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 부모님의 욕심때문이였는지 우리 집엔 제법 많은 책들이 존재했었다. 물론 대부분 아버지가 읽으셨던 책이였고, 교육열에 불타오르시던 어머니는 두꺼운 백과사전까지 책장에 빼곡히 쌓아놓고, 나에게 독서를 강요하진 않았으나 상대적으로 그 또래 아이들이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라는 것과는 거리를 두게 하셨기에 자연스럽게 책이라는 존재와 가깝게 지내는 환경이 조성되었나 보다.
심심할 때마다 두꺼운 백과사전을 몇 권씩 꺼내 읽다가 때로는 쌓아도 보고 도미노놀이도 해봤던 기억이 나곤 한다. 그 유전자가 고대로 피드백이 돼 버렸는지 주니어 역시 가끔 이런 놀이를 함으로써 나를 놀래키곤 한다.
책을 가까이 했던 나를 유심히 살펴보셨는지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가 읽을 책들을 꽤나 많이도 구입하셨던 기억이 난다. 한쪽 벽을 빼곡히 채웠던 세계명작 100권도 기억나며, 틈틈이 서점에 들려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을 뽑아내고 계산은 어머니가 하시곤 했었다. 단 만화책만큼은 금서였었다.
2.
아마도 내 중학교 시절은 이러한 독서생활의 새로운 반전을 가져왔었던 시기일지도 모른다.
비교적 또래보다 많은 책을 읽던 나는 어쩌면 나름의 자만심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봤자 책속의 내용을 주절주절 떠드는 것에 불과했겠지만.
그때 즈음에 서점 계를 강타한 도서가 있었으니 고려원에서 나왔던 "영웅문"이라는 책이 기억난다.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니 음지의 무협지를 양지로 이끌어 낸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었나 라고 개인적인 분류를 짓는 도서 중에 하나라고 판단되지만, 난 아직까지 제대로 영웅문을 읽은 적이 없다. 단지 그 어린 시절 자만심의 시기였는지 내가 서점에서 잡은 책은 영웅문이 아닌 德川家康(도꾸가와 이에야스) 다시 말해 대야망이였으니 말이다. 어린 시절 기억으로 20권이 넘는 책의 분량과 남이 주로 잡는 책이 아닌 책이라는 이유만으로 잡았었을 것이다. 그리고 보란 듯이 학교에까지 가져가 읽어주는 웃기지도 않는 엄청난 현학적인 모습을 그때부터 보여 왔었나 보다.
이러한 시건방진 태도는 결국 같은 반 급우와의 대화로 깨져버린다. 어느 때처럼 쉬는 시간에 이 책을 학교에서 잡고 있는 모습을 멀찌감치서 바라보던 그 급우는 내 앞에 털썩 앉으면서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엄청나게 건방지고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한마디를 던진다.
"넌 지금 그 책을 읽냐..난 벌써 1년전에 다 읽었는데..훗.."
충격이었다. 학업성적도 밑바닥 이였고 더군다나 같은 반 급우들과도 그리 친하게 지내지 않는 사교성이 극히 희박한 녀석이었다. 더군다나 남녀공학인 중학교 시절 반에서 여자아이들이 질색팔색을 하는 인물이었던 것.
이 녀석 때문에 난 자연스럽게 나의 모습을 돌이켜봤을지도 모른다. 같잖은 어려운 책을 잡고 아는 척 잘난 척을 하는 기껏해야 중삐리 애늙은이의 모습을... 아마도 그때 그 이후로부터 난 그 책을 학교에 가져오지 않았고 주로 집에서 조금씩 읽어나가는 것으로 나의 독서생활의 크나큰 변화과정을 겪게 돼 버렸다.
3.
그때에 비하면 30대 중반의 나이의 나는 책을 놓지는 않았으나 그때만큼의 독서량을 가지고 있진 않는다. 물론 독서 이외 오락거리가 내 주변에 널려있기도 하고, 그때만큼의 독서에 할애할만한 시간의 부재도 이유라면 이유겠다. 또 하나 그 중학생 시절의 트라우마 스위치의 작동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책을 많이 읽고 많이 안다는 것. 이것이 즐겁고 자신을 풍요롭게 한다는 건 분명 틀린 생각이나 이치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많은 책을 읽은 만큼 그만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넓어지거나 바르고 곧은 사상을 갖게 되는가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이 앞서버리곤 한다. 아마도 그건 책속의 세상을 왜곡하거나 혹은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일명 "헛똑똑이"들의 존재를 너무나도 많이 접하고 경험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수천 권의 장서를 소유하고 읽었다는 자부심과 독서량도 중요하겠지만, 남을 위해 혹은 자신을 위해 흘렸을 수천방울의 땀의 소중함까지 겸비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따라 영화 베트맨비긴스에서 레이첼이 브루스 웨인에게 했던 말 한방이 떠오른다.
"자신을 나타내는 건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다."
넷이 발달한 요즘세상에서 오프라인뿐만이 아닌 온라인 영역까지 자신이 보여주는 모든 행동에 적용시켜야 할 명대사라고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