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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인형 모중석 스릴러 클럽 23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연말이 다가와서 그런가, 요즘에는 이것저것 할게 많아져서 독서활동을 잘 못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독서에 점점 흥미가 줄어든다. 자주 가던 네이버 블로그나 알라딘 서재 활동도 뜸해졌는데, 최근 알라딘을 보면 기존 파워블로거들 말고는 활동하는 분들이 확 줄긴 했더라. 다들 나처럼 마음이 뒤숭숭하신가. 이렇게 독서에 흥미가 떨어질 때면 재미있는 작품으로 슬럼프를 극복해야 한다. 그래서 간만에 제프리 디버의 최상급 스릴러를 집어 들긴 했는데, 재미와 가독성이 죽여줌에도 불구하고 700쪽이나 되는 분량은 역시 버겁구나. 동네 마실 나가는 기분으로 시작했는데 완독하고 보니 어느새 지리산을 다녀와있었다. 사실 이분의 책은 늘 힘들어요 헉 헉.


디버 행님의 세컨드 시리즈인 이 작품의 주인공은 동작학 전문 경찰로써 일명 걸어 다니는 거짓말 탐지기이다. 상대의 신체 몸짓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다소 생소한 직업인데, 그녀는 8년 전 한 일가족을 살해한 죄수의 심문을 담당하게 된다. 그러나 죄수의 공범자가 그의 탈옥을 돕고 이후 CBI 요원 캐트린 댄스는 사건의 지휘를 맡게 된다. 탈옥수는 타고난 지능과 감각으로 경찰의 급습마다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캐트린 댄스는 그의 과거 여자들을 모아 탈옥수를 프로파일링 해보지만 그녀들의 주장이 전부 제각각이라 좀처럼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때 일가족 사건 당시 인형에 파묻혀 자느라 죽음을 면했던 한 소녀가 등장해 지난 8년간 숨겨왔던 사실을 고백한다.


보통 시리즈 1편은 이것저것 소개하고 설명하느라 어수선한 감이 있다. 작가의 다른 시리즈인 ‘링컨 라임‘ 1편도 그랬었는데, 이 책은 시리즈 시작치고 아주 깔끔하다. 확실히 여유를 찾은 게 보였다. 자신의 부족함과 단점을 알고 계속 개선해나가는 노력형 작가이다. 새로운 주인공과 시리즈에 맞게 ‘동작학‘에 대하여 여러 정보가 나온다. 이런 감정에는 이런 움직임을 갖거나, 저런 행동에는 압박감을 느끼는 중이라던가 등등. 사건도 그렇지만 주인공 타이틀이 참 흥미로웠다. 어떤 평에서는 링컨 라임 시리즈가 사건과 수사 중심이라면, 캐트린 댄스 시리즈는 인물 중심으로 진행된다고 했다. 타인의 심리를 파악하고 연구해야 하는 주인공 직업상 인물 위주가 되는 건 당연한 듯. 이 작품을 기준으로 제프리 디버의 장점들과 작품을 분석해보도록 하겠다.


디버의 장점 첫 번째,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장르소설 작가들이 악역을 설정할 때 동서양의 성향이 완전히 다른데, 일본을 예로 들면 어려운 문제를 척척 풀어내고, 보안 프로그램도 쉽게 해킹하며, 날아드는 공격도 휙휙 피하는 등 그야말로 완벽함을 보여준다. 이렇게 과정 없이 결과만을 보여줌으로 캐릭터를 단순화 시켜버리니 악역의 무게감은 점점 줄어든다. 반대로 서양권은 ​과정 중심이다. 동양권이 악인 된 이후의 모습만 보여준다면 서양권은 악인이 되기까지의 내용을 더 깊게 다룬다. 그러다 보니 악역의 모든 행동은 전부 이유 있는 행동이 된다. 특히 디버 작품은 범인 시점의 장면이 많아서 어쩌다 악인이 되었고, 왜 범죄를 저지르는지에 대한 범죄 동기가 분명해서 좋다. 이 책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대하는 직업상 웬만한 프로파일러보다도 섬세하고, 남편의 죽음과 두 아이로 인해 감정이 예민하다는 이런 설정들도 과거의 내용을 깊게 다루고 있다는 증거다. 이렇게 과정 중심 성향인 서양권 중에서도 제프리 디버는 탑 클래스에 속한다.


