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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미닛 룰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22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5월부터 6월 현재까지 평일 주말할 거 없이 매일매일 일정이 계속 생겨서 온전히 쉬지를 못하고 있다. 시간이 나면 휴식하기 바쁘니 근 두 달간 여가 다운 여가를 보내지 못했고, 독서와도 자연스레 멀어지고 있다. 또 점점 더워지는 날씨 탓에 뭔가를 진득하게 할 마음이 안 생긴다. 되돌아보면 해마다 여름철에는 독서량이 매우 낮은 편이었다. 그 대신 다른 취미활동의 시간이 늘어나는데, 요즘 나는 종이접기에 맛들려있다. 사무실에서 이면지로 동식물 같은 걸 접어서 직원들한테 줬는데 폭발적인 반응이지 뭔가. 소문이 퍼져서 타부서들도 찾아오고 난리이다. 성원에 힘입어 다이소 가서 양면 색종이를 사고 유튜브와 핀터레스트를 뒤져가며 밤늦게까지 종이접기를 연마하길 벌써 3주째. 그만큼 책은 멀어지지만 전두엽 풀가동해서 겨우 쓴 리뷰 하나보다, 잠깐 만든 종이접기가 훨씬 반응이 좋으니 상대적 박탈감이 자꾸 들지 뭔가. 그래서 여름이고 하니, 시간 잘 가는 스릴러나 읽어드렸제.
로버트 크레이스는 뭐랄까,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끔 쓰는 능력자이다. 일반 작가들이 사건과 범인의 추리를 뒤집는 데에 목메는 반면, 크레이스는 이야기의 구조를 비틀어 전개를 예상치 못하게 만든다. 그러니 재미를 떠나서 식상하지가 않다는 게 특징인데,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글쟁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최고급 기술이란 말씀. 이런 재능을 지닌 작가가 잘 없으니 천복을 받았다고 하겠다. 그럼 이번 작품은 어떻게 해서 이야기가 식상해지지 않았는지 써보겠다.
10년 만에 출소한 전직 은행털이범 주인공. 이제 좀 착하게 살아보려는 와중에 아들의 소식이 신문에 실렸다. 순경이 된 아들을 포함해 경찰 4명이 누군가에게 총살을 당했단다. 이후 경찰 측은 용의자를 발표하였고, 아들의 복수를 위해 여기저기 들쑤시던 주인공은 경찰에게 찍힌다. 최후의 수단으로 주인공은 10년 전 자기를 체포한 FBI 요원을 찾아간다. FBI를 은퇴하고 홀로 자녀들을 키우던 그녀는, 자신이 잡아넣은 범인이 나를 의지한다는 것과, 요원 시절이 떠올라 들뜬 마음으로 주인공을 돕게 된다. 그렇게 수사한 결과 경찰에서 발표한 내용들이 전부다 거짓임을 알게 되고, 피해자들이 불미스러운 일에 가담했었단 사실도 드러난다.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게 잘하는 짓인지 혼란스러운 주인공과, 경찰의 부패를 확 까발리고 싶은 파트너. 손 떼기에 너무 늦어버린 이들에게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끝까지 가는 거.
내 기준에 이 작품은 장르문학 랭킹 상위권이다. 여러 이유 중에 인물 설정이 가장 베스트였다. 출소한 범죄자와, 전 FBI 요원이라는 힘없는 루저들의 조합. 이들의 신분과 입장은 수사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이다. 따라서 독자는 별다른 기대 없이 이들을 지켜보는데, 여기서 작가는 이 기대 이하의 조합으로 방심한 독자의 빈틈을 찌른다. 마치 인기 없는 게임 캐릭터가 기본 무기만을 들고 끝판왕을 깨듯이 말이다. 이제 전개를 뒤집는 작가의 기막힌 발상을 말해보자. 제목의 <투 미닛 룰>은 은행털이에 주어진 최대 시간이다. 2분이 넘으면 경찰이 오기 때문인데, 이런 설정으로 범죄자가 은행 털다 잡히고 탈출하고 추격하는 이야기를 예상했다. 허나 처음부터 범죄자가 붙잡히질 않나, 출소한 은행털이가 주인공이질 않나, 아들 복수에 눈이 멀어 또 범죄자가 되려 하질 않나. 당혹감의 연속이라 식상할 틈이 전혀 없다.
총살당한 경찰들은 과거 은행털이범들이 숨겨둔 거액의 돈을 비밀리에 찾고 있었다. 그것도 문제지만 피해자들은 형사가 아니라 일반 순경들이었다. 그러니 누가 봐도 부패 경찰의 소행이고, 경찰 측은 이 사실을 덮으려 거짓 정보를 내놓기 바빴다. 주인공의 파트너는 FBI 인맥을 통해서 정보를 캐 보지만 돌아오는 건 출소자와 한패 된 그녀도 찍혔다는 사실뿐. 결국 FBI도 그녀가 뭘 하고 다니는지 다 알고 있었고, 경찰처럼 FBI도 이번 사건을 일부러 들쑤시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렇듯 작가는 계속해서 경찰 측을 더욱 수상하게끔 몰아가고, 반대로 주인공들은 더욱 무력한 존재로 만든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가 이 모든 사태가 진범을 잡기 위한 경찰 측의 쇼였음을 알게 된 두 사람은 멘붕에 빠졌다고 한다.
사건도 참 다이나믹 하지만, 두 명밖에 없는 인물의 입체감이 매우 뛰어나다. 두 사람 다 감정 변화의 폭이 넓은데, 주인공은 출소 후 선하게 살려다 죽은 아들의 소식에 슬픔과 분노가 일고, 힘없는 현실에 절망하고, 그럼에도 경찰들에 반항하고, 아들이 부패 경찰로 드러나자 극 상심하고, 범죄 습성을 아들에게 물려준 것 같아 스스로를 저주하고, 개고생한 파트너에게 미안하고... 정말 감정 하나하나에 몰입이 안 될 수가 없었다. 파트너도 마찬가지이다. 남편과의 사별 후 홀로 육아에 지친 그녀는, FBI 은퇴 후 유일하게 자길 찾아준 주인공이 고마웠고, 얻을 거 하나 없는 수사지만 요원 시절의 감각을 느껴서 기뻤고, 주인공의 부성애를 보며 괜한 허전함에 괴로웠고, 사건을 수사하며 다 죽었던 자신감을 되찾아 세상에 재도전할 용기가 생겼다. 지난번에 읽은 <데몰리션 엔젤>에서도 느낀 건데, 크레이스는 인물을 어떻게 다루면 잘 먹힐지를 여우같이 아는 사람이다. 보통 시리즈물을 쓰는 작가들은 스탠드얼론에 약한 편인데, 크레이스는 시리즈보다 스탠드얼론을 더 잘 만든다. 이런 사기캐...
<투 미닛 룰>의 백미는 사건이 터지고 수습하는 흔한 전개가 아니라, 사건 뒤에 일어날 사건을 다룬다는 설정으로 고정관념을 깨는 데에 있다. 이런 건 기승전결의 순서를 뒤집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게다가 제목의 ‘2분 법칙‘으로 범인을 궁지에 몰아넣는 깔끔한 마무리까지 완벽하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이라더니 과연 어나더 레벨을 보여준다. 여튼 다 좋았는데 모든 게 쇼였다는 진실이 밝혀지기까지가 너무 길어서 별 하나 뺐다. 그 분량 조절만 잘했다면 이 작품은 베스트 오브 베스트다. 무더운 여름에는 크레이스 작품을 꼭 읽어보시길. 근데 이 책은 품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