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만든 먼나라 이웃나라 15 : 에스파냐 먼나라 이웃나라 15
이원복 글.그림 / 김영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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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의 알카사르-아랍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요새를 기독교 왕국 궁전으로 사용한 곳-동,서양 문화가 만난 좋은 예다.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 사이에서 태어난 에스파냐의 공주 후아나.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왕자 필리프와 혼인을 한다. 필리프의 별명은 '미남왕'
대체 어디가 미남이라는 건지...;;;;


막장 일일 드라마에서 곧잘 사용하곤 하는 '겹사돈' 관계를 맺었다.
유럽의 왕실 정략혼 사이에서는 곧잘 있을 수 있는 일!


카를로스 1세이면서 카를 5세이기도 한 에스파냐 왕이 쓰고 있는 왕관과 직함이다. 에스파냐령이 얼마나 될지 상상할 수 있다.

저렇게 어마어마한 제국의 임금이지만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말년에는 스스로 왕관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은둔할 만큼 지쳐 있었다. 에스파냐 왕족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근친혼으로 인한 기형적 주걱턱이다. 위아래 이가 맞지 않아 음식을 제대로 씹지 못했고 입을 닫을 수 없어 파리가 멋대로 드나드는 걸 막기 위해 수염을 길렀다고 한다.

펠리페2세가 지은 엘에스코리알 궁전이다. 이 건물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바로 에스파냐 역대 제왕의 무덤이라는 것인데, 사후 50년간 옆에 있는 임시 묘지에 유해를 안장했다가 역사의 평가가 끝난 후 옮기게 되어 있다고 한다. 역사의 평가! 이 부분이 부러웠다. 말도 안 되는 인물까지 묻혀 있는 우리 국립묘지를 생각하면...ㅜ.ㅜ

태양의 제국 잉카의 흔적이 이렇게 남아 있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국기와 직접 비교해 보시라.

고야가 그린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이란 그림이다.
왕비의 정부에게 정사를 맡기고 사냥만 일삼던 한심한 국왕과 왕비, 그리고 스캔들의 대상인 중신 고도이까지 삼인방은 에스파냐 인들이 미워하던 '에스파냐의 세 걸림돌'이었다. 고야는 그림을 통해서 왕실을 비웃은 것이다.

나폴레옹은 에스파냐의 잡음을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친형을 에스파냐 국왕으로 만들었고, 여기에 저항하는 국민들을 힘으로 진압했다. 그러나 나폴레옹도 미처 알지 못했던 에스파냐 인들의 저항정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습, 치고 빠지는 '작은 전쟁'이 주로 벌어졌는데 여기서 '게릴라전'이란 단어가 나왔다.

에스파냐 내전에 참여한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이다.
두 사람은 전쟁이 끝난 후 각각의 경험을 토대로 작품을 썼다.

내란 와중인 1937년 4월 26일, 에스파냐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가 도이치 공군 폭격기의 공격을 받았다. 독립을 요구하며 공화파에 가담했던 바스크 지방 사람들에 대한 프랑코의 보복이자 공화파에 대한 경고였다.
프랑스에 머물던 피카소는 이 소식을 듣고 분개, 세계 만국 박람회에 출품할 작품을 준비하다가 한 달 만에 이 그림을 완성했다. 유명한 '게르니카'다.

쓰러진 자들의 계곡의 십자가.
내란으로 숨진 국민군과 공화군, 심지어 프랑코 마저도 함께 안치된 '화해의 장소'라는 것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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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8 - 헌종.철종 실록 - 극에 달한 내우, 박두한 외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8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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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가 효명세자를 앞세워 보냈기 때문에 그가 죽었을 때는 손자가 뒤를 이어야 했다. 새로 즉위한 임금의 나이는 고작 여덟 살. 당연히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인 순조 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맡게 되었다.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컸던 그녀는 친정 오라버니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렇게 헌종이 열다섯이 될 때까지  7년이 흘렀다. 열다섯이면 어른 취급 받던 시절, 헌종은 친정을 하게 된다. 안팎의 일은 여전히 안동 김씨 주도 아래 진행되고 있었고 헌종의 입장은 수렴청정 때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이름뿐인 왕이었지만 헌종은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조용히 정치를 하던 임금은 스무살이 되면서는 점차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왕의 의중은 안동 김씨가 장악한 권력을 찾아오는 것이었다. 왕의 신호탄에 신하들은 왕이 아니라 안동 김씨의 눈치를 살폈다. 너무 심하게 밀어붙이면 오히려 역풍을 받는 법. 헌종은 나름 밀당을 시도하면서 서서히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침착하고도 차분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헌종은 명이 짧았다. 재위 15년, 23세 때이른 죽음이었다. 실록은 헌종을 아름다운 외모에 좋은 목소리를 지녔다고 묘사했다. 오호라, 젊고도 아름다운 군주의 이른 죽음이 더 애석해지는 순간이다. 순원왕후는 편지에서 헌종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다른 이에 대한 칭찬이나 비난을 좋게 안 보고 곧이곧대로 믿지 않아요. 눈치 빠르고 시기심이 있어서...”

 

사방이 안동 김씨로 도배되어 있는 상황에서 왕은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했다. 이런 왕의 성격은 신중함의 한 단면으로 보인다. 좀 더 뜻을 펼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안타까운 일이다.

 

안동 김씨, 풍양조씨, 다시 안동 김씨로 이어지는 3대 60년 간의 세도정치. 헌종 때는 잠시 풍양조씨가 안동김씨를 누른 것처럼 묘사하곤 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안동 김씨 세상으로 보인다. 다만 풍양조씨가 세도정치의 한축을 잠시 발을 담그는 정도로 참여한 정도? 풍양조씨 일문이 좀 더 욕심을 내었더라면 아마 안동 김씨에게 바로 밟혔을 것 같다.

 

 

아무튼 임금은 죽었고, 후사는 없었다. 가장 가까운 종친을 찾아야 했다. 조선 전기만 해도 왕실엔 대를 이을 왕자가 부족한 경우가 드물었는데, 후기로 가서는 손이 너무 귀해졌다.