디버의 장점 두 번째, 시점 변화가 아주 뚜렷한데 이것은 몰입도를 끌어올리는 고급 기술에 속한다. A에서 B의 시점으로 넘어갔으면 넘어갔다는 내용이 들어가줘야 하는데 그런 부연 설명이나 장면전환이 없는 글을 쓰는 작가가 너무 많다. 시점이 바뀐 건지 모호해서 계속 되감기 하게 만드는 작가들은 독자가 무슨 전지적 작가 시점인 줄 아시나 봐. 근데 디버는 A에서 Z까지 시점 변화와 장면전환에 확실한 경계선을 긋는다. 조 올로클린 시리즈의 ‘마이클 로보텀‘이나 덱스터 시리즈의 ‘제프 린제이‘를 예로 들면, 작품의 진행 내용과 주인공의 내레이션이 쉴 새 없이 교차되어 작품이 건조하거나 루즈해지지 않게 한다. 이처럼 독백이 많은 일인칭 작품일지라도 시점 변화는 확실하게 주는 것이 좋다. 심리 장르문학은 말 한마디, 한 마디에 단서나 복선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아 저절로 긴장감이 유지된다. 이런 기법을 디버도 쓰고 있는데 기교 면에서는 로보텀이 좀 더 높아 보이고, 여유 면에서는 디버가 한 수 위다.


디버의 장점 세 번째,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창조한다. 특히 악역이 그렇다. 이 책에서도 교도소 탈옥수라는 타이틀 뒤에는 ‘컬트 리더‘라는 옵션이 붙었다. 컬트란 특정 인물에게 열광하는 집단을 말한다. 탈옥수는 거리의 소녀들을 모아 집단을 형성했고, 이들을 이용해서 범죄를 저질러서 본인은 현장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설정이다. 그에게 맨슨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어서 따로 검색해보니 과거 미국에 찰스 맨슨이 가출 소녀들을 가족으로 만들고 범죄를 대신 저지르게 했던 실제 인물을 캐릭터에 반영했다. 이런 식으로 디버는 모든 악역을 굉장히 화려하게 설정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첫 번째 장점과도 겹칠 수 있지만 엄연히 다르다. 일본 만화 ‘원피스‘의 오다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가, 잠깐 스쳐가는 인물조차도 복잡한 사연을 가진 캐릭터로 설정하여 한 명 한 명에게 생명을 불어넣기 때문인데 디버 스타일도 오다 작가와 비슷하다. 그래서 매력 넘치는 악역을 볼 때마다 캐릭터 설정에 쏟아붓는 작가의 정성이 보인다.


디버의 장점 네 번째,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을 반전으로 다룬다. 보통은 인물이나 상황 연출로 반전을 드러내는 반면, 디버는 멘트나 대화 장면에서 반전을 써먹는 경우가 더 많다. 대화나 독백은 수시로 나오니까 마지막까지도 반전이 가능하기 때문에 디버 작품은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가 없다. 이번 작품의 하이라이트 반전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탈옥수의 철옹성을 무너뜨린 장면이다. 그것은 남을 통제하는 컬트 리더의 성향을 역이용하여 본인이 남에게 통제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드는 일이었다. 게다가 진짜 공범자의 등장으로 연속 멘붕이 오고, 초반부터 뿌려졌던 떡밥이 퍼뜩 떠오르면서 뒤통수가 서늘해졌다. 심리를 이용한 해결법이 시리즈 성격과 딱 맞지 않는가. 작가의 큰 그림에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여러 권 읽어본 바 제프리 디버는 가수보다는 보컬 트레이너에 가깝다. 워낙 계산적이고 논리적인 스타일이라 타고난 자연미보다는 다듬어진 세련미로 승부하는 편이다. 노래도 기술보다는 음색이 우선이다. 그의 플롯은 항상 완벽에 가깝지만 철저히 계산된 글만 써서 호불호가 갈리기 쉽다. 따라서 디버 작품은 어쩌다 읽어줘야 감동이 오래가고 감탄도 연발하게 된다. 여튼 너무 잘 읽었고, 이번 리뷰는 너무 오랜만이라 평소보다 몇 배는 애를 먹었다. 이래서 글쓰기는 꾸준해야 한다는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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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수 없는 일이야 현대지성 클래식 16
싱클레어 루이스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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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월. 미국 상원 의원인 버즈 윈드립이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주인공은 버즈의 독재자 성향을 내다보고 그의 당선을 반대했다. 그러나 대중들은 지금이야말로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며 거세게 반박했다. 이 자유국가에 독재란 절대 있을 수 없다면서 말이다. 어쨌거나 당선 전부터 온갖 연기력과 말재주로 대중을 사로잡는 버즈의 공약은 실로 대단했다. 공약대로라면 미국의 모든 백인은 돈방석에 앉을 것이고, 에덴동산 이래로 미국만이 유일한 유토피아가 될 것이다. 그렇게 역사상 다시없을 위대한 지도자가 탄생하나 싶더니, 제2의 히틀러가 나타나버렸다. 즉위하자마자 버즈는 자신을 추종하던 민간인 청년들을 공식 호위대로 강화시키고, 계엄령을 내려 국회의원들을 모조리 체포했다. 또한 반 체제 자는 가차 없이 죽이거나 폭행하고 감금했다. 다들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다. 나라를 이지경으로 만든 건 버즈가 아니라 불의에 침묵했던 자신들이었다. 


