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잘 쓰는 법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2
시미즈 이쿠타로 지음, 김수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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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속품이 없으면 기계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애당초 기계 전체의 이미지가 없다면 어떤 부속품을 만들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부속품이라도 좋으니 많은 부속품을 서로 연결시키기만 한다고 기계가 완성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 때문에 나 같은 단문주의자라도 단문이 긴 글의 전제라고 말할 때 다른 의미에서 긴 글이 단문의 전제라는 진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부속품과 기계 전체의 이미지가 서로 전제가 되며 서로를 컨트롤하는 것이다. - P22

긍정도 부정도 주어가 없다면 성립되지 않는다. 주어가 명료하다는 것과, 긍정과 부정이 명료하다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주어가 확실한, 혹은 긍정과 부정이 확실한 문장을 쓴다는 것은 쓰는 본인이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글은 난처한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글을 쓸 때는 다소 곤란한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각오하고 작업에 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P45

애당초 논문이란 누구든지 읽을 수 있고 누구에게도 통용될 수 있도록 폭넓고 동시에 강한 설득력을 갖추어야 한다. 상대방이 있어도 그 상대방에게 어떻게든 얼버무릴 요량이라면 훌륭한 논문은 쓸 수 없다. 그렇게 폭넓고 강한 설득력을 갖춘 상태에서 특정 상대를 고려하는 것이 순서다. 읽는 사람들 중에는 여러 가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있겠지만 글은 사고방식의 차이를 돌파해갈 정도의 힘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힘은 그저 강렬한 형용사 따위를 사용한다 해도 결코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조용한, 그러나 누구든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증명일 것이다. - P72

저자를 대신하여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마스터한 서적이나 논문이기 때문에 더더욱 진정한 비판을 가할 수 있다. 그 정도까지 상대방에게 깊이 들어가면 분명 불만스러운 부분도 나올 것이다. 또한 불만스러운 부분에 대해 잠자코 있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만스러운 부분에 대해 발언하게 된다면 아무래도 그 부분에 관해 자신 있는 발언이 가능할 정도로 공부해야 한다. (...) 그렇게 생각하면 상대방을 고를 때도 자신과 사고가 전혀 다른 저자가 아니라 오히려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는 저자 쪽이 좋을 것이다. - P73

글을 쓰기 시작한다는 것은 기하학 공부의 출발점에 서는 일이다. 아무리 작은 오차라도 그것으로 끝장이다. 쓰기 시작하는 부분에서는 수식을 조립하는, 수식을 푸는 듯한 태도가 특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P83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러한 것들에 의해 하나의 혼돈스러운 공간적 병존 상태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다. 이 질서는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인위적인 것이다. 인위적 질서에 의해 자연적 상태를 다시 옮기는 것이다. 그러나 인위적 질서가 로고스에 적합한 것일 때 이 질서는 현실 그 자체가 몰래 바라고 있던 질서로서 나타난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공간적 병존 상태에 있던 현실이 인간의 손에 의해 시간적 과정 속으로 던져지고 새로운 인위적 질서를 부여받았을 때 거기서 새로운 현실이 태어나는 것이다. 새로운 진실이라 불러도 좋다. 그저 새로울 뿐 아니라 이것이 진정한 현실, 진정한 진실이다. 유의미한 현실, 유의미한 진실이다. 진정한 현실이나 진실은 인간의 작용을 포함하여 비로소 성립된다. 인간의 책임을 포함하여 비로소 성립한다. - P108

하나의 단어는 글을 만드는 돌이나 벽돌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손으로 구성된 현실을 만드는 돌이나 벽돌이다. 글은 하나의 건축물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글이리는 건축물을 완성시켜가는 것은 결국 현실이라는 건축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글이 작성되기 전에 존재하는 현실은 오히려 인간이 유의미한 현실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 P112

