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오늘 한여름처럼 무더웠지만, 그래도 나에겐 아직 봄이다.
연두색 잎파리들이 바람에 살랑대며 빛나면 봄앓이로 마음이 들쑥날쑥 찌릿하다. 그래서 아직 봄인 것이 좋으면서도 어서 빨리 지나가 버렸으면 싶다. 올해는 좀 더 심한 것 같다. 젊음과 청춘과 반짝거림에 대한 미련따윈 없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던건가. 많이 아프고 많이 뒤돌아 보고 있다. 요즘......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 그냥 어디론가 훌쩍 가버리고 싶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다가도 갑자기 찾아오는 쓸쓸함에 또 누군가를 찾게 된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요동치니 일이 손에 잡힐리 없다.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TV를 봐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눠도 마음이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한다. '연두색'이라고만 표현하기엔 너무 미안한 봄빛 아래서 하루 종일을 보내고 싶은 강렬한 소망과, 너무나 모범생처럼만 살고 있는 생활에서의 일탈 욕구!
그런 나의 마음을 누군가 살짝 엿보았는지 뜬금없이 <건축학 개론>을 보러 가자 문자를 했다.
이 영화는 보고 싶으면서도 보고 싶지 않았던. 그래서 그냥 지나가기만 바랬던 영화 중 하나.
첫사랑이 생각날 것 같아서....때문이 아니라 추억할 첫사랑이 없어서. 아니면 추억하고 싶지 않은 첫사랑 때문에...이게 웃긴 이유다. 그게 날 더 쓸쓸하게 할 것 같아서 말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 잔잔한 영화에도 극장 여기저기서 훌쩍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모두들 첫사랑을 추억하나보다. 난 보면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건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 여기저기서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기억의 습작>이 배경음악으로 쓰이고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그러니까, 영화든 드라마든 스포를 알면 안되는거야. 이렇게 감동적인데.
김동률이야 워낙 좋아했었는데 큰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기억의 습작>을 듣고 있노라니, 첫사랑이 생각날까 두려워 했던 내 자신이 우스웠다. 더 큰게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20대를 통틀은 내 젊음을 그리워하게 될 줄은. 그리고 또 한편으론 90년대가 벌써 그리워하고 추억해야 할 과거가 되었나 싶은 짙은 아쉬움. 내 20대는 온전히 90년대와 함께 했었고 그게 불과 얼마 전의 일인 것 같은데 말이다. 내 나이는 생각하지 않고 세월이 그렇게 가버렸다는게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팠다.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앞만 보고 살아온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청춘이란 고작 내 감정의 틀 안에서만 살아있는 부유물이었던 것처럼, 조각조각 파편처럼 나를 찌를 뿐, 내가 살았던 그 시절을 나에게 가져다 주진 못했다. 그래서 기억하고 싶어도 내 감정 이외의 것들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기억나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던 걸까.
그래서 마음이 아련했다. 대학생 서연과 승민이 그려내는 첫사랑의 모습은 -의도하지 않은 순수한 끌림과 엇갈림- 일부러 더 가까이도 더 멀리도 가지 않는 그 모습에서 내 20대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서 말이다. 알면서도 더 다가가지 않고 잘 모르면서 먼저 나아갔던, 그렇게 삐걱대고 어긋나니 '첫' 사랑이라 부르겠지만, 그래서 돌아보면 아름답기보다는 마음 아픈......
누구는 이 영화가 남자들을 위한 영화라 한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순진하고 어쩔 줄 몰라 쩔쩔매던 승민이는 어느새 담배 꼬나물고 거침없이 세상에 적응해 가는 평범한 일상의 남자가 되었다. 이 땅의 3~40대 남자들이라면 대부분 현재의 자신의 모습과 추억하는 첫사랑 자신의 모습이 그러할지도 모르겠다 싶다. 정글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버리고 숨겨야만 했던 순수하고 여렸던 자신의 모습을 이 영화를 통해 다시 발견하게 될지도...여자인 난 승민이의 그 순수한 모습을 다시 보길 바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서연 앞에서 쩔쩔매던 승민은 온데간데 없을지 몰라도 승민의 그 마음은 30대의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첫사랑이었던 여자의 꿈을 이루어주고 싶은 그 마음, 그때는 아무것도 없어서 해 줄 수 없었던 것을 지금은 해 줄 수 있기에 끝까지 해보려 하는 마음.
첫사랑이었던 서연은 첫사랑이었던 승민이 지어준 집에서 어떤 꿈을 꾸며 살아가게 될까? 난 그게 두고두고 궁금하다. 결국 그들은 다시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 이루어지면 그건 첫사랑이 아니라 현실이 될테니 그들의 결말은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그 집을 매개로 끊임없이 교감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햇빛을 온전히 받고 바다를 품에 안고 있는 그 아름다운 집에서, 그저 몸이 불편하신 노부를 모시고 동네 아이들 피아노를 가르치며 살아갈 서연이는, 과연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서로 주고 받은 첫사랑의 기억으로 인해 그들은 오히려 그 기억에서 벗어날 것 같고, 그들의 일상은 참으로 순리대로 평온하게 흘러가니 난 앞으로 그들이 맞이할 그들의 삶이 궁금하다. 왜냐하면, 나도 현재 나의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기억과 추억 속에서 이젠 빠져나와 나도 내 삶을 살아내야 하기 때문에.
자꾸 누군가를 찾는 것도,
현실이 아니라 허구에서 내 모습을 찾으려는 것도,
사랑하고 싶어하지 않으면서 사랑받고 싶어하는 것도,
이젠 다 추억 속에 묻어두고 나도 내 삶을 살아야지.
조금 지나면 괜찮을거야.
이 봄빛이 지나고 나면 분명 괜찮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