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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러 나가다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몸은 피곤한데 글은 써야겠고. 그래서 이번 서평은 간략하게 적는다. 처음 보는 조지 오웰의 작품이 있길래 냉큼 사 읽었는데 결과는 대만족. 하긴 오웰이 늘 그렇지 뭐. <숨 쉬러 나가다>는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인데, 작품성보다도 재미와 위트가 더 돋보여 저자를 다시 보게끔 만들어준다. 그러니까 필력 좋고 통찰력 있는 데다 유머까지 겸비하셨단 말이지? 내가 엔간해선 작가들한테 질투를 안 하는데, 오웰은 참 질투가 난다. 찬찬히 그의 책들을 섭렵해야겠다.
꽁돈이 생긴 조지 볼링은 아내 몰래 일주일 휴가를 떠나기로 한다. 그는 유년시절을 지내온 고향에 가서 낚시나 실컷 하다 올 계획이었다. 헌데 시골이었던 고향은 공업단지 및 주택단지로 변해있었다. 숨 쉬러 나왔던 조지는 이제 다시 집과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이다. 기본 틀은 이러하고, 주인공의 유년시절부터 애 아빠가 되기까지를 일인칭 시점으로 소개한다. 블랙 유머 한두 방울씩 뿌려주면서. <스토너>의 느낌도 약간 있는데, <스토너>가 후라이드 치킨이라면 이 책은 간장 치킨이라 보면 된다. 긴 말없이 읽어보라 하고 싶지만 이 책도 품절입니다요.
시골에서 형들과 낚시하러 다니는 게 전부였던 소년. 누구나처럼 대학 갈 준비를 하고, 성인이 되자 1차 대전이 터져서 군에 입대한다. 운 좋게 사병에서 장교로 뽑혔으나 외딴곳에 배치받아 전쟁 끝 날까지 짱 박혀있는다. 모두가 전쟁만을 심각히 여기지만, 진짜 심각한 건 전쟁이 지나간 다음이다. 그 많던 군인들이 강제 전역하여 백수가 되었고, 세상은 무너진 건물과 부족한 일자리와 생사확인이 불가한 사람들로 넘쳤다. 붕괴된 일상이 회복되려면 대체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까.
오웰은 전쟁 후의 참혹한 현실보다도 이제는 지나가버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옛 시절에 좀 더 집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가족과 지인들이 죽었고, 그 후에는 먹고살기 바빠서 점점 혼자가 된 주인공. 더는 추억을 공유할 사람도, 내 얘기에 공감해줄 사람도 없다. 그러다 문득 고향을 찾아가 위안을 얻기로 했지만, 이미 20년이나 지난 고향은 더 이상 그가 알던 고즈넉한 터전이 아니었다. 즐겨 찾던 가게들도 없어지고, 도로는 다 새로 깔았고, 숲과 연못이 있던 자리에는 공장이 세워졌다. 어쩌다 마주한 옛 연인은 그를 알아보지도 못한다. 기대가 어긋날수록 숨이 콱 막혀온다. 여러 번 말했지만 나는 현대 문명과 과학의 발전을 마냥 좋게 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조지 오웰도 득보다 실에 더 주목하는 사람이었다. 역시나.
가만히만 있어도 급변하는 세상인데 전쟁까지 치렀으니 얼마나 많은 게 바뀌었겠나. 본인만 해도 외모부터 직업과 환경까지 전부 달라졌건만 옛 고향의 모습이 그대로이길 바라다니. 이 무슨 근거 없는 확신과 믿음일까. 근데 또 이해는 되는지라 더욱 비참한 거다. 이런 주옥같은 감정은 여기서 끝날게 아니었다. 최근 몇 년 동안 히틀러의 행방을 보며 전쟁의 징조를 느꼈기 때문.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나를 한물간 늙은이로 여기는 저들도 내 심정을 이해할 날이 오겠지. 언젠가 저들도 전쟁의 얼굴을 갖게 되면 파시즘이냐 공산주의냐 싸울 때가 아니란 걸 깨달을 테지. 그리고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까지도.
전쟁은 오웰의 추억을 지우고 행복을 앗아갔다. 내 남은 기억들이 불확실하다고 느껴진다면 이 얼마나 숨이 막힐까. 이 작품이 발표되고 몇 년 뒤에 2차대전이 일어났다. 곧 일어날 전쟁보다 그 뒤에 있을 사태를 경고하려 이 책을 썼지 싶다.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태평하게 독서나 하고 있는 날들이 언제 멈춰버릴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날이 오면 우리가 그토록 고민하고 투쟁하던 것들이 다 허무로 돌아가리라. 부디 그런 날이 오지 않길 바라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