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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순이 언니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작가의 고향과 같은 곳에서 시작하는 소설의 배경... 혹 작가의 자서전적 이야기인가? 이렇게 혼돈이 가는 설정을 나는 무지 싫어한다. 소설은 소설이야!라고 딱 잘라서 상상이 안 가기 때문이다. 박완서씨의 "그 남자네 집"도 그래서 혼란스러웠는데,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나는 주인공 짱아가 꼭 공지영 작가처럼 느껴졌다. 아무튼... 소설은 소설이고, 그렇지만 또 그만큼 리얼한 게 소설이었으니... 읽으며, 6,70년대 서울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도 좋지만, 그 지독한 가난과, 그 서러운 계층 차이가 빚어내는 수많은 이야기들에 오래오래 가슴을 쓸어야 했다. 그러한 이야기 중심에 봉순이 언니가 있었다.
이름조차도 지극히 소박하고 순진한 봉순이 언니는 짱아네 집에서 식모살이를 한다. 처음엔 더부살이, 그리고 식모살이, 한때 가족처럼 대우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역시 남일 수밖에 없는 봉순이 언니는 엄마에게 도둑 취급을 받고 나서 집을 뛰쳐나갔었다. 그러나 남자에게 속아 버림 받고, 결국 아이를 지우게 되고 다시 늙은 홀아비에게 시집을 가지만 남자는 병들어 있었던 터여서 반년 만에 사망한다. 박복한 봉순이 언니의 신산스런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가슴이 저민 반면, 짱아네 가족의 변천사를 보는 것은 쓴웃음이 나온다.
아버지가 부재해 있을 때와, 아버지가 직장을 갖지 못했을 때의 이들의 가난한 삶은, 그 무렵 다른 이들의 삶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택시를 잡아 타고 동네 한바퀴 돌며 드라이브를 시켜부던 아버지가 택시 기사에게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어조는 사실 배부른 사치에 불과했다. 아버지는 곧 외국인 회사에 취직이 되었고, 기울었던 집은 이제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넉넉한 집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들은 사회 안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나름대로 선을 긋고 그들보다 어려운 형편의 이들을 기피한다. 어머니의 마실이 그러했고, 공부하는 언니 오빠들이 그러했다. 그래서 식구일 수도 있었던 봉순이 언니는 결국엔 식모로만 남아야 했던 것이다.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고, 날 때부터 귀부인인척 하며 지낸 어머니는 이제 사람 사이의 인정과 도리보다 물질적인 것에 더 집중하며 살게 된다. 숨겨두었던 반지를 찾아 봉순이 언니의 억울함을 알아차렸을 때에도 어머니는 남탓을 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리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고 하더니, 더 이상 가난하지 않은 그들은 더 이상 사람 사이의 인정과 도리를 따지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그 모습들을 모두 지켜보며 커온 짱아는, 학생운동도 하지만 자신의 모습이 가진 자의 오만이라는 이중성을 일찍이 깨닫는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깨달음 중에서 가장 소름 끼친 장면이 따로 있었으니, 바로 지하철 씬에서의 독백이다.
책의 소개에도 인용되었는데, 옮기면 이렇다.
그런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다가 문득 돌아봤을 때 놀랍게도 그녀가 날 바라보고 있었어. 설마 하는 눈빛으로... 희미한 확신과 놀라움과 언뜻 스치는 그토록 반가움... 나는 돌아보지 않았어. 어서 전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내려섰지. 엄마... 너무 많은 세월이 지났고, 그녀의 얼굴이 가물거려서... 그래, 그래서야, 그거지. 이제 와서 뭘 어쩌겠어. 30년이나 지났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그런데 그런데 날 더욱 뒤돌아볼 수 없게 만들었던 건, 그건 그 눈빛에서 아직도 버리지 않은 희망... 같은 게... 희망이라니, 끔찍하게... 그 눈빛에서... 비바람 치던 날, 이상한 생각에 내가 문을 열었을 때 두 발을 모으고 애타게 날 바라보던 메리.
'희망'이라는 말이 이렇게 인용이 되면, 그토록 무시무시한 단어가 될 수 있다는게... 작 중 주인공이 느낀 그 끔찍한 희망이라는 것을 내가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더 공포를 느꼈다.
가끔은, 그런 생각들을 했었다. '희망'이라는 말이 마술인 것이 아니라, '세뇌'인 것은 아닌지... 어차피 불가능하고, 어차피 정해진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데, '희망'이라는 말로 포장하여 닥쳐올 불안과 공포로부터 잠시 도망치고 회피하고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결국엔 희망이 절망이 될 것이면서 나를 속이고, 남을 속이고,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척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들이 무서워서, 다시금 '희망'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귀한 것이라고 말해보지만, 그 다짐만으로 올곧이 위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 스스로가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고 희망조차 없이 어찌 살 수 있느냐고 하면, 그 또한 맞다고 나는 말할 테지... 봉순이 언니가, 그렇게라도 살아야 했던 것처럼...
재밌게, 잘 읽었다. 유랑가족을 읽을 때에 느껴진 밑바닥 인생에 대한 서러운 공감은 뚜렷하지 않았지만, 그녀만의 색깔로, 그녀만의 스타일로 나름의 고민과 문제의식을 잘 보여준 듯 하다. 이렇게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후유증이 남는다. 다음엔 좀 밝은 이야기를 읽어야겠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