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론‘이라는 신학 분야는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 가는 길, 하느님과 함께 가는 여정에 대한 성찰이다. 저마다 제 길을 가지만, 우리는 같은 ‘인간‘이고 각자를 동반하는 하느님도 같은 하느님이기에, 하느님과 인간이 이루어가는 여정에 대한 보편적이고 공통된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너나없이 초행길인 삶에서 그런 설명은 이 길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사건과 체험을 ‘해석‘하는 데에, 그리고 이 길을 좀 더 ‘잘‘ 가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학문으로서의 은총론이 신앙인에게 봉사할 수 있는 부분은 그것일 것 같다. - P9
(...) 인간이 거부할 때 하느님의 은총은 효과를 내지 못하는가? 하느님의 은총은 ‘나의 태도에 달린 것일까?‘ 여기에 은총과 자유의지의 문제가 있다. - P22
은총 속에서 삶의 여정을 걸어갈 때 이 여정의 분명한 주인공인 ‘나‘는 소멸되거나 무화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다. 그렇다면 본성과 은총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 P24
그러므로 은총을 이해하려는 우리의 여정에 중요한 것은 ‘나는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다‘, ‘내가 이러이러한 것을 했기 때문에 은총을 받을만하다‘라는 식의 사고를 버리는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동기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 P41
사도행전에서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구원 업적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은총을 올바로 이해하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로, 성경에서는 은총에 대한 개념을 내게 좋은 것, 내게 이익이 되는 것, 내 마음에 드는 것 등 나를 위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업적을 가리킨다. - P57
삼위일체 하느님의 존재 방식은 위타적 사랑 곧 타자를 위한 사랑이고, 인간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존재 방식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 P59
한편 은사는 그 사람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주어진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공동체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은사를 자신만의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 P67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물론 다양한 은사가 필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은사의 종류나 크기가 아니라 그 은사를 받은 사람이 얼마나 하느님 앞에서 충실히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관건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 하느님께 시선을 두는 것, 그래서 그분의 시선에 따라 움직이고 그분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그분이 주신 은사를 사용하는 것이다. 거기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란 어떤 영토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총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이 있다. - P73
따라서 하느님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된 충만함이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다가갈수록 우리는 사람들에게 더 도움이 되고, 더 성숙해져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우리의 신앙이 한낱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올바른 가톨릭교회의 신앙은 인간을 통합적으로 성장시킨다. - P96
은총은 선행에 앞서고, 선행을 동반하며 또한 뒤따른다. 곧 선행은 어떠한 경우에도 은총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선행과 은총의 관계에 있어 가톨릭교회의 확고한 가르침은 은총의 우선성이다. - P189
하느님이 주실 구원과 우리의 선행 사이에 ‘비례적‘ 관계가 있다는 생각은 신학에서 항상 부정되었다. 선행을 베푼 만큼, 공덕을 쌓은 만큼 구원에 이른다는 생각은 인간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 P190
하느님은 분명히 당신 은총 덕분으로 우리가 행할 수 있었던 선행에 대하여 그것을 마치 우리가 한 것처럼 우리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것으로 갚아주실 것이다. - P197
이처럼 자유란 하느님과 비슷해지는 과정이며 하느님 모상의 실현이다. 자유란 인간이 본질로서의 자신을 실현하게 되는, 곧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운동 안에 있다. - P204
따라서 참된 자유, 가장 높은 형태의 자유란 인간 본성의 충만한 완성에로 나아가는 것이다. 참된 자유는 단순한 선택의 자유와는 구분되고, 자유방임적 자유하고는 더더욱 다른 것이다. - P206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이 인성을 억압하거나 흡수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 본성의 충만한 협력이 있었다. 이처럼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안에 작용하실 때에도 하느님은 우리의 본성을 억누르거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게 하지 않으신다. - P214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당신께 이르는 길을 알게 되며(물론 이것 또한 은총이다), 그 길을 걸음으로써 하느님을 더욱 알게 되고, 하느님을 알게 되면 더 사랑하게 되며(사랑하게 되는 것도 은총이다), 하느님은 그런 나를 보시고 더욱 은총을 내려 주시는 것이다. 이 역동성은 마치 하느님과 인간이 손을 잡고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 P218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 본성을 지녔다. 그렇지만 개인적 차원에서 볼 때, 하느님은 각 사람을 고유하게 창조하셨으며, 각자의 개인사가 다르고 각 개인의 구원사 또한 다르다. 우리는 각자 구원된 그리고 완성된 고유의 모습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각 사람이 궁극적 구원에 이른 모습은 공장에서 찍어내듯 모두 동일하지는 않다. - P219
(...) 하느님은 당신 은총으로 채우시는 ‘나의 인생 여정‘에서 나를 하찮게 여기지 않으신다. 조금만 성찰하면 하느님 앞에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알지만, ‘당신의 은총이 인간들의 공로가 되기를 바라실 정도로 그토록 좋으신 하느님‘에 대한 신뢰, 은총과 자유의지가 이루는 그 아름다운 여정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감히 이렇게 말하게 한다 "나는 내가 그리고 나의 영적 여정에서 내가 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신다." 그래서 은총에 대한 이야기는 ‘자비의 복음‘이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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