이러한 대립관계니 정도의 차이도 이쪽에서 문제를 골똘히 응시하고 있으면 그 안에서 나온다. 즉 글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글은 입체적 구조를 가지게 된다. 공간적 병존 상태에 있던 것이 멋지게 시간적 과정으로 변환되고 거기서 새롭게 입체화된다. 그러나 대립관계든 정도의 차이든 우리들의 정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으로, 정신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결코 태어날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대립관계든 정도의 차이든 실은 현실 그 자체가 정신을 향해 몰래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이 내부에서 바라고 있었던 것이지 정신이 외부로부터 폭력적으로 강요한 것이 아니다. 깊이 들어가야 한다. 대립관계나 정도의 차이가 튀어나올 때까지 깊이 들어가야 한다. - P114

본론이 큰 건축물, 서론은 작지만 별채의 건축물, 결론 역시 작지만 별채의 건축물이라는 식으로 쓰는 편이 좋다. 환언하면 서론을 쓰고 있는 동안 본론으로 들어가고 본론을 쓰고 있는 동안 결론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본론을 써버린 후 서론 및 결론이라는 두 개의 독립된 작은 건축물을 지어야 할 것이다. - P117

어떤 사람의 스타일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사유 및 서술의 어떤 습관이 고정된다는 말이다. 습관이 고정되면 이전에는 의식과 노력에 의해 마침내 달성되었던 일들이 무의식중에 노력 없이 달성되게 된다. 어린 시절에는 자신의 집에 있는 계단을 오를 때도 의식과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성장하면서 그 습관이 고정되면 무의식적으로 아무런 노력 없이 이른바 기계적으로 계단을 뛰어서 오르내릴 수 있다. 그리고 반대로 계딘 중간에서 자신의 동작을 의식해버리면 자칫 걸려 넘어질 수 있다. 스타일이라는 습관이 완성되면 어느 정도까지 기계적으로 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집 계단은 기계적으로 오르내릴 수 있는 성인이라도 이웃집 계단은 한 걸음씩 의식적으로 노력하면서 올라가야 한다. 내려가야 한다. 요컨대 새로운 경험을 만나 습관이 쓸모가 없어지게 된다. (...) 즉 완성된 스타일은 편리한 것임에 틀림없으나 그것은 결코 만능이 아니다. - P118

글에는 공격하는 면과 지키는 면이 있다. 글을 쓸 때 우리들은 공격과 수비라는 두 가지 활동을 한다. 말할 것도 없이 공격이란 자신의 의견이나 발언을 주장하는 측면이다. 자신만이 사회를 향해 행하는 것이며 자신만이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글을 쓴다는 긴장감도 있다. 그리고 이 측면에서는 자신의 관념이 글로 대폭발을 거두기 위해서 사전의 소폭발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에 비해 수비란 자신의 의견이나 발언이 학설적으로 고립되지 않도록 단단히 설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작업이다. 이것이 부족하면, 혹은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사회를 향해 나아갈 자신이 생겨나지 않는다. 공격하는 쪽이 개인적인 측면이라면 수비하는 쪽은 사회적인 측면이다. 이 측면에서는 친구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책에서 확인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서술 그 자체로는 이 측면이 배경에 물러서고 문자화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 P130

모든 것들을 내려놓은 후에 굵은 뼈대가 남는다. 아니, 굵은 뼈대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굵은 뼈대가 완성되면 공부했던 성과가 이번에는 가는 뼈대나 자잘한 가시로서 도움을 준다. 그것이 행해지기 전까지는 무엇이 굵은 뼈대인지 무엇이 잔가시인지 애매하다. 쓰는 본인은 명확하다고 생각해도 어쨌든 권위 있는 인용구라는 잔가시가 중심에 놓인다. 견고한 굵은 뼈대가 없는 글은 좋지 않다. 공부 끝에 모든 것들을 버리고 굵은 뼈대만 남겼을 때 사방에서 잔가시들이 도와주러 와주는 것이다. - P138

‘문체란 바로 우리들이 우리들의 사상에 부여한 질서 및 운동을 말한다.‘ 내가 지금까지 논해왔던 것도 ‘글을 쓴다는 것은 사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한마디로 집약된다. - P139

