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하루 - 실록과 사관이 미처 쓰지 못한 비밀의 역사 하루 시리즈
이한우 지음 / 김영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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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하루’라는 제목이 흥미를 돋운다. 조선의 지존이지만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그 왕의 하루가 어떠할지 관심이 갔다. 왕의 공적인 하루와 왕의 사적인 하루 역시도.

 

책은 세 개의 주제를 담아냈다. 1부는 ‘역사를 바꾼 운명의 하루’라는 제목으로 태조 이성계, 연산군 이융, 광해군 이혼, 소현세자 이왕과 정조 이산의 하루가 펼쳐졌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독자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은 다른 하루를 소개했다. 태조 이성계의 입을 빌려 저자는 그가 조선을 개국하던 그날까지도 고려의 중흥을 기대했고, 위화도 회군 역시 그가 새 왕조를 열 목적으로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늘의 뜻이었고 백성의 바람이었다고. 글쎄다. 그다지 동의가 되지는 않는다. 저자 스스로도 위화도 회군은 왕명을 어긴 정도가 아니라 반역이라고 말을 했으니.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문을 열었던 그날이 역사를 바꾼 운명의 하루였다는 것에는 물론 동의한다. 그러나 그가 그 순간까지도 고려의 중흥을 바랐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고려의 충신으로 시작을 했을지언정 그는 분명 새 왕조를 열었다. 그것도 주도적으로. 주변에서 팔 걷어붙이고 밀어붙였다 해도 그가 한사코 만류했다면 그는 고려의 마지막 신하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조선의 태조가 되었다고 해서 사적 탐욕으로 인한 결과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만큼 당시 고려가 썩어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내 본심은 그게 아니었다고 말을 하는 것은 어째 덜 당당해 보인다.

 

 

(민간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어버린 연산군 부부상이다.)

 

연산군 이융의 파멸은 그가 당한 것이 아니라 ‘자초’한 것이라고 그의 입술을 빌려 설명했다. 연산군이 아니니 장담할 수 없지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왕위에서 쫓겨날 무렵의 언행은 실로 비정상이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향응을 누리며 아주 퇴폐적으로 살았는데, 영화 ‘왕의 남자’에서 그려진 모습처럼 그는 행복해 보이기보다 애처로워 보였다. 그러니 소제목 ‘허무가 불러온 파멸’이란 제목도 잘 어울린다.

 

광해군 이혼의 하루는 연산군과 마찬가지로 그가 왕위에서 쫓겨나던 날을 묘사했다. 저자는 광해군의 입을 빌려 요사이 추켜세워지고 있는 그의 ‘중립외교정책’이 호도된 것이라고 표현한다. 과장된 재평가라는 것이다. 이 부분도 글쎄, 나는 너무 깎아내린 것이 아닌가 싶다. 과대평가된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잘 짚어낸 부분도 분명히 있는 것이다. 불필요한 전쟁을 두 번이나 일어나게 한 인조에 비한다면 그가 받아온 평가들은 그의 죄업보다 늘 가혹해 보였다. 그래서

 

내성외왕(內聖外王)에 다가가려 했던 선조의 꿈은 아들 광해군에 의해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119쪽

 

와 같은 표현은 동의할 수가 없다. 오히려 광해군에게 이런 불우한 업보를 남겨준 원죄는 선조에게 있다고 믿고 있다. 늦은 나이에 계비에게서 아들을 본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솔직히 어쩔 수 없었다고 여기지도 않지만) 자신의 적자 콤플렉스로 후왕의 불안감을 부추겨서는 안 되었다. 선조의 행실이 영창대군의 비극을 불러왔고, 이어서 광해군의 비극도 낳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서 이미 병자호란의 오욕이 싹튼 거라고.

 

 

(선조의 글씨와 그림이다.)

 

 

소현세자 이왕의 하루는 그가 죽던 날의 하루였다. 알려졌다시피 소현세자는 독살된 흔적으로 죽음을 당했다. 저자는 인조의 방조로 소현세자가 죽었다고 묘사했지만, ‘방조’는 좀 약한 표현이 아닌가 싶다. 인조의 주도로 진행되었지만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렸다는 게 맞지 않을까? 세자가 죽은 뒤 이루어진 뒤처리를 본다면 말이다. 사실 인조가 직접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아들을 죽인다는 것 자체로도 이미 말은 안 되지만, 권력이란 부자 사이에서도 나눌 수 없는 무서운 습성을 지녔으니. 저자는 숙종 대에 가서야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이 신원되는 것을 두고 소현세자 이후 왕실의 아들이 귀해진 것을 ‘저주’로 보고 그것을 풀려고 한 노력이라고 보았다. 조선 왕조 내내 적자로 왕위가 계승된 사례가 그다지 없기도 하지만 확실히 후기로 가서는 아들이 무척 귀해진다. 그래도 숙종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는 표현은 너무 단정적인 게 아닐까 싶다. 강빈의 신원에 대한 이야기는 숙종 이전에도 나왔지만 차마 하지 못했던 것이고, 숙종 때에 가서는 보다 자유로워진 까닭이지 싶다. 왕권도 그만큼 강해졌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정조 이산의 하루에 대해서 묘사했다. 역시 숨을 거두던 날의 하루다. 그가 독살되었다는 수많은 의혹을 부정하며 노론 벽파에 의한 타살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직접적인 타살은 아니어도 그가 받은 스트레스가 사인이 되었을 수는 있다고 여기지만.

 

다섯 군주의 역사적 하루에 대해서 묘사한 부분은 길지 않다. 나머지는 그 임금들의 역사적 하루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길게 설명했다. 역사적 맥락이 있어야 그 극적인 하루도 설명이 될 테니 말이다. 이 부분에서 나로서는 기존에 읽었던 여러 역사책들과 내용이 많이 중첩되어서 다소 지루한 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을 처음 만나는 독자라면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2부는 ‘군신이 격돌한 전쟁의 하루’라는 제목으로 전개된다. 이방원과 정도전 편에서는 혁명 동지들의 비극적 결별을 다루었고, 수양과 김종서 그리고 한명회 편에서는 군신 대립의 뿌리를 찾았다. 성종이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한명회에 맞서 대립하는 장면에서 잠시 응원하는 마음도 생겼지만, 결국 한명회의 승리로 끝나고 말아서 애석함을 느꼈다. 자유로울 수 없는 권력의 뿌리였던 것이다. 그에 비한다면 태종은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혁명 동지를 베어버림으로써 후세에 남을 빚을 스스로 갚아버렸으니 그 결단력이 대단해 보인다. 그에게 희생된 사람들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명회가 등장했으니 수양대군의 계유정난도 같이 소개되는 게 마땅하다. 똑같이 작전이 사전에 세어나가서 위기를 맞았는데, 뽑은 칼을 휘두른 세조는 왕이 되었고, 계획을 뒤로 미룬 단종 복위 세력은 사육신이라는 이름을 남기고 죽었다. 후세에 이름은 남겼지만 중대한 결정 앞에서 문신의 머뭇거림과 무신의 결단력이 대조되는 순간이라 안타까웠다.

 

이런 대조성은 중종과 조광조 편에서도 소개된다. 성리학적 이상 세계를 꿈꾼 조광조와 왕권 강화를 꿈꾸며 그의 손을 빌린 중종의 길은 어긋날 수밖에 없다. 속전속결로 덤벼야 할 일도 있지만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이고 인내를 키워야 하는 일도 분명히 있다. 서둘러 왕권을 강화하려던 예종이 의문스럽게 죽었고, 서둘러 훈구파에 대항해 사림파를 키우려 했던 조광조도 기묘사화와 함께 스러졌다. 그러나 또 오묘하게도, 조광조는 이후 조선의 역사에서 내내 추앙받았고, 제자리걸음으로 왕위를 지키기에만 급급했던 중종은 사관으로부터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문묘는 공자를 비롯한 5성(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으로부터 공문십철(공자의 뛰어난 열 제자)과 송나라 때의 주자학자 6명을 기리면서, 동시에 신라의 설총과 최치원에서 고려의 안향과 정몽주 그리고 조선의 유학자들을 모시는 곳이었다. 따라서 서인들은 종묘보다는 문묘에 배향되는 것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했고, 당파의 문묘 배향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거는 적극성을 보이게 되었다. -268쪽

 

유교의 나라 조선이니 문묘 배향이 민감한 것은 당연했다. 저자는 서인과 문묘 배향 편에서 군주를 초월한 공자의 권위에 대해서 다뤘는데 이 부분이 가장 재밌게 읽혔다. 종묘에 배향되는 것보다 문묘에 배향되는 것을 더 영예롭게 여겼던 서인들이니 군권보다 신권을 더 위에 놓았다는 평가가 적절해 보인다. 그러니 그들의 권력욕이 의문사를 의심케 하는 임금들의 죽음으로 이어졌다는 관점들도 지나치게 보이지 않는다. 신하들은 종묘 배향을 두고 싸웠고, 그들이 여기에 목숨을 거니 그걸 이용해서 줄다리기를 하는 임금도 당연히 나왔다. 인조와 숙종이 그랬다. 확실히 남의 손으로 왕이 된 중종의 반정과 제 손으로 왕위를 차지한 인조의 반정은 격이 달랐다. 주도권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인조는 적절히 밀당을 하면서 제 권력을 지켰고 이이와 성혼의 문묘 배향을 허락하지 않았다. 반면 숙종은 배향을 허락하되, 정권이 바뀌면 제 말과 행동을 뒤집었다. 왕권을 높일 수만 있다면 언사를 뒤집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숙종이었다. 그의 왕권은 높아갔지만 정치질서는 무너졌고, 그가 부추기거나 방조했던 탓에 서인과 남인은 죽고 죽이는 관계로 정착되어갔다. 인조만큼이나 나쁜 임금이다.

