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책입니다- 도리스 레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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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도리스 레싱이 노벨 문학상을 타지 않았더라면, 이 책이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이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구매를 좀 더 미루거나 아예 모른 채 지나가지 않았을까. 그녀가 큰 상을 받았기에 호기심이 동했고,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이라는 '세트도서'로서의 자리가 구매를 유발시켰다. 주체적인 선택은 그닥 아니었지만, 즐거운 독서였고 신선한 만남이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낀다.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직장 파티에서 만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때는 60년대였지만, 그들은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 좀 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접근을 원했던, 그리고 그것을 아낀다는 점에서 통했다. 그들은 런던까지 출근이 가능한 소도시에 위치한 빅토리아풍의 거대한 저택을 구입한다. 집은 우거진 나무로 둘러싸인 정원을 끼고 있었고, 2층과 3층의 방을 다 합하면 8개에 이르며, 꼭대기엔 다락방까지 있는 그야말로 거대한 저택이었다. 물론, 그들의 월급만을 가지고는 감당할 수 없는 액수였고, 데이비드는 오래 전에 이혼해서 새엄마와 살고 계시는 부자 친아버지의 도움으로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
호텔처럼 거대한 이 집을 무엇으로 채우고 싶었던 것이냐면, 그들은 '가족'으로 꽉꽉 채울 셈이었다. 그들은 여섯 명의 아이를 낳기를 희망했고, 아이들이 하나 둘 태어나는 동안 매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파티에 친척들을 초대하여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 기간은 몇 주를 넘어서 몇 달에 걸치기까지 했지만 그들은 즐거워했고 모인 사람들 역시 만족스런 시간을 보냈다.(그 어마어마한 경비는 데이비드의 아버지 제임스의 수표로 충당하곤 했다.)
아이들이 늘어날수록 해리엇의 어머니 도로시의 헌신이 요구되었고, 친척들은 그들 부부가 더 이상 아기를 낳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했지만, 이들 부부의 강력한(!) 의지는 꺾일 줄을 몰랐다. 그래도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이 몸에 부담을 주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어서 네번째 아이를 낳고는 조심을 한다고 하였는데, 그만 다섯 째 아이가 덜컥 들어서고 만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 책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이가 뱃속에 있었던 여덟 달 동안 해리엇은 끔찍한 시간을 보냈다. 아이가 뱃 속에서 너무 요동을 쳤던 것이다. 해리엇은 조산했고, 처음으로 병원에 가서 아이를 낳았다. 태어난 아이는 너무 무거웠고 울지조차 않는 녀석의 공격적인 젖먹기는 거의 공포를 느낄 지경이었다.
다섯 째 아이의 이름은 벤이었다. 벤은 성장이 빨랐다. 두 달만에 모유수유를 멈춰야 했고(아니었다면 엄마의 가슴을 통째로 삼켰을 아이였다.) 그 호전적인 눈빛에 다른 아이들은 슬금슬금 벤을 피하기 시작했다. 벤은 기어다닌적도 없이 바로 걷기 시작했고, 돌쟁이 무렵엔 개를 목졸라 죽였고 이어 고양이도 같은 식으로 죽여버리는 끔찍한 일들을 저지른다.
평화로웠고 행복했던 일상의 순간들은 모조리 깨져버렸다. 이제 친척들은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가 되어도 그 자리를 회피하기 시작했다. 벤의 형과 누나들은 동생을 피하고 경계했으며, 벤의 폭력에 의해 팔목이 삐기까지 했던 넷째 폴의 분노와 공포는 극에 달했다. 누구도 이 아이를 감당할 수 없었고(심지어 부모조차도) 가족들은 모두 지치기 시작했다.
결국, 가족의 평화를 위해서 이들은 벤을 '격리'시켜야 한다는 데에 합의를 보았다. 엄마 해리엇은 마지못해 수용했지만, 그것은 그녀가 보일 수 있는 엄마로서의 최소한의 양심이었을 지도 모른다. 아이가 창문에서 떨어지기 직전에, 자동차가 씽씽 달리는 곳으로 마구 달릴 때에, 가까스로 아이를 잡았을 때 해리엇이 느낀 감정은 지극히 솔직한 마음의 소리였다. "하필이면 내가 이때 들어오다니......"
