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병원에 6주 반을 계셨다. 그 기간 동안 내가 라면을 한번도 안 끓여 먹었다는 것은 나의 자부심이 되었다. 음하하하핫! 나 어쩐지 요리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아...ㅎㅎㅎ
재료들을 사다 놓으면 요리 한번 하고서 똑 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두번씩 요리하게 된다. 물론 순두부 찌개는 무려 네번을 끓여야 했지만...(엄니가 네팩 사다두고서 입원하심...;;;;)
잡채는 한번 더 도전했다. 첫번째 잡채에서 가장 치명적인 실패는 시금치였다. 두번째는 시금치를 아예 제꼈다. 대신 피망으로 초록색을 냈고, 빨강 주홍 파프리카를 보탰다. 그리고 야심작으로 콩나물을 투척했다. 이른바 콩나물 잡채!
야심은 컸고, 의욕도 넘쳤으나, 문제는 있었다. 콩나물 때문인지, 뭣 때문인지... 물이 엄청나게 나오는 것이다. 언니는 내가 싸준 잡채를 물찼다고 버려버렸다.ㅜ.ㅜ
난 내가 만든 음식을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편법을 쓰기로 했다. 해피투게더던가? 박정현이 나와서 잡채 그라탕을 만들었는데, 그 장면에 꽂힌 것이다. 냉큼 모짜렐라 치즈를 사다가 잡채 위에 덮어서 렌지에 돌렸다. 사진은 렌지 들어가기 직전의 치즈다. 뭐... 맛은... 치즈 맛으로 먹을 만했다.ㅎㅎㅎ
사다 놓은 애호박으로 호박전을 하려고 했는데, 내가 검색한 레시피는 호박을 갈아서 만드는 게 아닌가! 오홋, 이거 좋아 보인다! 냉큼 호박을 갈았다. 빨간 고추와 파란 고추로 고명을 올리고, 새우도 하나씩 박아 넣었다. 맛은 그럭저럭 좋은 편이었는데, 지나치게 시간이 많이 들고 설거지가 장난 아니었다는 후유증이 남았다.
이렇게 요리를 하다 보니 야채들이 남는다. 그러면 그녀석들은 모아서 샐러드로 변신한다. 처음에 플레인 요거트로 했던 샐러드가 별로였던 탓에 두번째 할 때는 마요네즈를 넣었다. 저기서 나중에 양상추만 남았을 때는 다시 플레인 요거트로 갈아타기~
밖에서 밥을 먹을 때 반찬에 그닥 관심 갖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걸 어떻게 만드는 것일까 유심히 살펴본다. 이날은 점심 메뉴로 감자 베이컨 볶음이 나왔는데, 집에 재료가 비슷하게 있다는 게 떠올랐다. 사둔 감자가 있었고, 스팸도 있었다. 파프리카도 아직 남았다. 레시피에선 감자를 달랑 하나를 깎던데, 아니 입이 몇 갠데 감자를 하나만! 나는 감자를 7개 깎았다. 열심히 채 썰었는데 부피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 그리고 햄도 썰었다. 역시 부피가 마구마구 늘어났다. 거기에 야채도 넣어...;;;;;
감자는 왜 그리 잘 안 익는지....;;; 약한 불에 볶아야 한다는 걸 몰랐다. 얼마간은 태웠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감자 햄 야채 볶음이 완성됐다. 아, 내가 했지만 완전 맛났어! 언니한테도 한통 갖다 줬다. 이날 언니가 엄마한테 가서 내가 자꾸 요리 가져온다고 하소연했다...;;;;;
떡볶이도 16년 만에 만들어봤다. 떡국 떡을 사다가 고추장과 고춧가루, 설탕과 꿀(물엿이 없어서...)을 넣고 끓였다. 내 입맛엔 매웠지만 맛은 좋았다. 계란이 덜 익은 게 약간의 아쉬움이랄까. 이후 계란은 세번 더 삶아 보고 드디어 다 익혔다. 그게 크리스마스날이었다.(이날도 떡볶이 만들었다.ㅎㅎㅎ)
그밖에 가장 쉽다는 카레라이스도 만들었는데, 카레 가루 봉투에 쓰인 대로 했는데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4인분이라고 적혀 있어서 물을 4컵 넣었는데(봉투엔 물 얼마 넣으라는 안내가 없었다!), 카레 가루가 모자라...;;;; 결국 언니네 하이라이스 가루를 공수해서 섞었다. 뭐, 맛 괜찮았다. 색깔이 좀 안 이뻤지만...;;;;
또 뭐했더라? 감자 올려보낸 것 언니가 안 먹고 묵혀서 도로 들고 와서 볶음밥으로 변신시켰고, 유부초밥의 속으로 쓰기도 했다. 떡국도 두번 끓였는데 진정 맛있었다. 아,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것 같아! 시금치 두부 된장국도 몇 번 끓였는데, 끝내 시금치 한단을 다 쓰지는 못했다. 이게 약간 아쉬움! 참치 샌드위치도 만들었고, 감자 샌드위치도 한번 더 했는데, 얘는 바빠서 못 먹다가 나중에 쉬어서 좀 버려야 했다. 아까비...ㅜ.ㅜ
엄니가 퇴원한 당일에는 미역국을 끓였다. 뜨거울 때는 몰랐는데 식고 나니 왜 이리 짠가... 사이다가 찬기운 가시면 달아지는 것과 같은 이치일까? 이튿날엔 부대찌개도 끓였다. 사골육수 한팩 사다가 끓였는데 오 먹을만 해! 라면 넣는 걸 깜박했지만 맛나게 먹었다. 물론, 이렇게 맛있게 먹는 사람은 우리 집에 나밖에 없....;;;;;
사실 나는 겨울이 되었으니 동치미를 담그고 싶었다. 동치미 얘기를 꺼내니 엄니가 당장 퇴원할 기세를 보이셔서 꾹 눌러 참았다. 엄니는 며칠 전에 아픈 팔로 기어이 동치미를 담그셨다. 아마도 두려우셨나보다...;;;;;
(언니 사진엔 뽀샤시 효과가 없다. 사심 가득한 사진!)