 

마지막으로 왕과 실록 편에서는 역사를 두고 벌이는 전쟁을 담아냈다. 역사전쟁!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 기록 유산에도 등재된 만큼, ≪조선왕조실록≫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치열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사관들이 왕권에 맞서 지켜낸 그 결기도 존경스럽다. 그리고 그 가치 앞에서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은 태종의 결정도 멋졌다. 좋은 선례가 이후 조선왕조의 역사 줄기를 바로 잡아준 것이다. 그런 까닭에, 대선 결과가 나오자마자 5.16이 쿠데타에서 ‘혁명’으로 둔갑하는 작금의 사태가 심란하기 짝이 없다. ≪월간 박정희≫가 복간되는 판이니 앞으로 놀라고 한숨 쉴 일은 꽤 많을 테지만.

 

3부는 ‘하루’라는 의미에서 가장 이 책의 주제에 잘 맞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 왕의 첫날이 되는 ‘즉위식’과 왕으로 다듬어 가는 제왕학 수련, 그리고 정치 행위의 결정체로 꼽힐 ‘왕의 결혼’, 그리고 묘호에 담긴 정치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이 내용들은 모두 조선 전체 임금에 대해서 짧게나마 언급하고 지나갔기 때문에 그 자체로 또 하나의 통사이자 주제사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권력 앞에 선 아버지와 아들들’이라는 제목으로 부자 사이의 권력 다툼에 대해서 다뤘다. 영조와 사도세자, 태조와 태종과 달리 효심이 깊었던 세종과 문종의 이야기도 소개되었다. 세조 역시 세종에게는 효를 다했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세조만큼 큰 불효자가 있나 싶다. 역시 무척 아이러니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공효와 사효가 충돌한 정조에 대해서 소개하고 책이 끝났는데 마무리가 좀 급작스럽게 느껴졌다. 뭔가 좀 더 뒷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말이다.

 

책을 다 읽는데 꽤 오래 걸렸다. 제목은 무척 흥미로웠는데 기존에 읽었던 역사서와 중첩되는 부분들이 많아서 진도가 조금 더뎠고, 이번 한주는 얼마나 폭풍같은 날들이었던가. (하아, 잠시 한숨 좀 쉬고 지나가자....) 때로 저자의 의견에 동의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그런 것들은 각자 생각이 다른 것이니 얼마든지 서로 이야기할 거리가 되어줄 것이다. 아쉬운 대목들이 있는데 좀 옮겨보겠다.

 

72

성균관에 입학하게 될 경우 외부 사람들을 만나면서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에 관해 어떤 식으로건 듣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성균관에 입학을 해도 형식적인 것일 뿐, 등하교를 하는 게 아닐 것 같은데 좀 이상하다.

274

숙종 대 말인 1712년 유생 1,000여 명이 상소해 청하면서 김장생의 문묘 배향 운동이 시작됐다. 이때는 숙종이 친왕적인 소론을 물리치고 노론과의 타협을 시도할 때였다. 결국 운동을 시작한 지 5년 만인 1717년 상소가 받아들여져 문묘의 동무에 배향됐다. 동무란 문묘의 정면을 바라보고 오른쪽을 말한다. 왼쪽보다 더 권위 있는 자리다.

>>>문묘 입장에서 왼쪽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나 싶다. 조선에선 왼쪽이 더 권위 있는 자리이니까.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높은 것처럼.

304

단종의 경우 역시 눈물의 즉위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수양과 안평대군 등 권좌를 노리는 숙부들이 도사리고 있는 가운데

>>> 안평대군도 수양과 마찬가지로 권좌를 노렸던 것일까?

309

정조가 영조의 유언을 무시하고 폐묘를 쓴 것을 생각한다면

>>> 폐묘를 썼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329

≪대학≫보다 ≪소학≫을 중시한다는 것은 왕권보다는 신권 중심의 세계관이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이유가 궁금하다. 어떤 면에서 그렇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343

그 후 신씨(연산군의 비)는 중종의 배려 속에 편안한 삶을 살다가 1537년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부적절한 표현 같다. 편안한 삶이었을 리가. 그냥 천수를 누렸다 정도가 맞아 보인다.

363

왕위는 사실상 세자 역할을 해왔던 후궁 소생 광해군이 이었다.

>>> 사실상 세자 역할이라니, 실제로 세자였지 않은가. 무려 17년이나.

364

그나마 (광해군은) 67세까지 천수를 누렸다는 점에서 곧바로 죽임을 당한 연산군과는 차이가 있었다.

>>>연산군은 병사가 아니었나? 타살이었나?

365

한마디로 영조 이후의 묘호는 엉망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에 따른 왕실 권위의 추락과도 무관하지 않다.

>>>영종이 영조가 되고 정종이 정조가 된 것은 고종이 황제가 됨으로서 추존하여 바뀐 게 아니었던가?

383

왕위는 이복동생 적자 명종에게 넘어간다.

>>>인종도 적자였는데 굳이 명종 앞에 ‘적자’라고 붙이는 건 적절치 않아 보인다.

 

외삼촌 윤원형의 폭정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효자라고 평하기는 곤란하다.

>>>윤원형 폭정 시대는 일부러 연 것이 아니고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는데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그리 된 게 아닌가? 열 두살 명종이 어머니를 어떻게 거스르나? 그로 인해 불효자가 된다는 건 좀 납득이 안 된다.

383

선조의 길이 아닌, 성종의 길을 따른 것이다.

>>인조가 선조의 길이 아닌 성종의 길을 따랐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수정했으면 하는 부분들이 있다.

 

51

홍산에서 대승를 거둔>>> 대승을 거둔

70

연산군의 ‘친모’ 역할을 했던 정혜왕후 윤씨>>정현왕후

99

신성군과 신립은 둘 다 임진왜란이 터지던 해에 세상을 떠나지만이 혼인은>>>떠나지만 이 혼인은

136

1636년 조선 조정은 군왕의 장남 소현세자와 차남 봉림대군을 청의 수도 심양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1637년

153

이조판서이나 병조판서를>>>이조판서나

172

밖에서는 둘째 형님인 익안공 이방의와 셋째 형님인 회안공 이방간이>>>셋째 형님과 넷째 형님으로 수정

207

군권을 통괄하는 중외병마 도통사>>>내외병마로 검색이 되던데 어느 게 맞는지 모르겠다.

222

예종의 분경 엄단 지시는 구체적으로 ‘종친, 재추, 공신’를 찍어서 >>>공신을 찍어서

233

한명회가 그만큼 중국 사신 정동와 밀착해 >>> 정동과

286

전주에는 실록뿐 아니라 경기전에서 태조의 어진도 모신 경기전도 있었다.>>> 경기전 중복

287

1599년 마침내 7년 전쟁은 끝났다. >> 1598년이 아니라?

299

원상 제도는 어린 성종이 즉위할 때 수렴청정의 보완 방식으로 설치된 임시 제도다.

>>> 예종 때부터라고 알고 있다. 제도로 확립되기 전에는 단종 때의 김종서가 해당되기도 하고...

304

권력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1455년 윤6월 11일 경복궁 사정전에서 노산군을 알현한 후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갖는다.

>>>이때는 노산군이 아니라 ‘상왕’

323

세조는 당시의 석학들을 불러모아 함께 ≪주역≫을 읽고 읽기 편하도록 >>> 읽고의 중복. 쉼표가 들어가거나 다듬을 필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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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반정, 나는 이렇게 본다 보리 한국사 2
김용심 지음 / 보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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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보리 한국사’ 시리즈는 역사를 읽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고 시작한다. 우리가 사는 나쁜 세상을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이들이 먼저 읽어야 함을 강조한다. 있을 것은 있게 만들고 없을 것은 없게 만드는 그 세상,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변화를 촉구하며 책장을 넘겨본다. 이 조차도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작은 노력일 거라고 믿으며.

