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숲
니콜 크라우스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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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쓰기에 진심이었던 나님은 이제 그만 지쳐버렸다. 이번 책을 끝으로, 아니다 싶은 책은 리뷰고 뭐고 그냥 덮어버릴 것이다. 이제는 예전처럼 전투력이 솟질 않는 데다 한번 다운되면 그 여파가 너무나도 오래간다. 그러니 앞으로는 재미난 독서와 즐거운 쓰기에만 전념할 생각이다. 더 이상은 에너지 낭비에 시간을 뺏기지 않겠다.


<위대한 집> 이후 7년 뒤에 나온 <어두운 숲>은, 같은 저자가 맞나 싶을 만큼 낯선 분위기와 감성을 보여준다. 두 남녀의 이야기가 교차하는데, 이 둘이 나중 가서 만나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냥 중편 두 개가 번갈아가며 나온다고 보면 된다. 물질적인 삶에 지친 은퇴한 변호사 노인과, 글쓰기의 한계를 만난 소설가의 내용인데, 소재는 좋았으나 전개며 서술이며 참 대략난감이었다. 썩 필요해 보이지 않는 장면들이 많은 데다 딥&다크한 저자의 철학들이 순서 없이 날아든다. 아따메, <위대한 집>도 여러모로 읽기 힘들었었는데 말입죠.


<어두운 숲>은 니콜 크라우스가 이혼하면서 생긴 감정들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사랑의 역사>로 큰 성공을 거둔 작가는, 이혼의 아픔을 치유해 주지 못하는 부와 명예에 회의감을 느꼈을 것이고, 그 심정을 담아 변호사 노인의 이야기를 썼을 테다. 또한 내 작품이 유대인을 대표한다는 부담과, 유대인과 미국인 사이에서 오는 정체성 혼란으로 내내 가시방석이었겠지. 소설가의 내용 곳곳에서 작가의 고통이 묻어 나온다. 니콜 크라우스는 직업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지 않았나 싶다. 결국 그녀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글쓰기로 눈앞에 벽들을 넘어섰다. 누가 뭐라 하든 이제는 자신을 위한 글쓰기로 마이웨이 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중반까지는 나름 괜찮았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는 과정은, 작가와 독자 서로에게 꼭 필요한 화두니까. 그런데 후반에 들어서도 계속 헤매고 있는 게 아닌가. 어쩌면 작가 자신도 인생에 어떤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이 작품을 완성한 걸 수도 있다. 그저 오랫동안 막혀있던 벽을 허물은, 기념비적인 작품일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기존의 모습에서 탈피하려는 시도는 좋았다만 작품성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못미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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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4-23 0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각 잘하셨습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점점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문제투성이 책은 너무 많거든요. 이렇게만 쓰신 것도 냉정하게 잘 쓰신 것 같습니다.^^

물감 2023-04-23 10:04   좋아요 2 | URL
좋은 책은 좋은대로, 나쁜 책은 나쁜대로 의미가 있다 생각했는데요. 수차례를 반복하다보니까 확실히 기빨려서 독서를 손 놓게 되네요 ㅠㅠ 한 때는 글쓰기의 원동력이 까칠함이었는데 어느새 다 시들어져 버렸어요 ㅎㅎㅎ

그레이스 2023-04-24 1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곳으로 결론이 나는 저에게도 조금 식상할때가 있더라구요^^;;

물감 2023-04-24 19:55   좋아요 1 | URL
ㅎㅎㅎ그레이스 님도 그러시군요. 참고 넘기는 데에도 한계가 있죠 😭

공쟝쟝 2023-04-29 1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생했습니다... 저는 니콜 크라우스의 아마 최근 작인 <남자가 된다는 것> 다 못 읽고 반납했습니다. 읽는 데 까지는 재밌게 읽어서 다시 빌릴 생각 있습니다ㅋㅋ 유대인에 대한 문제 의식이 있는 작가군요. 어쩐지 그 단편집에서도 자주 등장하더라구욥.

