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2
에두아르트 한슬리크 지음, 이미경 옮김 / 책세상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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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한국 최초의 장편 에니메이션 홍길동의 신동헌 감독이 별세했다. 그는 서양 고전 음악의 애호가로도 명성이 높아서, 그에 관한 책도 몇 권 쓴 바가 있다.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때도, 그의 책 음악가를 알면 클래식이 들린다를 읽었던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이었다. 바그너를 추종했던 브루크너를 거세게 비판했던 음악 평론가로 언급됐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바그너의 스승격인 리스트의 작품들을 즐기게 되면서, 한슬리크의 이름도 종종 접하게 됐다. 리스트와 교향시와 바그너의 악극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표제 음악의 조류와 대립했던 절대 음악의 수호자가 바로 그였다.

 

 리스트의 방향에서만 접근한 탓이 크겠지만, 그동안 바라본 한슬리크는 항상 완고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옹호했던 브람스의 치밀하고 견고한 작품들도 언제부터인가 자주 듣게 됐지만, 그보다 더 맘에 내키는 쪽은 언제나 리스트의 곡들이었기 때문이다. 오페라의 화려한 선율들을 피아노 한 대 위에서 현란하게 재구성한 리스트의 편곡 작품들이야말로 언제 들어도 놀랍고 달콤했다. 한슬리크는 음악은 문학 혹은 가사나 감정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예술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주장했지만, 바로 그 힘을 빌린 까닭에 리스트의 음악에 매혹됐던 것이다.

 

우리가 음악적인 감정 표현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단호하게 거부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감정 표현 가능성이 언젠가 음 예술의 미적 원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설사 음악에서 정확한 감정 표현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음악에서의 아름다움은 감정표현의 정확성과 같은 것이 아니다. -p.65

 

 그래도 결국 그의 이 책을 사고, 또 한참 시간이 지나서 결국 읽게 된 것은 그동안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은 그 자체로 온전하다는 한슬리크의 훈계를 의식해 왔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 책 속의 그는 여전히 완고했다. 이제 다시 이렇게 그의 논변을 듣는 일은 없으리라는 생각이 책을 읽는 동안 자주 들었다. 앞으로도 음악 자체를 위해 음악을 듣는 일은 없으리라는 뜻이기도 하다. 음악이 한슬리크의 말처럼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내 감정을 지탱하는 가장 유용한 수단이어서다. 다만 이 선율들이 창작된 목적이나 구성된 법칙은 듣는 자의 감정을 의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했다.

 

회화, 교회 건축, 희곡 작품을 수프를 떠먹듯 그렇게 감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리아는 그럴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예술 감상도 액세서리 같은 역할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음악 작품도 식사 음악으로 연주될 수 있고 꿩고기의 소화를 도울 수 있다. 음악은 가장 뻔뻔한 예술이면서 동시에 가장 겸손한 예술이다. 우리 집 앞에서 계속 징징대는 [뻔뻔한] 손풍금 소리는 들어야 하지만 멘델스존의 교향곡조차 [겸손하게도] 꼭 들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p.138

 

 한슬리크의 비유를 빌리자면, 난 음악에게 계속 겸손함만을 강요하는 쪽에 가깝다. 꼭 들을 필요는 없는 음악을 내가 들어주는 까닭에, 그 내부의 원리까지는 들여다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음악이야말로 특별히 주시하지 않아도 일상과 공존할 수 있는 드문 예술이다. 그런 음악을 시간을 장식하는 수단이라고 보는 것이, 이 작품들의 가치를 경시하는 태도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집 안에서 내가 원하는 선율들을 들어야만, 집 밖에서 들을 수밖에 없는 뻔뻔한 소음들을 잊을 수 있다. 집에 오자마자 트는 음악들은 일종의 결계와도 같다. 역시 태만하지만, 알 필요는 없더라도 들을 필요가 남는다.