옳지 않고, 당연히 엄마로서 할 소리가 아님에도, 아이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무서운지, 독자 역시 그녀의 그 참담한 마음에 동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전혀 다른 방향이긴 하지만 영화 '오멘'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달까......
벤이 수용소로 보내진 날, 네 명의 아이들은 서로 눈치 보기에 바쁘다. "우리들도 보내실 거예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해리엇은 울고 싶었을 것이다. 큰 아이 루크는 "벤이 우리하고 아주 달랐기 때문에 데려간 거야"라고 대신 대답을 하는데, 그 대답이 자못 슬프다. '다르다'라는 것이 다른 쪽으로도 읽혀서 말이다. 어떤 가정에서 장애 아이가 태어난다던지, 혹은 사고로 장애아를 갖게 되었을 때 집안에 드리워지게 되는 검은 구름이 떠올랐다. 물론, 작품 속 해리엇의 집은 얘기가 좀 다르다. 벤은 정상적인 대화를 하지 '않는' 특이한 아이였지만 장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운증후군 조카보다도 더 사회생활이 힘든, 심지어 '공포'를 자아내게 하는 남다른 아이였다.
아이가 보호소에 갇혀 있는 동안에 집안에 다시 평화가 돌아오는 듯했다. 넷째 폴의 변화가 가장 두드러졌다. 하지만 엄마 해리엇은 아들을 방치시킨 채 그 사실을 속에 담고 내내 버틸 수가 없었다. 아이가 어찌 지내는지 보고 오기 위해 떠났던 길에서, 결국 해리엇은 아들을 데리고 돌아오는 자신을 말리지 못했다. 끔찍한 보호소에서 약물로 통제되던 벤은 집에 돌아와서도 그 공포에 짐승같은 보호본능과 공격성을 쉽게 꺾지 못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해리엇은 집안의 공적이 되고 만다.
아이들은 기숙학교로 자청해서 떠나버리고, 폴은 히스테릭하게 성장했고, 데이비드는 집에 들어오지 않은 채 일에만 파묻혔다. 그 커다란 저택에 온통 사람들로 꽉 차서 모두가 행복해했던 시간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해리엇은 벤의 존재가 그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남다른 유전자, 지구상에서 잘 발견되지 않은 이상 생명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들이 행복해지고자 했던 그 마음이 욕심이었던 거라고 자조적인 말도 하게 된다. 네 명의 아이를 열심히 잘 키워낸 것에 대해선 누구도 칭찬하지 않는데, 벤이라는 아이를 낳았다는 것으로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고 비난을 받는 자신을 견뎌내지 못하는 해리엇은 점점 지쳐가고 늙어갈 뿐이다.
당연하다고 여긴 그들의 행복한 가정, 그들이 추구한 가치 등이 모두가 허망한 것이라고, 너무도 쉽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굳이 이 작품을 정치적인 내용으로 확대 해석하거나, 혹은 그 아이를 끌어안기 위해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는 질타성 감상을 내놓고 싶지 않다. 벤이 가족들(혹은 사회 구성원 전체)과 남다른 특성으로 외로웠을 것처럼, 해리엇 역시 그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서 충분히 외로웠다. 누구라도 겁나고 두려웠을 그 상황에 다른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다.(작품 속에선 의사 선생님들조차 원론적인 얘기들만 고집할 뿐, 이들에게 서툰 '위로'조차도 건네주지 못한다.)
작품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권선징악적 구조도 아닌, 그저 이런 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소설'로서의 이야기로 읽힌다. 여기에 교훈적 깨달음이나 반성을 꼭 갖다 붙일 필요도 없다. 작품 속에서 끊어지는 대목이 전혀 없어서 끊어 읽기가 아주 망하지만, 끊어 읽고 싶지 않게끔 충분히 매력적인 글쓰기를 작가는 남김 없이 보여주었다. 굳이 노벨상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도리스 레싱의 문장은 맛있었다. (사실 노벨상 받은 작품인데 지루하지 않다고 여긴 예는 오랜만이었다..;;;) 책꽂이에서 다른 민음사 세계 문학 시리즈와 함께 빛날 '다섯째 아이'가 내심 흐뭇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