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릴로 프린치프 - 세기를 뒤흔든 청년
헨리크 레르 글.그림, 오숙은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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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총성이 울린다. 저격 대상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대공비. 대공비가 먼저 숨을 거뒀고, 총독 관저에 도착한 대공도 이어서 숨을 거뒀다. 이 사건은 안 그래도 화약통 같았던 발칸반도 위에 불씨를 떨어뜨린 결과가 되었으며, 정확히 한 달 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러시아가 세르비아의 뒤에 서서 역시 선전포고를 했고, 독일이 협상국 측으로, 협상국은 다시 동맹국 쪽으로 맞 선전고포를 하며 대 전쟁의 서막을 알렸다. 단기전으로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은 예상과 달리 장기전이 되었으며 전 세계를 큰 혼란으로 몰아가는, 인류 역사상 이전에 없던 큰 전쟁으로 귀결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이다. 사라예보에서의 총성이 없었어도 전쟁은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도화선이 된 것은 황태자 부부의 죽음이 맞고, 그 죽음을 가져온 청년은 세르비아의 가브릴로 프린치프다. 이 책의 주인공!


사건 당시 가브릴로는 19세였다. 오스트리아 법에 따라 미성년자였던 관계로 사형판결은 피했고 징역 20년을 선도받지만 전쟁이 끝나기 몇 달 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얼마만큼의 증오가 따라오면, 얼마만큼의 각오가 다짐되면 19세 청년이 이런 과격한 일을 벌일 수 있는 것일까? 하긴, 이재명 의사가 이완용을 찔렀을 때 스무 살이었고, 윤봉길 의사가 물폭탄을 던졌을 때는 24세였다. 100년 전의 세상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보다 좀 더 어린 사람이 좀 더 어른으로 인식되기는 했었다. 또 시절이 하수상할 때에는 일찍 철들 수밖에 없는 게 또 인간의 숙명이기도 하지만...



(그림으로는 절대 자기들 나이로 안 보인다. 거사 몇 년 전 연애 시작할 때의 모습인데 십대 중반의 나이로는 결코...;;;;)


발칸반도는 지정학적으로 강대국들의 먹잇감이 되기 좋았다. '녹색의 땅'이란 뜻 답게 푸르고 기후도 온화했고,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이 만나는 곳인지라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에 딱 좋았다. 늘 바다로 나갈 출구전략만 찾는 러시아의 눈독을 받아야 했고, 그런 러시아를 견제하는 영국이 중동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 밟아야 하는 땅이었다. 고대로부터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로마제국의 침략대상이었고, 훈족의 침입에 이어 십자군 전쟁 때도 살육의 현장이 되었으며, 칭기즈칸의 몽골군대도 어김 없이 지나간 땅이었다. 이런 복잡한 역사 덕분에 여러 민족이 섞여 살았고, 마찬가지로 여러 종교가 뒤섞였으며, 여기에 이념분쟁까지 끼어들었으니 유럽의 화약고란 표현이 결코 지나치지 않다. 


발칸반도는 400년 이상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중국에 이어 18세기까지는 세계 경제대국 2위를 자랑하던 나라였다. 하지만 청나라가 종이호랑이였다는 것이 증명되던 그 시점에 오스만 투르크도 맥없이 무릎을 꿇었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했고, 이탈리아에게도 졌다. 제국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본 발칸 반도의 여러 나라는 똘똘 뭉쳐서 오스만 투르크와 맞붙었다. 1912년 1차 발칸 전쟁이다. 전쟁은 어이없게도 두 달 만에 오스만 투르크의 패배로 끝났고, 이 늙은 제국은 발칸반도의 영토 대부분을 잃는다. 좀전까지 한 편이었지만, 발칸반도의 여러 나라들은 다시 분열해서 싸웠고, 마케도니아를 삼키려고 했던 불가리아가 다른 발칸반도 나라들에게 몰매를 맞는다. 1913년 2차 발칸전쟁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일년 전의 일이었다. 


전리품을 챙겼던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908년에 병합해 버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때문에 신경질이 난다. 남슬라브족의 왕국을 세울 기회를 오스트리아 때문에 놓쳤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후계자가 자신들이 놓쳤다고 여기는 땅 보스니아에 온다. 그것도 자신들이 오스만 투르크에 대항해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던 날짜, 비도브단의 날에 온다. 민족감정을 건드렸다는 이야기이다. 


