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속품이 없으면 기계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애당초 기계 전체의 이미지가 없다면 어떤 부속품을 만들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부속품이라도 좋으니 많은 부속품을 서로 연결시키기만 한다고 기계가 완성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 때문에 나 같은 단문주의자라도 단문이 긴 글의 전제라고 말할 때 다른 의미에서 긴 글이 단문의 전제라는 진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부속품과 기계 전체의 이미지가 서로 전제가 되며 서로를 컨트롤하는 것이다. - P22
긍정도 부정도 주어가 없다면 성립되지 않는다. 주어가 명료하다는 것과, 긍정과 부정이 명료하다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주어가 확실한, 혹은 긍정과 부정이 확실한 문장을 쓴다는 것은 쓰는 본인이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글은 난처한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글을 쓸 때는 다소 곤란한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각오하고 작업에 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P45
애당초 논문이란 누구든지 읽을 수 있고 누구에게도 통용될 수 있도록 폭넓고 동시에 강한 설득력을 갖추어야 한다. 상대방이 있어도 그 상대방에게 어떻게든 얼버무릴 요량이라면 훌륭한 논문은 쓸 수 없다. 그렇게 폭넓고 강한 설득력을 갖춘 상태에서 특정 상대를 고려하는 것이 순서다. 읽는 사람들 중에는 여러 가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있겠지만 글은 사고방식의 차이를 돌파해갈 정도의 힘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힘은 그저 강렬한 형용사 따위를 사용한다 해도 결코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조용한, 그러나 누구든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증명일 것이다. - P72
저자를 대신하여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마스터한 서적이나 논문이기 때문에 더더욱 진정한 비판을 가할 수 있다. 그 정도까지 상대방에게 깊이 들어가면 분명 불만스러운 부분도 나올 것이다. 또한 불만스러운 부분에 대해 잠자코 있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만스러운 부분에 대해 발언하게 된다면 아무래도 그 부분에 관해 자신 있는 발언이 가능할 정도로 공부해야 한다. (...) 그렇게 생각하면 상대방을 고를 때도 자신과 사고가 전혀 다른 저자가 아니라 오히려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는 저자 쪽이 좋을 것이다. - P73
글을 쓰기 시작한다는 것은 기하학 공부의 출발점에 서는 일이다. 아무리 작은 오차라도 그것으로 끝장이다. 쓰기 시작하는 부분에서는 수식을 조립하는, 수식을 푸는 듯한 태도가 특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P83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러한 것들에 의해 하나의 혼돈스러운 공간적 병존 상태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다. 이 질서는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인위적인 것이다. 인위적 질서에 의해 자연적 상태를 다시 옮기는 것이다. 그러나 인위적 질서가 로고스에 적합한 것일 때 이 질서는 현실 그 자체가 몰래 바라고 있던 질서로서 나타난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공간적 병존 상태에 있던 현실이 인간의 손에 의해 시간적 과정 속으로 던져지고 새로운 인위적 질서를 부여받았을 때 거기서 새로운 현실이 태어나는 것이다. 새로운 진실이라 불러도 좋다. 그저 새로울 뿐 아니라 이것이 진정한 현실, 진정한 진실이다. 유의미한 현실, 유의미한 진실이다. 진정한 현실이나 진실은 인간의 작용을 포함하여 비로소 성립된다. 인간의 책임을 포함하여 비로소 성립한다. - P108
하나의 단어는 글을 만드는 돌이나 벽돌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손으로 구성된 현실을 만드는 돌이나 벽돌이다. 글은 하나의 건축물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글이리는 건축물을 완성시켜가는 것은 결국 현실이라는 건축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글이 작성되기 전에 존재하는 현실은 오히려 인간이 유의미한 현실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 P112
이러한 대립관계니 정도의 차이도 이쪽에서 문제를 골똘히 응시하고 있으면 그 안에서 나온다. 즉 글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글은 입체적 구조를 가지게 된다. 공간적 병존 상태에 있던 것이 멋지게 시간적 과정으로 변환되고 거기서 새롭게 입체화된다. 그러나 대립관계든 정도의 차이든 우리들의 정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으로, 정신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결코 태어날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대립관계든 정도의 차이든 실은 현실 그 자체가 정신을 향해 몰래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이 내부에서 바라고 있었던 것이지 정신이 외부로부터 폭력적으로 강요한 것이 아니다. 깊이 들어가야 한다. 대립관계나 정도의 차이가 튀어나올 때까지 깊이 들어가야 한다. - P114
본론이 큰 건축물, 서론은 작지만 별채의 건축물, 결론 역시 작지만 별채의 건축물이라는 식으로 쓰는 편이 좋다. 환언하면 서론을 쓰고 있는 동안 본론으로 들어가고 본론을 쓰고 있는 동안 결론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본론을 써버린 후 서론 및 결론이라는 두 개의 독립된 작은 건축물을 지어야 할 것이다. - P117
