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5 - 율리우스 카이사르 (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5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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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사르는 결국 루비콘을 건너고야 말았다.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의 운명이 걸린 이 순간에도 한 구절의 명언을 남길 정도로 그는 당당했다. 앞으로의 날들이 오직 한 사람, 그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서였을까? 이제 로마는 바야흐로 세계 제국으로의 첫발을 내딛고 있었으나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는 과두정(寡頭政) 체제는 그 흐름을 따르지 못하고 있었다. 이로써 제정(帝政)으로의 방향 전환이라는 카이사르의 목표는 뚜렷해졌으며 그의 모든 행동은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미 그에게 '때'가 이른 이상에는, 성급한 판단이라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에서도 이미 그의 승리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한 성급함이 부끄럽지 않도록 그는 승리할 수 있었다. 폼페이우스의 수적 우세가 압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가 계속해서 승리했기에 로마의 미래를 결정할 구체제와 신체제의 격돌이라는 이 전투의 중요성을 인식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굳이 말하자면 너무 시시한 탓이었던 것일까? 하지만 카이사르가 단지 그 혼자만의 신념으로 이와 같은 승리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압도적인 병력을 이끌고 있었던 폼페이우스에게는 없었던 군사적 철학이 그에게는 있었다. 바로 전쟁의 주체가 되는 병사들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고, 그러한 자신의 철학을 당사자인 병사들의 마음에까지 새기는 것이었다. 대제국 로마의 새로운 전기를 연 인물다운 용병술이었다. 반면 폼페이우스는 그의 지지세력인 원로원파와 마찬가지로 병사들을 자신들의 지위와 재산을 지키는 소모품 정도로 여기는 듯했다.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군대 경력이 많은 폼페이우스 자신은 그렇지 않았더라도 병사들의 입정에서는 지금까지 그들이 본 지도층, 곧 원로원 의원들의 태도에 불신을 품고 있었다. 결국 그들에게는 맘에 없는 싸움이었으니 승패는 여기에서 이미 정해진 것이다. 지휘관인 폼페이우스도 그 끝이 온전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이집트에서 비참하게 암살당하고 카이사르는 일센티미터의 코를 오늘날까지 남기는 '트러블 메이커', 클레오파트라를 만나서 자식까지 얻는다. 이 무렵 카이사르는 우리 생활에 필수인 달력을 현실에 맞게 개정했다. 대다수 서민들은 이런 사소한 배려를 고마워한다는 것을 아는 '허영심 많은'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큰 일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중 하나가 사실상,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과두정의 폐지와 제정의 성립을 의미하는 정치 개혁이었다. 당연히 기득권층을 중심으로 한 불평 분자는 생겨날 수 밖에 없었고, 그 분출은 너무도 불쾌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 끝은 결국 카이사르의 너무도 어처구니없고 아쉬운 죽음이었다. 어쩌면 한 일보다 할 일이 더 많았을 지도 모르는 그였지만, 자신의 붉은 피로 로마의 대지를 적시고 말았다.

 카이사르 본인의 예상보다 10년은 일찍 전개되고야 만 이 상황으로 말미암아 약관 18세의 나이에 후계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와 한창 혈기왕성한 장년에 스스로 카이사르의 후임자임을 공언하는 안토니우스 사이에 제2의 내란이 벌어졌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필 안토니우스에게 끼어든 클레오파트라로 인해 안토니우스의 치밀하지 못한 성격은 그녀의 천박함과 어우러지고 만다. 그 결과로 둘은 서로의 결애서 떠나고 파르살루스 평원에 이어서 악티움 해역에서 카이사르의 이상(理想)은 두 번째 대승을 거두고, 그의 갈 길을 만천하에 알린다. 카이사르와 함께 로마 사상의 쌍벽이라던 키케로의 죽음을 끝으로 과거의 인물은 가고 새 시대가 다가온다. 아우구스투스의 팍스 로마나의 시대가.(1997. 10. 13∼20, 1997. 10. 20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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