 

시리즈의 첫 책은 “선조, 나는 이렇게 본다” 였다. 의미 있게 읽었지만 정작 리뷰는 쓰지 못했다. 그래서 두 번째 책인 이 책도 그렇게 지나치게 될까 봐 조바심을 내며 얼른 책을 펴 들었다. ‘나는 이렇게 본다’ 시리즈의 두 번째 대상은 문체반정이다. '문체반정'이란 당시 유행하던 소설 문체를 엄격하게 금하는 문화 정책이다. 사실 정조 시대에는 이 사건을 ‘반정’이라는 지극히 정치적인 용어로 표현하지 않았다. 이 단어는 후대 학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그만큼 이 사건이 문화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이라는 반증일 것이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정조는 호학군주였다. 학문의 깊이도 깊었고 그 박학함도 누군가의 추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본시 책읽기를 즐겨했던 성품으로 느껴지지만 아비를 잃고 살얼음 같은 세손 시절을 지나 왕위에 오르기까지 느껴야 했던 지극한 생명의 위험이 그를 더더욱 밤을 새워 책을 읽게 만들었을 것이다. 온 조정이 자신을 죄인의 아들이라며 쫓아내려고 하는 형국에서 그는 그 어떤 꼬투리도 잡히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사도세자가 죽음에 이르던 그 날 아침까지도 엮어서 펴냈던 소설책과 같은 소품을 정조는 결코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다. 아비와의 차이점도 증명해야 했지만 정조 자신의 성향도 소품에는 취미가 없었다. 오히려 재미도 모르고 도움도 안 되는, 쓸모없는 존재로 여겼을 것이다. 소품류의 수입도 금할 만큼 치를 떨었지만 그렇다고 정말 세상에서 소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고, 그걸 원했던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정조에게는 이 문체반정이 필요했다. 누군가는 이것을 명백한 사상통제로 보고 또 누군가는 이를 통해서 노론의 공격으로부터 남인을 지켜내기 위함이라고 보았는데, 내 생각에는 둘 모두를 원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소품체를 썼던 관료들에게 자송문(반성문)을 내게 했고, 벼슬을 빼앗았다가 되돌려주기도 했다. 명백히 사상적 탄압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또 이때 정조로부터 꾸중을 들은 인사들이 노론 인사였고, 이가환 등에 대한 공격을 너희 노론들이 고전(성리학)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게 더 큰 잘못이라고 받아친 것도 정조였다. 얼마 전에 발견된 그의 비밀 어찰에서는 심지어 그가 그렇게 파르르 떨던 소품 형식의 문체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니 정조가 정이라고 믿는, 바름이라고 믿고 있는 가치 성리학으로 올곧이 나아갈 것을 원했던 이 고지식한 임금님께 문체반정은 꼭 필요했던 수단으로 보인다.

 

자, 임금이 문체반정을 선포했다. 문체가 바르지 않아 세상 풍속이 바뀌었다고 선전포고를 했으니 싸워야 할 대상도 필요하다. 정조는 이 뒤엎어야 할 문체의 중심에 박지원이 있다고 꼭 집어서 이야기했다. 열하일기로 연암체를 선보인 이 거장이 임금의 레이더 망에 바로 걸린 것이다. 그리고 또 한명, 이옥이 있다. 일개 유생에 불과했지만 번번이 임금의 예리한 검열에 걸려 장원에 급제하고도 꼴찌로 밀려나기도 했던 불우한 사나이. 책은 그렇게 세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 시기에 있었던 치열한 문체 싸움을 전달하고 있다. 그 시대가 어떤 사회였는지,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은 각자 어떤 창과 방패를 들고 싸웠는지를 말이다.

 

생각해 보면 정조처럼 문체의 의미를, 곧 글쓰기의 의미를 과대평가한 임금은 없다. 순진하게도 정조는 문체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같은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고칠 수 있다고 믿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또한, 정조처럼 문체를 과소평가한 임금도 없다. 정조는 위로부터 개혁을 통해 얼마든지 문체가 바뀐다고 보았기에 문체반정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문체라는 것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스스로 움직인다는 사실, 임금 개인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힘과 의지가 들어가야 비로소 변화한다는 사실을 정조는 간과하고 있었다. 문체가 가지고 있는, 스스로 살아 숨 쉬는 힘을 결정적으로 과소평가한 것이다. -206쪽

 

진정 정조는 누구보다 문체를 과대평가했고, 또 동시에 과소평가했다. 그를 가리켜 개혁군주라 일컫는 것에 굳이 거부반응을 보이지는 않지만, 그가 그 시대를 극복해내지 못했다는 것에는 공감한다. 자연인으로서의 그에게 가지는 애틋함과 달리 정치인으로서의 그는 아무래도 봉건 군주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거기까지는 가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자, 박지원 얘기를 해보자. 문체를 어지럽히는 주범으로 지목된 이 사나이는 임금이 써서 올리라고 하는 순정한 문체를 거부한다. 너무 잘못해서 반성문도 쓰지 못하겠다고 능청스럽게 빠져나갔던 이 인물에게 정조는 면전에서 글을 써내라고 명을 내렸다. 거기에 대해서 박지원은 과연 임금이 원하는 글을 써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이 괴짜 양반은 오히려 가장 소품스런 글을 써서 올린다. 무인 이방익이 중국에서 표류했다가 돌아온 이야기를 쓰면서 연암은 이방익의 아버지 이광빈의 일본 표류기로 역공을 펼친다. 물론 여기에 대해 정조가 어떤 보복성 징계를 한 바는 없다. 오히려 풋!하고 웃음을 터트리지 않았을까 상상하게 된다. ‘철즙을 물들이지 않았더라’로 대표되는 이광빈의 이야기는 이 책 속의 또 다른 이야기로 등장하며 독자의 관심을 확 사로잡는다. 그러나 그보다 더 독자의 심금을 울린 것은 '열녀전'이었다.

 

박지원은 몇 편의 열녀전을 쓴 바 있다. 기존의 사대부들이 쓰곤 했던 열녀전과 크게 다를 바 없었던 초기 열녀전과 달리 마지막에 그가 쓴 열녀전은 놀라운 차이점을 보인다.

 

하지만 꼼꼼히 따져 보면 이것은 정말로 열녀를 기록하는 글이 아니다. 왜냐하면 첫 부분부터 열녀는 ‘제대로’ 소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아무개 둘째 딸 신 씨, 아무개 첫째 부인 박 씨” 하는 식으로 그 아버지나 남편의 이름으로 소개된다. 정작 본인은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것이다. 중간 부분도 마찬가지. (...) 오로지 얼마나 남편을, 시댁 어른을, 자식과 살림을 잘 돌보는지만 적어 내려간다. 마지막 부분 또한 거의 다 “군자 왈, 이 열녀의 지극한 정절을 깊이 치하하노니......”로 시작되는, 글을 쓴 남성의 평가로 끝난다. 가장 여성답다는 열녀전의 기록이 완벽하게 남자의 눈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결말도 언제나 똑같아서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이 최고의 열녀라고 부르짖으며 끝을 맺는다. 그러니 여자들이여, 모두 열녀가 되어 그 한 몸 죽여서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자! 그렇게 거창하게 외치는 지극히 가부장적인 글. 이른바 과부의 ‘죽음’을 조장하는 글이 바로 열녀전인 것이다. -141쪽

 

이름조차 제대로 소개되지 않는 열녀전의 주인공인 그녀들은 자신의 이야기는 없는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오로지 시댁 식구들을 위한 희생양으로 살다가 마지막까지 사대부 남자의 평가로 끝맺음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그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목숨으로 값을 치러야 했다. 그 희생의 악순환을 박지원은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런 악순환의 한축을 자신이 담당했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하여, 박지원은 새로운 열녀전을 썼다. 무려 과부의 ‘욕망’이 등장하는, 온전히 그녀가 주인공인 열녀전을 말이다.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명백하다. 조선이라는 나라에 이어지고 있는 이 인습을, 억압된 관습의 문제점을 낱낱이 고발한 것이다. 그런 글은 임금이 강조하는 순정한 문체로 쓸 수 없었다. 그는 이미 명이 다해 가고 있는 고전 경서의 낡은 문체를 끌어안고, 여전히 성리학 질서에서 비켜가지 않는 이상 정치를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임금에게 던지는 반성 아닌 반성문, 동시에 최고의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물론 이 열녀전이 임금께 올려진 글은 아니었지만.

