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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0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4월
평점 :
어느 정도 검증된 책을 골라 읽긴 하지만 누구나 읽는 필독서보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읽고 리뷰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 이미 유명할 대로 유명한 작품을 리뷰 쓴다는 건 매우 기운 빠지는 일이다. 앞서 수많은 리뷰와 해석이 존재해, 내가 어떤 평을 쓰던지 중복과 뒷북이 될 테니까. 그래서 나는 유명한 맛집 탐방보다, 나만의 맛집 발견을 더 선호한다. tmi는 이쯤 해두자. 오래 묵혀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드디어 완독해 뿌듯한 반면, 대체 어떤 리뷰를 써야 할지 몰라 막막한 상태다. 그러므로 이번 글은 적당히 의식의 흐름대로 쓰련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의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햄릿 왕자의 숙부는 덴마크 선왕을 독살한 후 왕이 된다. 그리고 숙부와 간통해온 왕비는 그와 재혼한다. 내막을 알아낸 햄릿은 선왕의 복수를 결심하는데, 다짜고짜 달려들어 숙부를 죽일 순 없는 노릇이다. 하여 그는 광증에 걸린 척하면서 숙부의 범죄 증거를 수집한다. 자신의 메소드 연기에 모두가 껌뻑 속자, 적성을 찾은 햄릿은 전공을 연극 영화과로 정했다는... 점점 미쳐가는구나. 이래서 유명작은 리뷰하기가 싫다니까.
햄릿에게는 아군이 없었다. 선왕이 죽고 나자 온 국민의 태도가 변했다. 손가락질 받던 숙부는 모든 이의 아첨을 받는다. 왕궁과 백성들은 이 추악한 왕과 왕비를 따르고, 친한 벗들마저 가면을 쓰고 햄릿을 대한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복수했다 한들 변함없는 현실에 무엇을 바라리오. 하여 햄릿은 자살을 소망하게 되고, 여기에서 바로 사느냐 마느냐 하는 내적 갈등이 나온다. 혼자만 정신줄 잡고 있기보다 차라리 광인의 감투를 쓰고 타이밍을 재는 게 낫다고 판단. 그리고 타인과의 대화마다 광인의 언어유희로 쏙쏙 빠져나가는 지혜를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그의 편이 아무도 없다는 게 확실해지자 햄릿은 복수의 결단이 점점 약해지고, 독자조차도 햄릿의 복수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괜히 4대 비극이라 불리는 게 아니올시다.
<햄릿>은 모든 인물이 정반대의 겉과 속을 지녔다. 이 같은 설정은 저마다의 비극을 불러와, 작품 속 비극이 햄릿만을 위한 게 아님을 보여준다. 그것으로 또한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을, 셰익스피어는 여러 번 강조한다. 그 모든 운명과 비극의 중심에는 햄릿이 있었다지만 이유야 어찌 됐든 주변인들은 각자의 운명대로 차례차례 죽는다. 작품 해설에는 이 죽음들이 햄릿의 복수가 지연되면서 생긴 문제로 보고 있다. 햄릿이 질질 끌지만 않았어도 몇몇의 죽음은 면했을 거라나. 글쎄, 운명이 그렇게 정해져있었다면 죽음 자체가 그리 중요한 건 아닐 테지. 햄릿을 사랑한 이들은 분별력이 없어서 죽게 되고, 햄릿을 시기한 이들은 욕심에 눈이 멀어 죽고 만다. 이로 보건대 죽음의 원인은 자신들의 우둔함에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내 눈엔 그렇게 보였던.
막말로 너 죽고 나 죽자는 진흙탕 싸움의 내용인데, 대체 무엇이 <햄릿>의 명성을 높이고 있는가. 정답은 정의(선)의 고결함에 있다. 사회적으로도 그렇지만 기독교적인 측면에서 보면 하나같이 범죄 한 영혼뿐이다. 왕비의 간통도, 숙부의 독살도, 대신의 이간질과 벗들의 거짓말도, 그리고 대신을 찔러 죽이고 벗들을 죽게 놔둔 햄릿도. 아무리 질서를 바로잡고 무너진 성벽을 세우는 일이라도 타인의 목숨을 뺏는 행위는 절대로 용인될 수 없다. 햄릿도 그걸 알지만 선왕의 복수는 곧 피치 못할 운명인지라, 결국 목숨을 맞바꿔서 정의를 실현키로 한다. 이 운명의 대가가 없었다면 세상은 여전히 부패하고 거짓이 판을 치겠지. 이렇듯 정의가 고결하려면 그만한 희생이 요구된다. 이 부름에 응하는 누군가에 의해 세상은 바뀌는 법이다.
간혹 이렇게 나랑 1도 겹치지 않는 허구의 인물한테 푹 빠져들기도 한다. 주로 인물의 고뇌와 갈등이 남 일 같지 않을 때나 그러는데, 햄릿은 좀 다르다. 그가 극심한 우울과 염세와 배신감 속에서도 선왕의 명예 회복을 선택했다는 데에 큰 점수를 주고 싶다. 햄릿은 생각이 너무 많아 지나치게 신중한 편이다. 그래서 모든 돌다리를 두드리느라 복수할 타이밍을 내내 놓치고 있다. 그런 회피형 인간이 침묵을 어기고 진실의 횃불을 들기까지 얼마나 고생 많았던가. 아 역시 나는 성장통 빡씨게 겪는 인물들이 좋다. ‘사느냐, 죽느냐‘라는 이 대사만으로도 셰익스피어는 천재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