물감 2023-04-29 22:08   좋아요 1 | URL
이 작가는 유대인을 대표하는 글을 써내야한다는 강박에 갇혀있단 느낌이에요. 통찰과 고뇌가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는데 영 정돈이 안된다고나 할까요. 그건 그거대로 볼만할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여기까지만... ㅋㅋㅋㅋ
 
위대한 집
니콜 크라우스 지음, 김현우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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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 크라우스의 작품을 두 권째 읽어보니, 유대인만의 감성이 뭔지를 알 것도 같다. 흑인문학과 비슷하면서도 뭔가 다르다고 느껴지는 건 유대인들의 민족성 때문일까. 해는 떴던 곳으로 지고 바람은 불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성경 구절처럼, 떠나온 것들은 다 있던 곳으로 가야 한다는 관념 비슷한 게 있다. <사랑의 역사>에서 보여준 그 먹먹함을 갑절로 보여준 <위대한 집>은 솔직히 좀 과했다고 본다. 어떤 고급 요리라도 계속 먹으면 질리거든.


<사랑의 역사>에서 액자소설의 구성을 썼던 것처럼, 이번 작품도 여러 명의 서사를 ‘책상‘이라는 매개체로 하여 연결 짓는 독특한 구성을 보여준다. 말이 연결이지, 단편집의 독립적인 내용들로 이뤄져 있다. 그러니 애써 퍼즐 맞추기를 할 필요는 없겠다. 총 네 명의 화자가 들려주는 고백록인데, 각자 지나간 세월에 관하여 줄줄이 내뱉느라 이야기 자체로는 재미가 떨어진다. 남편과 아내, 친구와 애인, 부모와 자식, 가족과 타인 등등. 유대인들과 관계 맺은 사람들 혹은 유대인 자신들이 말 못 할 어떤 결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다만 그 패턴이 반복되다 보니 짠하던 마음이 점점 느슨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작가가 만든 유대인들의 공통점. 내 아픔은 어디까지나 내 몫이어야 한다는 고집이다. 그렇기에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털어놓지 않고 혼자서 감당한다. 연대 책임을 지게 하거나 피해를 줄까 봐 그런 건 아니라서, 그냥 유대인의 민족성이란 이유라 믿기로 했다. 이 책은 세대를 거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게 된 ‘로르카의 책상‘의 소유자 네 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만 그 책상에 관련된 에피소드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게다가 제목에 있는 ‘집‘도 내용들과는 전혀 연관성을 찾지 못했다. 해설에서는 책상을 물려주고 넘겨받는 이 행위를 주목하고 있다. 환경이든 물질이든 운명이든 주어진 건 수용해야 한다는 게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본분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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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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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을 했었다. 어떤 제목이라도 외국인이 쓴 거면 촌스럽지가 않다고. <사랑의 역사>라는 다소 밋밋한 이 제목을 국내 작가가 썼다면 금방 묻혔을 거란 생각이 든다. 사랑이 역사로 존재하려면 아무래도 깨소금 볶는 쪽보다는 운명의 장난 혹은 시련 쪽이어야 할 테지. 그걸 역사라 부를 수 있다면, ‘사랑의 역사‘를 가지지 않은 이가 아무도 없다는 뜻이렸다. 저마다의 역사처럼 나도 나만의 것을 끄집어내어 저자가 얘기하려는 사랑에 다가가고자 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접근이 불가할뿐더러, 어떻게 해봐도 내 아픔들과 좁혀지지 않을 성질의 작품이었다.


크게는 세 가지 시점이 교차하며 진행된다.

① 나치의 침공으로 소녀와 헤어진 유대인 소년. 미국으로 떠난 소녀는 그의 아이를 낳았으나 연락 두절로 결국 딴 사람과 결혼한다. 절망의 세월을 지나 독거노인이 된 그에게 날아든 익명의 소포. 내용물은 과거 자신이 소녀를 생각하며 썼었던 ‘사랑의 역사‘ 원고였다.