 

이제 이옥에게로 가보자. 그동안 내가 접한 이옥의 이야기는 그를 시대의 희생양, 가련한 피해자로만 보았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소개된 이옥은 비록 문체반정의 최대 피해자이긴 하더라도 그로 인해 불행해진 사내로 보이지는 않는다. 과거 시험에만 매달리던 젊은 시절에 그가 가졌을 낭패감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는 벌을 받아 충군에 동원되었을 때조차 그 자신의 문체를 버리지 않았고 더더욱 탐닉하는 모습을 보였다.

 

궁한 사내, 남쪽 동네에서 남몰래 한탄하고

나이 많은 처녀, 북쪽 대궐에 알려졌네.

여러 재상들, 서쪽 성에서 혼례 일을 맡고

정겨운 부부, 동쪽 평상에서 은혜에 감격하네. -166쪽

 

나라가 나서서 가난한 처녀총각들을 혼인시켜주었는데, 그만 실수록 누락된 노총각이 드디어 장가가게 된 장면을 ‘희곡’으로 그려냈다. 사방위가 대구를 이루며 그날의 경쾌함을 눈에 선하게 그려내었다.

 

“이 달이 무슨 달인가? 눈앞에는 아지랑이가 흔들흔들, 푸른 사초 둑에는 새 잎이 뾰족뾰족, 물억새는 서걱서걱 소리를 내고, 종달새는 세 발까지 날아오르는 달. 그런데 삼 년 묵은 말가죽만 오호롱 지호롱. 늙은 도령의 심사, 이에 참기 어렵구나.” -167쪽

 

이쯤 되면 이 노총각이 얼마나 마음이 달떴는지 충분히 짐작이 갈 것이다. 노총각만 그랬겠는가. 마침내 시집가게 된 노처녀의 마음 또한 왈랑거려 참을 수가 없다. 오죽하면 멍멍이를 붙들고 내일모레 시집간다고 자랑을 했을까.

 

이옥의 글은 생명이 있었다. 벼룩에게 물리는 순간을 읊은 다음 글을 보시라.

 

마치 은바늘로 터진 솔기를 꿰매는 듯

재빨리 살갗을 파고드는데,

장미꽃에 잘못 부딪혀

붉은 가시에 살갗이 찔린 듯

피와 신경이 놀라고 자지러져

사람으로 하여금 배겨내지 못하게 한다.

 

이에 손톱으로 쳐 누르자

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 창자는 볼 수 없고

다만 한 떨기 복사꽃 같은 피가 보였다.

이옥, ≪경금소부≫, <벼룩을 읊은 부> -234쪽

 

진짜 눈앞에서 벼룩이 살갗을 물어뜯는 현장을 목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가. 마지막에 한 떨기 복사꽃으로 피어난 핏방울까지,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자극하는 글솜씨다. 이런 글쓰기에서 자부심을 느낄, 재미와 만족을 느낄 사나이에게 고전 문체로만 글을 쓰라고 하니, 그야말로 생고문이 아닐 수 없다.

 

정조가 고전 문체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면, 이옥은 그 반대편에 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유롭고 창의력이 넘치는, 생명이 돋아나는 그런 새 문체를 갈고 닦은 이옥, 그리고 그 중간에서 조화로움을 추구했던 박지원까지.

 

여기, 18세기에 가장 치열하게 문체를 두고 고민한 세 사람이 놓여 있다. 얼음 갑옷을 입고서 뜨거운 태양빛에 제 몸을 내던졌던 임금 정조. 얼음이 녹아 내려가도 결코 포기할 줄 몰랐던 강철 사나이에게 글은 ‘바른’ 것이었다. 바른 것이어야 했다. 그리고 박지원은 누더기를 걸친 채 살아있는 햇볕을 즐겼다. 그리고 두 눈을 부릅뜨고 세상의 흐름을 지켜보았다. 마지막으로 이옥은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흐르면서 자신의 뜻을, 자신의 글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언젠가 자신이 입은 허름한 홑옷이 쓸려가는 날, 진정으로 ‘멋진’ 비단옷의 가치가 드러날 것을 믿었다. 그러니 그는 불행하지 않은 사나이였다.

 

격변의 시기를 살았던 세 사람을 둘러싼 문체반정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했다. 지금 왜 우리가 그 시절의 문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생각해볼 일이다. 앞서 이 역사 시리즈의 출간의 변을 언급했다. 왜 역사를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렇다면 어떤 문체를 써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저자는 이렇게 풀어냈다.

 

우리는 흔히 무언가를 바꾸거나 개혁할 때 “천명을 받았다”, 또는 “혁명을 일으켰다” 같은 말을 쓰지요. 비슷해 보이는 두 말은 그러나 전혀 다른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천명은 대개 왕이나 천자, 영웅 들이 받습니다. 왕은 하늘의 자식이라거나, 하늘이 내려준 최고의 영웅 같은 말들은 다 이 천명을 받아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때의 천명은 하늘 천(天)을 써서 사람이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운명을 뜻하지요. 그런데 그런 것을 사람이 고칠 수 있다, 바꿀 수 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바로 혁명입니다. 여기서 혁은 가죽 혁(革)을 씁니다. 가죽은 그냥은 쓸 수 없고 꼭 사람이 손질을 해서 써야 하지요. 곧 천명을 손질할 수 있다, 천명을 바꿀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혁명인 것입니다. -256쪽

 

천명에 가까웠던 정조는 문체를 바꾸려 하였지만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 문체를 바꿔낸 이들은 가죽을 손질할 수 있는 사람들, 곧 평범한 백성들이었다. 그리고 이는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조금씩 문체를 바꾸고 현실을 바꾸고, 그렇게 더 나은 세상,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게 우리의 소명이다. 그것이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책임이자 기쁨이다.

 

제법 딱딱할 법한 주제건만 기대 이상으로 이 책은 재미있다. 소개되는 인물들이 워낙 입체적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입과 손을 빌려 읽게 되는 글들이 또 하나의 이야기 세계를 창조해 냈다. 적절히 문답법을 섞어서 쓰는 저자의 글솜씨도 재미에 큰몫을 담당했다. 부록으로는 문체반정이 진행되는 와중에 정조가 노론 신하와 나눈 대담이 소개되고 있다. 이 말발도 좋고 글발도 좋은 임금님이 작정하고 덤벼든 신하 하나를 어떻게 요리해내는지 그 솜씨 한 번 구경해 보시라. 두 번째 부록은 ‘빨간펜’ 선생님 정조가 자신의 글을 밑줄 그어가며 수정하고 풀이하는 가상의 글잔치 쯤으로 여기면 되겠다. 과연 정조는 자신의 날카로운 검열을 어찌 피해갈 것인가. 세 번째 부록은 ≪조선왕조실록≫ 속 문체반정에 관한 기록들을 발췌한 것이다. 은근히 실록을 읽는 것도 재밌는 일이다. 그 방대한 양을 다 읽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관심 가는 부분을 뽑아 읽는 정도의 노력이라면 말이다. 아시아 1위, 그리고 세계 5위에 빛나는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을 가진 나라의 국민으로서, 한 번 도전해볼 법한 노력이라 하겠다.

 

이 책의 시리즈는 10권으로 기획되었다고 한다. 선조와 정조의 문체반정이 출간되었고, 근간으로 동학과 김삿갓이 대기 중이라고 한다. 관심 가는 내용들이다. 다음 시리즈도 충분히 기대해 본다.

 

덧글) 무척 즐거운 독서였지만 원문 인용의 녹색이 눈을 피로하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게다가 색도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아서 더 힘들었다. 책이 많이 팔려서 다음 쇄에는 폰트 수정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역사책도 아주아주 잘 팔리는 우리네 책문화를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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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10-26 0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조와 박지원이 있었다지만,
모두 '한문'으로 하는 문체반정이었을 뿐,
삶으로 파고들지는 못했어요.

박지원이 농민을 안타까이 여기는 시를 쓰기는 했어도
스스로 농민이 안 되었을 뿐더러
농민들이 쓰는 '한국말'로 글을 쓴 적도 없어요.
언제나 한문으로 '권력자'와 '지식인'한테 보여주는 글만 썼지요.

문체반정이란 무엇일까요.

마노아 2012-10-26 23:09   좋아요 0 | URL
정조보다는 박지원이 앞으로 나아갔고, 그보다는 이옥이 훨씬 더 많이 나아간 것 같아요.
자신의 계급을 극복해내지 못한 한계성은 그 시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것 같고, 그래도 그 중에서 박지원은 좀 나은 편 아닐까요? 적어도 그 백성들의 삶을 들여다보려고 애썼잖아요.