변화란 굵은 뼈대를 중심으로 하는 무브망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진정한 변화다. 굵직한 논리적 굴곡이 중요하며 자잘한 변화는 피하는 편이 좋다. 하지만 커다란 굴곡에 따라 써 내려가면 쓸 수 없는 사항, 담아낼 수 없는 논점이 반드시 생겨버린다. 물론 처음에는 쓸 작정으로 생각하거나 조사해두었던 논점이지만 자연스럽고 커다란 논리적 굴곡 그대로 서술이 나아가면 아무래도 이 논점을 버려야만 하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이다. ‘주‘로 다는 방법도 있지만 ‘주‘로 처리하기에는 문제가 너무 크고 버리기에도 너무 미련이 남는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마음을 굳게 먹고 단호히 버려야 한다. 그것도 굵은 뼈대를 중심으로 한 무브망이 전제가 되어야겠지만 버리는 쪽이 산뜻하다. 그때는 일단 버리고 다른 기회에 그 논점을 한가운데 고정시킨 또 다른 논문을 써야 한다. 미련이 있으면 힘차고 굴곡 있는 논리는 태어나지 않는다. - P141

관념은 경험의 흐름으로 녹여져야 하는 동시에 경험의 흐름은 관념으로 결정화시켜야 한다. 방향이 어떻든 일방통행은 안 된다. 왕복 교통이어야만 한다. 왕복 교통에 의해 우선 경험은 추상적 관념의 도움을 빌려 스스로를 조직화할 수 있으며 스스로를 고도화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관념이나 관념 시스템이 경험의 테스트를 거쳐 풍요로워지고 성장할 수 있다. - P160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진리나 사실은 인간의 활동이나 책임을 포함하여 비로소 성립되는 법이다. 이를 망각하고 진리나 사실이 스스로 외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해하며 논문 역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잊은 채 그저 진리를 쓰면 되고 사실을 기술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어떤 글을 쓸지 고민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많은 논문들이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들, 요컨대 독자에게 의존하는 사람들보다 관료학자에 의해 쓰여왔다는 것과도 관련 있을 것이다. - P189

글은 역사적으로 전혀 새로운 단계, 즉 유력한 경쟁자에게 둘러싸여지는 단계에 돌입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글을 쓴다는 것이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면 앞으로는 그 어려움이 한층 증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글이 가벼운 몸이 되어 그 본질로 순수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 생각해도 추상적 언어로 이미지를 표현하는, 언어를 통해 이미지를 타인의 내부에 전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글의 본질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 아니다. 영상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과거 사람들과는 도저히 견줄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방식으로 이 본질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197

문장 공부는 문장이라는 형식적인 것의 공부로는 가당찮은 것이며 철학의 문제든 정치의 문제든 경제의 문제든, 어쨌든 그러한 내용 공부와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장을 만드는 것은 사상을 만드는 것이며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니체는 말하고 있다. ‘문체의 개선이란 사상의 개선을 말한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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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리커버)
심채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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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문과에 속하게 되었지만, 사실 나의 첫 장래희망은 천문학자였다. 그 어린시절에 이렇게 천문학자의 생활을 현실적으로 알려주는 사람이 내게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그때의 꿈을 이루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을까. 참고로 이 책의 제목은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과학적 사실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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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1-01 00: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라파엘님 2022년 건강하게 행복하게!!
 \│ /

.*˝ ☆˝*.

( + 福 + )
˝*****˝ 복 마뉘!^^

라파엘 2022-01-01 00:38   좋아요 2 | URL
항상 감사합니다!! 스콧님도 늘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러블리땡 2022-01-01 0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라파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파엘 2022-01-01 08:45   좋아요 1 | URL
정말 감사합니다!! 땡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 😄

겨울호랑이 2022-01-01 08: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라파엘님 새해 건강하시고, 행복한 한 해 되시길 소망합니다! ^^:)

라파엘 2022-01-01 09:41   좋아요 2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겨울호랑이님도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

han22598 2022-01-01 11: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실...이과문과 구별같은건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 같아요 ㅎㅎ 라파엘님 2022에는 우리 하늘 많이 바라보면 살아요 ^^

라파엘 2022-01-01 15:16   좋아요 2 | URL
맞아요... 그래서 이제 우리나라 학교교육은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으로 운영된답니다 ㅎㅎ 한님 말씀대로 우리 하늘을 보며 살아가는 평안한 2022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han22598 2022-01-03 14:11   좋아요 1 | URL
앗. 바뀌었나보네요 ㅎㅎㅎ
 