무슨 근거없는 자신감이었을까. 자신들의 날개 아래에서 보스니아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여긴 것일까? 암살 위험에 대한 경고가 누차 제공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그것도 '그날'을 꼭 집어서 보스니아를 방문한 것은...


아무튼 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 황제는 아들은 자살, 아내(엘리자벳 황후)는 암살로 잃고 후계자로 내세운 조카마저도 잃었다. 그리고 거대한 전쟁이 시작되었고, 군인만 1000만 명 가까이 사망하고 부상자는 2천만 명이 넘으며 민간인 희생자도 1,100만 명을 아우르는 어마어마한 대전이 일어난다. 


물론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이 전쟁의 결과를 보기 전에 죽었다. 그러나 그가 살아서 이 전쟁의 결과를 안다 할지라도 그 자신의 행동을 후회할 것 같지는 않다. 그는 확실한 확신범이었으니까. 





거사에 참여한 일곱 명은 모두 '검은 손' 회원이었다.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이 그들의 모토였다. 아버지가 사제였던 트리프코 그라베주는 늘 아버지의 업신여김을 받곤 했는데, 그런 아버지가 아들이 하려는 일을 짐작하는 순간 지지해 주는 장면이다. 종교를 넘어서는 민족감정이 한편으로 섬뜩했다. 물론 민족을 뛰어넘는 종교는 더 끔찍하지만...



덴마크 만화가의 작품인데 그림체가 독특하다. 그래픽 노블 같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판화로 그린 것 같기도 한데 또 인물이 등장한 걸 보면 펜으로 그린 것 같고... 둘을 섞어서 작업했을지도. 확실히 가브릴로가 태어날 때를 묘사한 저 장면들은 판화 그림을 연상시킨다.


이 거대한 세계대전의 결과는 좀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전쟁에 불씨를 제공한 세르비아는 승전국이 되어 주변 나라들을 통합해서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 되었고, 곧 몬테네그로와 마케도니아 일부 지역까지 합쳐서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되었다.(유고슬라비아는 '남슬라브족의 나라'라는 뜻) 그 유고슬라비아가 지금은 없는 나라가 되었고, 다시 해체되기까지 인종청소까지 해가며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가를 생각하면 답답해진다. 그러니까 마치 독일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당연히 잘못한 일인데, 그 유대인이 세운 나라 이슬라엘이 지금 주변 나라들에게 하고 있는 학살을 생각하면......


의열단이나 한인애국단 같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을 대상으로 치룬 거사들은 그래 마땅했다고 여겨지는데, 낯선 이름들의 외국에서 일어난 이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심정적으로 모두 공감이 가질 않는다. 익숙하지 않은 것도 이유겠지만, 일단 그로 인해 일어난 파장이, 그 결과의 규모가 너무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만약 이 책에서 오스트리아의 압제가 이들에게 얼마나 가혹했는지, 또 세르비아와 마찬가지로 보스니아도 남슬라브족의 대통합을 간절히 바랐던 게 드러났다면 조금 다르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남슬라브 민족주의자이며, 오스트리아의 지배에서 해방된 범남슬라브족의 통일을 믿습니다. 

나는 테러로써 그 목표를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사악한 것을 파괴했으니, 나는 범죄자가 아닙니다. 

나는 내가 선한 일을 행하였다고 믿습니다.

우리 마음에서 생각이 자라났고, 그래서 우리는 암살을 결행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을 사랑했습니다.

우리 민족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나를 변론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1914년 10월 23일, 사라예보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범정 최후진술  -227쪽



민족주의는 언제나 뜨겁다. 청년의 피를 뜨겁게 달구기도 하고, 누군가의 광기를 자극하여서 집단 학살에 첨여하게도 만든다. 이것이 '애국심'과 결합하면 그 힘은 더 커지고 파괴력도 덩달아 커진다. 너무 없는 것도, 너무 많은 것도 문제가 되는 성질의 것이다. 


이런 혼란감을 주고 또 곱씹어 보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을 읽은 가치이며 또 메시지가 된다고 생각한다. 인류가 거쳐온 탐욕의 역사도 함께 보았다. 그리고 오늘따라 절절하게, 이 노래가 생각난다. 




존 레논 imagine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Ah -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

You may say that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Any You -

You may say that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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