 

 

전반적으로 조선 왕실이 적장자가 왕이 된 경우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임금의 아들이 왕이 되긴 했는데 헌종이 죽고 나서는 왕의 아들로서 임금이 될 사람이 없었다.

   

강화도령 철종이 후사로 결정된 것을 안동 김씨의 음모로 보기도 하는데, 조선의 왕실 시스템을 생각한다면 지나친 해석 같다. 임금이 죽으면 후사에 대한 결정권은 왕실의 큰어른이 갖는 것이 맞고, 핏줄상으로도 원범과 원범의 형 말고는 대안이 없었다. 원범의 형이 원범보다 세살 많았는데, 수렴청정이 불가피했다면 스물 넘은 형보다는 그래도 좀 더 어린 원범이 더 적당했을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둘째 아들을 왕으로 밀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튼 그렇게 해서 순원왕후는 조선 왕조 사상 유일무이하게 두 차례나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농사짓고 살기 바빴던 원범이 정치를 아우를만큼의 식견이 당장에 있을 리 만무다. 대왕대비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언문 하교를 내렸다.

 

구구절절 바른 조언이다. 글밥이 많긴 하지만 깊이 새겨들을 메시지다.

 

순원왕후의 행적을 살피면 왕실을 꼼꼼히 챙기고 백성을 보살피는 면모들은 훌륭했다. 그러나 자신의 친정 가문이 나라의 가장 큰 해악이 되고 있다는 것을 못 알아차렸으니 그녀의 죄가 없다고는 말 못하겠다. 진심은 있었어도 구중궁궐 속에서 친정만 의지하며 제한된 정보만 받아들인 그녀의 필연적인 한계일 것이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갖고 싶어지는 게 권력이고 인간의 욕심인 법. 저 수많은 병자 돌림을 보고 있자니 어질어질하다. 김병연도 조상을 욕한 전적만 없었으면 저 행렬에 포함되었을까?

 

그렇게 안동 김씨의 전면적인 지배는 완성되었다. 마치 총수 일가가 재벌 경영권을 완전 장악하듯 한 가문이 나라를 통째로 삼켜버렸네. 무늬는 이씨 왕조, 실제론 김씨 왕조. -95쪽

 

때는 19세기. 세도정치로 정치가 무너져 내렸고,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의 삶도 무너졌다. 의무는 가득하고 권리는 없었던 조선의 백성들. 제도 상으로는 얼마든지 과거 응시가 가능한 나름 '열린 사회'였다지만,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사회 구조가 아니었다. 이게 전근대 사회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게 씁쓸할 뿐!

 

 

사당오락도 아니고 삼당사락이다. 소는 네가 키워라. 공부는 내가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너의 경쟁자들은 열공 중에 있다....

 

아, 웃자니 또 슬퍼지네.

 

군포 징수에 따른 폐단을 개혁하고자 영조는 균역법을 실시했었다. 그러나 한 구멍이 막히면 다른 구멍을 뚫어서 또 다시 곳간을 채우는 공무원들이 부지기수. 기본적으로 급여 자체가 없던 고을 아전들은 당당하게 백성들을 털어먹었다. 기본적인 시스템이 문제가 있었고,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있으니 본전 찾으려면 부지런히 백성들을 짜먹는 게 수령과 그들을 보좌하는 아전들의 기본 책무였다. 이런 나라에서 반기를 들지 않으면 그게 정상이겠는가.

 

곡식이 많이 나기 때문에 털릴 것도 더 많은 삼남 지방에서 극렬한 저항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민란들은 산발적으로 일어났고 연대하지 못했다. 조선 왕조를 뒤엎을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허무하게 놓치고 말았다. 내가 다 속상할 지경이다.

 

각지의 난들은 상당한 유사점들을 보여주었다. 우선 난은 삼정의 문란, 그중에서도 특히 환곡으로 인해 일어난 경우가 많았다. 원성이 집중됐던 토호, 아전들을 죽이고, 그들의 집을 불태웠으며 관아를 습격해 불을 지르거나 수령을 붙잡아 능욕했다. 난이 진행될수록 백성의 분노는 양반층 전체로 확산되는 경향도 띄었다. 그런데 삼남 일대를 온통 뒤흔들었는데도 지배 세력에게 안긴 충격은 그리 크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이웃 고을의 소식에 영향을 받고 자극되었지만 적극적으로 이웃 고을과 연계하려 한 움직임도, 여러 고을을 통일적으로 묶어내려 한 시도도 없었다. 전국적인 봉기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개별적이고 고립적인 봉기들의 릴레이였을 뿐이다. 그리고 관아를 습격하고 아전, 토호들을 거침없이 죽이면서도 수령은 욕보이기만 했을 뿐, 약속이나 한 듯이 한 고을에서도 죽이지 않았다. 그토록 분노가 컸으면서도 문제의 근원은 보지 못한 채 이런 인식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수령이 나쁜 놈이긴 해도 우찌 됐든 나라님이 임명한 사람 아이가?"

“하모. 수령을 직이모 나라에 선전포고 하는 거랑 같은 기라.” -127쪽

 

 

이게 가장 화가 났다. 가장 윗대가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것! 답답해도 너무 답답하다. 이게 다 유교 때문이 아닌가 싶다. MB가 아무리 큰 부정을 저질러도 그래도 대통령은 하늘이 내는 것이니 욕하면 안 된다고 하는 우리 엄니를 보는 기분이다. 민중이 움직인 혁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결정적 최후의 한방은 못 먹인 게 아닌가 싶다. 지금도 뻔뻔히 잘 살고 있는 전두환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온다. 그런 전직 대통령이 또 늘어날 판이니...ㅜ.ㅜ

 

백성의 고단한 삶을 몸으로 체험하고서 임금이 된 철종이다. 삼남에서 일어난 각종 농민 봉기들은 철종에게 어쩌면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안동 김씨 위세에 숨죽여 살아온 그에게 왕으로서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명분과 분위기가 모두 조성된 것이다. 그러나 삼정의 개혁은 조선 사회를 근본적으로 수술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당연히 기득권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올 것이다. 그걸 잠재우려면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인물이 필요하다. 뒷날의 흥선대원군처럼. 철종은 개혁의 칼을 빼들어서 그 칼을 안동 김씨에게 주었다. 개혁 대상에게 개혁을 맡겼으니 당연히 성공할 리가 없다. 애당초 사대부 전체와 한판 붙을 각오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더 실망스럽게도 신하들이 올린 존호를 받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사면령을 내렸는데, 민란을 촉발시킨 부정 수령들이 이때 모두 사면되었다. 근데 이 모습, 과연 19세기의 일인가? 오늘날의 얘기로도 보이는데...

