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 하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2
박지원 지음, 길진숙.고미숙.김풍기 옮김 / 그린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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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참 잘 꾸며진 이야기 책이다. 아기자기하다. 하지만 충실한 번역에 깔끔한 화판의 그림들까지 나무랄 데가 없다. 솔직히 나같이 한문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전문을 다 싣지 않은게 아쉽긴 하다. 하지만 일반 독자들이 있기엔 전혀 문제 없고 열하일기의 매력에 푹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작년 이만때쯤 열하일기 원문 해설서에 무턱대고 도전했었더랬다. 그 때 고미숙 선생님이 쓴 '열하일기, 웃음과 유머의 유쾌한 시공간'을 읽고난 후였다. 평소 같았으면 그 대작에 감히 도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지원의 문장은 난해하기로 유명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고미숙 선생님의 책을 읽고나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게 바로 해설서가 가진 매력일테지만, 열하일기는 난해한 책이기보다 명쾌하고 유머러스한 책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나 원문 해설본은 난해하고도 어려웠다. 아니 이미 고전을 많이 읽어왔기에 옛사람들의 생각을 잘 알 것이라 생각했던 나의 모든 것이 착각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다. 역시 완전히 패배였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르고 덤벼든 꼴로, 두 손 두 발 다 들어야 했다. 그렇게 좌절을 겪었던 책이 이런 이야기책이 되어 나올 줄이야. 참 격세지감을 느낄 뿐이다.

  이 책은 열하일기에 관해 알고 싶은 독자라면 필히 보아야 하는 책이다. 원문 쪽을 볼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단호하게 말리고 싶다. 원문은 이 책을 통해 기초를 쌓고 고미숙씨가 쓴 다른 열하일기 관련 글들을 읽고, '역사스페셜, 열하일기편'을 다 본 다음에 봐도 늦지 않다. 아무 생각없이 무턱대고 덤벼들었다간 후회하게 될 게 뻔하다. 그러니 아무 편견이나 생각없이 맘을 내려놓고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쭉 읽어보길 바란다. 거짓말 하지 않고 그 비쥬얼만 보아도 어느 순간에 이 책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짜임새 있게 잘 편집했으며 더욱이 하나 하나의 그림들이 유머러스하다^^. 이건 직접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조선 시대 선비가 가지고 있을 법한 근엄한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다. 하긴 원래 열하일기 자체가 유머러스한 글이긴 하지만 말이다.

 초등학생부터 나이가 많이 드신 분들까지 아무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다. 그냥 그림만 보며 열하일기 일정을 따라가도 되고, 시간이 있다면 글까지 읽으며 열하일기의 재미에 푹 빠져도 된다. 그렇게 읽다보면 어느 순간 원문 열하일기를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의 매력은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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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 상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2
박지원 지음, 길진숙.고미숙.김풍기 옮김 / 그린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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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名作은 두고 두고 회고될 값어치가 있는 작품들을 말한다. 그런데 아무리 명작이란 이름이 붙었다 할지라도 함부러 덤벼들 수는 없다. 무언가 특이한 게 있을까봐서 무턱대고 달려들었다간 넉다운 되기 일쑤다. 굳이 책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우린 수많은 명화들을 보면서 느껴보지 않았던가. 명화는 하나 같이 지루하고 잠이 온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깊이 있는 대사들이나 짜임새 있는 장면들이 와닿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순간적인 쾌락을 주는 액션 장면류의 영화들에 익숙한 시선 탓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명작이나 명화는 어느 정도의 인생이나 삶의 경험이 쌓인 이후에 보아야만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거 같다.

