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록수에 관한 생각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상록수하면 지조가 생각합니다.


 성삼문의 시조를 보아도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낙장송 되었다가

백설이만건곤 할제 독야청청하리라.‘


 계절의 변화에도 푸름을 간직하는 나무! 상록수를 포함한 침엽수는 양수림으로 분류되고 활엽수는 음수림으로 분류됩니다. 언뜻 첫 인상에는 울창한 열대우림을 생각하면 활엽수가 생각나서 활엽수가 양수림으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침엽수는 충분한 일조량이 있어야 자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일조량이 충분해야 나무가 자랄 수 있기 때문에 큰 침엽수 밑에서는 자신의 씨앗으로부터 생긴 나무가 자라지 못하고, 하물며 자신의 잎조차도 햇볕을 쪼일 수 있는 바깥쪽에만 잎이 있고 안으로 잎이 나지 않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기에서 연상된 것이 후진을 양성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상록수는 후진양성에 미흡하여 활엽수에게 자리를 빼앗기는구나! 음수림은 비교적 적은 일조량으로도 자랄 수 있으며 자라고 난 후 큰 잎으로 그늘을 지게 만들므로 양수림과의 생존경재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습니다. (생물학 용어로 양수림에서 음수림의 숲으로 변하는 것을 ‘천이’라고 하지요.)


 일본 바둑계의 원로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는 일본의 하시모토 우타로(橋本宇太郞), 중국의 오청원(吳淸原), 한국의 조훈현을 제자로 삼아 3국의 세 천제를 문하생으로 두었습니다. 그에 반에 기타니 미노루(木谷實)는 많은 사람을 제자로 두었는데, 가토 마사오, 다케미야 마사키, 고바야시 고이치, 조치훈 등이 포함됩니다. 세고에의 계보에 임해봉이나 이창호도 속하겠지만 일본 바둑에서는 기타니 문하생이 많아 기타니 계보가 주류를 이룬다고 합니다.


 혼자는 독야청청하지만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는데 무능력했던 상록수 - 사람사이에서 지조가 있는 사람이 흔하지 않은 것도 지조가 세상살이를 역부족으로 만드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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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대 종교

 초등학교 5학년 때 (이 사건은 담임선생님이 너무 화를 내셔서 정확한 학년을 정확히 기억합니다.) 바른 생활 문제에 ‘다음 중 4대 종교가 아닌 것은?’이란 시험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4대 종교는 그리스도교, 불교, 이슬람교, 유교였습니다. 답가지에 힌두교가 포함되어 있었고, 4대 종교가 아닌 것은 힌두교가 답이었습니다. 저는 아무 생각없이 힌두교로 답을 표시하였고 저는 그 문제를 맞혔습니다.


 시험 본 다음 날 담임선생님은 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누구를 지목하지 않고) 우리 반 학생들을 야단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문제를 틀릴 수 있냐.’하고‘나머지는 다 들어 본 종교이고 힌두교는 들어본 적도 없지 않니.’ 저는 ‘시험 문제야 맞고 틀릴 수 있는 것이지만, 너무 쉬운 문제를 누군가 틀렸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지금 제가 이 문제를 풀려고 하면, 쉽게, 당연하게 답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불교와 힌두교중에서 어느 것이 답일까.’ 꽤 고민했을 것입니다. 불교의 많은 사상은 힌두교 사상의 바탕을 갖고 있고, 인도 인구로 보면 신자수가 적은 것도 아닙니다. 지나고 생각하니 그 초등학교 시절의 문제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어렸을 때 쉬웠던 것이 자라면서 왜 이렇게 헛갈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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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2-04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기에는 그 답은 '유교'일 것 같은데요? 유교가 종교이던가요?
아~~ 이러기 시작하면 '종교'의 definition까지 가야 할까요? 전 그래도 유교일 것 같습니다.
힌두교는 인도 뿐 아니라 동남아 지역에도 상당한 교세가 있습니다.