  의미를 찾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있다. 그러한 자신의 내면을 명확하게 인지한 상태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 그들은 애초에 그 내면의 문제를 그냥 묻어두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 문제를 이해하고 설명해보고자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의 경험에서 어떤 수단과 자원을 선택하고 사용하게 된다. 누군가는 그러한 자원으로 문학을 선택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경제학이나 정치학 또는 여성학 등이 그 자원이 될 수 있다. 자기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원은 그 사람의 삶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서, 나는 주로 철학과 교육학 그리고 신학을 문제해결의 자원으로 사용한다. 자기 내면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그냥 묻어두고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은, 그것이 언제가 되든지 결국 공부하는 사람이 된다. 


  자신을 설명하고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어떤 자원을 선택하든지, 그 공부의 동기와 결과의 자리에 혐오와 배제 등 폭력성이 자리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나에게 정답인 것이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정답인 것은 아니며, 자기 삶의 올바른 해석은 결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스스로 해낼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아가고 만들어내는 삶의 해석만을 정답으로 여긴다면, 그 순간부터 그것은 공부가 아니라 종교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러한 종교는 다른 삶의 해석을 함부로 판단하고 배제하며 폭력적으로 변해간다. 내가 근본적으로 원하는 것이 그러한 배제가 아니라 사랑이라면, 내 공부의 동기와 결과에는 단지 사랑이 자리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다른 이들과 조금 더 공감할 수 있기를 바라고, 내가 살아간 이후에 세상이 조금은 더 살기 좋은 곳이 되기를 바란다. 


  언제나 성실하게 공부하고자 하지만, 나는 배우는 것이 너무나 더딘 사람이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렇다면 왜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던 사춘기를 겪어내고,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나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나는 인생을 잘 모르고 세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사건을 경험해야, 얼마나 다양한 감정을 겪어내야, 얼마나 오래 살아봐야 삶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나의 인생을 다 살아내고 나면 그때는 조금이라도 어떤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까. 환갑, 그것이 인생을 한 바퀴 돌았다는 의미라면, 나는 일단 내 인생을 한 바퀴 살아보고 싶다. 인생을 한 바퀴 살아보면, 그때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때는 삶을 이해할 수 있을까. 적어도 조금은 그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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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12-28 12:27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인생을 한 바퀴 돌아도 아니 70, 80살이 되어도 삶에 대해 잘 모를 것 같아요.
여든이 넘은 친정어머니도 이제야 깨닫게 되는 일들이 생기더라고요.
아마 죽는 순간에도 우리는 삶에 대해 잘 모른 채 눈을 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씩 깨닫고 알아 갈 뿐... ^^
그래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별표 다섯개...) ㅋㅋ

라파엘 2021-12-28 17:56   좋아요 7 | URL
페크님 말씀대로, 모른다는 것을 알고 언제나 배우는 마음으로 평생 살아가야겠지요. 다만 한해가 지날수록 나이만 먹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한해를 더 살아보는 만큼, 그만큼씩 더 선하고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ㅎㅎ 페크님, 좋은 말씀 감사해요~ ^^

scott 2021-12-28 12:5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것 코로나 시대에 이보다 더 절실하게 마스크 없는 세상 더 나은 세상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적이 있었나 싶었을정도로 우리 모두에게 힘든 시기 인것 같습니다
라파엘님의 이 페이퍼 며칠동안 읽으면서 저 자신을 되돌아 봅니다 ^^

라파엘 2021-12-28 18:02   좋아요 4 | URL
한번 읽고 지나가는 글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다시 읽히는 글이 되다니,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평소에 스콧님 글을 통해 많이 배우고 생각하게 됩니다. 건강 유의하시고, 따뜻한 연말연시 보내세요 ^^

mini74 2021-12-28 18:0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라파엘님의 공부의 동기와 결과에 사랑 공감이 있길 바란다는 글, 참 좋아요. ㅠㅠ 저 또한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싶습니다 ~ 라파엘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라파엘 2021-12-28 18:07   좋아요 4 | URL
미니님은 이미 삶에 사랑이 흐르고 있는 것 같은데요 ㅎㅎ 종종 올려주시는 북튜브도 잘 보고 있습니다!! 좋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