루이스 싱클레어는 미국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다. 이 책만 읽어보아도 왜 상을 받았는지 납득이 간다. 미국 사회에 대한 사실주의, 풍자, 통찰력 등 날카로운 시선을 갖추었으며, 출판사 서평처럼 세계 3대 디스토피아 소설에 추가시켜도 합당하다. 요즘 디스토피아 소설들은 이미 사회가 몰락하고 난 뒤의 내용을 다루는 반면, 과거 디스토피아 소설들은 사회가 몰락해가는 과정을 다루는 내용이 많은 것 같다. 이 작품의 발표 시기는 미국 대공황이 최고조였던 1935년이다. 당시 히틀러와 나치가 정권을 잡자마자 민주주의를 폐하고, 나치 돌격대를 만들고, 모든 당을 해체시켰던 실제 역사를 적나라하게 풍자하여 써낸 이 책은 발표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렸단다. 읽어보니 과연 그럴만하다. 전문서적만으로 이해가 안 되는 정치나 경제 분야는 이렇게 문학으로 읽는 게 도움 된다. 일단 대중의 바람대로 버즈는 정말 신세계를 만들어주긴 했다. 자유국가에서 공산국가로  어떻게 갑자기 바뀔 수 있지? 이제 막 당선된 한 사람으로 인해 수많은 지식인, 지성인, 사업가들의 지능이 이 정도로 퇴화할 수도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건만, 얼마든지 가능하단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교육도 법도 언론도 전부 조작되어 진실이 사라진 땅, 믿는 도끼마다 발등 찍혀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된 불신자들의 낙원. 이제 정권의 개가 되어 눈 가리고 아웅할 것이냐, 끝까지 투쟁할 것이냐. 선택해야만 한다. 


꽤 많은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나 메모하지 않아도 읽는 데에 어려움은 없다. 다만 뒤로 갈수록 문장의 호흡이 점점 길어져 이해하기가 버겁다. 그리고 대화체들이 어째 연극톤 느낌이 남. 영어 교과서 다이얼로그 읽는 기분이랄까. 여튼 버즈를 보면 독불장군 트럼프가 김정은을 따라 공산주의 만세를 외치는 장면이 상상된다. 공산주의는 멀리서 보면 오직 국가의 명예를 내세우는 것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주인에게 재롱부리는 개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결여된 개인의 삶에 무슨 만족이 있겠나. 근데 지금 한국은 국민의 의견도 반영 안 해주면서 민주주의라고 불리고 있다. 위에서 지들끼리 맨날 탁상공론하는데, 공산주의랑 뭐가 다른 건지 참.


