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 하고 가요”

 

익숙한 종이컵에 미인 이나영이 화사하게 웃고 있는 길쭉한 비닐 막대의 상단이 뜯겨져 나가며 내용물이 투척된다. 정수기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이 부어진 후 포장지는 커피를 저어주는 최후의 임무를 수행하고 쓰레기 통으로 직행한다.

 

날이 추워진 까닭에 이런 온기 나는 액체는 반갑다. 조금씩 나눠 마시며 담배를 한 대 피며 이런 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눈다. 어지럽고 복잡한 정치, 사회이야기가 아닌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가 오고간다. 종이컵을 비우고 감사합니다. 한마디를 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 준비를 한다. 그 뒤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대충 이렇다.

 

“수고 했어요. 다음에 봐요.”

 

내가 요즘 많이 마주치는 분들의 모습이다. 이 분들의 근무처는 화사한 색채나 질감을 자랑하는 인테리어하곤 거리가 멀다. 겨우 빛을 밝히는 형광등 몇 개가 높은 천장에 매달려 있고 투박하고 둔탁한 금속제 앵글이 겹겹이 자리 잡고 그 위에 거대한 박스들을 역학적으로 쌓여 무너짐을 방지한 공간이다. 다시 말해 창고다. 종류와 형태가 다양한 가지각색의 물건들이 분류별, 항목별로 자리 잡고 있는 장소이다.

 

하루에 엄청난 무게의 화물이 들어오고 나가며, 이를 관리하는 직업. 그들에게 화사한 와이셔츠에 단정하게 묶은 넥타이, 광이 나는 구두는 어울리지 않은 패션이다. 두툼한 작업복에 안전화, 그리고 빨간 고무가 코팅된 목장갑이 가장 어울리는 패션일 것이다. 화사한 언변과 유창한 전문용어도 필요 없다. 오히려 식민지 문화의 잔재일 수밖에 없는 일본어가 섞인 변칙적인 외래어가 난무한다. 통로를 질주하는 지게차와 크레인으로 인한 소음 때문에 자연스럽게 기차화통 같은 목소리가 튀어나오곤 한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부대낌이더라도 어마어마한 양의 화물이 들어오면 너나 할 것 없이 덤벼들어 조금이라도 손을 보탠다. 이런 낯선 부류의 사람들과의 만남이 처음엔 어색했지만 이제 서로 땀을 흘리며 화물을 나르며 감사와 고마움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작은 인스턴트커피 한 잔일지라도 그 안에 담긴 투박하지만 구수한 사람냄새는 꽤 오래갈 것 같다.

 

내 인생에 깊이보다 폭이 넓어지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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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1-12-18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방끈의 길이보다 두께. 그러게요 :)
갑자기 저도 커피를 마시고 싶어졌어요!

Mephistopheles 2011-12-20 22:58   좋아요 0 | URL
설마 원효면옥에선 뜨거운 육수에 커피를 타주진 않겠죠?(쓰고 보니 그 맛이 궁금해진다는.......)

세실 2011-12-18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인생의 폭이 넓어진다는 그 말씀 참 좋으네요. 저도 그런 느낌 듭니다. 요즘^*^

하지만 전 저 다방 커피 안 마셔요. 살 찌니까요. 쿨럭~~~

Mephistopheles 2011-12-20 22:59   좋아요 0 | URL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허리의 폭이 넓어지지 않는 전업이라서요. ㅋㅋㅋㅋ

무스탕 2011-12-18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오전에만 나영양 커피 세 잔을 해치운 사람, 여기 있습니다. 쿨럭~~~
팔딱팔딱 뛰는 생간의 모습을 접하고 계시군요 ^^

Mephistopheles 2011-12-20 23:01   좋아요 0 | URL
시끌시끌하고 분위기는 화사하지 않아도 에너지는 넘치는 공간이더군요.

BRINY 2011-12-18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이 생기면 너나없이 달려들어 손을 보태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그래도 주위에 있기에 힘을 낼 수 있습니다.

Mephistopheles 2011-12-20 23:03   좋아요 0 | URL
저처럼 잠깐 들리는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남의 화물임에도 도와주더라고요. 저고 자연스럽게 따라하게 되더군요. 근데 너무 고마워하시는 겁니다. 참 이 나이에 감사하는 마음이 무언지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잘잘라 2011-12-19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봉지커피만 마셔요. 그래서 살쪘어요. 흑흑

Mephistopheles 2011-12-20 23:05   좋아요 0 | URL
어쩝니까. 바람을 타고 우산을 펼치며 날아다니는 메리포핀스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건가요??