공쟝쟝 2021-12-31 16: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신학이 그 자원으로 작용한다는 말이 무척 놀랍습니다. 앞으로 읽고 쓰며 공부하실 것들을 만약 알라딘 서재를 통해서 제가 볼수 있다면, 매우 눈 반짝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태생이 무교로서, 그래서 더 신학을 읽는다는게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공부의 결과에 사랑이 닿는다면 좋겠지만 그 사랑이 무엇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사랑. 너무 오염된 말 같아서 이제 쓰기도 싫어진 그것. 사랑~ 찾아가보줘. 일단은 인생 한바퀴 돌 때까지의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하며 더듬더듬 ^^

라파엘 2021-12-31 18:25   좋아요 2 | URL
신학도 인간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만든 제도로 오염되었고, 사랑도 인간이 잘못된 지점에 가져다 붙이면서 오염된 것 같습니다. 쟝님 말씀대로, 둘 다 본래 어떤 모습인지 알기 어려울 만큼 오염되고 오해되기 쉬운 상황인 듯 해요. 여러모로 모든 좋은 것들은 꼭 인간들이 손대서 망쳐놓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 인간들 안에서 또 희망을 찾아야겠지요. 저도 결국 인간이니까요 ㅎㅎ 우리가 더듬더듬 잘 찾아갔으면 좋겠습니다 ^^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의 삶에 참여한다는 의미이며, 내가 하나의 새로운 삶을 경험한다는 측면에서 그것은 나의 기존의 경험과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나의 어린시절의 독서는 내 실제 삶과는 괴리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학식을 하고 교과서를 잔뜩 받아온 그 시절의 나는, 새 책이 많이 생겨서 기분이 너무 좋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거실에서 교과서를 쌓아두고 전부 읽어버렸다. 교과서를 읽다보면 교과서에서 언급되는 작품들이 궁금해져서, 자연스럽게 교과서에서 언급된 책을 사서 읽었고 교과서에서 언급된 음반을 사서 들었다. 그리고 읽을 책이 더 필요해지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작품이나 유명한 고전들을 찾아서 읽어나갔다. 그 시절의 나에게 교과서는 읽을 책을 선별하기 위한 간편한 기준이 되어주었다. 


  훌륭한 문학작품들이 어린이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까. 그 시절의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읽는 문학작품들을 모두 원문으로 읽어보고 싶었다. 원어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지만, 어린이를 위해 쉽게 쓰여지거나 요약된 책이 아니라 작품의 원문 그대로를 읽고 싶었고 그래서 원하는 대로 읽었다. 고작 열살 남짓한 어린이는 그렇게 머릿속에 어른들의 이야기를 집어넣었다. 


  책의 내용은 말 그대로 머릿속에만 들어갔다. 평범한 가정에서 평탄하게 자라는 어린이에게는 인생 경험이라고 할 만한 게 별로 없었고, 그런 보통의 어린이에게 어른들의 삶과 인생 이야기가 가슴까지 들어갈리 없었다. 소풍 가는 버스에서 옆자리의 친구에게 내가 읽은 책의 내용을 한두 시간 동안 줄줄이 읊어줄 수 있었지만, 그건 내 이야기가 아니므로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굳이 그 시간의 감정을 분별해보자면, 전달하는 내용과 관계 없는 잘난척 혹은 자기만족. 


  그 어린이가 자라기는 했을까. 책의 내용을 이해하고 정리해서 전달하는 기술은 학교교육을 통해 분명히 더 잘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나의 삶과는 어떻게 관련이 되는가. 문학을 읽으며 작가가 그려내는 그 삶에 내가 들어가서 살아볼 수 있을만큼, 다른 인생에도 참여해볼 수 있을만큼 이제 나는 내 삶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가. 