작가는 버즈보다 그를 무작정 따랐던 추종자들이, 그리고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은 ‘깨어있던‘ 국민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사실 호위대만 아니었어도 버즈가 그렇게 위험한 인물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젊은 층의 잘못된 사상이 문제가 되고 있다.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위상을 높인다는 이념은 알겠는데, 무슨 권리로 타인의 인권을 짓밟고, 대를 위해 소가 희생되어도 된다니? 이게 민주주의로 살아온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생각일까? 그렇다면 원래부터 제 마음에 독재 성향이 심어져있던 거겠지. 오히려 옛 세대들의 잘못된 사상으로 고생하는 우리나라와는 정반대의 내용이라 이게 참 흥미로웠다. 지난 몇 년간 국내에는 이명박 다스, 최순실 게이트, 박근혜 탄핵과 촛불시위 등등 파란만장한 일들이 있었다. 그때만큼 국민 하나하나가 깨어있고 책임을 다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건 그렇고 국가는 국민이 호소하고 청원 올리는 내용들에 가볍게 대처하지 좀 말았으면 좋겠다. 강서구 pc방 사건이나, 여중생 폭행 사건, 어린이집 원장 사건, 부산 일가족 살인사건 등등 요즘도 핫한 뉴스가 끊이질 않는데, 예전과 다르게 국민들이 적극적으로 관심 가지고 참여를 하잖나. 대한민국이여, 민주주의라면 제발 국민의 뜻을 위해 움직여줘. 제발 한국을 떠나고 싶지 않게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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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0-29 14: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마저 읽어야 하는데 읽다 말아 버렸네요 ...

물감 2018-10-29 14:57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적이 많아서 이젠 한 권을 완독하고 다른걸 읽어요...다시 도전하기엔 버거운 책이네요😐
 
시간을 멈추는 법
매트 헤이그 지음, 최필원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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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동안‘소리 듣는다면야 좋긴 하겠지만 죽을 나이가 돼서도 그 얼굴이면 과연 좋을까? 주변 사람들이 다 늙어가는데 나 혼자만 어린 얼굴이 과연 기쁜 일일까? 누구나 장수하고 싶고 한살이라도 어려 보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정작 늙지도 죽지도 않는 입장이 되면 얘기가 다르다. 천년을 살아가는 이 책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주인공의 표현을 빌리자면 글자 하나 없는 책 같은 처지이며, 진절머리 나는 후렴구 노래에 갇힌 기분이라고 한다. 칠팔십 년을 사나, 칠팔백 년을 사나 인생의 굴레는 변함이 없나 보다. 왜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라는 제목의 책도 있지 않던가. 장수 인간이 얘기하는 인생의 수고로움과 삶의 애환을 들어보자.


먼저 주인공은 초 핵폭탄 급 동안을 가진 439살 할아버지이다. 그는 늙지 않는다. 정확히는 정상인보다 노화되는 시간이 15배쯤 느리게 흐른다. 이런 자신의 병을 치료받으러 유명 의사를 찾아갔으나, 그 의사는 자신처럼 늙지 않는 자들이 만든 한 단체에게 살해당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가 노출되면 세상에 혼란을 가져올 것이고 신변이 위험해지기 때문에, 나름의 규칙을 세우고 세상으로부터 서로 보호를 주고받는다. 이 단체에 소속되고부터 수 세기 동안 다양한 신분으로 살면서 인간들을 지켜본 결과 사는 것에 특별함이란 없었다. 세상에 아무 미련도 없는 주인공이 꿋꿋이 사는 이유는, 잃어버린 딸을 찾기 위함이다. 자신과 똑같은 시간의 저주에 갇혀버린 딸과 상봉할 날을 위해 몇 백 년이라도 자신의 고통과 트라우마를 견디고 견뎌야 한다.


​저자가 동화작가라는 티가 나는 게 문장이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하고, 동화에도 어울리겠다 싶은 비유법이나 특정 표현들이 자주 보인다. 이 책도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는 진행되는 구성 방식인데,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과 여러모로 비교되었다. 그 책의 문제점은 과거의 화려한 내용들이 현재와는 하나도 연결성이 없다는 거였다. 그러다 보니 과거 내용은 완전 별개로서 손자들에게 들려주는 옛날이야기가 되어 의미 없는 분량만 차지한 꼴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그것과 다르게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가 꽤 있다. 대표적으로 주인공이 과거 만났었던 위인이나 유명인의 생생한 묘사라던가, 어릴 적 겪었던 마녀사냥 당시의 배경을 학생들에게 설명하는 장면들. 이처럼 지나온 과거가 현재의 일부분이 되고, 또는 그 기억이 두통을 낳는 장면들이 반복되는데, 이런 기교들이 작품의 균형을 이루고 몰입을 돕게 한다. 여기서 저자의 내공을 볼 수 있었지.