 

때는 19세기. 서양 열강들이 앞다투어 이웃 나라들을 잡아 먹고 있던 시절. 세상의 중심을 자처하며 오만의 극치를 달리던 중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국은 아편을 앞세워 청나라를 제대로 요리해버렸다. 부끄러운 전쟁이었다. 쇄국을 고집하던 일본도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었다. 조선은 좀 더 현명한 선택을 해야 했다. 수시로 이양선이 출몰했고, 그들의 군사력이 압도적으로 세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다른 대응을 보여야 했고, 변화를 가져야 했다. 그러나 여전히 중국에 기대어 사대 외교를 고집했고(너희가 오랑캐 취급하던 그 청나라에게!) 막연히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버텼다. 이렇게 일관성 있게 한심하고 무능할 수가! 대체 이순신은 왜 침몰하는 조선 호를 건져 놓은 것인지 갑자기 막 원망이 들려고 한다...;;;;;

 

하여간, 그렇게 조선은 더더더 기울어 갔고, 철종은 또 후사 없이 눈을 감았다. 아들은 여럿 있었지만 모두 일찍 죽어버렸다.

 

 

서른 셋, 지극히 젊은 나이였다. 죽어서 오히려 자유를 찾은 것일까. 그림 속 철종의 모습이 무척 외롭고 슬퍼보인다. 그림에서 약간 사팔처럼 보이게 나오는데 철종 어진도 그렇게 그려졌던가?

 

 

음, 약간 몰려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암튼, 철종이 눈을 감았다. 이어지는 수순은 알다시피 조대비가 흥선군의 둘째 아들을 후계자로 세워 고종이 왕이 되는 것. 19권이 그렇게 시작된다.

 

헌종과 철종실록은 아무래도 기록이 부실한 편이다. 이 책도 다른 책들보다 많이 얇아졌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박시백은 책의 말미에 조선사를 쭈욱 한차례 정리를 해주었다. 그 과정은 사실상 사대부의 역사였고, 사대부들이 어떻게 정점을 찍고 분열했으며, 나라를 말아먹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고종실록은 그보다 더 답답했으니 벌써부터 숨막혀하면 곤란하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려운 법이다. 개혁의 주체가 개혁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개혁을 하고자 하는 권력자 자신도 개혁해야만 할 때도 있다. 철저하게 기득권을 내려놓고 새롭게 태어나지 않고는 뿌리부터 바뀌지 않는다. 조선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대한민국도 그렇다. 문득, 민주당 의원들부터 이 시리즈를 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열독하고 열공하고 깊이 반성 좀 하라고...

 

이제 이 시리즈는 딱 한권만 남았다. 그리고 남은 한권은 가장 가슴 아프고 사장 서러운 기록들로 덮일 가능성이 무척 크다. 바닥을 보겠지만, 그 바닥을 치고 일어나는 우리 역사의 가능성도 같이 보았으면 좋겠다.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사는 이 시간 속에서 확인할 수 있기를...

 

덧글) 오타가 하나 있다.

 

49쪽 박남 박씨 >>> 반남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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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3-01-26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워낙 영 정조 시대에만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순조에서 대원군 등장까지는 무관심하죠.이게 문제입니다.그러다 갑자기 강화도 조약으로 넘어가려니 맥락을 못잡죠.박시백 씨가 그런 점에서 그 공백을 잘 메꿔준다고 봐야죠.그리고 박 씨는 요즘 통속적으로 유행하는 정조 편향적인 사관(그 극단에 이덕일 씨가 있습니다만...)에서 벗어나 균형을 유지하려고 하니 다행이에요.

마노아 2013-01-26 22:04   좋아요 0 | URL
극단적인 정조 빠와 정조 까 사이에서 박시백 씨가 균형을 잘 잡고 있어요.^^

노이에자이트 2013-01-28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조 까로 마노아님이 간주하는 분은 누구신지 궁금궁금...혹시 정병설 씨?

마노아 2013-01-28 01:16   좋아요 0 | URL
네, 아마도요.^^ 안대회씨도 그쪽에 가깝다 느껴지고요. ㅎㅎ

노이에자이트 2013-01-28 21:08   좋아요 0 | URL
마노아 님의 속마음을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천황의 하루 - 오늘, 일본 황궁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요네쿠보 아케미 지음, 정순분 옮김 / 김영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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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임금의 하루를 소재로 한 '왕의 하루'에 이어 이번엔 '천황의 하루'다. 그 중에서도 일본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끈 메이지 천황의 하루를 통해서 전통과 규율을 존중하다 못해 거의 집착하는 이 '신성' 체제의 내부를 슬쩍 들여다보고 있다.

 

시작은 천황의 기상부터다. 평일 오전 8시, "오히~루(기상)"
라고 외치는 소리가 울리면 방에서 방으로 기상 시간을 알리는 말전달이 이어지고 궁성의 하루가 열린다. 전통은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천황은 8시보다 일찍 일어나서도 안 되고 늦게 일어나서도 안 된다. 천황이 일찍 일어나버리면 보필하는 이들의 스케줄도 모두 꼬이기 때문에 설령 아침 잠이 없어진 노년에 가서도 이 시간은 지켜져야만 했다. 잠에서 깬 천황은 시의의 진찰을 받고 화장을 한다. 이때의 '화장'이란 몸치장 전체를 가리키는 궁중 용어다. 이때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한 다음 따뜻한 물수건으로 상반신을 닦아낸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빗고 향수를 뿌리면 준비 끝! 메이지 천황은 외국의 향수 한 병을 이삼일 만에 다 썼을 정도로 향수 매니아였다고 한다. 어휴, 향수를 그렇게 뿌려댔으면 주변 사람들이 꽤 힘들었을 것 같다.

