 부정적일 때보다는 훨씬 많은 다른 댓글을 유도한다. 원글 자체보다 다른 댓글의 움직임에 따라, 쓰고자 하는 댓글이 영향을 받기도 한다. 마치 빨간 불인데도 바쁜 누군가가 횡단보도를 건너게 되면 너도나도 우루루 따라하게 되는 것과 같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통상 시장의 95퍼센트는 모방자이며, 단지 5퍼센트만이 창조자’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5퍼센트의 창조자가 되는 위험을 감수하느니 95퍼센트의 모방자로 살아가는 편리를 택한다. 가끔 도저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창조자에 의해 세상은 뒤집어지기도 하는데, 중요한 건 그 혁명의 성공 뒤에도 여전한 나머지 95퍼센트의 모방자가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 물리적 상황이든 심리적 상황이든 대의를 좇을 확실한 군중이 있다는 것.
인간의 이런 심리적 상태, 즉 다른 사람의 행동을 따라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믿는 경향을 ‘사회적 증거의 법칙’이라고 한다. 사이비 종교가나 정치꾼은 군중 심리를 잘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도덕이나 경건을 가장한 흰소리로 옳고 그름이 제각각인 군중들을 선동할 수 있는 것도 이 군중 심리를 백 번 활용하기 때문이다. 특정한 날 예언이 실패해 천국행을 가지 못해도 여전히 신도 수는 줄어들지 않고, 청문회 때마다 차마 들어줄 수 없는 비열함의 꼼수가 넘치는 얼굴이 쉼 없이 등장하는 것도 군중보다는 언제나 창조자가 한수 위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의 원인에는 군중의 우매함도 있지만 특유의 ‘귀차니즘’도 한몫한다. 체념의 친구가 된지 오랜 군중은 웬만해선 별다른 자극을 받지 못한다. 군중의 피로지수가 높을수록 위대한 창조자를 만나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