  열하일기에 대한 칭찬글들이 봇물을 이룬다. 이미 우리 시대에 하나의 명작으로 남아 있는 조선시대 여행기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열하일기의 특이점은 박지원이라는 조선 선비가 보는 청의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설과 그 곳 사람들과 격이 없이 나눈 대화에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청은 오랑캐이고 우리는 중화를 이은 대민족이라는, 이른바 '소중화의식' 속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과 대화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저급한 것이라 폄하했던 것이다. 그런 의식이 팽배해 있었음에도 연암은 그걸 뛰어넘어 그들과 소통할 수 있었고 그들의 좋은 점을 배워올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야기들이 담긴 책이니, 열하일기는 특별할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조선시대엔 열하일기는 금서로 규정되어 읽는 것조차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군사정권 시대에 금서로 구분된 책들을 밀실에서 몰래 읽던 그런 광경과 은근히 일치한다. 그 책이 21세기에 이르러서야 하나의 명작 고전으로 읽히게 되었으니 참 힘들고 고단한 세월이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무턱대고 원작 열하일기를 읽을 순 없다. 난 한문을 전공을 사람이어서 여러 공부를 한다는 생각으로 원문 열하일기를 읽었지만, 몇 줄 읽다보니 검은 건 글씨요, 하얀 건 종이라는 생각만을 하며 읽을 뿐이었다. 청과의 관계,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의 인식, 언어습관 등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읽으나 마나한 글이 된다. 명작이 순간 졸작만도 못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기까지 고미숙 선생님이 쓴 '열하일기, 웃음과.....' 와 '삶과 문명의...'를 읽었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열하일기에 흠취할 수 있었는데, 다시 그 열하일기를 다양한 자료와 함께 풀이해놓은 책이 출간된 것이다. 솔직히 원문판 열하일기(거기에 이런 상세한 자료와 원문이 실려있길...)의 출간을 바라던 나로서는 실망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출간된 것도 나쁘진 않다. 원문을 해석해 놓은 책이긴 하지만 전문이 다 실려 있진 않다. 물론 여행에 관한 내용은 다 수록되어 있고 그 외에 자질구레한 내용들만 뺀 것이지만 말이다. 책은 참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그리고 번역도 충실하며 한문문장에 익숙치 않은 현대인들이 읽기에 편하다. 열하일기를 읽으며 여러 사진들을 통해 그 상세한 과정들을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좀더 관심 있으신 분은 '역사스페셜, 열하일기편'과 함께 읽어나가시길~ 

  이를 계기로 진정 열하일기를 읽고자 했으나 읽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쉽고 재밌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고전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기쁨이라면 어려운 글을 읽는 쾌감이기보다 선현의 생각들을 갈무리 함으로 나의 비전을 탐구해볼 수 있는 것이리라. 명작이 이로서 우리에게 더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과연 이걸 읽으며 어떤 생각들을 하게 될지는 그걸 하나 하나 같이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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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태의 스토리 철학 18
남경태 지음 / 들녘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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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세상을 살아간다. 그건 곧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 이상의 신념을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종교적 신념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세상을 판단하며 사람을 판단할 것이다. 무종교인이라면 각 자의 이데올로기가 있을 것이다. 그걸 삶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왜 철학은 중요한 것인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을 때, 이미 철학을 가진 것이니 다른 철학을 지닐 필요는 없어진다. 그럼에도 왜 철학을 논해야 하는 것이며, 왜 번거롭게 철학을 탐구해야 하는 것인가? 물론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 자체가 이미 자기의 한계 영역을 알고 그걸 넘어서려 노력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주어진 그대로의 삶에 만족하며 산다. 주어진 철학이 절대적인 참(진리)라고 생각하며 그걸 부여잡고 세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게 끝이 아님은 분명하다. 평생 기독교를 저주하며 살아오던 사람이 임종의 시기가 다가오자 갑자기 기독교를 인정하는 등의 행동을 취하기도 하니 말이다. 그건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기 위한 일시적인 방법일 테지만, 그의 삶이 지금껏 얼마나 허무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이런 삶의 허무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금껏 지녀왔던 철학의 담론을 새롭게 정립하는 것, 누군가가 어떠한 목적에서 나에게 줬는지도 모르는 삶의 철학의 한계를 넘어서 나의 삶을 내가 정의하고 살아가려 하는 것, 바로 그게 우리에게 철학이 필요한 까닭이다. 우린 지금껏 타인의 의지로 이 세상을 살아왔다. 하지만 이젠 우리가 내 자신의 의지를 명확히 알고 그 의지에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바로 그 명확히 알고자 하는 의지 속에 철학에 대한 담론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은 강신주씨가 쓴 '철학, 삶을 만나다'와 같이 읽으면 좋을 것이다. 철학이 결코 삶과 동떨어질 수 없음을, 그런 철학이라면 전혀 무용한 것임을 두 책에선 나란히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왜 우린 무의식이란 것을 알아야 하는지, 왜 우린 인간이 지닌 철학들을 알아야 하는지 이 책에서 명확히 나와 있다. 그건 곧 타인을 이해하는 통로임과 동시에 나 자신을 이해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언제나 나 자신의 관점에서 타인을 정형화하려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나 같으면 저렇게 하지 않을텐데, 도무지 저 자식을 잘 모르겠어'라는 말들은 그런 정형화의 한계를 표현한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이라는 영화에선 사람의 형상을 아메바 모양으로 그린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볼 땐 몇 개의 점만을 찍어 삼각형, 사각형으로 정형화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혹 그 사람을 전부다 아는 것처럼 생각한다니, 그런 심각한 착각이 또 있을까. 바로 이런 소통의 문제로 인해 우리의 삶은 늘 고립되며, 나 자신 또한 내 스스로 고립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형상이 아메바라 한다면, 우린 수도 없이 그 점들을 찍어봐야만 그를 어느정도 제대로 알게 되는 것이다.