마립간 2004-02-05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이 어려운 질문을 던지셨네요.
예전에 친구와 종교란 무엇인가 한참 이야기 한 적이 있었는데, 제 생각에 언급된 종교중 가장 표준에 해당하는 것이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입니다. 멀리 있는 것이 유교이고, 그 중간이 불교입니다. 왜냐하면 유교는 구원이 없고, 불교는 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자신의 해탈이지 부처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했다가 친구한테 야단 맞았습니다. 서양종교관을 갖고 있다고. 개신교에서 제사를 금지하는 것은 유교에도 종교적 측면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교도 카돌릭, 개신교, 그리스와 러시아 정교, 영국국교 개신교에서 이단으로 취급되는 여러가지를 생각하면, 그리스도교가 하나의 종교로 말하기도 어렵고.
제가 느낀 점은 힌두교가 별 거 아닌 것으로 생각했는데, 상당히 비중있는 종교였고 불교의 뿌리가 되는 종교였습니다. 가을산님의 글까지 읽고 나니 그 문제 정말 어려운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소굼 2004-02-05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사를 지내면서도 종교조사를 할 때면 '무교'라고 했었죠. 게다가 객관식 문항에서도 '유교'가 없어서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했었고...음 고등학교때 친구녀석이 종교가 뭐냐고 했을 때 당당히 '산신령'이라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 vs 군자대도행君子大道行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에는 정문과 후문이 있는데, 집에 등하교할 때 주로 후문으로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3, 4학년 때 쯤 갑자가 후문으로 다니지 말고, 정문으로 등교하라는 이야기가 학교에 떠돌아 다녔습니다. 그 이유가 되었던 것이 바로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 군자는 큰 길로 다닌다. 얼마 후 후문을 열어 놓는 시간이 줄게 되어 학생들은 점차 정문으로만 다니게 되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랬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하였던 학생들이 정문으로 다니기 시작한 후 군자대도행이란 말은 점차 잊혀졌습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적인 큰 사람을 뜻하는 군자가 큰 길을 다닌다는 것이 무엇이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한자의 의미가 한 가지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로路가 길이라는 뜻일까? 길을 뜻하는 것에 路와 道가 있는데, 도道는 길이란 뜻 외에 도리란 뜻도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문장은 ‘군자란 무릇 큰 도리를 행한다.’가 ‘큰 길을 다닌다.’로 와전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해석에는 반대로, 군자는 큰 길을 다녀야 하는데 후대에 추상적으로 옳고 바른 행동을 한다고 확대 해석되었다는 설명이 많습니다. 글쎄, 아마도 처음부터 도리를 뜻하며 생겨난 말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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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흔 2004-02-06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자대로행'은 공자와 공자의 제자인 '자유'와의 대화 중에 나오는 말입니다. '도'자는 노자 도덕경에서 사용을 하였습니다. 공자보다는 노자가 윗 시대지만 그 당시에는 인정을 받기가 어려웠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합니다. 그러니, '로'자가 맞다고 보아야 합니다. 실지로 공자와 '자유'와의 대화를 보면 이런 내용입니다.
"그 사람은 길을 걸으면 큰 길로만 걷습니다. 그 사람은 사잇길이나 뒷길, 그리고 좁은 길은 걷지 않습니다. 더욱이 길이 아닌 곳은 절대로 걸어가는 일이 없고, 언제나 큰 길을 당당하게 걷는 사람입니다."
 

 육하원칙六何原則 (5W1H)

 예전에 (그러니까 어렸을 때) 분명했던 것이 커 가면서 불분명해지는 것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육하원칙 입니다. 언제(when), 어디서(where), 무엇을(what), 누가(who), 어떻게(how), 왜(why) 여섯 가지가 해당합니다.