② 독일군에게 소년이 죽은 줄 알았던 친구. 소년에게 건네받은 ‘사랑의 역사‘ 원고를 스페인어로 번역해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해버린다. 그러나 양심에 찔린 그는 원작자를 책 말미에 언급한다.

③ ‘사랑의 역사‘의 주인공 이름을 물려받은 앨마. 어느 날 ‘사랑의 역사‘의 번역본을 요청받은 엄마에게 묘한 냄새를 맡은 앨마는, 작품과 요청자 그리고 앨마라는 이름의 관계를 추리한다.


읽어보면 썩 친절한 작품은 아니구나 할 것이다. 액자소설이니 꼭 메모하면서 읽으시길. 근데 다 읽고 보니 어지러웠던 플롯은 보기보다 간결했다. 뒤죽박죽의 챕터들도 하나의 그림을 향해가고 있었다. 추리소설과 순문학의 결합이라. 2005년도 작품이던데, 시대를 얼마나 앞서간 것인지. 이 영리한 작가의 책들을 좀 더 읽어봐야겠다.


굵직한 스토리라인이 온통 인물들의 감정선에 가려져있다. 소중한 사람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이 공통점인데, 그것이 각자를 삶의 어딘가에서 밀어내고만 있다. 먼저 노인이 된 레오의 아픔을 느껴보자면, 앞서 말했듯 연인과의 이별 아닌 이별을 겪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을 그리움과 탄식 속에 갇혀지낸다. 어떻게든 정리하고 새 출발 하기엔 자신의 아들이 눈에 밟혔더랬다. 비록 레오의 존재조차도 모를 테지만 혈육에 대한 사랑은 흘러간 세월만큼 커져 있었다. 어느 날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찾아간 장례식장에서 타들어가는 마음을 달래던 중, 소년 시절의 자신과 찍은 소녀의 사진을 발견한다. 아들의 이부동생 말로는 돌아가신 엄마의 유품이라 했다. 그녀도 나를 잊지 않고 있었구나. 애써 외면했었던 평생의 사랑을, 다 떠나간 뒤에야 겨우 불러볼 수 있다니. 아름다운 세상과 잔인한 세상은 종이 한 장 차이였던가.


소녀 앨마의 아픔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아빠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모든 게 변했다. 늘 태연한 척하는 엄마와, 갈수록 사차원이 돼가는 동생. 그리고 뭘 해야 할지 막연한 나. 아빠를 대신해 자신이 가족을 지키기로 한다. 앨마의 관심사는 야생에서도 살 수 있는 생존비법 연구로 이어진다. 그러다 ‘사랑의 역사‘ 번역 요청자를 엄마의 재혼상대로 점찍고 다리를 놔주려다가, 그 책의 주인공이 실제 인물이라는 가설에 이르자 직접 찾아 나서기로 한다. 이 과정들은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고픈 무의식의 집념이었다. ‘앨마‘란 이름이 진정 사랑의 대상이었는지, 부모님은 무슨 생각에서 그 이름을 나에게 준 건지, 정녕 나는 그 이름을 물려받기에 적합한 사람인지를 알아야 했다. 그래야 손상된 심장이 다시 제 기능을 할 테니까. 마침내 사랑의 근원과 마주한 앨마는 모든 역사를 눈으로 확인한다. 이제는 제자리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그녀의 오랜 갈증은 과연 해소되었을까.