숲노래 2012-10-28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민들을 가엾게 여기는 글을 쓰기는 하되
농민이 읽을 수 없는 한문으로 쓰던 예전 분들은
처음부터 아예 농민이 읽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던 임금들보다
조금 더 나은 편이라 할 테지만,
'좀 나은 편'이라고 해서 백성과 함께 살았을까...는 잘 모르겠어요.

스스로 계급을 털지 못한 한계는 '대다수'가 아니라 '모두'이지 싶어요.
맹사성 같은 사람을 빼고는
아마 '모두'가 아니랴 싶어요.

왜냐하면, 스스로 농사지어 밥먹던 지식인은 거의 찾아볼 수 없거든요.

마노아 2012-10-29 20:34   좋아요 0 | URL
글 잘 읽었어요. 옳은 말씀이에요.

2012-10-30 0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30 0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식탁 위의 세계사 창비청소년문고 5
이영숙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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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길에는 지하철에서 내려서 버스로 갈아탄다. 그때 질러가기 위해서 교보문고를 휙 지나가는데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핸드폰에 제목을 저장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내 보관함에 이미 이 책이 있다. 먼저 찍어놓고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나와 만날 책이었나보다.^^

 

 

200쪽이 채 되지 않는 가벼운 책이다. 말투도 엄마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 더 가볍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다루는 역사 이야기까지 가벼운 것은 아니다. 식탁 위에서 마주치는 것들 속에 담겨 있는 역사 이야기지만 식탁 위에서 가볍게 버려질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사실, 입으로 들어가는 먹는 것이 차지하는 중대함이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법! 표지에 이 책에서 다룰 소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위트가 넘친다.

 

첫번째 이야기는 감자에서 시작했다. 감자라면 응당 아일랜드가 떠오르기 마련, 역시나 아일랜드 사람들의 한을 다루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감자가 유럽으로 전해졌을 때는 그야말로 찬밥 신세였다. 악마의 음식 취급을 받으며 괄시 당하던 감자가 어느덧 식탁을 점령하며 가난한 이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는 고마운 식량이 되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기대를 했음일까. 그 감자가 병충해를 입으며 아일랜드는 대기근을 겪었다. 그리고 그때 영국이 취한 행동은 아일랜드인들의 민족 감정을 건드렸다. 오늘날까지 사이가 좋지 않은 두 나라의 관계가 흡사 일본과 우리나라를 보는 느낌이다. 간밤 버터에 노릇하게 구운 감자를 늦은 시간에 먹으면서 죄책감을 느꼈고, 그렇지만 그 황홀한 맛에 만족감을 느꼈는데, 책 속에서 다시 만나는 감자의 녹록치 않은 역사를 보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영국 여왕이 아일랜드 땅을 밟은 저 역사적인 사진은 무려 백년 만의 발자취였다. 사진의 구도는 빌리 브란트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 사진만큼 감동적이지는 않다.

 

두번째 이야기는 소금이었다. 가장 중요한 금 세 가지에서 황금과 어깨를 견주는, 아니 사실은 그보다 더 중한 소금의 이야기이다. 이번 이야기를 아주 감동적으로 이끌어준 인물은 간디였다. 마하트마 간디, 그 위대한 영혼의 눈물 겨운 투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생산한 목화를 식민 지배중이었던 영국은 헐값에 사들여서는 공장에서 만든 면제품을 인도에 비싼 값에 되팔았다. 여기에 저항하기 위해 간디는 직접 물레로 실을 자은 다음 옷을 만들어 입었다. "아름다움으로 옷을 입지 말고 위엄으로 입읍시다."라는 그의 말은 그 자체로도 훌륭하지만, 그가 행적으로 보였기에 더 울림이 크다. 그 어떤 명품 딱지를 붙인 옷도 따라잡을 수 없는 '위엄'이다.

 

 

그의 소금 행진은 또 어떠했던가.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 소금세를 매겼다. 제 집 앞에 소금밭이 있는데도 영국 것만을 먹어야 한다니, 얼마나 폭력적인 법이던가. 이 위악적인 법에 간디는 평화적으로, 비폭력으로 저항했다.

 

"악에 협조하지 않는 것은 선에 협조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의무입니다."

 

아아, 간디는 명연사이기도 하다. 언행의 일치가 보여줄 수 있는 힘있는 말의 무게다. 1930년 3월 12일 사바르마티 아쉬람이라는 곳에서 시작해서 4월 6일 염전이 있던 구자라트 주의 단디 해변까지, 장장 370km를 26일간 계속 걸었다. 환갑을 넘은 나이의 간디가, 우리가 알다시피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타오르는 볕을 자랑하는 40도 이상의 온도에서 모자도 쓰지 않고 맨발이나 다름 없는 허름한 신발로 길을 걸어냈다. 오죽하면 사람들의 그의 발앞에 나뭇잎을 깔아 주었을까. 마치 예수님이 지나는 길목에 옷을 깔아주었던 성경의 한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마침내 해안가에 도착한 간디는 침묵 속에서 소금을 집어 올려 맛을 보는 행위로 인도 사람들에게 커다란 울림을 전해 주었다. 그 무엇보다 영적이고, 그 무엇보다 강렬한 이 투쟁을 영국은 힘으로 억눌렀지만, 역사는 간디의 정신을 기억해 주었다. 그리고 이젠 나도 그를 기억할 차례다.

 

세번째 주제의 키워드는 '후추'다. 콜럼버스를 함께 기억하면 좋겠다. 죽을 때까지 인도로 착각한 그에게 노출된 아메리카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 이야기했다. 그 시절에 왜 후추가 그리 귀했는지, 긴 항해 끝에 괴혈병으로 죽는 선원들의 사연을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인과관계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 정도로 쉬운 설명이라면 초등 고학년도 얼마든지 소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마오쩌둥의 대장정과 문화 대혁명에서는 돼지고기가, 그리고 유월절에 먹는 무교병과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덧씌워진 오해를 다루면서 빵이 등장한다. 음식과 역사가 함께 버무려져 서로를 당기는 기분이다. 바게뜨 빵이 '평등 빵'이라고 불려지게 된 사연에서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새겨보고, 초승달이라는 이름을 가진 크루아상 빵에서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튀르크의 과거를, 그리고 다시 마리 앙투아네트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도 재밌게 보았다. 바게뜨 빵과 크루아상을 먹을 때마다 그들의 나라를, 그들의 이름을 한번씩은 더 떠올리게 될 것이다. 덕분에!

 

프랑스의 앙리 4세와 미국의 후버 대통령을 함께 엮은 닭고기 편도 재밌었다. 최근에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죽은 메리 스튜어트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앙리 4세를 함께 떠올렸는데 며칠 만에 다시 만나게 되니 그 우연성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더불어 내가 좋아하는 만화가 황미나의 '불새의 늪'도 같이 떠올렸다. 종교개혁의 절대 군주, 유럽의 얽히고설킨 혼인관계 등이 포개지는데, 복잡하기보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흥미로움이 따라 붙었다. 이 책을 보면서 다른 책이 함께 보고 싶어지는 이 아름다운 효과!

 

감자와 함께 대표적인 구황작물 옥수수 편에서 흐루시초프의 남다른 면을 보았고, 바나나에서는 플랜테이션 농업에 스며있는 착취의 무서운 얼굴을 함께 보았다. 어릴 적 부의 상징이었던 바나나가 요즘처럼 마구 먹을 수 있는 값싼 과일이 된 이면에 '살충제'라는 무서운 특수효과가 번쩍번쩍 섬광을 일으킨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을 치르는 동안 전쟁에 쓰이는 화학 무기를 개발하던 공장들이 전쟁이 끝나고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지자 업종을 바꾸었다고 해. 살충제나 제초제, 과일을 오래도록 보존하는 약품 등을 개발하는 일을 하기 시작한 거야. -143쪽

 

 

칼을 녹여 곡괭이를 만드는 평화의 시대를 꿈꾸기엔 기술이 지나치게 발달했지만, 그래도 분명 저런 용도 말고도 다른 이로운 쪽으로 전쟁 기술이 인류에게 이바지한 일들이 있을 거라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보았다.

