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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치마 밑 - 행복한 책꽂이 02
주명철 / 소나무 / 1998년 11월
평점 :
합본절판
통사는 커다란 윤곽을 그려내면서 통으로 읽어내는 멋과 소득이 있지만, 미시사는 세부적으로 파고들어가 기발한 맛과 뜻하지 않은 즐거움을 얻어내는 효과가 있다. 대체로 통사 쪽을 더 많이 읽게 되지만, 가끔 만나는 미시사는 그 감칠 맛으로 인해 입맛을 여러 번 다시게 될 때가 있다. 이 책이 꼭 그랬다.
제목을 보자. 파리의 '치마' 밑이다. 처마도 아니고 기둥도 아니고 지붕도 아니고 '치마'다. 아, 제목부터 뭔가 에로틱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게다가 '파리'라고 하지 않는가. 뭔가 낭만이 치솟을 것 같은데 부제를 살펴보자. '18세기 프랑스 문화를 읽는 또 하나의 창'이라고 적혀 있다. 18세기라면 혁명의 기운이 솟구쳐 오르던 그 유명한 시대가 아니던가. 그 시기 프랑스 문화를 읽어내는 창으로서 '치마 밑'이 기능을 하고 있다니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저자는 파리에서 고문서들을 섭렵하며 연구 주제를 파고든다. 처음 목표한 바는 세 가지로 확대된 크기였지만, 점차 줄여가 한 가지 주제에 맞닥뜨렸으니 그 사람이 '구르당 부인'이다. 그녀는 누구일까? 18세기 파리를 주름잡았던 유명한 포주다. 루이 15세가 죽은 이듬 해, 죽은 왕의 애첩을 다룬 '마담 뒤바리에 관한 일화'가 출간된다. 이 책에서 뒤바리 부인의 미모와 재능을 이끌어낸 사람으로 구르당 부인이 출연하는 것이다.
우리의 정사 '실록'이 그 방대한 양의 기록과 정확히 쓰려는 정신으로 어깨 으쓱할 때가 있지만(유네스코 기록 문화가 아닌가!) 비슷한 시기 프랑스에서 밤문화에 대한 이토록 자세하고 많은 양의 정보가 남아있다는 것에 화들짝 놀랐다. 우리의 야사기록도 없는 바는 아니지만,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질적 거리감이 꽤 크다. 공공연히 성직자가 어린 처녀를 밝히는 파리의 밤문화에 비견하여 조선의 양반 대감이 얼추 짝이 안 맞는 까닭이다. 조선이 유교사회였다고 해서 밝히던 색골 양반이 없었겠으며, 변태 대감 마님은 또 없었겠냐마는, 그래도 '노골성'과 '솔직성'에선 좀 차이가 있어 보인다. 책 속에 자주 등장하는 그림과 판화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조선의 춘화도 꽤 적나라했지만, 그래도 좀, 다르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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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난봉꾼들이 얼마나 처녀를 좋아 했는지 알 수 있는 동시에 사람에 따라서는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기 때문에, 얼굴이 예쁜 아가씨는 마음만 먹으면 갑자기 호화로운 생활을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데렐라 이야기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웬만한 여자가 신을 수 없는 “작은 신”은 처녀를 암시하는 것으로서 정복욕이 강한 남성이 즐겨 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해당되는 말로 봐야 옳다.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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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일처제가 정답이 아니며, 성욕이라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책 속에 등장하는 무수한 실존 인물들에 관한 기록들은 좀 놀랍고 그래서 더 신선하다. 돈이 많건 적건, 여자를 찾는 남자들을 상대로 아가씨들을 처녀로 둔갑시켜서 몇 번이나 거래를 성사시키는 구르당 부인. 이 부인과 커넥션을 맺고 알선해 주는 바람잡이들과 나눈 편지를 보면 이들의 사업은 규모나 치밀함 면에서 웬만한 기업을 방불케 한다. 정말로 그들이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종의 자부심까지 비쳐진다면 심할까?
물론, 그 시절에도 땀흘려 농사짓고 제 몸을 놀려서 고된 노동으로 하루를 연명하는 사람이 더 많았을 테지만, 구조적으로 어린 여자애들이 몸을 버리고 또 팔려가기 너무 쉬웠던 사회 문제를 외면할 수는 없다. 게다가 얼굴이 반반하기라도 했다면 더 쉽게 유혹에 지거나 한 밑천을 잡았을 것이다. 그것을 단순히 우리 기준으로 눈살 찌푸리면서 바라보는 것은 어쩐지 폭력같아 보인다.
게다가 혁명으로 분출된 민중의 자각과 의식이라는 것도 결국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더 고양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프랑스 혁명'이라는 걸출한 역사적 사건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책 속에서 제시된 자료들을 보면 유명한 계몽철학자들도 당시 '금서'로 지정된 책을 썼고, 유통시켰으며, 그 책들에서 성풍속과 '훔쳐보기'를 이용하여 민중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달했다. 그 메시지들이 돌고 돌아 두루두루 전달되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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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사회는 온통 ‘훔쳐보기’의 대상이었다. 경찰은 거물급 인사들의 사생활을 추적하고 엿본 뒤 보고서를 만들어 치안총감과 왕실에 전달했다. 어디 그 뿐인가? 도서 감찰관도 수많은 끄나풀을 풀어 작가들을 감시했다. 치안총감 사르틴느가 했다는 말-길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셋 중 하나는 자기 부하라는 말-은 그 사회에서 ‘훔쳐보기’가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음란 서적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훔쳐보기’를 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훔쳐보기’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가르친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과적으로 반문화의 철학이었다. 또한 독자 가운데 이같은 철학을 배우지 못하는 사람도 일차적으로 피임의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 반문화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반역사적인 것으로서, 말하자면 자연의 철학이요 유물론이다. 신분을 중시하는 전통 사회의 가치관을 부정하는 철학이 ‘쾌락주의’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 18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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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를 아주 작은 범위로 축소 시켰기 때문에 책은 두껍지 않다. 200페이지 남짓되는 분량인데 그림도 많이 섞여 있어서 더 금세 읽어버릴 수 있는 책이다. 영화 '미인도'에서 침을 꼴깍 삼키게 했던 장면보다 더 침을 주르륵 흘리게 만드는 그림들이 무척 많았는데 차마 사진을 찍어 올리지는 못하겠다. 뭐, 상상에 맡겨도 좋겠다.^^
97-98년도에 쓰여진 책이고, 이미 절판된 책이다. 지역 도서관에서 발견하고는 방긋 웃을 수 있었다. 오래됐지만 내가 싫어하는 신명조 체도 아니고, 바랬지만 오히려 골동품 느낌이 나서 책 읽는 동안 내내 기분이 좋았다. 내친 김에 관련 책이나 영화를 좀 더 찾아보면 어떨까 싶다. '위험한 관계'는 워낙 두껍던데 차라리 영화 '발몽'을 보는 건 어떨까? 옷을 보는 감상도 만만치 않을 듯하다. 하나의 책을 읽고 나서 주렁주렁 다른 책들이 연결되어서 관심을 쏟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고마운 책이 아니겠는가.
파리의 치마 밑에서도, 역사는 도도히 흐르더라. 지금 이 순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