 

어떤 음악 작품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려내거나 그 특징을 밝혀내거나 혹은 해설하는 것 등은 모두 비유적이거나 아니면 허구적이다. 다른 모든 예술에서는 설명에 해당하는 것도 음 예술에서는 이미 은유가 된다. -p.81

 

 지난해에 아쿠타가와 야스시의 음악의 기초를 읽고 적었듯, 음악을 배우며 들을 의지는 여전히 미미하다. 이 책에서도 음악 밖에는 음악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단서도 없다는 한슬리크의 완고함이 역시 거부감을 초래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제는 작곡가들이 청자의 감정을 자극하거나 유도할 목적으로 작품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좀 더 의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 밖의 작품을 푸는 실마리가 내 안에만 있다고 믿는 것은 억지다. 듣지 않을 길이라도 그 방향만큼은 알고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 길로 더 깊이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든, 언젠가 그 길로 걸어갈 때를 위해서든 생각의 이정표는 꽂아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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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2
에두아르트 한슬리크 지음, 이미경 옮김 / 책세상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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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의 최종 가치는 항상 감정의 명료함과 관련될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완전히 동의한다. -18쪽

아름다움은, 그것이 아무 감정을 환기시키지 않더라도, 사실상 우리가 보거나 관찰하지 않는 경우에도 아름다우며 계속 아름다움을 유지한다. -26쪽

음악은 청자들의 환상을 위해 예술가의 환상에서 나오는 것이다. 물론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은 그저 단순한 직관이 아니라 지성을 통한 직관, 즉 표상과 판단을 포함한 직관이다. -28쪽

아름다움에 대해 지성만이 활동하게 되면 미적이지 않고 이성적으로 되지만, 감정 작용이 지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더 위험하며 병적이다. -29쪽

음악적 논문들은 음악과 건축이 유사하다는 사실을 셀 수 없이 자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건축가라면 어느 누가 건축은 감정을 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거나, 감정을 내용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겠는가? -30쪽

얼마나 많은 모차르트의 작품들이 그 당시에는 정열적인 것으로, 격정적이고 모험적인 것으로 여겨졌던가? 하이든FranzJoseph Haydn의 교향곡에서 느껴지는 편안함과 쾌적함은 모차르트 음악에서의 격정과, 심각한 투쟁, 쓰디쓴 고통들에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20년 내지 30년 후에 사람들은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바로 그렇게 구별했다. 정열적이고 격정적인 음악의 대표 격이었던 모차르트의 자리는 베토벤이 차지했고 모차르트는 하이든의 올림포스적인 고전성을 물려받았다. -32쪽

우리가 음악적인 감정 표현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단호하게 거부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감정 표현 가능성이 언젠가 음 예술의 미적 원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설사 음악에서 정확한 감정 표현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음악에서의 아름다움은 감정표현의 정확성과 같은 것이 아니다. -65쪽

춤이 특정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몸동작과 표정으로 말을 하기 위해, 춤의 형식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 율동성을 버리면 버릴수록, 형식은 없고 의미만 있는 단순한 판토마임에 더 가까워질 뿐이다. 춤에서 극적 원칙이 우세해지면 그만큼 춤의 조형적이며 율동적인 아름다움은 손상된다. -68~69쪽

사람들이 어떤 대상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 대상의 품위가 떨어지는 일은 없다. -80쪽

어떤 음악 작품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려내거나 그 특징을 밝혀내거나 혹은 해설하는 것 등은 모두 비유적이거나 아니면 허구적이다. 다른 모든 예술에서는 설명에 해당하는 것도 음 예술에서는 이미 은유가 된다. -81쪽

동백꽃은 향기 없이 꽃을 피운다. 백합은 색깔 없이, 장미는 향기와 색깔을 모두 갖고 아름답게 피어난다. 여기서 이것의 속성이 다른 것의 속성으로 옮겨지지 않으며, 그럼에도 이들은 저마다 모두 아름답다! -90쪽

음악만큼 그렇게 신속하고 다양하게 많은 형식들을 사용하는 예술도 없다. 전조들, 종지구들, 음정 진행과 화성의 연결은 50년, 아니 30년 만에 진부해져, 뛰어난 작곡가는 더 이상 그것을 사용할 수 없고, 계속해서 순수하게 음악적인 새로운 특징을 찾아야 한다. -92쪽

바흐, 모차르트, 하이든의 세계관을 비교하면서 그들 작품이 대조적인 이유를 세계관의 상이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일은, 아주 흥미롭고 가치 있는 시도로 간주된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는 너무나 복잡하여, 그 인과 관계를 철저하게 밝히려 하면 할수록 그릇된 결론으로 이끌릴 위험이 많아진다. 이 원칙을 따르는 연구는 과장의 위험이 너무나 심각하다. 사람들은 단지 동시대에 일어났을 뿐 긴밀한 영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쉽사리 내적 필연성이 있는 것으로 서술하고, 음 언어가 영원히 번역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하여 당장의 필요에 따라 이리저리 해석한다. 같은 사실이라도 현명한 사람이 말하면 진리가 되고 평범한 사람이 말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 되어버리는 그 같은 역설이 얼마나 교묘하게 잘 펼쳐졌는지에 오로지 좌우되는 것이다. -97~98쪽