Joule 2011-12-19 0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왠 청승인지 모르겠는데, 제가 생각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멋진 건축가의 전업 페이퍼를 읽고 있자니 왜 눈물이 글썽, 하는지 모르겠어요. 생전에 그런 일이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제 바람 중 하나가 메피님께 집 한 채 지어달라고 부탁해야지,거든요.
메피님, 화!이!팅!

Mephistopheles 2011-12-20 23:05   좋아요 0 | URL
줄님. 성형만 야매가 있는 건 아닙니다. ㅋㅋㅋ

네꼬 2011-12-22 13:47   좋아요 0 | URL
어? 야매도 해주시는 거예요?

Mephistopheles 2011-12-25 23:14   좋아요 0 | URL
쉿! 네꼬님.. 야매는 여차하면 쇠고랑 차고 경찰 출동해요...ㅋㅋ

머큐리 2011-12-19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의 마음이...오늘 추위를 녹여주네요...^^

Mephistopheles 2011-12-20 23:07   좋아요 0 | URL
제가 좀 뜨거운 남자(라고 쓰고 아저씨라고 읽는다.)랍니다. 뚜하하하하

nada 2011-12-19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의 도전, 변화, 감사하는 마음..
오늘 아침도 졸 추워하며 일어났는데,
이 글 읽고 한결 따뜻해진 기분이에요. :)

Mephistopheles 2011-12-20 23:07   좋아요 0 | URL
페이퍼 하나 쓰고 핫팩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moonnight 2011-12-19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따뜻해요!!! ^^
읽는 것만으로도 따스함이 전해지는 글이에요. 처음 퇴직하시고 전업하셨단 얘기 들었을 땐 조금 걱정도 되었었는데(주제넘게도 말이죠. -_-;;;) 인생의 폭이 넓어지는 기분을 느끼신다니, 저도 막 찡해지는 거 있죠. 메피님. 홧팅 ^^

Mephistopheles 2011-12-20 23:09   좋아요 0 | URL
새로운 분야, 전혀다른 세계를 접한다면 폭은 아마 당연히 넓어진다 보고 싶은데. 그 못지않게 파스도 참 많이 넓게 붙이고 다닙니다. ㅋㅋ

마녀고양이 2011-12-19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추운데, 고생하지 않으실까...
하지만 인생의 폭이 더 넓어졌다는 문구에서 따스함을 느낍니다.
따스하게 입고 다니셔염..

Mephistopheles 2011-12-21 20:12   좋아요 0 | URL
워낙에 피하지방층이 두꺼워 남보다 추위는덜 타는 편인데........전업하고 살이 쪽쪽 빠진다지요. 그래서 그런지 추위를 더 타는 것 같다는.

진주 2011-12-20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눈에는 메피님이 폭도 깊어지고 넓이도 넓어지신 것 같이 보여요^^

Mephistopheles 2011-12-22 00:07   좋아요 0 | URL
그 반대로 몸뚱이의 폭은 줄어들고 있다지요. (살 엄청 빠진다는 소리)

토토랑 2011-12-22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전 이런 감동적인 페퍼 읽구도
역시 커피는 맥심 노랑이가 최고! 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지 ^^;;
(회사 후배가 한번은 맥심말고 다른 노랑이를 사왔다가 엄청 갈굼당했더라지요..)

글구 살 빠지면 추위타는거, 피부 밑에 입었던 내복을 벗는 셈이니 ^^;;
목도리하고 몸 따스하게 하시고, 감기 조심하세요

Mephistopheles 2011-12-25 21:00   좋아요 0 | URL
원래 미각이 우선시 되는게 사람 사는 도리(?)입니다...ㅋㅋ
근데 목도리를 할 경황이 없어요. 좀 움직이다 보면 바로 열이 올라오다 보니까요..^^

네꼬 2011-12-22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지금 봉지 커피 타 마실래요. 이 따뜻한 메피님.

Mephistopheles 2011-12-25 21:01   좋아요 0 | URL
커피 전문점 에소프레소 베이스 커피도 맛은 있지만 그래도 간편하게 한 잔하기엔 인스턴트 봉지 커피가 쵝오! 죠..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