 시간과 공간은 물리학에서 같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공간에 비해 시간은 비가역이지만, 그렇다면 공간에서 상하의 개념은 좌우전후의 개념과 달라야죠. 비행기가 없던 시절에는 구면(2차원)에 붙어사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흐른 물을 다시 위로 올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누구와 무엇도 주체와 객체 또는 생물과 무생물(아니면 인간과 비인간)로 나누어 사용하지만 주체와 객체는 언재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고, 인간도 생물의 하나이며, 물질로 구성된 것을 생각하면 특별한 것이 없고. 영어를 배울 때, who로 물으면 이름을 묻는 것이고, what으로 물으면 직업을 묻는 다고 했지만, 성경에 하나님이 ‘나는 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I am who I am.'과 'I am what I am.'을 혼용하는 것을 보면 절대적 기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왜와 어떻게도 이유와 방법으로 구분되는 듯 싶지만, 가만히 따져 보면 그도 그렇지 않은 것이...... 모든 사건이 궁극원인과 근접원인으로 나눌 수 있고, 우리가 임의로 궁극원인을 규명했다고 하면, 그 궁극원인의 원인이나 이유를 다시 물을 수 있으므로 궁극원인 사람의 작위적인 것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근접원인이 가능하다면, 근접원인을 연속해서 나열할 수 있고, 이것이 과정이 되므로 방법과 같습니다. 예전에 물리학은 ‘왜’를 연구하고, 화학은 ‘어떻게’를 연구한다고 했는데, 요즘에는 뭐가 물리고, 뭐가 화학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육하원칙은 삼하원칙이 되어야 하는데, 좌표(when & where), 주체 및 객체(who & what), 근접원인들 (why & how)로 정리가 되는 군요. - 쓸데없는 것만 생각하는 마립간의 생각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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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로병사生努病死의 비밀이 아니고 저의 생각들

 어렸을 때 생, 로, 병, 사는 분명하게 다른 것이었습니다. 태어남(birth)과 늙음(old, aged), 질병(disease), 죽음(death)은 국어로 보나 한자로 보나 영어로 보나 분명한 단어가 있고 개념도 확실히 구분되었습니다. 그런데 직업적인 것도 있겠지만, 생로병사에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구분이 지어지지 않습니다.

 설명하면, 성냥갑과 같은 직육면체가 있을 경우 앞면이 있지만 직육면체에서 앞면을 따로 떼어낼 수 없습니다. 뒷면도 마찬가지죠. 그렇다면 같은 비유로 삶이 있습니다. 삶의 앞면이 생(birth)입니다. 그리고 뒷면이 죽음입니다.

 그러면, 늙음은 어떨까요. 사람이 삶으로 늙어 갑니다. 즉 사는 것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과정이며, 삶이 있을 뿐이고 시작에 가까운 부분을 젊다고 하며, 끝 부분에 가까울 때 늙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끝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내일 죽게 된다면, 오늘 늙어다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질병은 어떨까요. 우리가 심장병이라고 부른 것은 심장만이 다른 장기organ보다 특별히 나쁜 경우를 말합니다. 나쁘다는 것은 그 장기만이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고 그 부분만 늙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즉 어느 한 장기만 특별하게 늙으면 질병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심장병이란 심부전(심장기능저하)을 가져오지만, 다른 장기, 폐나 신장 등은 심장에 비해 기능 부전이 덜 하는 상태와 다름 아닌 것이죠. 늙었다는 것은 전신 즉 모든 장기가 골고루 기능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장기가 특별히 먼저 망가지지 않고, 다 함께 망가지면, 사망원인을 노화라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삶은 생로병사의 합쳐진 형태이지 각각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내 달음질하고 있습니다. 그 끝은 내일이 될 수 있습니다. 환자들은 다들 이렇게 말합니다. ‘어제까지 건강했다고요.’ 그러면 태어날 때부터 몇 세부터 아프기 시작한다고 꼬리표를 달고 나오나요. 우리는 항상 살아 감으로 해서, 늙어가며, 병들어 가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결론에 까지 이르면, 오늘 하루가 매우 소중하고, 축복받았다고 생각 들지 않습니까? (live = age = get disease = 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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