음 예술의 물리적 부분을 연구하는 데 수학이 없어서는 안 될 실마리를 제공한다 하더라도, 완성된 음악 작품에서 그 의미가 과대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작품이 훌륭하든 나쁘든 간에, 음악 작품에서 수학적으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환상의 창조가 계산 문제는 아닌 것이다. 모든 모노코드(한 줄로 된 발현 악기) 실험이나 소리 음형, 음정 비례 등은 여기에 속하지 않으며, 미학적 영역은 그러한 요소들의 관계가 그 의미를 중단한 지점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수학은 단순히 기본 요소들을 규칙화하여 정신적으로 취급할 수 있도록 만들어줄 뿐이며, 가장 단산한 관계들 속에서 눈에 띄지 않게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음악적 사고는 수학 없이 나타나는 것이다. -100~101쪽

인생에서 어떤 위대한 것도, 어떤 아름다운 것도 내면의 따뜻함 없이 성취되지 않았다. -111쪽

시인들이 그렇듯 작곡가도 감정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겠지만 그것이 그에게는 창조적인 요인이 아닐 뿐이다. 그가 어떤 강렬하고 열정적인 정념Pathos으로 가득 차 예술 작품을 만들게 되면, 그 정념은 작품의 원인과 동기가 될 수는 있을지라도 -특정한 정서를 표현할 능력도 임무도 갖고 있지 않은 음 예술의 본성을 통해 알 수 있듯이-결코 예술 작품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111~112쪽

감정이 직접적으로 음으로 분출되는 것이 허용되는 행위는 음악 작품의 창조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음악 작품의 재생산, 연주에서 일어난다. -115쪽

음악의 주관적 인상을 연구할 때 그러한 (작곡과 연주의) 분리는 특히 유효하다. 연주자는 자신의 악기를 통해 그가 지금 가지고 있는 감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 또한 연주를 하면서 자신의 내부에 들어 있는 거친 격정, 불타는 그리움, 밝은 기운과 호흡할 수 있다. 손가락 끝을 통해 내적인 떨림이 직접 현에 전달되거나, 활로 켜거나, 노래로 소리를 내거나 하는 신체적인 친밀함이 일어난다. 그래서 연주에서는 가장 개인적인 기분이 표출될 수 있다. 여기서 주관성은 단지 음 속에 형식화되어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음으로 울리며 현실화된다. 작곡가의 창작은 천천히, 가끔 중단되어가며 이루어지지만, 연주가의 작업은 한 번에 끝나는 비행과 같다. 작곡가의 작업은 영원히 남겨지기 위한 것이고, 연주가의 그것은 충분한 순간을 위한 것이다. 음악 작품은 형식화된 것이고,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그것의 연주가. 감정이 분취되고 흥분되는 음악의 순간은 재생산의 행위에 있다. 이 재생산의 행위는 어둠에서 깜빡거리는 불빛을 끌어내어 청자들의 마음속에 옮겨 붙게 한다. 물론 연주자는 작곡된 것을 연주할 뿐이다. (다음)

(이어서) 작품은 음표대로 연주할 것만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작곡가의 정신만 이 존재하고 연주자는 그것을 추측하고 드러낼 뿐˝이라고 말한다. 그 말도 옳다. 그러나 바로 이 재창조의 순간에 작곡가의 정신을 자기화하는 것은 연주가의 정신이다. -115~116쪽

회화, 교회 건축, 희곡 작품을 수프를 떠먹듯 그렇게 감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리아는 그럴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예술 감상도 액세서리 같은 역할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음악 작품도 식사 음악으로 연주될 수 있고 꿩고기의 소화를 도울 수 있다. 음악은 가장 뻔뻔한 예술이면서 동시에 가장 겸손한 예술이다. 우리 집 앞에서 계속 징징대는 [뻔뻔한] 손풍금 소리는 들어야 하지만 멘델스존의 교향곡조차 [겸손하게도] 꼭 들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138쪽