  삶은 신념의 문제이다. 며칠전 케이블TV에서 삼황신성교에 관한 프로그램을 방영했었다. 누가보아도 일반물인데 '신성수'라는 이름으로 십만원씩에 판매하고 있고 그걸 치유의 명약이라는 생각으로 아무 거리낌없이 산다. 우린 묻는다. 티비에선 그 물이 먹을 수조차 없는 물이라 방영했지만, 그걸 사람들은 사서 마신다. 우린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는가?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지 않은가? 신념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그나마 올바른 생각들로 신념을 지닌 사람이라면 당연히 괜찮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폐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을 통해 나의 신념을 다시 재검토해 보는 게 필요하다 거다.

  철학은 곧 내 삶에 대한 비젼을 탐구하며, 나 자신을 알고자 하는 노력일 뿐이다. 이 책을 읽고 그런 깨달음을 조금이라도 얻게 된다면, 이 책은 그 자체만으로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둔 책이라 할 것이다. 스토리를 통해 이야기를 하기에 지루하지도 어렵지도 않다. 하지만 너무 단편적인 이야기들이라 너무 짧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젠 다시 '철학(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읽어봐야 하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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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 합본호
신경림 지음 / 우리교육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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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을 찾아서'라는 책을 얼핏설핏 본 적이 있지만, 그다지 읽고 싶지는 않았다. 우선 나에겐 시에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중고등학교 때 도저히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시들을 어떠한 감상법에 따라 외우고 외웠기 때문이다. 시가 중의성을 가지고 있을 때 시는 아름다울 수 있는데, 학교에선 정답만을 원했다. 이미 하나의 생각으로 정해진 틀에 따라 읽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런데 난 불행히도 시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런 공부방식에도 불만이 많았으니 시험 점수가 잘 나올리는 만무했다. 그런 악순환이 반복되다 보니깐 자연스럽게 시에서 더욱 멀어져 버렸다. 그런 나에게 시를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른바 대학교에 들어와 러브레터를 쓰며 연애시를 인용해야 했던 것이다. 그 때 보았던 시들은 감수성을 날카롭게 세운 것들이다. 그래서 한번 읽을 땐 정말 내가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처럼 좋지만, 두번 세번 읽다보면 그렇게 유치하고 가벼울 수가 없다. 이른바 상업화된 '돈벌이가 되는 시'들의 한계였던 거다. 그 탓에 난 다시 시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가볍게 감수성을 자극하며 쓰는 시라면 나도 백 번 천 번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이제 어느덧 내 나이 28살이다. 아직도 변변한 직장 하나 갖지 못한 '청년 실업'의 대표주자로 오늘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하며 살고 있다. 어찌보면 내 생애에 가장 볼품없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 순간 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관점이 결코 하나가 아님을 안다. 그리고 지금의 이런 무수한 사유들이 나의 삶을 더욱 풍요하게 만들거라는 확신도 든다. 작년보다 올해가, 어제보다 지금이 더 즐겁고 행복하다면 그건 합리화일테지만, 나의 생각 속에 다른 방향들과 가치를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감수성이 남다르지 않고 살아있을 때 다시 시를 접하게 되었다. 나의 전공상 한시를 주로 읽게 되었지만, 그 시들을 읽을 때 난해했던 건 역시 사람의 감수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거였다. 그런 고민이 끝내 좀더 이해하기 쉬운 우리시로 이어졌던 것이다. 과거 사람의 시는 그 인식의 격차로 인해 어려웠던 거라면, 지금 사람의 시는 그나마 이해하기 쉬울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역시 맘에 쏙 든다. 물론 시들이 전부다 실린 것도 아니고, 전문이 실린 시는 몇 되지 않지만, 사람을 알고 시를 알고 삶을 알게 되는 그런 책이었다. 나와는 삶의 여건이나 환경이 다르지만 그 시인들이 시로 표현한 것들은 그들 속에 응어리진 삶에 대한 희구였던 거다. 바로 그런 응어리들이 같았다. 나 또한 그런 부조리한 삶에 대한 응어리를 몸소 느끼고 있고, 이 안에서 어떻게 내가 더 나은 가치를 창출해낼 수 있을지 고민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특히 도종환님의 '내 어릴 때 꿈은'이란 시는 나를 감동에 휩싸이게 했다. 내가 교사가 되는 꿈이기도 했지만, 단순히 직업적 교사가 아닌 삶을 나눌 수 있는 그런 교사를 꿈꾸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도현님의 시들은 대체로 나의 감수성에 맞았다.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는 감동 그 자체였다. 시의 간결한 언어 속에 담긴 깊은 뜻이 맘에 들었다. 지금에 이르러 읽는 시는 확실히 학생 때 의무적으로 읽었던 시와는 느낌이 다르다. 그런 점에서 난 이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시인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찾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누구나 자기를 알기 위해 발버둥칠 것이다. 그런 고민을 할 수 있고, 더 나은 비전을 탐구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 크나큰 축복이다. 내가 중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첫 시간에, 화투에 유일하게 나오는 비광(오노도후) 이야기를 해준다. 꿈이 있고 희망이 있다면 그 삶은 결코 실패한 삶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다. 결국 그들에게 해줬던 이야기지만, 그건 내 스스로 나에게 던지는 메시지였음에 분명하다. 이 책으로 인해 시에 대한 기쁨도 찾고, 덩달아 나도 찾게 되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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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2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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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들어서 회화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내 주위에 미술을 하는 친구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예전엔 그들을 보며 나와는 다른 관심 분야가 있을 뿐이라 별세계를 대하는 것처럼 느꼈으니 말이다. 하지만 미술 또한 인간의 궁극적인 감정을 풀어내는 것이라 했을 때, 미술이나 음악, 그리고 글쓰기는 닮아 있다. 내가 지금 이렇게 글쓰는 것 또한 결국은 나의 심정을 풀어내는 것이며, 누군가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심리가 숨어 있으니 말이다. 그런 까닭에 미술을 전공한 백진규라는 친구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히 회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미술사에서 '원근법'의 발명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한다. 원근법을 발명함으로 미술은 좀더 현실과 가깝게 되었으며, 절대적인 관점이 아닌 개인 각각의 관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원근법은 가까운 것은 크게, 멀리 있는 것은 작게 그리는 것인데, 막상 볼 땐 현실과 똑같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현실이라고 볼 순 없다. 현실에선 멀리 있는 나무라도 작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을 왜곡하면 사실처럼 보이고, 현실을 직접 표현하면 왜곡된 것처럼 보이는 아이러니) 원근법의 발명으로 회화는 한단계 업그레이드 된다.