 

칠레가 세계 제일의 포도 생산국이라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다. 그래서 칠레산 포도주가 유명한 것일까? 오래 전 뜨겁게 덥혀진 와인을 마셨던, 아주 덥던 날의 특별한 소풍이 떠오른다. 그때 마신 와인이 칠레산이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가 근세로 넘어오면서 몸살을 앓던 시절에 가장 눈길을 끌었던 대목이 아편전쟁이었다. 장사의 이문을 남기기 위해서라면 아편도 밀수할 수 있고, 전쟁도 얼마든지 일으킬 수 있는 탐욕의 인간들은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또 그만큼 인간을 잘 설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차는 영국인들 모두가 즐기는 일상적인 음료로 자리 잡았지. 차에는 카페인 성분이 들어 있어서 각성 효과가 있거든. 졸음이 오지 않고 일시적으로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말이야. 그래서 공장 같은 데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차를 제공했다고 해. 게다가 차에 넣는 설탕은 열량을 보충해 주는 효과가 있거든.  -173쪽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는 잠을 깨라고 옷핀으로 찌르는 공장주가 나오는데, 그에 비하면 각성제 효과를 내는 차를 마시는 건 그나마 로맨틱하다고 해야 할지...

 

이 책 '식탁 위의 세계사'는 기획을 아주 잘 잡은 책으로 보인다. '식탁'이라고 공간을 한정 지었지만, 그 안에서 다뤄지는 역사의 이야기는 아주 긴 시간을 품고 있고, 우리의 일상과 아주 가까운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더더욱 흥미를 끌었다. 내용이 진행되면서 곁들여 소개되는 이야기들도 재미있고 유익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독서가 정말 가볍고 산뜻하게 끝났다. 청소년은 물론 성인들마저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기왕이면 시리즈로 나와서 부엌 안의 세계사, 욕실의 세계사 등등... 다양한 내용들이 소개되었으면 한다. 응원과 기대를 담아서 기꺼이 읽을 것이다. ^^

 

덧글) 전 근대사회가 지난 이후에도 국민이 아닌 백성으로 표현한 것에서 아주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다. 아편전쟁을 1839년이라고 썼는데 1840년 아닌가? 이건 좀 찾아봐야겠다. 185쪽에는 대처 수상을 새처 수상이라고 표기했다. 다음 쇄에서 수정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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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미술관 - 그림, 한눈에 역사를 통찰하다 이주헌 미술관 시리즈
이주헌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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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왕 루이 14세(이아생트 리고, 1701, 파리, 루브르 박물관)

“아가야, 너는 위대한 왕이 될 것이다. 건축에 빠졌던 나의 취향을 닮지 마라. 전쟁을 좋아하는 것도 닮지 마라. 반대로 이웃나라와 화친하도록 노력해라. 신의 은혜에 보답해라. 신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지 말거라. 백성으로 하여금 신을 경배하게 해라. 늘 좋은 충고를 따르도록 해라. 백성의 짐을 덜어주려고 노력해라. 애통하게도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구나.”
태왕왕 루이 14세(1638-1715)가 영면을 앞두고 다섯 살짜리 후계자에게 남긴 유언이다. 자신의 통치 전반에 대한 반성과 함께 후계자에게 주는 진솔한 당부가 담겨 있다.
루이 14세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영광에 대한 그의 지나친 집착에서 비롯되었다. -51쪽

고작 다섯살짜리 후계자에게 남기기에는 지나치게 심각하고 무거운 이야기이다. 그만큼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을 때 뼈에 사무쳤다는 얘기일 것이다. 어려서 임금이 된 루이 14세의 재위 기간은 조선의 인조, 효종, 현종, 숙종까지 겹친다. 절제의 미가 있었던 조선의 궁궐을 떠올리면 화려한 베르사유궁은 무척 대조적이다.
그림 또한 마찬가지다. 그림 속 루이 14세는 아래쪽을 내려다 보고 있고, 그 바람에 그림을 보는 이들은 그를 우러러 보게 되어 있다. 모델과 관객 사이의 우열 관계가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이다.
매끈한 루이 14세의 다리를 보니 영화 '왕의 춤'이 떠오른다. 앞부분 보다가 잠들었는데 다시 도전해야겠다.^^

 

 

자파의 페스트 병원을 방문한 나폴레옹(앙투안 장 그로, 1804, 파리, 루브르 박물관)

이집트 원정 당시 나폴레옹의 부대는 페스트로 인해 병사들이 쓰러지는 곤경을 겪었다. 시리아의 자파에 있던 모스크를 병원으로 개조한 뒤 거기에 환자들을 수용했는데, 그림은 바로 그 병원을 찾은 나폴레옹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이 인상적인 것은 화가가 나폴레옹을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렸다는 것이다. -85쪽

이 그림은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하기 직전에 공개되었다. 미술사적 평가와 별개로 이 그림이 얼마나 세심하게 전략적으로 쓰였는지를 알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견되는 나폴레옹의 등장이라니... 한편으로는 아찔하고, 한편으로는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나폴레옹의 대관식(자크 루이 다비드, 1805-1807, 파리, 루브르 박물관)

이 그림 역시 나폴레옹의 홍보 전략이 빛을 발하는 그림이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열린 황제의 대관식에서 나폴레옹은 교황이 관을 씌워주는 관례를 거부하고 자기 손으로 자기 머리에 관을 씌웠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준 황제라는 듯이 말이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 다비드는 애초에 이 장면을 나폴레옹이 직접 자기 머리에 관을 씌우는 모습으로 그리려 했으나, 구성상으로 또 기록적인 측면에서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을 썼던 황제가 그것을 벗어 다시 황후에게 씌우려는 장면으로 구성을 바꿨는데, 문제는 황제를 어떻게 설득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화가는 조제핀에게 황제를 설득해줄 것을 요청했고 자신이 황제와 더불어 그림의 실질적인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안 조제핀은 이 일에 적극 나서 마침내 지금의 그림이 탄생했다. -93쪽

화가도 나폴레옹만큼이나 영리했다. ^^
번호를 소개하겠다.
1. 나폴레옹 황제
2. 조제핀 황후
3. 어머니 마리아
4. 형 조제프
5. 동생 루이
6. 여동생들 카롤린, 폴린, 엘리사
7. 조카 루이 나폴레옹
8. 샤를 프랑수아 르브룅
9. 장 자크 레기 드 캉바세레스
10. 루이 알렉상드르 벨티에
11. 탈레랑
12. 뮈라
13. 교황 피우스 7세(비오 7세)
14. 화가 다비드
15. '카이사르의 유령'으로 불리는 인물

각각의 인물들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겠다.^^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일리야 레핀, 1885,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좋아하는 일리야 레핀의 그림이다. 제 손으로 아들을 죽인 이반 뇌제의 충격어린 눈빛이 강렬하다. 사건은 사소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며느리인 태자비가 입고 있던 옷이 차르가 보기에 정숙하지 않았다. 임신 중이던 태자비는 몸을 움직이기에 좀더 편한 옷을 입고 있다가 갑자기 행차한 시아버지를 맞으러 나갔다가 진노한 차르에게 걷어차이고 말았다. 놀란 태자가 아버지를 말리려다가 더욱 격분한 차르의 지팡이에 관자놀이를 맞고 닷새 뒤 사망한 것이다. 태자비도 유산 끝에 곧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유능하고 강력한 통치자이기도 했지만 피로 점철된 그의 인생은 그를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군주의 한사람으로도 만들었다. 그의 생은 영광 뒤에 겹쳐진 고독과 자기 혐오, 그리고 외로움으로 뒤덮였을 것만 같다. 그림 속 저 표정처럼...

 

사형수들에게 독약을 시험하는 클레오파트라(알렉상드르 카바넬,1887,개인 소장)
클레오파트라의 연회(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1742-1743년경,파리,코냐크 제 박물관)

그리스인의 피를 이어 받은 라지드 왕가의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는 전형적인 이집트인의 인종적 특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라지드 왕가 사람들은 이집트어를 할 줄 몰랐다고 한다. 일상에서 그리스어를 쓰고 그리스 풍의 옷을 입고 그리스 식으로 살았다. 다만 클레오파트라는 민간 이집트어를 배워 말할 줄 알았고 이집트의 종교와 전통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활용할 줄 알았다.

그럼에도 두 개의 그림 중 첫번째 그림이 더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두번째 그림은 제목을 보지 않고는 좀처럼 클레오파트라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 그림은 거금을 들여 정찬을 차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클레오파트라가 식초 항아리에 자신의 값비싼 진주귀고리를 집어 넣고는 녹여서 마신 일화를 담은 것이다. 안토니우스가 그녀의 대범함에 놀랐음은 당연하다.

그나저나, 그 진주 귀고리.... 아깝네...^^

 

 

퐁파두르 부인(모리스 켕탱 드 라투르, 1755, 파리, 루브르 박물관)
퐁파두르 부인(프랑수아 부셰, 1756,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똑같은 모델을 비슷한 구도로 그렸지만 두번째 부셰의 작품이 더 마음에 든다. '귀족의 은밀한 사생활'로 이미 홀딱 반했기 때문일 것이다.(이 책 최근에 개정판 나왔다!)