만약 인간이 예술의 요소적인 것들에 마음을 온전히 빼앗겨, 자유로운 행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해졌다면, 이것은 예술을 위해서도 명예로운 일이 아니며, 인간 자신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140~141쪽

(고대의 음악은) 4분음[반음보다 더 좁은 미분음]과 ‘이명동음적인 음조Tongeschlecht‘[4분음을 포함한 음조]로까지 선율 재료가 미세하게 다듬어져, 오늘날의 음 예술이라 할지라도 그 이상으로 각 선법(旋法)에 특징적인 특수한 표현을, 이야기되거나 노래되는 말과의 긴밀한 유착을 보여줄 수 없을 정도다.
이렇게 미세하게 발달된 음 관계들은 좁은 범위에서이긴 하지만 청중들을 훨씬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 둔한 평균율로 교육된 우리의 귀보다 예민한 그리스인들의 귀가 끝없이 미세한 음정들까지 구별해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들 민족의 정감 역시 우리보다 음악에 의한 분위기 변화에 훨씬 더 민감했으며 그러한 변화를 더욱더 열망했다. 우리의 경우엔 음 예술에 대한 예술적 훈련을 받았기에, 음 예술의 요소적 영향력을 마비시키는 관조적 쾌에 이르려 한다. 그래서 고대에는 음악이 더욱더 강력하게 작용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144~145쪽

하나의 음악 작품을 이해하는 데 수반되며 우리를 즐기게 해주는 심적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번번히 간과된다. 그 요소란, 작곡가의 의도를 계속 쫓아가며 때로는 앞서 기대하기도 하고, 떄로는 추측을 확인하며, 때로는 유쾌하게 속기도 하면서 청자가 발견하게 되는 정신적 만족이다. 이러한 지적 과정들이, 이러한 끊임없이 주고받는 과정들이 무의식적이고 순식간에 지나가는 일임은 자명하다. 오로지 그러한 음악만이 완벽한 예술적 향유를 제공할 것이며, 이러한 향유는 본래 환상의 사색Nachdenken der Phantasie이라 부를 수도 있을 정신적 후속물들을 야기한다. 정신적 행위 없이는 어떠한 미적 향유도 없다. 음악에서는 이러한 정신 활동의 형식이 특히 고유하다. 음악 작품들은 확고부동하게 한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청자에게 일어나는 일이며, 따라서 음악 작품들은 청자에게 임의의 정지나 중단을 허락하는 관찰이 아니라 예민하게 깨어 있으면서 끊임없이 따라올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반은 아주 복잡한 작품들에서는 정신적 노동이 될 수도 있다. -147쪽

음악에서는 모든 것이 측정할 수 있는 것인 데 반해 자연음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두 음향 세계가 거의 매개 없이 양립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자연은 우리에게 완성된, 모방할 수 있는 음 체계의 예술적 재료를 주는 것이 아니라, 물질 그대로의 원재료를 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음악에 활용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동물의 소리가 아니라 그들의 내장이며[내장으로 악기를 만들므로], 음악이 가장 고마워해야 할 동물은 나이팅게일이 아니라 양이다. -165쪽

어떤 하나의 주제에서 내용과 형식을 분리해내려는 모든 시도는 모순에 부딪히거나 억지스러울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어떤 동기가 다른 악기로, 혹은 한 옥타브 위에서 반복된다면, 그 동기의 내용이나 형식은 바뀌는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듯 형식이 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동기의 내용으로 남게 되는 것은 단지 음정들의 나열 같은 것들이거나 우리 눈앞의 총보에 그려져 있는 음표들의 윤곽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음악적 규정이 아니라 추상일 뿐이다. 이것은 원기둥의 채색된 창문에 비유할 수 있다. 이 창문으로 보면 같은 대상도 빨갛게, 파랑게 또는 노랗게 보일 것이다. 이때 대상의 내용도 형식도 바뀌지 않았다. 오로지 색깔만 변한 것이다. 동일한 형식을 이같이 가장 강렬한 대조에서 섬세한 뉘앙스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다양한 색채로 변화시키는 것은 음악의 매우 고유한 특징이며, 음악의 효과 중 가장 풍부하고 가장 정제된 측면의 하나다. -184~185쪽

작곡이 형식적인 미적 법칙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그 과정은 자의적으로 무계획적으로 방황하는 즉흥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나듯이 유기적으로 앞으로의 전개를 예측하게 하면서 점점 발전해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186~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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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티그루 소령의 마지막 사랑
헬렌 사이먼슨 지음, 윤정숙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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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꺼워도 금방 읽을 것이라 생각하고 집었던 책인데,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책을 읽는 속도가 많이 느려진 탓도 있겠지만, 이야기의 호흡이 미친 영향도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60은 넘긴 영국 육군의 퇴역 소령과 같은 동네에서 작은 잡화점을 운영하는 파키스탄 혈통의 여성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그들의 작은 마을 에지컴세인트메리를 산책하는 걸음 마냥 완만한 템포를 벗어나지 않는다.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계속 걸을 길이기 때문이다.