  바로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이야기는 회화 전통을 계승할 것이냐, 서양의 원근법을 도입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또한 그런 거대담론과 함께 사랑이야기도 함께 전개된다. 딸을 곁에 두고자 하는 에니시테, 그리고 그 딸을 사랑하는 카라, 그리고 그 딸(형수님)을 사랑하는 하산의 숨막히는 사랑에 대한 열정이 함께 버무려진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잘 모르는 터키식 문화 때문에 힘겨울 뿐이지, 이런 저런 엮인 이야기들로 재밌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 누가 뭐래도 이 책의 이야기의 핵심은 미술적 관점에서 적대시하다가 서로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미술적인 담론들은 하찮은, 거창한 듯 그렇게 흘러간다. 굳이 다른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라면 살인까지 벌어질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하찮은 이야기가 아니였기 때문에 그들에겐 살인까지 해야할 정도의 신념을 낳은 것이다.

  '몇 십년간 산에서 도를 닦던 스님이 무언가를 깨우친 후에는 왜 산에서 내려와 민중으로 들어가는가?' 라는 질문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질문에 대해 각자 생각해볼 문제이다. 하지만 여기서 나오는 대답이 이 책을 읽는데, 그리고 그런 회화적 갈등을 풀이하는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좀 어려운 책이고, 지루한 책이지만 읽다보면 분명히 '아하' 하는 깨달음을 주는 책이다. 여러 문화를 접하고 싶고, 그림에 대해 남다른 생각들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한 번 정도는 읽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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