보통 일인칭 시점의 소설은 독자가 직접 주인공이 되어 읽는 맛이 있다. 근데 이 책은 일인칭이면서도 제삼자 입장에서 읽혔다. 그래서 아쉬웠다. 왜 주인공 입장이 될 수 없었냐면 계속 과거로 점프하니까 빙의되려는 걸 방해받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거 시점도 계속 왔다 갔다 해서 상황 파악하느라 리듬마저 중단된다. 매력적인 구성이지만 이런 리스크가 따르는군. 무엇보다 그토록 찾아다니던 딸이 아무 언급도 없다가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태연하게 아빠와 마주하는 건 좀 아니지 싶다. 몇백 년 만의 재회인데 일주일 만에 만난 것 같은 연출에, 감정선도 너무 약했어. 좀 더 드라마틱한 전개를 원했는데. 뭐, 요것들 빼면 다 좋았음. 주인공이 발견한 시간을 멈추는 방법은 시간의 지배에서 해방되는 것,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시간을 멈추는 법이 아니다. 나 외에 소중한 사람들의 시간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스스로가 과거에서 미래가 되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들의 시간과 발 맞출수 있단 걸 깨달은 거지. 평생 거짓말해야 하고, 누구와도 친해져선 안되고, 도망 다녀야 하는 인생이라면 차라리 산에 들어가 자연인으로 사는 게 나을 듯. 여튼, 너무 잘 읽었다. 분석할 것도 많았고, 재미도 교훈도 빵빵한 작품이다. 우리의 닥터 스트레인지께서 영화에 출연한다고 하시니 완전 기대된다.


이제 나에게 묻는다. 지금 이 순간은 미래를 맞이하는 시간일까, 과거로 지나 보내는 시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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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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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알라딘 이웃 중 라스티님이 쓰신 ‘작가 수업‘의 서평 중에서 뇌리에 꽂힌 문장이 있었다. 바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독서를 해야 잠재 능력이 개발된다‘는 말이었다. 많은 독자들이 장점 위주로 글을 쓰고 있고, 모든 책마다 별점을 후하게 주는 데에 비해 나는 그렇지 못하다. 내가 워낙 프로까칠러라서 가끔 걱정도 들었는데, 내 시각과 주관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위로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대로 계속 가련다. 누구나 쓰는 똑같은 칭찬글은 쓰지 않을 것이다. 여하튼 책 읽고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반대로 서평을 쓰고 싶지 않게 만드는 책들도 더러 있다. 보통은 요약이 어렵거나, 포인트를 놓치고 읽었다거나, 나와 맞지 않아서인데, 때로는 이유 없이 싫을 때도 있다. 이 책이 그러했다. 분석하는 재미도 없고, 내용도 그냥저냥에 억지스러운 주제의식 등. 뭔가 있어 보이는 듯한 분위기만 조성하다가 뻔한 결말. 의욕이 확 꺾였지만 뭐라도 작성해보자.


남자친구를 만나러 간 보험사 직원이 교살 당한 시체로 발견되고 남자친구는 행방불명 상태다. 죽은 여자는 조건만남 사이트에서 만났던 다른 남자가 있는데, 사실 범인은 이놈이다. 참고로 이 책은 범인을 찾고 추격하는 추리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스포일러는 아니다. 암튼 이 남자는 죽은 여자 소식을 접한 후로 찾아오는 괴로움을 다른 여자를 만나서 해소한다. 그러나 양심에 못 이겨 살인죄를 고백하고 자수하려 하나, 이미 주인공에게 빠진 여자는 주인공을 이끌고 도주를 택한다.


도주한 시점부터 이야기는 힘을 잃었다. 전혀 매력 없는 두 남녀가 꼼지락대다가 붙잡히는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어서, 혹여나 마지막에 뭔가 반전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없었다. 근데 보험사 동기들 이야기와 다단계에 빠진 할머니 이야기는 왜 한 걸까. 이외에도 스토리에 별 영향 없이 분량만 잡아먹는 불필요한 내용들이 너무 많아서 진도가 나가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리고 사건 추리 내용은 없고, 등장인물들이 각자 딴 얘기만 하고 있어 모두가 사건과 관련 없는 제삼자들 같았다. A를 보여준다 하고 B만 보여주고 있으니,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멀리 돌아가는 답답함이었다. 그렇게 각자의 이야기도, 사건의 진실도 따로 노는 답답한 전개에서 마지막에 하나로 엮었다지만 솔직히 작위적이었고, 이쯤 되면 앞서 불필요한 내용들에 대해 불만이 폭발하게 된다. ‘할런 코벤‘의 작품도 이렇게 끝에 가야만 앞의 내용들이 이해되는 경우가 많아서 한번 쓴소리를 했었는데 이 책도 똑같은 케이스다. 이렇게 처음 만난 작가의 첫 작품이 실망스러우면 어쩔 수 없는 선입견이 생겨버린다.