 

거트루드는 영리한 아이라고 했잖아, 퍼거슨.” 대거넘이 말했다. “내 누이인 이애의 엄마는 대단한 여자였지. 나만큼 그애를 사랑한 사람은 없어.” 그는 냅킨으로 눈가를 두드렸다. 소령은 이런 말은 예상도 못했다. 메이 대거넘은 새파랗게 젊은 가수와 달아난 뒤 가족에게 거의 의절당한 것으로 마을에 알려져 있었다. -p.320

 

 이야기에 큰 갈등은 보이지 않는다. 서로 인종과 배경이 다른 두 노인의 사랑이라고는 하지만, 체면과 시선에 퍽 연연하는 어니스트 페티그루 소령은 시종일관 그 감정이 남들의 입질에 오르지 않도록 하는 데, 자신의 연정만큼이나 큰 기력을 소모할 뿐만 아니라, 가게를 함께 꾸리던 파키스탄 인 남편과 사별한 재스미나 알리 역시 소령의 그런 태도를 관대하게 이해한다. 게다가 그들의 연애를 훼방 놓을 소읍(小邑)의 영국인들 역시, 타인의 사생활을 두고 험담을 나눌 때조차 자신의 평판에 신경 쓰는 사람들이다


 적어도 이 소설의 화자가 바라보는 이야기의 표면에서는 두 사람의 애정을 손가락질하는 자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짓이 부적절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만큼 양식이 있고, 동시에 그럼에도 그것을 수군대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만큼 비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마을의 목사와 그 사모를 비롯해 소령의 오랜 지인들의 뒷공론이 오래도록 이어지리라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사랑에 빠진 퇴역 소령이 그들의 틈바구니에서 빠져 나왔을 뿐이다.

 

모자걸이 옆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을 맞아줄 여신이 필요했거든요.” 앨마가 말했다. “그리고 미시즈 알리는 순수한 인도인, 아니면 적어도 파키스탄인이잖아요.”

사실 난 케임브리지 출신이에요.” 미시즈 알리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립병원 3병동 출신이죠. 와이트 섬보다 멀리 가본 적도 없고요.” -p.224~225

 

 물론 이 소설 속의 사람들이 마냥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처신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은 충분히 교양 있다고 자부하는 에지컴세인트메리의 사람들이 그나마도 제대로 못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불편하면서도 흥미로웠다. 무굴 제국을 주제로 골프클럽의 댄스파티를 연다면서 파키스탄 출신인 미시즈 알리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은, 소읍의 영국인들에게 부족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잘 보여 준다. 타인의 정체성을 향해 그게 그거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반성과 분별이 필요하다.

 

 이런 장면이야말로 미시즈 알리와 페티그루 소령의 사랑이 이 작은 동네에서 결코 따뜻하고 쉬울 수만은 없으리라는 너무나 명확한 단서이다. 이 단면을 두 사람의 미래에 놓인 걸림돌로 확장시키지 않은 까닭에 이 소설은 비좁고 짜증날 때도 있지만, 동시에 온기를 품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저 사람들의 턱없이 교만한 올바름은 그들과 함께 살아온 페티그루 소령의 일부이기도 했다. 페티그루 소령은 미시즈 알리에 빠져들면서, 비로소 자신의 세계가 얼마나 답답했는지 남김없이 바라보게 되었다. 이제 미시즈 알리의 눈앞에서 그는 숨을 곳이 없었고, 숨을 필요도 없었다.

