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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디자인 아이콘 83
폴커 알부스 외 지음, 조원호 외 옮김 / 미술문화 / 2008년 2월
평점 :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건, 과연 '디자인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대답만큼 어렵다.
'디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나와야 '좋은 디자인'에 대한 답도 나올 것이다.
강의 준비를 하면서 가장 오랜 시간 고민하고 준비하게 되는 부분도 역시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이며
강의를 하는 순간에도, '정말 디자인이 뭘까?'라는 질문은 끊이지 않는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정의를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광범위하기 때문에 더 조심스럽고, 단정적이고 싶지 않기도 하다.
그러기에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도 '디자인'이란 화두는 용어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토론거리들을 던져줄 수 밖에 없다.
사전적 의미로 보자면,
- 네이버 국어사전-
의상, 공업제품, 건축 따위 실용적인 목적을 가진 조형 작품의 설계나 도안.
- 네이버 백과사전-
주어진 목적을 조형적으로 실체화하는 것.
디자인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실체이기 때문에 실체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디자인은 주어진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여러 조형요소 가운데서 의도적으로 선택하여
그것을 합리적으로 구성하여 유기적인 통일을 얻기 위한 창조활동이며, 그 결과의 실체가 곧 디자인이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정의다.
디자인이란 용어 자체가 범위가 넓고 날로 정의가 가감된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밑줄 친 부분은 동의할 수 없다.
특히 현재의 디자인에는 저런 근대적 디자인의 정의를 적용하기엔 많은 무리가 따른다.
'실용적인 목적'을 가지지 않으면 디자인이 아니란 말인가?
디자인은 계획하고 의미화 하고 구조화 하는 사고의 작용으로 봐야지
눈에 보이는 설계나 도안, 결과로서의 실체로만 보는건 산업주의 시대의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인공물들의 의미를 기호화 하고 그것에 상징을 부여하는 행위, 사고의 작용.
그런 정의가 있고 나서야 구체적인 디자인 '작업'으로서의 위와 같은 정의가 성립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굉장히 추상적이고 어려운게 아닐까 하지만, 실제 디자인이란 분야가 현재 그렇다.
'디자인'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영향력을 미치는 범위는 광범위하고
good design과 bad design의 기준도 개인의 취향과 기호의 문제로 넘어간지 오래다.
어찌보면 구체적인 실체가 없는 바로 그것이 현대의 디자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초창기 디자인 분야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산업혁명 이후에 나타난 중산층과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의 문화가 폭발적인 이슈가 되었던 시대에는
백과 사전적 의미가 아주 적절하게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에는 '디자인'이란 용어가 지금처럼 널리 쓰이지 않았고
'디자인'의 의미도 역시 외관과 제품을 시대의 요구에 따라
보기 좋게 '구성하고' 꾸미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디자인적 의미의 시대사적 흐름을 보여 주는 책이 <20세기 디자인 아이콘>이다.
<20세기 디자인 아이콘>은 1900년 <언더우드 타자기>부터 2000년 <가상현실-사이버 세계>까지
20세기를 대표할 수 있는 디자인 83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2가지 - 인터넷과 가상현실-을 제외하면 거의 다 제품 분야의 디자인이다.
아무래도 산업 시대 생산을 위한 디자인이 주가 되어 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요새 디자인 관련 책들이 이런 구성이 많다.
패션디자인, 의자 디자인, 그래픽 디자인, 디자이너 등을 사례 위주로 소개하는 책들의 장점은
지루하고 추상적인 디자인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 사물이나 시각물을 통해 디자인을 접하기 때문에
훨씬 쉽고 편안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단점이라면 디자인을 단편적이고 개별적인 '제품'이나 '상품' 혹은 '시각물'로 제한되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과
그 당시의 문화적 유행, 산업적 변화, 세계적인 추세들과 연관될 수 밖에 없는 디자인을
그저 형태적 특징이나 외관의 어떠함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는 것.
(사실 이런 단점은 디자인에 대한 왜곡된 편견을 줄 수도 있다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럼에도, 난 이런 책들이 많이 출간되는 것이 반갑기도 하다.