혐오범벅 헬조선의 마지막 낭만파인 나님과 딱 맞는 감성의 작품이었다. 드라마는 안 보면서 드라마틱한 사랑은 또 좋아하는 나님의 90년대 취향과도 꽤나 일치했다. <사랑의 역사>는 상실에도 전염성이, 아련함에도 유전성이 있다고 느끼게 해준다. 이런 복합적인 감성 표현이 가능한 건, 니콜 크라우스 자신이 유대인이기 때문이리라. 작가는 레오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명하고, 앨마를 통해서 유대인의 심정을 그려낸다. 그리고 두 인물의 결합이 만들어낸 에너지를 독자에게 전파한다. 레오처럼 간직하는 사랑도. 앨마처럼 찾아 나서는 사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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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4-12 15: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완전 애장하는 책입니다. 표지만 좀 평범(?)했더라면 좋았을텐데 ㅜㅜ
저도 물감님 의견에 공감하는게 만약 이 제목을 가지고 한국작가가 썼더라면 저는 왠지 안읽었을거 같습니다 ㅋ

물감 2023-04-12 16:19   좋아요 1 | URL
문학동네가 전반적으로 디자인이 좀 약해요(고전은 제외). 그래도 좋은 작품 많이 내줘서 넘어가줍니다 ㅎㅎㅎ 새파랑 님도 제목에 대한 선입견이 있으시군요! 저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저라도 안읽었을 텐데, 이런 식으로 놓쳐버린 좋은 국내작품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도 듭니다 ^^

공쟝쟝 2023-04-12 17: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나 이작가가 쓴 다른 책 빌려놨는데!! 보고 잼쓰면 읽는데 참고할게요!

물감 2023-04-12 18:07   좋아요 1 | URL
전에 얘기했었던 바로 그 잔잔바리 감성이에요 ㅋㅋㅋ 개취지만 강추!
지금은 <위대한 집> 읽는 중! 그리고 <어두운 숲>도 연달아 읽을 예정!
참고하라고 얼른 읽고 리뷰 쓸게요~~
 
제인 에어 을유세계문학전집 64
샬럿 브론테 지음, 조애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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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대 퇴사 시대. 결국 나님도 퇴사를 했다. 뭐랄까. 일이 많거나 복지가 부실한 것보다도 불편한 직원들과 웃고 지내야 하는 게 가장 곤욕이다. 맞지 않는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 있다 보면 내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 이번 직장에서는 유독 자유를 갈망하면서 겨우 버텼다. 21세기 현대사회에서 자유 타령이 웬 말이냐 싶겠지만, 그냥 먹고살기 적당할 만큼의 벌이와, 나 자신이 온전한 주체로써 존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때마침 읽은 <제인 에어>는 나와 비슷한 고민에 살던 소녀의 이야기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내가 그녀에게 공감했던 건 지금 내 상황 때문만은 아니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것이 나에겐 그렇지 않다는 사실과, 남들이 누리는 그 당연함이 내게 오기까지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해주었기에.


고아였던 제인 에어는 친척 집에 더부살이를 하다 어느 기숙학교로 보내진다. 그리고 8년 뒤 어느 집의 가정교사로 일하게 된다. 그러다 집주인이 제인에게 청혼을 하고, 그를 거절한 제인은 소리 없이 떠나버린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두 사람이 훗날 다시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


집에서는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학교에서는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받지 못했던 주인공. 그런 환경에 있다 보면 점점 주눅 들거나 위축되기 마련인데, 제인은 ‘나‘라는 정체성을 끝까지 부여잡는다. 고분고분한 타 여성들과 달리 고집 세고 성깔 있던 그녀는 저항의 아이콘이다. 그러나 매사에 부딪히기보다 상황에 따른 적응 및 판단으로 최상의 융화를 이끌어내는 방식을 택한다. 그것은 스스로를 잘 아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최상급 퍼포먼스였다.