‘악인‘의 사전적 의미는 악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책은 악인의 기준점을 모호하게 다룬다.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철저히 배제하고 선악의 판단 기준을 독자에게 맡겼다. 그래 좋다. 근데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악인이 된 주인공을 가리켜 이것도 악이라 할수있느냐‘ 를 말하고 싶은 거라면 대단히 실망스럽다. 악의가 있든 없든 범죄자 인건 마찬가진데 단 한 번의 희생정신으로 주인공의 죄가 없어지는가? 악의가 없었다 해도 누군가는 이미 피해를 입었는데 그 사람은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그래서 이 책의 주제의식은 억지스럽다고 한 거다. 작가가 쓰고자 했던 ‘진짜 심연‘이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는데다, 악화된 상황에 따른 심리묘사도 빈약하고 부실한데 심연은 무슨 얼어 죽을. 당부족인가, 오늘따라 까칠함이 하늘을 찌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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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10-19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리뷰, 환영합니다. 칭찬 일색의 리뷰가 있는 반면 이런 리뷰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너를 위해서라면 난 무엇이든 할 수 있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의 죄를 감해 주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누구를 위해서이든 악은 그저 악일 뿐이니까요.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

물감 2018-10-19 22:4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남들이 좋은 점만 말하니까 나쁜 점을 말하기 어려워하는 독자들이 많아요. 나만 다르게 느낀다는 것에 겁이나니까 모두가 예 하면 똑같이 예 하는 분들이 많아서 늘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백종원처럼 되기로 했어요. 좋은점엔 칭찬하고, 아닌것엔 과감하게 쓴소리 하기로요^^

페크pek0501 2018-10-19 22:49   좋아요 2 | URL
저는 가끔 남들이 모두 예, 라고 할 때 저만 유독 노우, 라고 외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글을 쓸 때 제게 힘을 주는 말이 있습니다. ˝칼럼은 편견이다.˝라는 말.
이 말을 위안 삼곤 합니다. - 특히 자신 없는 글을 쓸 때.

마찬가지로 모든 글은 자기의 편견을 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과 다른 생각을 가질 때 차라리 저는 독창적이군, 이라고 느끼는 편입니다.
모두 같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기가 독재 나라도 아니고 말이죠.
알라딘은 독재 마을이 아니라서 좋습니다.

물감 2018-10-20 13:13   좋아요 1 | URL
편견을 쓴다. 좋은 말이네요. 저도 위안삼겠습니다ㅎㅎ왼손잡이가 잘못된건 아니니까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다락방 2021-09-01 2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별 두 개 리뷰 썼는데 물감님의 별 두 개 리뷰라니 진짜 너무 반갑네요 ㅋㅋ 이거 별 두개 리뷰 썼다고 댓글로 욕도 먹었는데 말입니다 ㅋㅋㅋㅋㅋ

물감 2021-09-02 07:49   좋아요 1 | URL
말씀하셔서 방금 저도 글 읽고왔는데요, 댓글 어이없어서 웃었네요. 지 감상은 종소리이고 남의 감상은 걔소리라고 생각하는가보죠?ㅡㅡ 저런 인간들이 국내독자들을 우물안 개구리로 만드는 건데요ㅋㅋ에휴.

저도 이 책 진짜 별로였어요. 내용은 이제 기억도 잘 안나지만 그 실망스러움이 강렬하게 박혀있어요ㅋㅋㅋ저도 반갑슴다ㅋㅋ

다락방 2021-09-01 2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가서 다시 확인했더니 저는 별 하나 줬네요. 호호 🤭