 

 

키 165cm정도의 메이지 천황. 당시 기준으로는 꽤 큰편이었다고 한다. 눈빛이 부리부리, 사진을 뚫고 나올 것만 같다.

 

 

 

황후 하루코다. 몹시 병약했다고 하는데, 아파보이는 건 둘째 치고 표정이 너무 없어서 종이 인형처럼 느껴진다. 부부가 모두 얼굴이 꽤 크다. 전통적 동양인의 체형이었을 테지. 지금이야 키도 커지고 얼굴도 작아진 모양새지만...

 

조식은 각자 먹고 천황의 하루 업무가 시작된다. 한시도 가만 있지 않는 성정의 천황은 심지어 모든 서류를 서서 검토했다고 한다. 천황이 서 있으니 결재 받으러 온 신하가 감히 앉아 있을 도리가 있나. 그런데 그런 천황 앞에서도 앉아서 볼일 본 사람이 있다고 한다.

 

 

황족이 알현을 왔을 때도 양쪽이 모두 기립한 상태에서 대화가 진행되었는데 예외적으로 의자에 앉은 인물들이 있었다. 아리스가와 다케히토 친왕과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다. 보조가 특히 이토는 “어전에 나갈 때는 보통 검을 빼고 들어가는데 그 사람만은 찬 채로 들어갔습니다” “팔꿈치를 의자에 기대고 편안한 자세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메이지 대제의 일상을 추억하다》)라고 하는 것처럼 별격이었던 듯하다. -69쪽

 

이토의 파워가 이정도였구나. 굉장히 씁쓸해진다. 심지어 황태자는 아버지를 어려워해서 천황의 기분을 먼저 확인한 후에야 알현을 했다고 하는데 말이다.

 

메이지 천황은 꽤 세밀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배려심도 꽤 돋보인다. 잠시도 앉지 않고 서서 일을 보는 것도 사실 아랫 사람들을 고려한 습관이었다. 자신의 행동 반경에 따라서 뒤따르는 이들의 업무 양이 폭발학 때문에 산책도 삼가는 사람이었다. 사실 비합리적이거나 비상식적인 전통이 있다면 그걸 바꾸는 게 더 나은 법이건만, 거기까지는 가지 못했던 메이지 천황은 자신이 불편을 감수하고 주변 사람들을 좀 더 편하게 만드는 차선책을 고집했다.

 

신하들에게 승마를 시켜 건강을 관리하게 하였지만 정작 자신은 운동 부족이었다. 운동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역시 그에 따라오는 번다한 규칙과 주변인들의 불편을 덜기 위함이었다. 여관들이 무거운 물건을 놓아다가 둘 일이 많은데 자신이 자리에 있으면 일일이 인사를 하고 무릎걸음으로 지나가야 하니, 이때도 자리를 비켜주는 것으로 그들의 불편함을 덜어내었다. 최선의 방법은 취하지 않아도 차선까지는 해내는 인물이었다. 전근대 사회와 근대 사회의 경계에 선 사람으로 보인다.

 

검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던 천황. 식민지배의 묵은 업이 있는 이나라의 독자로서 잠시 눈썹이 꿈틀대는 순간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든 생각인데, 메이지 천황은 한 사람의 개인으로 보면 무척 괜찮은 인물로 보였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주변에도 규칙을 준수할 것을 강조하지만, 나름의 유머도 있고 섬세한 배려도 자주 보인 인물이었다. 병약한 아내는 물론이요, 보좌하는 신하들, 그리고 궁에서 어려서부터 생활한 소년들에게도 그랬다. 제 몸이 불편할지언정 신하들의 불편함은 최대한 덜어주려고도 애썼다. 그런데 그 메이지 천황이 집권한 시기에 조선은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고 어마어마하게 수탈을 당하다가 끝내 강제 병합되었다. 문득, 청문회를 요란하게 했던 흡사마가 떠오른다. 그 사람도 자기 집에서는 따뜻하고 섬세한 아버지일지도 모른다. 가족을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린 행적을 보였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공직에 어울리냐고 묻는다면 어휴, 말을 말아야지.... 일본 사람들에게 메이지 천황은 존경의 대상일지 모르겠으나 대한민국 독자로서 나는 어디 감정이 그래지는가.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로까지 범위를 넓혀도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은 최대한 담담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사실 책도 천황의 하루를 따라가면서 그 시대의 분위기를 보여줄 뿐, 심각한 정치적 역사적 책임을 묻지는 않는다. 크게 웃기지는 않지만 나름 유머도 섞어가면서 애를 쓰는 게 보인다. 이를테면 천황이 아꼈던 개가 오히려 신하들을 아랫 사람으로 대하듯 심통 부리는 장면 등이 그랬다.

 

 

 

깨끗하고 신성한 것은 '청', 지저분하고 터부의 대상이 되는 '차'의 구분이 인상적이었다.

 

104

여관이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하는 것은 식사 당번 때만이 아니었다. 하반신은 인간의 몸에서도 대표적인 ‘차’의 장소이기 때문에 손이 더러워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여관은 자신의 양말이나 버선도 아랫사람의 손을 빌려 신었다고 한다. 다다미에 앉아서 엎드려 인사를 할 때도 발로 밟는 다다미 때문에 자신의 손바닥이 더럽혀질까봐 한 손은 손등을 바닥으로 향하게 하고 그 위에 다른 한 손을 포개놓는 식으로 했다. 만에 하나 손이 더럽혀지면 청정의 과정을 다시 되풀이해야 했다.