요건 언니 작품이다. 생일이 끼어 있던 주말에 이런 날은 꼭 잡채를 먹어야 하는 거라고 만들어 주었다. 이날도 냉장고에는 나의 물찬 잡채가 아직도 살아 있었는데....;;;; 내 잡채는 퉁퉁 불었는데 쟈는 꼬들꼬들하네..ㅜ.ㅜ
두번째 사진은 숙주 나물 위에 모짜렐라 치즈를 얹고 프라이팬에 구워낸 뒤 케첩을 뿌린 것이다. 전에 삽겹살 집에서 이렇게 안주 나오는 걸 봤는데 그걸 응용했다 한다. 아, 어쩐지 나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마구 솟구친다! 나 숙주 나물 좋아하는데!!!
작년까지 조카들은 볼키스로 선물을 대신했는데, 올해는 기어이 선물을 준비하겠다고 다짐을 하더니 저리 준비해 왔다.
다현양이 자기가 좋아하는 지우개를 사오더니 매일같이 쓰고 있냐고 묻고 있다.
다현양을 보고 자극 받은 세현군도 이튿날 캔커피 두개와 초코바 하나를 포장해 왔다.
아마도 포장은 언니가 해줬겠지? ㅎㅎㅎ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친구가 생일날 보내준 기프티콘으로 케이크를 샀다. 아마도 임시로 고용된 알바생으로 보이는 청년에게 오늘 몇 백 개의 케이크를 팔았냐고 물으니 수천 개는 팔았을 거라고 대답했다. 그 수천 개 중 하나인 쉬폰 케이크다.ㅎㅎㅎ
초는 두개 꽂았고, 하나에 천년 씩, 예수님의 이천년(약 이천년으로 퉁치고~) 생일을 축하하는 노래를 조카들과 불렀다. 좀 멋쩍긴 했다. ㅎㅎㅎ
사은품으로 무릎담요와 수면양말, 무알코올 샴페인 중 하나를 고를 수 있었는데 나는 샴페인을 골랐다. 아무도 안 먹어서 나혼자 원샷했는데 사이다 맛이었다. 케이크는 생각보다 맛이 없었는데, 아마도 만든지 좀 된 게 아닐까 의심이 간다. 날이 날인 만큼!
오늘은 직장에서 송년회가 있었는데 메인 요리가 보쌈이었다. 12시 반에 점심 먹고 3시 반에 송년회가 시작되었으니 많이 먹을 수가 없었다. 그 결과 고기가 많이 남았다. 남은 고기와 야채 그리고 양념들을 모두 소포장하더니 내게도 상추와 새우젖을 주었다. 고기는 빼고.... 아니, 주려면 고기를 줘야지 왜 고기는 안 줘...ㅠ.ㅠ 오늘 갖고 올 짐이 많아서 괜찮다고 했는데도 기어이 상추를 내게 안겨주었다. 고기 없이...ㅜ.ㅜ 흥치피치 치사 빤스!
고구마 사둔 게 있는데, 고구마 샐러드나 고구마 스프를 만들어볼까 고민 중이다. 믹서를 쓰면 설거지가 힘들어지니 그냥 고구마 샐러드로 갈까?
정유정의 28을 읽으면서, 이렇게 고립된 도시에 갇혀 있게 된다면, 집에 먹거리와 생필품을 좀 갖다 두고 며칠은 버틸 수 있겠다 싶었다. 적어도 라면과 햇반으로 버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하긴,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에도 이렇게 밥상에 집착하게 되지는 않겠지만....(혹, 하려나??)
아무튼! 꽤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고, 장바구니 때문에 마트 지출도 꽤 컸지만, 여하튼 제법 즐겁게 요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말고 다른 사람도 즐겁게 먹어주면 더 좋겠지만... 아직 그 단계는 좀 부족하고, 적어도 맛투정은 좀처럼 하지 않는 내 입맛에는 두루두루 괜찮았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전혀 나지 않는 성탄절이었고, 연말연시의 들뜬 기분이라는 건 애당초 찾을 수도 없는 날들이 이어진다. 세상은 혼란스럽고 마음은 볶이고 있고, 정신은 피폐해져 있다. 그래도, 그런 때이니만큼 더더 열심히, 더 맛있고, 더 정성을 쏟은 밥 한끼를 찾고 싶다. 그게 스스로에게 주는 위로가 될 것 같아서 말이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따뜻한 위로 혹은 격려 말이다.
덧)근데 왜 내가 내미는 위로에 다른 식구들은 공감을 못하는 걸까...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