<디자인>하면, <앙드레 김>과 <패션 디자인>만을 떠올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런 것도 디자인이고, 이런 분야도 있으며 이런 관점으로 이런 의미가 있는 것이 디자인이다...소개해 주고 있으니까.
디자인사적으로 의미 있었던 디자인들을 자꾸 접하다 보면
형태적 특징과 외관보다 훨씬 더 중요한 <디자인적 사고와 개념>을 알아갈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많이 보여주기> <많이 접해보기>의 컨셉에 충실한 책이다.
위쪽 시계방향으로-
<1904, 힐 하우스 체어-찰스 레니 매킨토시>
<1917, 레드-블루 팔걸이 의자-게리트 리트펠트>
<1925, 바실리 의자-마르셀 브로이어>
<1927, MR 의자-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새로운 재료와 시대적 요구, 상상력 넘치는 아이디어들이 보이는 의자들이다.
이런 디자인의 의자들은 현대에 와서 수많은 응용 제품으로 우리 눈에 익숙할 지 모르지만
이미 20세기 초 선구자적 디자이너들에 의해 실험적으로 시도된 원형 디자인들은
각각이 가지는 의미와 파격 때문에 보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한 느낌을 받게 된다.
앉을 사람, 놓일 공간, 생산 과정에서의 효율적인 재료, 전체적인 구조와 비례, 사회 속에서의 가치 등을
모두 고려할 수 밖에 없는 디자인 행위를 각각의 의자들 속에서 발견해 낼 수 있다.
그저 '앉는 의자'라는 기존의 인공물에 새로운 상징적 해석을 덧붙이는 행위.
-그것이 바로 '디자인'이다.-
<1956, 브라운 포너슈퍼 SK4>
1956년에 브라운 사에서 만든 축음기와 라디오 일체형 디자인이다.
지금의 컴팩트 오디오 시스템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당시로서는 축음기의 바로크적 장식을 모두 걷어버리고 최소한의 기능과 형태만 남겨두어서 더 유명했단다.
학생들에게 LP레코드판을 아냐고 했더니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단다.
간혹 오래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물건이 되어 버리다니.
하긴 콤팩트 디스크의 개발로 인해 LP판은 자취를 감추어 버렸으니 이해는 되지만,
LP레코드 만의 고유한 소리를 기억하는 나로서는 너무나 빠르게 변해 가는 문명이 아쉽기만 하다.
<1933, 비알레티 모카 익스프레스-알폰소 비알레티>
이 책에 소개된 역사 속 디자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고 가지고 싶은 제품이다.
이태리에서 아직도 생산되는 제품이고 각 가정의 90% 이상이 보유하고 있는 커피 메이커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물을 끓여 아래서부터 올려 커피를 걸러 마시는 이 방식이 새롭고
이 제품으로 꼭 한 번 마셔보고 싶다는 열망(!)이 생기기까지 한다.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당시로서는 알루미늄이라는 소재를 커피 메이커에 사용한 시도가 새로웠던 제품이다.
커피를 많이 마시는 사람들이어서 이 제품이 많이 팔리게 된건지,
아니면 이 제품이 유명해 져서 사람들이 커피를 더 많이 마시게 된건지 그건 알 수 없지만
그만큼 디자인과 생활은 인과 관계가 되기도 하고 주종 관계가 되기도 한다.
이 책에 소개된 83개의 디자인 아이콘들 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디자인들이 그렇다.
그렇기에 기존 역사 속 디자인을 돌아보고 재해석하여 다시 지금의 디자인을 만들어 가고
더 소통하기에 좋은 디자인을 만들어 내고 예측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알찬 사진과 자료들 때문에 참 재미있고 유용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지만
아쉬운 점은, 번역의 매끄럽지 못함이다.
직역에 가까운 문장들은 여러 번 읽어야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고
필요없는 수식어들의 위치가 집중하는데 방해를 한다.
그런 면은 아주 안타깝기 그지없다.
디자인을 잘 모르는 비전공자들도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되려다 만 느낌이라...
다행히 심오한 내용들은 아닌지라 해석하는데 어려움은 없지만
누군가에게 선뜻 소개하기엔 그 정도의 아쉬움은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