소설에는 세상 모든 게 다 있다. 버려지고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 인간과 인간 사이에 오고가는 감동과 따뜻한 마음, 그것들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문장들. 도대체 이런 소설을 읽지 않고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또 버텨낸단 말인가. 소설이야말로 우리가 끝까지 쥐고 있어야 할 거룩한 예술이다. - P22

다른 분야보다는 소설이, 잠깐 동안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삶을 살아보게 해준다. 소설은 지금 내가 있는 현실을 떠나 다른 환경과 시간 속에서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준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앞에 펼쳐진 일들을 맞닥뜨리며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기도 한다. 그러면서 나는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공감하기도 한다. 그동안 몰랐던 다른 곳의 다른 상황들도 소설을 통해 알게 되기도 한다. - P31

나의 경우엔 책을 읽는 것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무척 안타깝다. 이렇게 재미있는데, 좀 읽어보지. 읽어보면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 수 있을 텐데. 책을 전혀 읽지 않는다면 일단 쉽게 읽히는 책으로 시작하면 좋을텐데. 그러면서 멋진 문장들이 가득한 책도 읽는 것이다. 국내 작가의 작품으로 시작하는 것도 좋다. 혹시라도 ‘소설‘이 유독 재미없다고 하는 사람에겐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문장부호를 충실하게 지켜가면서, 따라가면서 읽으세요." 큰따옴표 안의 글은 정말 대화한다는 생각으로, 느낌표가 있는 문장은 정말 감탄하거나 놀라듯이, 쉼표에서는 꼭 쉬어주는 것이다. 그러면 책은, 소설은, 정말 재미있다! 그렇게 문장부호를 충실히 따르며 읽다보면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지면서 내용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 P43

하지만 소설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어린 시절 내가 처음 소설이란 걸 읽게 됐을 때, 소설은 그저 재미를 얻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나는 소설에서 이야기와 재미를 즐기고 감동을 받는다. 그리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내가 알지 못하는 많은 것들에 대해 배운다. -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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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24 13: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라파엘님!
가족 모두 행복 가득! 하시길 바랍니다
🎄 ℳ𝒶𝓇𝓇𝓎 𝒞𝓇𝒾𝓈𝓉𝓂𝒶𝓈 🎅🏻

(\ ∧♛∧ .+° °*.
(ヾ( *・ω・) °・ 🎁
`し( つ つ━✩* .+°
(/しーJ

라파엘 2021-12-24 19:35   좋아요 0 | URL
항상 감사합니다!!! 스콧님께서도 가족과 함께
기쁘고 행복한 성탄절 되시길 기도합니다~ ^^

별족 2021-12-24 13: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삶과 이야기 가운데 균형을 잡는 건 어려운 거 같아요^^

라파엘 2021-12-24 19:39   좋아요 2 | URL
맞아요 ㅎㅎ 다양한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수 있기를 바라고,
저의 삶도 하나의 훌륭한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

서니데이 2021-12-25 01: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라파엘님, 즐거운 크리스마스와 따뜻한 연말 보내세요.
주말 날씨가 많이 춥지만, 좋은 일들 가득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메리크리스마스, 좋은 밤 되세요.^^

라파엘 2021-12-25 01:22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해요!! 건강하고 행복한 연말연시 되시길 기원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
 
은총
최현순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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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론‘이라는 신학 분야는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 가는 길, 하느님과 함께 가는 여정에 대한 성찰이다. 저마다 제 길을 가지만, 우리는 같은 ‘인간‘이고 각자를 동반하는 하느님도 같은 하느님이기에, 하느님과 인간이 이루어가는 여정에 대한 보편적이고 공통된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너나없이 초행길인 삶에서 그런 설명은 이 길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사건과 체험을 ‘해석‘하는 데에, 그리고 이 길을 좀 더 ‘잘‘ 가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학문으로서의 은총론이 신앙인에게 봉사할 수 있는 부분은 그것일 것 같다. - P9

(...) 인간이 거부할 때 하느님의 은총은 효과를 내지 못하는가? 하느님의 은총은 ‘나의 태도에 달린 것일까?‘ 여기에 은총과 자유의지의 문제가 있다. - P22

은총 속에서 삶의 여정을 걸어갈 때 이 여정의 분명한 주인공인 ‘나‘는 소멸되거나 무화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다. 그렇다면 본성과 은총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 P24