176

천황의 몸을 씻는 데도 청인 상반신은 권전시, 장시, 권장시가 씻고, 차에 해당하는 하반신은 명부, 권명부가 씻어야 했다. 천황은 신성한 존재이기 때문에 전신을 청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그리고 욕조는 물을 허리 정도까지만 채워서 하반신만 물속에 담그도록 한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반신욕이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욕조 가득 물을 부으면 상반신까지 물속에 들어가 차인 하반신의 더러움으로 청인 상반신까지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218

몸에서 가장 더러운 발이 이불에 직접 닿으면 이불을 타고 더러움이 온몸에 퍼진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나이기의 잠옷에는 특수한 장치가 되어 있었다. “옷의 끝자락을 길게 해서 발을 감쌌다”고 하므로 발이 이불에 닿지 않도록 하얀 비단 잠옷으로 크레이프처럼 온몸을 싸도록 만든 것이다. 천황 부처와 여관들 모두 그런 잠옷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거의 강박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전통이라니, 그래서 지켜야 한다니 어쩌겠는가. 설마 요즘도 저러지는 않겠지? 답답해서 사람이 어디 살겠는가 싶다. 패기 있고 발랄해 보이던 마사코 황태자비가 칩거 중이라는 소식도 이런 숨막히는 규율 탓이 크지 않을까. 아, 갑자기 김진명의 '황태자비 납치 사건'이 궁금해지는군... ^^

 

책의 본문보다 맨 뒤 부록처럼 실린 신명호 교수의 해설이 더 흥미로웠다. 메이지 유신 때에 어떻게 그렇게 단번에 천황에게로 모든 권력이 옮겨졌을까 궁금했는데 이 부분을 적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타이밍이 잘 맞기도 했지만, 단번에 권력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한 것도 좋은 수확이다. 또 조선의 궁녀와는 신분 차이가 큰 천황의 후궁들에 대한 얘기도 무척 재밌었다. 확실히 일본은 동아시아에 위치해 있지만 유럽과 닮은 점이 많은 듯하다. 지방분권적 정치 스타일도 그랬고, 왕비를 모시는 시녀들이 귀족이었던 것과도 통하니 말이다.

 

앞의 시리즈 '왕의 하루'는 읽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는데 이 책은 무척 빨리 읽혔다. 글밥이 더 적기도 하지만 구성 자체가 보다 간결하고 '하루'라는 타이틀에 맞게 시간 흐름도 정방향이어서 읽는 게 더 수월했다. 혹시 다음 시리즈는 중국 황제의 하루가 되려나? 지배자 말고 또 다른 여러 인물들에게까지 관심을 확대해서 '하루' 시리즈가 더 나왔으면 좋겠다. 그 자체로 브랜드가 되면 무척 재밌을 듯하다.

 

덧글) 오타 하나 발견했다.

223

천황를 수행하는 >>>천황을 수행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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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13-01-24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어 보이네요.
눈썹과 콧수염과 눈빛이 참 인상적인 사진이네요. 그에 비하면 고종이 비슷한 예복 입고 찍은 사진은 얼마나 인자하고 자그마한 조선의 할아버지인가요.

마노아 2013-01-24 20:3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인상부터가 차이가 확 나네요. 한쪽은 순딩이 인상인데 말이지요.^^;;;;

노이에자이트 2013-01-24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후를 모시는 시녀가 귀족인 것 같은데요...왕비도 귀족이 모셨나요? 일황은 천황 한 명이지만 일왕은 여러 명이라 구분이 명확하더라고요.

마노아 2013-01-24 20:33   좋아요 0 | URL
왕비를 모시는 시녀들이 귀족이었다는 말은 유럽 얘기한 거였는데 좀 혼동이 되게 썼네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9 - 고종실록 - 쇄국의 길, 개화의 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9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8권에서는 헌종·철종실록을 함께 다뤘는데, 삼정의 문란을 구체적으로 언급했고, 아울러 조선 왕조가 500년 동안 어떻게 망하지도 않고 근근이 그 명맥을 이어 왔는가를 설명했다. 세계는 탐욕의 각축장이 되어 있었고, 믿었던 중국도 종이 호랑이라는 것을 입증했으며, 일본 역시 바로 꼬리 내리고 힘 기르기에 열중했다. 그런 세계의 흐름 속에서 조선은 임금이 후사 없이 죽었다. 그렇게 19권을 맞이했다.

 

 

19권은 당연히 고종의 즉위부터 다룬다. 12세 어린 임금을 대신해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가 수렴청정을 맡게 되었다. 순조, 헌종, 철종에 이은 4대 연속 수렴청정이다. 왕실의 손이 얼마나 귀했는지, 얼마나 위태롭게 이어왔는지가 한눈에 보이는 순간이다. 효명세자의 요절로 현실 속 중전은 되지 못했던 신정왕후. 한때 세도가로 이름 높았던 친정 풍양 조씨도 안동 김씨 앞에선 맥을 못 추었고 궁궐의 존재감 없는 왕대비로 살아가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조카가 찾아왔다. 흥선군 이하응이다. 그는 자신의 둘째 아들을 익종대왕(효명세자)의 아들로 삼아 왕실의 후사를 이으라고 권고했다. 큰 아들도 아닌 둘째 아들을 내민 것은 ‘수렴청정’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그 정도 딜은 되어주어야 대왕대비도 마음이 움직일 게 아닌가. 종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남연군의 자손 중에서 왕위 계승자가 나오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야사에서는 그녀가 안동김씨에 뒤쳐진 친정을 부흥시키고 안동김씨 일가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표현하곤 하는데, 그보다는 흥선군이 제안한 개혁 구상에 동의하고 지지했다는 게 더 합당하겠다.

 

 

드라마에서 표현되는 대원군은 늘 대궐을 출입하며 직접 회의를 주재하고 명을 내리기도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대원군의 사저 운현궁에서 궁으로 들어오는 전용문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대원군의 출입은 드물었다. 몇몇의 경우를 빼고는 그는 좀처럼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의 구상과 개혁은 더러 대신들의 건의라는 형식을 통했고, 대부분은 대왕대비의 입과 언문 하교를 통해 이루어졌다. 말하자면 그녀는 대원군의 개혁 파트너였던 것이다. 그리고 왕실의 재건이라는 대원군의 구상을 실현하는 수렴청정의 주체로서 각종 개혁을 이끌었다. 그녀의 수렴청정 기간은 2년 3개월. 고종이 15세가 되자 망설임 없이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이후 83세가 되는 고종 27년까지 살았는데 단 한 번도 정치에 무리하게 개입하거나 하지 않았다.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가야 할 때를 잘 아는 삶이었다. 절제와 위엄이 돋보인다.