어떤 사람의 스타일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사유 및 서술의 어떤 습관이 고정된다는 말이다. 습관이 고정되면 이전에는 의식과 노력에 의해 마침내 달성되었던 일들이 무의식중에 노력 없이 달성되게 된다. 어린 시절에는 자신의 집에 있는 계단을 오를 때도 의식과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성장하면서 그 습관이 고정되면 무의식적으로 아무런 노력 없이 이른바 기계적으로 계단을 뛰어서 오르내릴 수 있다. 그리고 반대로 계딘 중간에서 자신의 동작을 의식해버리면 자칫 걸려 넘어질 수 있다. 스타일이라는 습관이 완성되면 어느 정도까지 기계적으로 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집 계단은 기계적으로 오르내릴 수 있는 성인이라도 이웃집 계단은 한 걸음씩 의식적으로 노력하면서 올라가야 한다. 내려가야 한다. 요컨대 새로운 경험을 만나 습관이 쓸모가 없어지게 된다. (...) 즉 완성된 스타일은 편리한 것임에 틀림없으나 그것은 결코 만능이 아니다. - P118
글에는 공격하는 면과 지키는 면이 있다. 글을 쓸 때 우리들은 공격과 수비라는 두 가지 활동을 한다. 말할 것도 없이 공격이란 자신의 의견이나 발언을 주장하는 측면이다. 자신만이 사회를 향해 행하는 것이며 자신만이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글을 쓴다는 긴장감도 있다. 그리고 이 측면에서는 자신의 관념이 글로 대폭발을 거두기 위해서 사전의 소폭발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에 비해 수비란 자신의 의견이나 발언이 학설적으로 고립되지 않도록 단단히 설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작업이다. 이것이 부족하면, 혹은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사회를 향해 나아갈 자신이 생겨나지 않는다. 공격하는 쪽이 개인적인 측면이라면 수비하는 쪽은 사회적인 측면이다. 이 측면에서는 친구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책에서 확인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서술 그 자체로는 이 측면이 배경에 물러서고 문자화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 P130
모든 것들을 내려놓은 후에 굵은 뼈대가 남는다. 아니, 굵은 뼈대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굵은 뼈대가 완성되면 공부했던 성과가 이번에는 가는 뼈대나 자잘한 가시로서 도움을 준다. 그것이 행해지기 전까지는 무엇이 굵은 뼈대인지 무엇이 잔가시인지 애매하다. 쓰는 본인은 명확하다고 생각해도 어쨌든 권위 있는 인용구라는 잔가시가 중심에 놓인다. 견고한 굵은 뼈대가 없는 글은 좋지 않다. 공부 끝에 모든 것들을 버리고 굵은 뼈대만 남겼을 때 사방에서 잔가시들이 도와주러 와주는 것이다. - P138
‘문체란 바로 우리들이 우리들의 사상에 부여한 질서 및 운동을 말한다.‘ 내가 지금까지 논해왔던 것도 ‘글을 쓴다는 것은 사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한마디로 집약된다. - P139
변화란 굵은 뼈대를 중심으로 하는 무브망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진정한 변화다. 굵직한 논리적 굴곡이 중요하며 자잘한 변화는 피하는 편이 좋다. 하지만 커다란 굴곡에 따라 써 내려가면 쓸 수 없는 사항, 담아낼 수 없는 논점이 반드시 생겨버린다. 물론 처음에는 쓸 작정으로 생각하거나 조사해두었던 논점이지만 자연스럽고 커다란 논리적 굴곡 그대로 서술이 나아가면 아무래도 이 논점을 버려야만 하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이다. ‘주‘로 다는 방법도 있지만 ‘주‘로 처리하기에는 문제가 너무 크고 버리기에도 너무 미련이 남는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마음을 굳게 먹고 단호히 버려야 한다. 그것도 굵은 뼈대를 중심으로 한 무브망이 전제가 되어야겠지만 버리는 쪽이 산뜻하다. 그때는 일단 버리고 다른 기회에 그 논점을 한가운데 고정시킨 또 다른 논문을 써야 한다. 미련이 있으면 힘차고 굴곡 있는 논리는 태어나지 않는다. - P141
관념은 경험의 흐름으로 녹여져야 하는 동시에 경험의 흐름은 관념으로 결정화시켜야 한다. 방향이 어떻든 일방통행은 안 된다. 왕복 교통이어야만 한다. 왕복 교통에 의해 우선 경험은 추상적 관념의 도움을 빌려 스스로를 조직화할 수 있으며 스스로를 고도화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관념이나 관념 시스템이 경험의 테스트를 거쳐 풍요로워지고 성장할 수 있다. - P160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진리나 사실은 인간의 활동이나 책임을 포함하여 비로소 성립되는 법이다. 이를 망각하고 진리나 사실이 스스로 외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해하며 논문 역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잊은 채 그저 진리를 쓰면 되고 사실을 기술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어떤 글을 쓸지 고민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많은 논문들이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들, 요컨대 독자에게 의존하는 사람들보다 관료학자에 의해 쓰여왔다는 것과도 관련 있을 것이다. - P189
글은 역사적으로 전혀 새로운 단계, 즉 유력한 경쟁자에게 둘러싸여지는 단계에 돌입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글을 쓴다는 것이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면 앞으로는 그 어려움이 한층 증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글이 가벼운 몸이 되어 그 본질로 순수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 생각해도 추상적 언어로 이미지를 표현하는, 언어를 통해 이미지를 타인의 내부에 전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글의 본질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 아니다. 영상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과거 사람들과는 도저히 견줄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방식으로 이 본질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197
문장 공부는 문장이라는 형식적인 것의 공부로는 가당찮은 것이며 철학의 문제든 정치의 문제든 경제의 문제든, 어쨌든 그러한 내용 공부와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장을 만드는 것은 사상을 만드는 것이며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니체는 말하고 있다. ‘문체의 개선이란 사상의 개선을 말한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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