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복
중학교 시절 가장 친한 친구는 내 옷소매 사이로 비죽하게 튀어나온
내복 끄트머리를 보고 "남자답지 않다" 라는 호기를 부렸던 적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발끈했던 난 그날 이후로 내복을 입지 않고 겨울을 나게 되었다.
그건 지금까지도 지켜지는 겨울나기의 철칙이 되었지만, 그때 그 친구의
풋내나는 마초스런 발언이 없었다면 아마도 난 둘래둘래 내복을 껴입고 겨울
을 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남들보다 체지방이 월등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손
열이 많은 체질이기에 나에겐 여름은 견디기 힘든 계절의 의미로 다가오고
그에 반면 겨울은 매서운 추위가 온 들 그냥저냥 별 불편없이 살아가는 계절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칼같은 북풍한파가 몰아쳐도 내 손은 지나치리만큼 비정상
적으로 적정 온도를 유지하다 보니 마님은 겨울만 되면 외투 속에 찔러넣은
내 손을 찾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혹자는 손이 따뜻한 사람은 성격이
냉정하다고 한다. 냉정하건 말건 뜨끈뜨근한 두꺼운 내 손은 겨울나기 초특급
아이템 중에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총각땐 겨울철 타고난 작업 아이템으로
제 몫을 톡톡히 하기도 했으니까. 매서운 겨울 따뜻한 손만큼 간절한 것도 없
다보니..
하지만 장갑을 사지 않아도 되었던 20대와는 다르게 점점 손 온도가 떨어지는
느낌을 받으며 세월 앞엔 그 어느것도 영원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휴대용난로
한참 지포 라이터를 수집했던 시기에 자주 이용하는 남대문 샵에서 계절상품으로
진열된 녀석을 들고 온 지 5년째가 돼어 간다. 적당량의 라이터 기름을 넣주고
살짝 불을 붙이면 제법 장시간 뜨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다.
옛날 어린시절 학교 교실 난로의 연료로 사용된 조개탄을 넣는 조악하게 생긴
녀석도 있었고 최첨단 전기충전식 손난로가 있다치더라도 변함없는 성능으로
오랜기간 겨울을 같이 난 이 녀석이 제일 듬직하다.
사무실에서는 털신을 주문하느라 부산을 떨어도 난 이 난로 덕분에 지출이 줄어
드는 이익을 보게 되었다. 사실 신발 사이즈가 맞는 것이 없기도 하지만 말이다.
난로
중앙집중식 난방이 아닌 사무실 구조상 도시가스로 가동되는 동그란 난로를 하나
구비해놨다. 전방위적인 따뜻함을 선사해주진 않지만 이 난로의 용도는 사무실
직원들의 고향 토산품 덕분에 또 다른 진가를 발휘한다.
반년 전에 입사한 강원도 출신인 여직원 덕분에 올 겨울 사무실은 먹을 것으로
넘쳐나고 있다. 고구마, 감자, 오징어를 사무실에서 먹으라고 한박스 보내왔고
출출한 날이면 고구마를 호일에 싸고 오징어는 직접 구워먹는 꽤나 향토스런
분위기가 연출된다.
직원 단위가 백단위가 넘어가는 대규모의 사무실을 다녔을 때는 꿈에도 못꾸던
상황이 그 규모의 십분지 일이 되는 작은 규모 속에서 또 다른 즐거움을 찾는다.
어디가나 똑같다 라는 결론에 도달한 직장생활 10년차가 넘어가는 시점에서 이런
잔정과 잔재미는 조금은 재미있는 사회생활을 만들어주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