 

살아서 '대원군'의 호칭을 받은 유일한 인물 흥선대원군. 그는 과감하게 개혁을 추진한다. 야인으로 살던 시절부터 오래 구상하고 계획했으리라. 그야말로 준비된 지도자였다. 안동김씨 세도 정치를 털어냈지만 피바람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가 인재라면 노론, 소론, 남인을 구별하지 않았고, 심지어 언제 나왔는지 까마득하게 잊혀진 북인과 차별받던 서북인들, 그리고 안동 김씨 마저도 들어서 썼다. 동원할 수 있는 인재는 다 동원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종친이라는 굴레로 재주를 썩혀야 했던 관례를 깨고 과거를 보게 했으며 관직도 내줬다. 어찌 보면 안동 김씨 세도를 능가하는 전주 이씨 세도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용서 없이 철퇴를 내리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국가 재정 운용에 가장 큰 곤란은 세금 체납이었다. 그렇다고 백성들이 정말 세금을 안 냈냐하면 무슨 쏘리! 어떤 험한 꼴을 당하려고.... 세금은 냈지만 국가로 들어가지 않고 부패한 관리들의 곳간으로 쌓였다. 저기 저 모습들... 어디서 많이 본 모습 아닌가? 심지어 세곡을 빼돌리고 조운선을 일부러 침몰시키는 관행조차 있었다. 나라 꼴이 얼마나 한심했는지 눈에 선하다. 공무원이 먼저 이렇게 썩어버린 나라에 무슨 기대를 품을 수 있을까. 그리스가 언뜻 떠올랐지만, 남의 걱정 할 때인지 모르겠다.

 

각종 폐단에 대한 경고, 시정, 처단이 이어지고 바로잡는 과정들이 뒤따랐다. 권력이 집중된 비변사의 기능을 의정부에 합치면서 폐지해 버렸고, 개국 초의 삼군부도 회복해 비변사의 군사 지휘 업무를 맡겼다. 법전을 정비했고 민생 관련 개혁 조치들도 박차를 가했다. 가장 화끈했던 부분은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법이 실시된 것이다. 영조는 역을 균등하게 한다며 균역법을 시행했지만, 사실상 아랫돌 빼서 윗돌 괴어버리는 수준이었다. 그걸 대원군은 해낸 것이다. 영조도, 정조도 못했던 작업이다. 

 

 

서원을 철폐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카리스마는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기득권만 있고 의무는 없는 이 뻔뻔한 기생충들에게 본때를 보여준 것이다. 명분이 있으니 양반들은 속이 타고 애가 타도 할 말이 없는 상태.

 

 

1000여 개가 넘던 전국의 서원이 다 정리되고 47개 남았다.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이보다 엄청난 개혁이 있을 수 있을까. 집단 멘붕 소리가 들릴 법도 하다.

 

임진왜란 때 불탄 이후 여태 재건하지 못한 경복궁의 중건. 백성에게 짐이 된 것은 사실이나 불필요한 일을 무리해서 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중건 과정에서 잇따른 화재발생은 그야말로 불우했고, 당백전의 발행은 제 발등을 찍는 무리수였지만 경복궁 중건 자체는 왕조 국가에서 피할 수 없는 숙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원군은 해냈다. 지금도 전 세계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멋진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경복궁의 재탄생이다.

 

 

개혁의지 확고했고, 능력도 빼어났던 흥선대원군. 그러나 그에게 아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외교정책이다. 때는 바야흐로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열강들이 서로 뜯어먹기 바쁜 아주 살벌한 시기. 그렇지만 문 닫아 걸고 소중화만 외치는 조선은 그런 세계 정세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다. 심지어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개망신 당하고 수도 베이징까지 열리는 것을 눈으로 지켜보고도 말이다.

 

 

저 엄청난 격변의 시기를 연표로 확인하시라. 숨이 막힌다. 체급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먼저 문 열고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면 일본처럼 한 번 맞고 바로 생각을 돌려먹기라도 했어야 했다. 하지만 조선은 순진해도 너무 순진했고, 상대 국가들의 탐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조선 후기 이후 지나치게 사대로 흐른 대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큰나라 눈치만 살피다가 그 나라마저도 제 앞가림 못하는 것을 목격하고 일어난 멘붕. 그 멘탈붕괴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고, 눈치껏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야말로 무능했다. 정말 속상한 일이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명백한 조선의 패배였다. 그들은 실컷 불태우고 부수고 죽이고 훔쳐서 떠났다. 사상자와 우리측 피해를 생각하면 명백한 패배이건만, 이제 그만 가자~하고 가버린 그들을 '물리쳤다'고 여겼다. 그리고 여전히 통상수교거부... 다 잘 하고도 하나를 잘못하면 실기하기 쉬운 정치판에서 엄청난 판단오류이다. 그게 조선의 한계였다.

 

대원군에게 아쉬운 것은 이렇게 외교정책이지만, 대원군이 쇄국을 고집했다고 해서 바로 몰락했던 것은 아니다. 세도정치 60년 동안의 폐단을 과감히 도려냈던 카리스마 대원군의 진짜 천적은 며느리였다.  바로 고종비 민씨.

