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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소설 읽는 노인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칠레에서 태어나 라틴/유럽 국가를 돌며 중남미 문학가가 된 루이스 세풀베다. 이처럼 출생지와 성장지가 다른 작가들이 가진 생각과 통찰은 확실히 남다르게 느껴진다. 라틴 문학은 내 취향이 아니지만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은 워낙 평이 좋길래 궁금해서 읽어봤다. 그럭저럭 괜찮긴 한데 왜들 그렇게 강추한지는 잘 모르겠다는. 여튼 사연이 있는 듯한 제목처럼 보이지만 딱히 뭐가 없었다. 그리고 어르신들도 연애소설 읽을 수 있지, 그게 뭐 특별하당가? 다 좋게 봐주겠다만 아무리 봐도 제목이 영 거슬린다. 솔직히 노인의 독서 장면은 거의 없다시피 한데 이 제목이 어울리긴 하당가? 현대에 맞게 제목을 고쳐보자면, <생존 신고를 위한 넓고 얕은 정글 지식> 정도가 어떨까. 노인의 낯간지러운 연애 이야기를 기대했던 터라 많이 허탈했지만 그래도 볼만했습디다.
어쩌다 아마존 부족들과 자연인 생활을 하게 된 외간 남자. 그게 적성이었는지 잘 적응해 살다가 어느덧 노인이 되었다. 부족 마을에 가끔씩 들르는 치과 의사에게 건네받은 연애 소설을 읽는 게 노인의 유일한 낙이다. 그런데 외지인들의 정글 방문이 점점 늘어나자 노인의 휴식 시간은 줄어들기 시작한다. 사냥꾼과 노다지꾼의 침입은 동물과 부족의 터전을 옮겨 다니게 만들었다. 어느 날 맹수에게 습격 받은 외지인의 시체들이 등장하자 마을에서는 노인을 포함한 수색대를 편성하고 맹수 사냥에 나선다. 이후 노인은 홀로 남겨져 암살쾡이와 맞붙게 된다.
보다시피 주요 줄거리는 노인의 취미인 독서랑은 전혀 연관이 없다. 그저 일과를 마친 뒤 짬짬이 소설을 읽는 정도인데 어째서 제목을 그렇게 정한 건지 모르겠네. 노인의 선호 장르에 따라 아름답고 가슴 아픈 남녀의 사랑을 꿈꾸고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마음속에 로망 정도로 남겨둘 뿐 현실에서 로맨스를 찾는 일은 일절 없으시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연애소설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게 없으니 넘기겠다.
환경 소설로도 유명하던데 글쎄, 나는 여기에도 딱히 공감을 못하겠다. 물론 밀림을 파괴하고 자연의 질서를 휘젓는 무리에 저항하는 장면들이 있긴 하다. 그러나 외지인들은 짐승들에게 된통 당해서 퇴장하기 일쑤이고, 밀림을 우습게 아는 뚱보 읍장도 제 미련함에 혼쭐나기 바쁘다. 그러니까 노인 일행이 적들과 치열한 싸움까지 해가며 밀림을 지켜내는 장면이 없는데 무슨 환경 소설이람. 앞서 말했듯 내 눈에는 정글의 생존 에피소드 모음집에 가까웠다. 강에서는 어떤 물고기를 조심해야 하고, 모기떼를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고, 원숭이들의 집단 공격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며, 진흙 언덕과 늪에서는 어떻게 이동해야 하는지 등등 자연인의 지혜를 알게 해주는 인상이 더 강했다. 오히려 제목이나 환경 어쩌구 하는 태그 때문에 괜한 프레임만 씌워진 듯한데.
아내의 죽음을 막지 못했던 것에 대한 일종의 강박이, 후에 밀림을 지키는 사명으로 이어진 게 아니냐 할 수도 있겠다.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린 기분을 다신 겪고 싶지 않은 노인은, 사랑하는 밀림을 지키는 수호자가 되었다는 설정이 아니냐는 것이다. 노인이 연애소설을 읽으며 지난날의 아내를 그리워하고 결혼생활을 곱씹었다면 모를까, 그렇지는 않았기에 사명이나 수호자 같은 거창한 이유나 설정은 좀 아니라고 본다. 매 순간이 험난한 밀림에서는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하기에 과거에 갇혀 지낼 여유 따윈 없을 테니까. 메인 테마인 암살쾡이에 대해서는 참 많은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데 다른 건 넘어가고, 사실 싸울 이유가 없는 대상끼리 싸워야만 하는 이 거지 같은 운명에 나는 주목했다. 인간을 향한 살쾡이의 분노와 살기는 외지인들 때문에 생긴 거였고 노인도 그 사실을 잘 안다. 그치만 공포에 떨고 있는 원주민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무기를 들어야 했다. 가해자가 따로 있는데 왜 피해자끼리 물고 뜯어야 하나. 뭔가 한참 잘못되었다.
자연과 인간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노인과 바다>나 <모비딕>이 연상되지만, 이 책의 노인은 존재를 증명하려고 암살쾡이와 싸운 게 아니라서 더 좋았다. 혹여 뻔한 이유에서 싸운 거라면 그렇게까지 유명한 작품으로 남진 못했을 거다. 여튼 남들처럼 극찬은 못하겠다만 충분히 읽어볼 만한 작품이다. 세풀베다의 작품이 꽤 되던데 찬찬히 도전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