 

내가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어머니를 수조에 빠뜨려 죽였지.” 그녀는 쭈그리고 앉아서 바늘 끝으로 잔디밭에 원을 그렸다. “난 봤어. 아버지가 한 손으로 어머니를 수조에 밀어넣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걸. 아버지는 어머니를 정말 사랑했거든. 어머니는 카펫과 구리 솥을 팔러 온 남자와 웃었고, 우리 할머니의 가장 좋은 찻잔에 차를 담아 자기 손으로 직접 건넸지.” 그녀가 다시 일어섰다. “난 항상 아버지와 아버지의 희생이 자랑스러웠어.” p.481~482

 

 이 작품에는 미시즈 알리의 시집 조카이고 그의 가게를 물려받은 압둘 와힛과 그의 애인 아미나, 두 사람 사이에서 탄생한 아들 조지도 등장한다. 집안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한 두 사람을 둘러싼 갈등은 이 작품에서 그나마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건이다. 파키스탄 혈통의 이슬람 신자인 이들의 종교적, 개인적 완고함뿐만 아니라, 그들이 영국의 작은 동네에서 눈에 띄는 존재라는 사실까지 겹쳐서 그들의 사건은 이야기 속에서 더 눈에 띈다. 가족의 명예를 더럽히고 이슬람의 교리를 벗어났다는 이유로 두 사람의 압둘 와힛과 아미나의 혼인을 반대했던 압둘 와힛의 외고모할머니가 말하는 명예 살인의 과거사는, 사실상 에지컴세인트메리의 사람들이 입으로 내놓지 않는 파키스탄이며 인도에 대한 가장 어두운 인상을 스스로 증명한다.

 

 압둘 와힛이 아미나를 사랑하면서도 가문의 명예와 종교의 교리에 얽매여서 결혼을 회피하는 태도의 근원으로 명예 살인을 제시하는 흐름은 일견 태만하기도 하며, 또한 이민자에 대한 편견을 조장한다고 우려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악한 풍습이 아직까지도 정당화되거나 박멸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민자이자 소수자라는 다양성의 범주에 앞서서 인간으로서 범해서는 안 되는 행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훨씬 중대한 까닭에, 적절한 전개라고 보았다. 노인들의 사랑인 동시에 다수자와 소수자의 결합인 이 이야기가, 명예살인을 마치 오래 전 끝난 전설처럼 다루지 않은 덕분에 미시즈 알리와 페티그루 소령의 애정 역시 허공을 맴돌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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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좀 더 다녔던 두 번째 회사를 그만둔 지 2달 정도 지났다.

다음 주 월요일에는 80일 동안 교토로 떠난다.

벚꽃이 필 무렵 들어가서 수국이 필 무렵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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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onjoo 2017-03-27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on Voyage!
 
페티그루 소령의 마지막 사랑
헬렌 사이먼슨 지음, 윤정숙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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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런 사람(퍼거슨)을 이길 수 없어요.˝ 로저가 비통하게 말했다. ˝돈도 가졌고, 가문도 가졌잖아요. 내가 (거트루드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봤자 도움이 되지 않았을 거예요. 아무리 진심이었다고 해도요.˝ -467쪽

˝하지만 그 사람(퍼거슨)은 이미 작위가 있잖아요.˝ 재스미나가 말했다.
˝스코틀랜드 작위는 사실 별 볼 일 없어요.˝ 소령이 말했다.
˝특히나 인터넷으로 산 것은요.˝ 로저가 덧붙였다. -468쪽

˝내가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어머니를 수조에 빠뜨려 죽였지.˝ 그녀는 쭈그리고 앉아서 바늘 끝으로 잔디밭에 원을 그렸다. ˝난 봤어. 아버지가 한 손으로 어머니를 수조에 밀어넣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걸. 아버지는 어머니를 정말 사랑했거든. 어머니는 카펫과 구리 솥을 팔러 온 남자와 웃었고, 우리 할머니의 가장 좋은 찻잔에 차를 담아 자기 손으로 직접 건넸지.˝ 그녀가 다시 일어섰다. ˝난 항상 아버지와 아버지의 희생이 자랑스러웠어.˝
˝우리는 문명화된 사람들이에요. 과거에 메달린 시골의 소작농 가족이 아니라고요.˝ 재스미나는 공포로 목이 메었다. -481~482쪽

˝그 사람에게 결혼하자고 할 거야.˝ 소령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뭐라 하든.˝
˝흥분부터 하지 마세요. 고환은 아직 치료중이잖아요.˝ 로저가 말했다. -497쪽

˝나는 나보다 대단한 사람들에게 내가 대단해 보일 날을 간절히 원했어.˝ 소령이 말했다. ˝난 오만했다. 유전적인 것인가봐.˝ -5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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