 

 

외척의 발호를 경계해서 '한미한' 가문에서 며느리를 들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세도정치를 경계하느라 믿을만한 가문을 선택했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부인 민씨 가문이었다. 민유중은 인현왕후 민씨의 아버지이다. 그 민유중의 5대손 민치록의 딸이 중전이 된 것이다. 비록 민치록은 죽었지만 어머니는 살아계셨고, 양오라비도 있었다. 양오라비 민승호는 대원군의 처남이기도 하다. 대원군은 이 간택을 완벽한 선택이라고 믿었겠지만 그가 후회했을 것처럼, 그리고 내 생각에도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민비가 스무살이 넘고도 친정을 하지 못하는 남편의 불만을 건드린 것은 나름 자신의 처세술로도 보인다. 대원군은 탁월한 개혁가에 정치가였지만, 그가 왕은 아니었다. 열다섯에 수렴청정도 거두었는데 그후 7년이나 더 섭정을 한 셈이다. 수술대 위에 올려진 조선의 갈 길이 너무 멀어 보였겠지만, 대왕대비처럼 물러날 때를 알아야 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지체하다가 그는 꼴사납게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가야할 때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대원군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애석하다. 대원군과 민비의 사이가 그렇게 나빠지지 않았더라면 이후 역사의 격동기에 조선 왕실은 조금은 덜 부끄러은 모습으로 대처하지 않았을까 하는, 하나마나한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면서 동시에 불평등조약인 강화도 조약의 체결과정을 보면 일본이 보인 고압적인 자세와 말도 안 되는 생떼와 물고 늘어지기에 잠시 혈압이 올랐다. 이제 서문 첫 글자 떼었을 뿐인데 벌써 이러면 곤란하지 싶어 호흡을 가다듬지만, 역시 화나는 건 화나는 일이다. 버럭버럭!!!

 

게다가 중국의 우산 아래 안전하게 머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조정 대신들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결코 낯설지 않기 때문에 역시 더더더더욱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난 누군가, 여긴 어딘가.....;;;;;

 

친정 이후 고종이 보여준 정치력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열두 살에 임금이 되어 정치밥 먹은지 벌써 십년도 더 되었으니 이 정도는 해줘야 기본이지만, 그동안 아버지와 마누라 기에 눌려 살았다고 생각한 이미지와는 다소 달랐다. 평범한 시절에 임금이 되었으면 보통 이상은 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랴. 시절이 평범하지 않은 것을. 각별히 불우한 시절에 임금이 되었으니 그 이상의 정치력을 보여줄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이었다. 그래서 생각보다 괜찮기는 했어도 역시 후한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내게 있어 고종은.

 

개화파들도 마찬가지다. 명문가의 자제에, 권세가의 자제에, 임금의 부마이기도 했던 젊은이까지 개혁에 나섰다. 일신의 영달만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 의도의 첫 순수함과 열정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방법이 잘못 됐다. 급진 개화파들이 모델로 삼은 일본의 메이지유신. 단순히 엘리트들이 정변으로 권력을 잡고 개혁을 진행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랜 존왕운동의 연장으로 '대중적 지지기반'이 있었고, 저항을 막아낼 자체의 무력이 있었다. 급진개화파에게는 둘 다 없었다. 위로부터의 개혁의 한계였다. 대중적 지지기반이 없는 개혁, 성공할 수가 없다. 오늘날 진보 운동 하는 사람들이 새겨볼 부분이다. 무지해서 생각 없이 1번 찍었다고 생각하면, 또 지는 거다.

 

역사는 거울이다. 과거를 통해 오늘을 진단하고, 미래를 예단한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미래도 가망이 없다. 망국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서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 이유이다.

 

저자 박시백은 이 시리즈를 '철종실록'에서 마무리 지어야 하는가 고민했다고 했다. 이후 실록은 일제 감정기에서 편찬되었기 때문에 일본의 개입이 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전 실록에서도 집권 당파나 세력의 입김은 작용했었다. 실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실을 담고 있고, 그러니 고종실록도 진행하는 게 마땅하다고 여긴 것이다. 다행히 오늘날에서 가까운 시기인지라 실록말고도 관련 기록이 아주 풍부하다. 당대 우리나라 사람뿐 아니라 외국인의 시선으로 기록한 객관적 자료들도 많다. 사진 자료도 있고 말이다. 참고문헌을 보니 독자 역시 보고 싶어지는 책이 많아서 다소 흥분되었다. 역으로 이런 도움이 가능하였군!

 

 

언제나 진지함과 핵심을 뚫는 정교한 실력을 보여주지만 유머도 결코 잊지 않는 박시백이다. 소매 폭을 줄이라는 고종의 명에 대한 사대부의 저 반응을 보시라. '스키니 소매'에 빵 터졌다. 이런 순간순간의 웃음은 자주 포착된다. 바로 이 맛에 초등 저학년만 벗어나면 누구에게든 권할 수 있는 책이 되었다. 많은 역사적 내용을 담고 있어서 글밥도 무척 많은 편이지만 지루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그리고 열심히 읽은 보람이 분명 차곡차곡 쌓이는 책이다. 세계가 인정한 이 방대한 역사 기록을 이렇게 읽기 편하게 정리해 주었는데, 이 정도 수고도 하지 않는다면 역사에 미안한 일이다. 닥치고 필독, 다시 한번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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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que 2013-02-20 1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고 사진에다 표시해도 될 것을 왜 아까운 책에다가 노랑 천지를..ㅠ

마노아 2013-02-20 16:14   좋아요 1 | URL
공부의 흔적인 거죠. 근데 제 책에 필기한 것을 지금 아까워하시는 건가요?
 
권력과 인간 - 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2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사도세자는 가시 같은 이름이다. 그의 진실이 무엇이건간에 일단 아프고 시작하는 이름이다. 그같은 감정은 정조에게도 동시에 이입된다.

 

이 책은 사도세자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그 비극적인 죽음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삶과 거기서 비롯된 역사에 대해서 무척 집요하게 추적하였다. 집필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 사료는 '한중록'이다. 원전을 꼼꼼히 살펴서 번역한 이전 저서(한중록)가 이 책의 중요한 주춧돌이 되었다.

 

저자는 기존에 인기를 끌었던 이덕일 씨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반박하면서 사도세자는 정신병에 걸린 것이 확실하다고 못을 박았다. 제시하는 사료들의 근거를 보다 보면은 저자의 주장에 수긍하게 된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영조가 더 큰 정신병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뒤주에 갇혀 죽기 전에 이미 사도세자는 고사된 상태였다. 어떻게 이렇게 철저히 아들을 저주하고 핍박하고 학대할 수가 있었을까.