그러므로 은총을 이해하려는 우리의 여정에 중요한 것은 ‘나는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다‘, ‘내가 이러이러한 것을 했기 때문에 은총을 받을만하다‘라는 식의 사고를 버리는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동기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 P41

사도행전에서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구원 업적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은총을 올바로 이해하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로, 성경에서는 은총에 대한 개념을 내게 좋은 것, 내게 이익이 되는 것, 내 마음에 드는 것 등 나를 위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업적을 가리킨다. - P57

삼위일체 하느님의 존재 방식은 위타적 사랑 곧 타자를 위한 사랑이고, 인간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존재 방식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 P59

한편 은사는 그 사람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주어진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공동체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은사를 자신만의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 P67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물론 다양한 은사가 필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은사의 종류나 크기가 아니라 그 은사를 받은 사람이 얼마나 하느님 앞에서 충실히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관건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 하느님께 시선을 두는 것, 그래서 그분의 시선에 따라 움직이고 그분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그분이 주신 은사를 사용하는 것이다. 거기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란 어떤 영토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총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이 있다. - P73

따라서 하느님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된 충만함이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다가갈수록 우리는 사람들에게 더 도움이 되고, 더 성숙해져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우리의 신앙이 한낱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올바른 가톨릭교회의 신앙은 인간을 통합적으로 성장시킨다. - P96

은총은 선행에 앞서고, 선행을 동반하며 또한 뒤따른다. 곧 선행은 어떠한 경우에도 은총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선행과 은총의 관계에 있어 가톨릭교회의 확고한 가르침은 은총의 우선성이다. - P189

하느님이 주실 구원과 우리의 선행 사이에 ‘비례적‘ 관계가 있다는 생각은 신학에서 항상 부정되었다. 선행을 베푼 만큼, 공덕을 쌓은 만큼 구원에 이른다는 생각은 인간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 P190

하느님은 분명히 당신 은총 덕분으로 우리가 행할 수 있었던 선행에 대하여 그것을 마치 우리가 한 것처럼 우리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것으로 갚아주실 것이다. - P197

이처럼 자유란 하느님과 비슷해지는 과정이며 하느님 모상의 실현이다. 자유란 인간이 본질로서의 자신을 실현하게 되는, 곧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운동 안에 있다. - P204

따라서 참된 자유, 가장 높은 형태의 자유란 인간 본성의 충만한 완성에로 나아가는 것이다. 참된 자유는 단순한 선택의 자유와는 구분되고, 자유방임적 자유하고는 더더욱 다른 것이다. - P206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이 인성을 억압하거나 흡수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 본성의 충만한 협력이 있었다. 이처럼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안에 작용하실 때에도 하느님은 우리의 본성을 억누르거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게 하지 않으신다. - P214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당신께 이르는 길을 알게 되며(물론 이것 또한 은총이다), 그 길을 걸음으로써 하느님을 더욱 알게 되고, 하느님을 알게 되면 더 사랑하게 되며(사랑하게 되는 것도 은총이다), 하느님은 그런 나를 보시고 더욱 은총을 내려 주시는 것이다. 이 역동성은 마치 하느님과 인간이 손을 잡고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 P218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 본성을 지녔다. 그렇지만 개인적 차원에서 볼 때, 하느님은 각 사람을 고유하게 창조하셨으며, 각자의 개인사가 다르고 각 개인의 구원사 또한 다르다. 우리는 각자 구원된 그리고 완성된 고유의 모습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각 사람이 궁극적 구원에 이른 모습은 공장에서 찍어내듯 모두 동일하지는 않다. - P219

(...) 하느님은 당신 은총으로 채우시는 ‘나의 인생 여정‘에서 나를 하찮게 여기지 않으신다. 조금만 성찰하면 하느님 앞에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알지만, ‘당신의 은총이 인간들의 공로가 되기를 바라실 정도로 그토록 좋으신 하느님‘에 대한 신뢰, 은총과 자유의지가 이루는 그 아름다운 여정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감히 이렇게 말하게 한다 "나는 내가 그리고 나의 영적 여정에서 내가 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신다." 그래서 은총에 대한 이야기는 ‘자비의 복음‘이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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