제인은 외모, 재산, 지위 등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기대하지 않았다. 반대로 배움의 결과물인 지성, 덕, 분별, 통찰 등을 평생의 무기로 삼았다. 아무도 자신을 사랑해 주질 않는다면 내가 나를 사랑해 주자는 쪽이었고, 늘 당당하고 지혜롭게 행하여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도록 살아갔다. 그 많은 비교와 모욕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건, 자신과 그들의 관심사가 전혀 달랐기 때문. 독립된 삶과 건강을 완성하는 데에는 타인의 개입이 필요 없는 그녀였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제인의 홀로서기는 계속된다. 주인의 끈질긴 청혼에 좋으면서도 난처해지는 그녀. 주인의 사랑은 진심이지만 제인의 있는 그대로를 원한다기보다 그의 소유물로 두고 싶어 했다. 제인 또한 주인을 사랑했지만 자신의 일부를 버려가면서 결혼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평탄한 길을 놔두고 가시밭길을 택한 제인. 여기서 독자의 의견은 언니 멋져요 쪽과 자존심이 밥 먹여주냐는 쪽으로 나뉠 수 있다. 후자의 의견도 이해는 간다. 제인의 사정이 썩 좋은 것도 아닌 데다 비혼 주의자도 아니었으니. 또한 제인 정도의 총명함과 분별력이면 결혼 후에도 충분히 남편을 컨트롤하겠다 싶고. 여하튼 그곳을 떠나 새로 정착한 곳에서 그녀는 또 한 번 플러팅을 받게 된다.


세컨드는 젊은 목사였는데, 제인의 성품에 반하여 선교사 부부가 되자고 조른다. 목사는 제인의 그릇이 결코 가정교사 수준이 아니며, 그 재능을 넓은 세상에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신을 높이 평가해 준 목사에게 잠깐 흔들렸으나, 사랑도 없이 사명감으로 하는 결혼 또한 자신 없었던 제인. 이런 일이 반복되면 오는 기회들을 전부 걷어찬 게 아닌지를 의심하게 된다. 그저 나 자신이 더 중요해서 내린 선택이었는데, 어느새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재고 있나 싶어지지. 제인처럼 남들은 다 멀쩡한데 나만 다르다고 느껴져 속을 앓는 유형들이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할 게 아니라 제인처럼 잠시 지나가는 성장통으로 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작품 내내 제인은, 여자라면 이래야 한다는 관념을 타파하고 있다. 헌데 이것은 개성을 드러내거나 열등감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의 일원이 되어 남들과 잘 섞이고자 하지 않았던가.


이 작품은 ‘여성‘이라는 타이틀에서 자신의 고유성을 지켜내는 내용이지만 메시지를 더 넓게 해석해 볼 수도 있다. 학생이라면, 신입이라면, 부모라면, 연예인이라면 등등. 포장지가 같다고 해서 내용물까지 똑같을 거라고 착각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멋대로 정해놓고 기대에 어긋나면 사회성 부족이니, 의욕이 없다느니, 절실치 않다느니 식의 돌려까기를 해댄다. 이런 게 비일비재한 인간 사회에서 나 자신을 지켜내기란 분명히 쉽지 않다. 현실과의 타협은 필요하나 그것들이 내 영혼을 지켜주진 못하므로, 제인처럼 부끄러움이 없는 홀로서기를 연습해야 한다. 그러니 부디 독해집시다. 21세기 아싸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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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4-06 13: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퇴사 하셨군요. 당분간 여유를 가지고 즐겁게 독서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제인에어처럼 홀로서기가 성공하시기를~!!

물감 2023-04-06 13:17   좋아요 2 | URL
새파랑 님의 응원, 왜 눈물이 나죠ㅎㅎㅎ 감사합니다.
근데 백수되고 더 책이 안 읽히는 이유는 뭘까요...

그레이스 2023-04-13 09:24   좋아요 1 | URL
넘 갑작스런 자유시간때문이겠죠.
하루가 짧다고 느껴지는 순간 본격적인 책읽기에 적응하실듯, 시간을 정해놓고 산책하시는걸 권해요, 장소를 정해놓고 독서하는 것두요.
그저 제 짧은 경험과 소견입니다.
물감님의 자유를 위한 퍼포먼스 응원합니다.

독서괭 2023-04-06 13: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공감하며 읽으시고 멋진 리뷰까지!
퇴사하셨다니!! 물감님의 제2의 인생 응원합니다!

물감 2023-04-06 13:33   좋아요 1 | URL
독서괭 님 따라 읽은건데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또 다른 직장을 구하긴 하겠지만... 당분간은 푹 쉬렵니다. 감사해요!