교양과 지성미로 통하는 퐁파두르 부인인 만큼 주변 소품들도 그런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책과 악보, 악기, 그림에 지구본까지...

과거 유럽에서는 퐁파두르 부인처럼 왕이나 귀족, 권력자의 정부가 된 사람을 코티잔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일반적인 정부와 달랐고 창부들과도 구별된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높은 지위의 후원자들과 관계를 맺을 뿐 아니라, 그 관계가 사회적으로 공인된 이들이었다.

고급 코티잔이 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용모뿐 아니라 교양과 재능, 품성, 센스, 위트를 두루 갖춰야 했다. 따라서 높은 지위의 후원자에게 선택될 때 그 선택의 기준이 되는 것은 결국 그녀가 어떻게 양육되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고급 코티잔은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유부녀인 경우도 많았는데, 어차피 코티잔이 된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이익을 따라 한 남자의 파트너가 되는 것이므로, 심지어 자기 남편의 신분 상승 혹은 지위 상승을 위해서도 다른 남자의 코티잔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바라는 이득을 얻으면 상호 양해하에 후원자와 깨끗이 헤어졌다. 후원자들은 자신이 데리고 있던 코티잔에게 헤어질 때 이처럼 원하는 보상을 해주거나, 다른 유력한 후원자를 소개하거나 경제적인 보상을 해주곤 했다.
이처럼 유럽에서 코티잔 문화가 발달한 것은 정략결혼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권력자들이나 귀족의 경우 가문과 혈통, 재산을 잇기 위해 정략적으로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정서적이고 육체적인 만족을 이렇듯 혼외의 파트너에게 찾게 된 것이다. 이것이 궁정문화와 귀족문화에 녹아들어 공식화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코티잔이었다. -169쪽

아아아, 두번째 드레스 참 예쁘다. 곱구나....!

 

 

일출(프랑수아 부셰, 1753, 런던, 월리스 컬렉션)
일몰(프랑수아 부셰, 1752, 런던, 월리스 컬렉션)

두 장의 그림을 함께 보아야 제맛인 작품이다. 태양의 신 아폴로가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바다의 요정들을 떠나는 장면과 돌아와 그들의 환영을 받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 그림에서 아폴로는 루이 15세를 상징하고, 테티스 여신은 퐁파두르 부인을 상징한다. 해가 바다에서 떠오르고 바다로 돌아가는 영원한 숙명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정부'라는 단어로 설명하기엔 너무 부족한, 두 사람의 우정을 담은 인생의 여정이 느껴진다.

 

운명의 여신에게 퐁파두르 부인의 목숨을 연장해달라고 호소하는 예술들(카를 방로, 1764, 포틀랜드 미술관)

퐁파두르 부인은 1764년 43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부인의 죽음은 루이 15세 뿐아니라 프랑스의 예술가들도 슬프게 만들었다. 그만큼 그녀가 예술계에 보낸 후원과 지원이 큰 격려가 되었던 것이다. 너무 이른 그녀의 퇴장에 대한 슬픔을 카를 방로는 이렇게 멋진 그림으로 표현했다. 운명의 여신이 가위를 들어 부인의 명줄을 끊으려 하자 아폴로와 주위의 조각, 회화, 건축, 음악이 간절한 자세로 그러지 말 것을 호소하는 것이다. 한 시대 문화예술의 토3대를 다진 이에게 보내는 감사이자 그 업적에 대한 극진한 찬사가 아닐 수 없다. 불후의 명곡에서 임태경이 패티김에게 보냈던 경의가 떠오른다.

 

하렘의 빛(프레더릭 레이턴 경, 1880년경, 개인 소장)
노예시장(장 레옹 제롬, 1871, 신시내티 미술관)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기원전 26세기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쿠푸는 피라미드를 세울 돈을 마련하기 위해 딸에게 몸을 팔게 했다고 한다. 기원전 18세기 메소포타미아의 함무라비 법전에는 창부를 포함한 여성의 상속권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나온다. 법조문에 등장하는 창부에 관한 언급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하겠다. 기원전 7세기 바빌로니아에서는 부유한 시민들의 주요 수입원 가운데 하나가 여자노예를 통한 윤락사업이었다. -171쪽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는 여인의 모습이 무척 관능적이다.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취한 듯 몽롱한 얼굴이다. 눈부신 느낌으로 처리한 빛도 그 미모를 더욱 빛나게 한다.

두번째 그림에는 비참한 제 모습에 절망에 빠진 노예와, 자신의 관능을 부각시키기 위해 거의 모델 포스로 서 있는 여인을 함께 볼 수 있다. 노예시장에 매물로 나온 노예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자신이 팔리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노예는 상인의 기분에 따라 강간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 그런 사정을 알고 나니 여인의 도발적인 포즈가 쉽게 이해가 간다. 제국주의가 한참 기승을 부릴 때, 서구 앞의 동양은 마치 이 여인같은 재물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울컥하게 만든다. 

 

흑사병(아르놀트 뵈클린, 1898, 바젤 미술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죽음이 있는 자화상(아르놀트 뵈클린, 1872, 베를린, 국립 고전 미술관)

흑사병에 대한 유럽인들의 오랜 공포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림이다.

흑사병이 심하게 돈 14세기에는 심지어 당시 유럽 인구의 1/3이 제물로 사라지기도 했다. 1348년 평균수명이 25세였던 영국인들은 1376년 평균수명이 17세로 내려갔다. 그 공포스러운 현실 앞에서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지옥의 목구멍까지 들여다본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더 이상 과거의 관습과 문화를 그대로 유지해갈 수 없었다. -213쪽

같은 사람이 그렸는데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똑같이 죽음이 지배하는 그림이긴 하지만...
전염병으로 자녀를 잃은 화가의 우울함이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에게 영감을 준 존재는 뮤즈가 아니라 이처럼 죽음이었다. 화가의 귓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는 죽음이라니, 섬뜩하면서 어쩐지 시적이다. 뮤지컬 '엘리자벳'에서 죽음을 한 사람의 배우로 표현한 부분이 떠오른다.

작곡가 말러는 이 그림에 영감을 받아 '교향곡 4번, G장조'의 스케르초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림 속 죽음의 느낌을 음악에서 그대로 살리기 위해 말러는 바이올린 솔로이스트로 하여금 바이올린을 부적절하게 튜닝해 연주하도록 했다고 한다. 찾아서 들어봐야겠다.

 

사치를 조심하라(얀 스테인, 1663, 빈 미술사 박물관)

 

제목이 아주 적나라하다. 어수선해 보이는 집에서 한 여인이 졸고 있꼬, 그 사이에 집안이 온통 난장판이 되어 가고 있다. 식탁 위의 음식은 개가 먹어치우고 있고, 아기는 값비싼 목걸이를 갖고 놀고 있다. 집안에서 돼지가 활개를 치고 다니고 손님으로 온 이들도 어지럽게 화면을 장식하고 있다. 부유한 집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막 살면 순식간에 쫄딱 망할 수 있다는 것을 아주 직접적으로 보여준 그림이라 하겠다. ^^

 

마라의 죽음(자크 루이 다비드, 1791, 브뤼셀, 벨기에 왕립 미술관)

 

김영하의 책에서 이 그림을 표지로 쓴 것을 봤던 것 같은데 제목이 정확히 떠오르지 않는다. 읽었던 게 아니라 그 책의 표지를 보고 친구가 이 그림 아냐고 질문을 했던 것으로 묶여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그림은 익숙하다. ^^ 고대의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그림을 많이 그린 다비드는 프랑스 대혁명 당대를 살면서 해당 시대의 역사화도 그렸다. 그림의 주인공 마라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 자코뱅당의 주요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피부가 좋지 않았던 그는 욕조에서 업무를 볼 때가 많았는데, 업무 중에 지롱드당 지지자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암살당했다. 마라와 다비드의 이름이 오른쪽 아래쪽에 선명하게 보인다. 이 그림을 보니 오래 전에 읽은 김혜린 작가의 '테르미도르'가 떠오른다.^^

 

'역사의 미술관'은 역사와 '미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영리하게 잡은 책이다. 그림 속의 역사와 역사 속의 그림이 잘 만났다. 그림에 얽힌 이야기 뿐 아니라 그 시대를 조명하는 역사적 흐름을 잡아주는 것도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그 덕분에 책 한권을 읽었는데 통사로서의 역사책도 보고 미술책도 보고 풍속사로서의 면면을 본 충족감이 든다. 이제껏 읽은 이주헌 씨의 책 중에서 만족도가 가장 컸다. 모처럼 맛있게, 그리고 영양가 있는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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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1 0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01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별족 2012-06-01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퐁파두르 부인이, 그 닥터 후 에피소드의 그 우주선 이름이었던 기억이 -_-;;;

마노아 2012-06-01 16:14   좋아요 0 | URL
닥터 후를 보지 못해서 전혀 모르는 얘기인데, 아무튼 우주선 이름이란 말이죠?
전 율리시스 만화에서 오디세이 우주선이 떠올라요.^^

별족 2012-06-01 16:29   좋아요 0 | URL
저도 어쩌다 본 건데 그 때. 퐁파두르 부인은 누굴까, 그랬던 기억이 있어요.