물감 2021-09-02 00:00   좋아요 1 | URL
ㅋㅋㅋ한개나 두개나 똑같죠 뭐😎
 
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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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국내 문학을 연속 세 권이나 읽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이번에도 처음 만나는 작가의 작품이다. 요즘 한창 글쓰기 스킬업 중이어서 길게 써보려다 그냥 짧게 쓰련다. 다리 위에서 자살하려는 한 남자가 있다. 그가 생을 마감하려는 이유는 뭐였을까. 그는 육 남매 중에서 혼자 모자란 지능과 신체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놀림거리와 애물단지가 되었으나 타고난 넉살로 그럭저럭 살았다. 산골 마을에서 농사지으며 가난 속에 살아온 이 집안의 육 남매 성장과정은 생략한다. 장남이 월남전에서 죽고, 아버지는 술주정뱅이가 되고, 작은누나는 연탄가스 사고로 정신장애를 입는 등 사는 게 이만큼 힘들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고난은 쉬지 않고 찾아와 괴롭혔다. 불행은 이게 끝이 아니다. 죽어라 돈 벌어서 동생들 대학비와 생활비에 전부 퍼주면서 오로지 가족만 생각했는데 회사가 망했다. 엄청난 빚쟁이가 되고 이렇게 만수네 가족들은 하나같이 엉망진창의 삶을 살아간다.


장르문학처럼 큰 이슈가 있는 건 아니고, 만수네 가족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재미있는 건 만수가 주인공 같은데 만수 입장에서 쓴 글은 없다는 거다. 전부 가족, 동료, 친구들의 입장에서 쓴 내용뿐. 그래서 주인공이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알 수 없는 게 아쉬웠다. 일단 한국 사회가 짜장면 10원 시절부터 근대화 시작까지 어떻게 흘러가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떤 장면은 너무 상세해서 불편할 정도였다. 요즘 학생들이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르는데, 옛날부터 한국은 늘 헬조선이었던 것 같다. 우리가 잘 아는 단군 신화의 곰과 호랑이 일화를 보면, 쑥과 마늘로 100일 다이어트 미션에서 곰은 잘 참아 인간이 되었고, 호랑이는 이따구로 못 산다며 굴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 두 유형은 작품 속에서도 잘 나타나는 바 만수는 늘 곰이었고, 친구며, 가족이며, 동료들은 전부 호랑이였다. 곰 쪽이 늘 손해 보는 입장이었단 게 난센스인데, 안 맞는 사람들과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건 얼마나 고역인가. 신화 속 곰은 혜택이라도 있었지 만수는 그런 거 없다. 정직하게 살아봤자 모두 다 소용없다. 평생 술 담배해도 건강한 사람은 장수하는 거다. 그러니 억울하지 않으려면 어느 영화 속 대사처럼 곰 같은 여우로 살아야 되나 보다.


왕년의 스타 연예인이 토크쇼에 나와 과거의 썰을 풀면, 요즘은 ‘추억 팔이‘라며 그만 우려먹으라고 한다. 하물며 이런 6~70년대 배경의 서사물이 요즘 젊은 층에게 과연 얼마나 먹힐까. 삼촌들의 군대 얘기가 재밌는 건 나름 공감이 되기 때문인데, 이 책은 지금 30대만 해도 공감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시점이 너무 자주 바뀌어 정신이 없었고, 끝까지 진지해서 교장선생님 훈화처럼 금방 지루해진다. 이 작품에 딱 맞는 표현이 있는데, 평생 일만 하다 늙어죽은 소를 닮은 책이다. 죽어라 일해봤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소의 업적은, 주인공이 걸어간 헌신의 삶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투명인간인가 싶다. 뭐 이런 희망이라곤 1그램도 없는 작품이 다 있을까. 생략해서 그렇지 이 책은 불행의 연속이어서 읽는 내내 괴롭다. 여튼 끝에서 처음 자살 장면으로 다시 돌아오는데, 서술자가 주인공이 갑자기 안 보인다며 너도 투명인간이냐고 한다. 아니, 그럼 투명인간의 뜻이 진짜 그 뜻이었어? 알고 보니 SF였던 거야 뭐야? 아니면 작가가 길을 잃은 건가?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이건 납득이 안되잖아, 납득이... 당분간 국내 문학은 정지해야겠다. 짧게 쓰려 했는데 왜 이렇게 길어졌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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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파인더 2018-11-14 16: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성석제작가의 글은 언어유희로 유명하죠.. 워낙 예전부터 재담과 해학으로 유명한 작가라..저같이 올드한 사람들 취향엔 맞긴한데... ㅠ 저도 나이를 많이 먹었나봅니다. 성석제작가는 제가 20대때 무척이나 좋아했었는데.. 이런류의 이야기는 이제 젊은 사람들에게 안먹히나 봅니다.^^

물감 2018-11-14 17:43   좋아요 0 | URL
제 취향이 아닐뿐, 지금의 20대들이 다 저같진 않을거에요ㅎㅎ 올드감성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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