다락방 2023-04-06 14: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물감 님, 제인 에어 읽고 쓴 리뷰들 중 가장 색다른 리뷰가 아닐까 싶네요. 퇴사한 독자의 사회생활 분투기 공감..
그동안 고생하셨고 푹 쉬셔요. 새로운 시작이 맞춤할 때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물감 2023-04-06 14:59   좋아요 0 | URL
가장 색다른 리뷰라니, 엄청난 찬사로군요. 덕분에 기분 좋아졌어요 ㅎㅎ
사회생활이 원래 그런거라지만 나를 버려가면서까지 참아야 하나 싶어요. 먹고 살기 위한 일이 반대로 나를 죽게 만드는 모순... 여튼 충분히 쉬면서 독서도 하고 그럴려고요! 감사합니다 ^^

책읽는나무 2023-04-06 15: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결단력 멋지십니다!
열심히 고생하신만큼 푹 쉬시고, 제2의 인생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저도 제인 에어 물감님 리뷰로 읽으니까, 같은 책인데도 느낌 완전 다르게 읽힙니다.

물감 2023-04-06 15:49   좋아요 1 | URL
책나무님 오랜만이에요 ㅎㅎ 어째 현실보다 알라딘서 위로를 더 받는 듯 하네요 ^^
이 책 너무 재밌게 읽었어요. 어째선지 여성만의 이야기라는 느낌이 안들었네요. 그래서 이런 리뷰가 나왔나봅니다!

coolcat329 2023-04-07 0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최근에 큰 결정을 하셨군요. 당분간 맘껏 자유 누리시고 좋은 기회가 꼭 찾아오시길 바랍니다.

제인에어는 제가 초딩6때 날이 어두워지는 줄도 모르고 캄캄한 방에서 다읽고 펑펑 운 책이라 참 각별합니다.ㅎㅎ

물감 2023-04-07 10:45   좋아요 1 | URL
댓글 감사합니다. 그래도 마음은 홀가분하고 좋아요 ㅎㅎ
어떤 포인트에서 펑펑 우셨는지를 알 것 같네요. 제인을 좋아하지 않을 독자가 과연 있을까 싶고요^^ 뒤늦게 읽었지만 제게도 각별할 듯 합니다.

꼬마요정 2023-04-07 15: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인 에어 리뷰 독특하고 재밌습니다. 그러고보니 제인 더 멋있게 느껴지네요. 물감 님도 큰 결정 하시고 멋지십니다!! 푹 쉬시고, 책도 마음껏 읽으시고, 원하시는 일 하시게 되길 바랍니다. 물감 님 화이팅!!

물감 2023-04-07 16:13   좋아요 2 | URL
꼬마요정님 댓글 넘넘 감사합니다! 알라딘 이웃이 최곱니다 ㅎㅎㅎ제인처럼 나를 지키기 위해 퇴사했어요. 더 좋은 곳을 찾게 되겠죠^^ 4월도 파이팅하시고 미세먼지 조심하세요!

잠자냥 2023-04-12 15: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니, 퇴사하기 전에 회사의 자기계발서 다 읽고 나오는 큰 그림을 그렸다니 이런 놀라운 인간이!
물감 님은 대성할 것입니다.

부디 다음번 밥벌이 하는 곳에서는 좀더 인간다운 인간들이 있길 기원합니다!

물감 2023-04-12 16:24   좋아요 1 | URL
ㅋㅋㅋ퇴사가 잡혀서 부랴부랴 읽긴 했지만 딱히 남는 게 없네요. 역시 저는 소설이 좋아요~~ 징글징글한 사람들과 작별했습니다. 아주 속이 후련해요. 저도 잠자냥 님처럼 업무만족도가 높은 곳을 찾아야겠어요 ㅋㅋㅋㅋ

공쟝쟝 2023-04-12 17: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얽!! 퇴사했어요!? 전쟁터 벗어난 거 축하해여!!! 자 이제 혹독한 지옥의 맛을 좀 봐랏!!!! 으하하하하하하!!!! 제인처럼 꼿꼿히 자기를 지키면 잘 될겁니다!