 

심지어 영조는 백성들이 얼어 죽거나 주려 죽거나 가뭄 같은 천재지변이 생겨도 “소조에게 덕이 없어 이러하다”고 꾸중했다. 이 때문에 사도세자는 날이 조금 흐리거나 겨울에 천둥이라도 치면 임금이 또 무슨 꾸중이라도 할까 사사건건 두려워하며 떨었다.
– 142쪽
영조는 특별히 중요한 일로 질책하지도 않았다. 간병하는 세자의 옷매무새나 행전 친 모양 등을 가지고 꾸짖었다. 어머니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울부짖으며 정신을 못 차리는 세자에게 영조는 사소한 트집을 잡았다.
– 145쪽
궁궐이 피로 물든 시기였다. 영조는 이렇게 좋지 않은 자리에는 꼭 세자를 불렀다. 자기가 일을 끝내고 들어갈 때 세자가 없으면 늦은 시간이라도 꼭 불러 인사를 받았다. 그때 영조가 던진 인사는 고작 “밥 먹었냐”였다. 이는 영조가 그날의 불길한 기운을 씻으려는 행동이었다.
– 154쪽
영조는 세자의 외출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다.
– 161쪽
사도세자는 스물두 살이 되도록 능행 수가를 한 번도 못했다.
영조는 사형죄인을 심문하거나 죽이는 불길한 일에는 자주 세자를 불러 곁에 앉혔지만, 밝고 빛나는 경사에는 부르지 않았다.
– 162쪽
평소 영조는 미신적인 조짐이나 금기를 강하게 믿었는데, 그 속에서 세자는 늘 ‘재수 없는 존재’였다. 어쩔 수 없이 불길한 세자를 거둥에 끼웠더니 아니나 다를까 재변이 생겼다. 이에 세자를 향해 “날씨 이런 것이 다 네 탓이라, 도로 돌아가라”고 크게 화를 냈다는 것이다.
– 166쪽
『이재난고』 등에 의하면 영조는 환궁하면서 개선가를 연주하게 했다고 한다. 자식을 죽여놓고는 마치 적국을 평정한 것처럼 승전가를 연주하게 한 것이다. 신하들이 극구 말리는데도 영조는 듣지 않았다. 서울 사람들은 아들을 죽여놓고 역적을 토벌한 것처럼 개선가를 울리며 대로를 행진하는 득의양양한 영조를 보았다.
– 227쪽

 

 

액받이 무녀라도 되는지, 온갖 재수없는 액은 아들에게 모두 돌리고, 심지어 아들을 죽여놓고는 개선가를 연주하게 했다. 이 멘탈이 과연 정상적인 것일까?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에서도 이같은 영조의 정신 상태를 정신병으로 진단하는 것을 보았다. 사도세자에 앞서 그쪽이 내게는 더 설득력이 있다.

 

권력이라는 것이 참으로 비정하다. 나로서는 영조가 즉위하는 과정도 수상한 점이 많았고, 그랬기 때문에 더 비정상적으로 권력에 집착한 게 아닐까 의심이 간다. 정통성이 있었더라면, 스스로 콤플렉스에 잠식되지 않았더라면 사도세자가 그렇게 못마땅했을까 싶다. 더 큰 비극은 대를 이을 세손(정조)이 없었더라면, 영조가 이같이 비극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짐작에 정조가 가엾고, 지나치게 장수해서 아들 잡아먹기까지 오래 산 영조의 질긴 명줄도 얄궂다.

 

저자는 객관성과 사실적 분석에 대해서 무척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는데, 비판하는 대상들에 대한 근거들을 따져본다면 반박할 거리가 그다지 없어 보였다. 그런데 본인도 좀 치우치는 감은 있어 보였다. 경종의 불임에 대해서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죽기 전 하초를 잡아서라는 설이 있었다고, 굳이 필요하지 않은 대목을 써넣은 것도 그랬고, 정조의 즉위 일성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니라."를 해석하면서 ‘내가 비록 사도세자의 아들이긴 하지만, 영조께서 효장세자의 아들로 만들어놓았으니, 그것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뜻으로 말했다고 써놓았는데 별로 수긍이 가지 않는다. 좀 작위적인 느낌이다.

 

이 책을 읽은 지는 몇달이 지났는데, 뒤늦게 짧게나마 리뷰가 쓰고 싶었던 것은 대선을 지나면서 느낀 권력의 무참함 때문일 것이다. 이긴 자가 모든 것을 다 갖는, 그래서 권력을 가지면 모두를 얻고, 권력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이 살벌한 싸움이 연상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자식마저도 죽일 수 있는 무시무시한 권력의 비정함 말이다. 씁쓸하고, 슬프고, 갑갑하다.

 

책을 무척 꼼꼼하게 집필한 느낌이다. 근래에는 좀처럼 오타 없는 책을 볼 수가 없었는데, 이 책은 그런 면에서 매우 치밀했다.

 

65쪽 명나라에게 죄를 얻지도 않고 청나라를 화나게 하지도 않으려는 광해군의 등거리 외교를 비판하면서 >>>후금

318쪽 정순왕후는 권력을 놓은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서인지 수렴청정을 끝낸 일여 년 후 죽고 말았다.>>>'일년 여'가 더 자연스럽다.

 

딱 이 정도밖에 눈에 띄지 않는다. 원고도 완벽하게 쓰려고 했다는 느낌이 들고, 편집자도 무척 꼼꼼성실했던 게 아닐까 싶다.

 

작년에 저자분과 문학동네 회원들과 함께 창경궁과 창덕궁을 함께 거닐었는데, 그때 연재되었던 이 원고들을 먼저 읽고 보았더라면 좀 더 많은 것들을 담아 내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공부가 많이 되는 시간이었다. 뒤늦게 책을 읽어 복습을 했고, 더더 늦게 리뷰 도장을 찍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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