마노아 2012-06-02 10:39   좋아요 0 | URL
베르사이유의 장미 때문에 뒤바리 부인이 더 먼저 떠오르긴 했는데 아무래도 퐁파두르 부인이 더 유명하긴 하죠.^^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귀스타브 도레 그림,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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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의 가이드북 혹은 축약본에 해당하는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이다. 19세기 전반기에 활동했던 역사작가 프랑수아 미쇼의 글에 귀스타브 도레가 19세기 후반기에 삽화를 그린 '십자군의 역사'가 시오노 나나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참으로 행운이다. 물론 그 책을 발견하고서 이 책이 나오기까지는 무려 30년이라는 기다림이 동반된다.
긜고 이제 그녀의 다른 저작물들이 차례대로 마쳐지고 '십자군 이야기' 차례가 닥쳤을 때 도레의 그림이 다시금 빛나게 되었다.

모든 페이지의 그림을 다 사진으로 옮기진 못하고 열 컷만 찍어보았다.

오리엔트의 화려함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십자군 전사들의 모습이다.
중세에 동양과 서양의 경제적 규모는 전적으로 동양의 우위였다.
오리엔트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모습에 십자군 전사들의 눈과 속이 함께 뒤집혔을 것이다. 당시에 유럽은 시골 촌구석이라고 해도 무방했을 정도니까.

'불의 시련'에 도전하는 바르톨로메오의 모습이다.
자신이 한 말이 옳은지 그른지 신의 증명을 받기 위해 타오르는 불길 속을 맨발로 지나가는 것을 '불의 시련'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찌른 창촉을 발견했다고 주장한 바르톨로메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창촉이 가짜로 의심을 받자 신의 증명을 받겠다며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심한 화상을 입고 9일 후에 죽고 만다.
그 자신 홀로 망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겠지만, 그를 믿어준 툴르즈 백작 레몽까지 망신살을 뻗치게 했으니 김어준 표현으로 하면 그레이트 빅엿쯤 되겠다. 십자군의 아이콘이 되려다가 꼬깔콘이 된 모양새다.

예루살렘 공성전의 모습이다. 성벽과 같은 높이의 목재 탑을 만들어 공격하는 전법인데 사막에서 나무를 구하기란 별따기! 베네치아 상인들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공격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 두번째 총공격도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예루살렘을 끝내 차지한 제1차 십자군 되겠다.

포로의 몸이 된 서유럽의 여인들이다. 제1차 십자군과 그 이후 십자군의 차이 가운데 하나는 제1차 십자군을 따라나선 여자가 주로 순례자나 창부였던 데 반해 그 이후의 십자군 원정에는 대부분 고위층 여자들이 동행했다는 것이다.
특히 제2차 십자군 원정 때는 프랑스 왕 루이의 왕비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동참했다. 왕비가 움직이니 당연히 시중을 드는 시녀들도 따른다. 이들은 이슬람군과의 전투에 패하면 이슬람측의 포로가 되어야 했다.
이슬람에서는 몸값을 치르면 풀어주는 관습이 있기에 지위가 높은 여인들은 몸값을 내고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만한 돈을 지불할 능력도 없고, 대신 지불해줄 사람도 없는 여인들의 운명이란 가혹할 뿐이다. 이들은 먼저 이슬람교로 개종하기를 강요받은 뒤에 어느 태수나 장군의 하렘에 넣어졌다. 코란에서는 이교도와의 성관계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쩐지 병자호란때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무수한 여인들과 가난한 이들이 떠오른다.

처음 십자군과 맞닥뜨렸을 때 이슬람 세력들은 그들이 내세운 '성전'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실컷 분열되어 있어서 자기들끼리 다투기 바빴던 이슬람 세력들을 통합해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게 만든 이가 살라딘이었다.
그가 등장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한판승부가 가능해질 것이다. 제1권에서는 아직 그 내용까진 나오지 않았다.

십자군이 활용한 갖가지 공성기들이다. 이런 식의 공성기는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무기에서도 곧잘 보여지던 것들이다.
이런 공성기를 사용하려면 현지에 가서 만들기보다 본국에서 제조해서 현지로 옮기는 것이 나았다. 이때 크게 활약한 것이 베네치아 공화국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도시국가라서 인구가 적었다. 영토형 국가인 프랑스나 영국에 비하면 10분지 1밖에 되지 않았다.
이 장면은 콘스탄티노플 공략 때인데 꽤 약해진 모양새지만 아직까지는 철옹성을 유지하던 그들이었다. 그들이 무너지던 이야기는 시오노 나나미의 전쟁 3부작 중 제1편 '콘스탄티노플 함락'에서 아주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프랑수아 미쇼의 책 '십자군의 역사'에 백여 장의 삽화를 그린 귀스타브 도레가 그중 단 한 장도 그리지 않았던 것이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이끈 제6차 십자군이라고 한다. 프리드리히가 이끈 제6차 십자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한 십자군이었다. 그러나 파문을 당한 황제가 주도한데다 이슬람교도를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히려 로마 교황은 제6차 십자군을 인정하지 않았다. 얼마나 독실했으면 그것을 존중하여 그 후 600년 뒤의 사람이었던 도레는 프리드리히 2세를 그리지 않았을까?
그를 소개하기 위해서 시오노 나나미는 상(像)으로 대체했다. 그나마도 어느 열혈(!) 그리스도교도가 집요하게 부숴버린 상으로 말이다. 이집트의 신전에서 자주 보았던 십자가 형상의 파괴된 자국이 떠오른다.

사진이 흔들렸지만 아쉬운대로 쓰자.
주인공은 이집트의 여자 술탄이다.
이슬람 왕조가 들어선 이집트이기에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가 등장하던 때의 복식이나 느낌은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이교도의 땅에 버려진 성묘교회다.
1291년, 오리엔트의 그리스도교도들이 마지막으로 농성을 벌이던 도시 아코가 함락되었다. 제1차 십자군으로부터 벌써 2백 년이 지난 시점이다.
그렇게 2세기에 걸친 십자군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귀스타브 도레는 아코의 아비규환을 그리는 대신 처연하고 쓸쓸한 느낌으로 성묘교회를 그렸다. 그의 신심은 참으로 깊었나보다.

총 4권의 책으로 이 시리즈를 구상한 시오노 나나미는 뒤의 3권을 1막,2막,3막으로 구성하고, 맨 앞에 이 책을 냄으로써 프롤로그의 성격을 더했다.
귀스타브 도레의 삽화를 배치하고 그 옆에는 그림이 진행되고 있는 곳의 지도와 설명을 더했다. 모든 페이지가 다 이런 식의 구성을 따른다.
그림이 왼쪽에 배치되고 지도와 설명이 오른쪽이었다면 우리나라 사람의 읽는 방향으로는 더 어울렸을 것 같은데, 아마도 일본이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읽어서 이런 방향이 된 것이 아닐까? 뭐, 나의 상상이다.
재밌게 읽은 이 책에서의 유일한 옥의 티랄까.
아, 오타도 하나 있었다. '목재'를 '목제'라고 쓴 것. 위 세번째 그림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어찌 보면 두꺼운 양장본으로 폼잡고 펼쳤는데 너무 심심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십자군 이야기의 전체 실루엣을 잡아주는 가이드 역할로서 꽤 훌륭했다고 여긴다. 이 책에 이어 '십자군 이야기' 1권을 읽으니 먼저 만났던 그림과 설명을 떠올리면서 이해를 도왔다. 자신의 의도를 충실히 담아 만든 책이리라.
개인적으로는 귀스타브 도레의 그림보다도 짧게 설명한 시오노 나나미의 글들이 더 눈길을 잡았더랬다. 역시 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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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1-10-12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차라리 이 책을 살 걸 그랬군요.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권은 저를 실망시켰어요.ㅜㅜ

그림은 낫겠군요....

마노아 2011-10-12 09:43   좋아요 0 | URL
이 책 별로라는 리뷰도 보긴 했는데 저는 괜찮았어요.
그림도 좋았고, 간략한 설명도 쉽게 이해가 되고 지도도 있고요.
책이 좀 비싸긴 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