물감 2023-04-12 18:03   좋아요 1 | URL
아직은 천국이지만 조만간 지옥이겠죠?ㅋㅋㅋㅋ 백수 생활은 처음인데 이거 너무 좋네요 와하하하

공쟝쟝 2023-04-12 18:12   좋아요 2 | URL
체감상 70일 정도 지나면 적응되고 더 천국 ㅋㅋㅋ 140일쯤 지나고 전 초조했어요 ㅋㅋㅋㅋㅋ 내가 다 기분 좋네!!! 즐기라!! 산책 많이해요!!
 
디미트리오스의 가면 열린책들 세계문학 248
에릭 앰블러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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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지 않고 읽었는데도 실망했다면 기대를 했단 거겠지. 스파이소설의 원조라는 에릭 앰블러의 작품을 처음 접했는데, 와 이렇게 루즈한 첩보물도 다 있나 싶더라니깐. 아무리 뻔한 게 싫다지만 독자들이 어느 정도 바라는 전개가 있잖아? 그런데 자꾸 불길한 길로만 빠지면 읽는 내내 불안해진단 말이지. 혹시 잘못 걸린 게 아닐까, 괜히 시간만 뺏긴 건 아닐까 하고. <디미트리오스의 가면>은 딱 불안한 독서의 표본이었다. 정성 들여 쓰고 싶지 않으니 후딱 쓰고 끝내련다.


경찰을 따라 한 시신을 참관하게 된 추리 소설가. 살해당한 시신은 악명 높은 범죄자, 디미트리오스였다. 이 범죄자에게 호기심이 생긴 주인공은, 비공식 탐정이 되어 몰래 뒷조사에 들어간다.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얻어낸 정보만 해도 디미트리오스는 위험인물이 분명하지만 많은 베일에 싸여있어 영 파악이 불가했다. 결국 꼬리가 밟혔는지, 디미트리오스와 일했던 X맨이 주인공을 협박해온다. 손 떼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소설가는 이대로 죽고 말 것인가.


이 작품이 노잼인 이유가, 이미 죽어버린 범죄자의 발자취를 알아내서 어쩔 거냐는 말이지. 차기 작품을 구상한다는 핑계야 있지만, 이미 주인공 스스로도 이 짓을 왜 계속하고 있는지를 자문한다. 독자 입장에서는 미결 사건을 풀 것도 아닌데 뭐 하러 계속 파고드는지 이해가 안 된다. 어떤 확신이나 동기 같은 게 없이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휘젓고 다니는 주인공이 그저 맥빠져 보일 뿐이다. 또한 디미트리오스가 죽었다는 설정으로 흘러가나, 조만간 진짜가 등장하실 게 뻔해서 일말의 기대조차 생기질 않는다. 늦어진 등장만큼 비중 또한 낮으니 활약이랄 것도 없이 퇴장해버린다. 물론 기대도 안 했지만 중요 인물을 이렇게 막 다뤄도 되는 건가. 보통 스토리가 부실하면 캐릭터빨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이 책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X맨은 소설가와 1급 정보를 합쳐 디미트리오스의 재산을 뜯어낼 계획이다. 이 X맨과 엮인 뒤 끌려만 다니는 주인공의 수동적인 플레이는, 디미트리오스가 등장했음에도 분위기를 바꿔놓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스파이가 안 나오는데 스파이 소설이 웬 말인지. 디미트리오스처럼 제 욕망을 가면 쓴 채 살아가는 이들이 있고, 타인의 욕망을 이용하여 제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선하게 사는 사람들도 어떤 상황과 기회가 주어지면 얼마든지 돌변할 수 있다는 인간의 본성을 다루려던 작품이 아니었을지. 아무튼 별로였다. 회사 책 뽀개기 마지막인데 쪼까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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