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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회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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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읽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 되고 있다.
큰맘 먹고 성능을 높인 다초점 렌즈는 계속 고쳐써야 하고,
시린 눈은 세상을 투명하게 투과하지 못한다.
몇번이나 눈을 깜빡거린 후에야 다시 놓쳤던 문단을 찾아 글줄 사이를 더듬는다.
잠시, 읽는 것이 사라지고 난 다음을 생각하니 체념의 한숨이 흘러나온다.
읽지 못하는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목소리를 봉사하겠다고 한 생각은 결국 내게 필요한 것이 될까.

마음이 부산스럽고
지나간 기억들이 제멋대로 머릿속에서 튀어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윌리엄 트레버에게 손길이 간다.
그의 고요한 체념과 받아들임이 처방처럼 느껴져서일까.
소란스럽던 마음과 머릿속이 잠시나마 고요와 평화로 차오른다.

번역소설은 원문으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도 잠시 접어놓는다.
그의 영어문장은 결이 너무 섬세해서 조금 뒤죽박죽이어도 누군가 애써 우리말로 바꿔준 걸 읽는 게 그나마 낫다. 그저 언어나 문장 너머에 있는 뭔가를 더 상상하고 그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언젠가 <파리 리뷰>에 실렸던 그의 인터뷰 기사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기차역까지 친절하게 마중나와 있던 그의 인품과 인터뷰 내내 흐르던 그의 다정함. 
요란하지 않고 과하지도 않은(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성품에 따뜻한 눈동자만 맑게 빛날 것 같은 사람. 너무 애써 전업작가가 되려고 몸부림치는 것 같지 않게 느껴졌던 건 그가 꽤 괜찮은 광고회사를 다니면서 틈틈이 글을 썼기 때문이었을까. 30대 중반이 넘어서야 전업작가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게 담담한 그의 대답만큼이나 그의 이력이 참 ‘답다’는 생각을 했었다.

결국은 나이들고 병들고 죽는다.
이별하는 순간 가장 우아하게 보이는 커플처럼,
쇠락을 앞둔 노인의 스러짐이 아름답길 소망하는 건 지나친 욕심일까.
천천히 놓아버리고 내려놓고 내려오는 길을 담담히 걸을 수 있을까.

가물해지는 기억을 위해서라도
그의 글을 다시, 또 다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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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12-04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레버의 작품들은 담담하면서도 울림이 있더라구요. 이 작품도 정말 좋았습니다 ㅋ

책을 오래보려면 눈건강이 중요한데 저도 요샌 눈이 아프더라구요 ㅜㅜ

나뭇잎처럼 2022-12-05 14: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도 보배 같은 눈 잘 돌봐가면서 읽으시길요. 트레버 아들 말처럼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게 된 트레버에게서 처음으로 불행해하는 모습을 보았다죠. 읽고 싶은 걸 읽지 못하는 그 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려면 창밖너머 멀이 보는 습관이라도.. 트레버는 주기적으로 읽어줘야 하는 거 같아요. 오늘의 명상처럼...
 
빼앗긴 자들 환상문학전집 8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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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귄의 작품 중 워낙 알려진 작품이라(상도 많이 받고) 기대를 하고 보았는데 워낙 예스런 표지에 한 번 놀라고, 예스런 번역에 또 한 번 놀랐다. 잘 모르는(르 귄이 만들어낸) 단어와 개념이 많아 원서 대신 번역서를 일단 선택했는데, 다음에는 원서로 바로 갈까 하는 생각도 들고. 1974년에 발표된 소설. 인류의 공산주의 실험이 실패로 향하는 시기에 착취자와 피착취자, 아나키즘과 아키즘, 과거와 현재, 부분과 전체, 영속과 무한의 대비를 통해 지구인에게 고착화된 세계관을 뒤집는 거대한 헤인시리즈의 대표작. 옛 소련의 집단농장과 지금 현재 쿠바의 자발적 빈곤이 떠오른다. 어느 누구도 다시 그 시절로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배고픔을 참지 못한다. 과연 공동체를 위한 자발적 빈곤이 탐욕의 정점을 향해 치달아가고 있는 지구인들에게 가능할까. 여전히 공산주의는 의미있는 실험이며 앞으로도 보다 개선된 형태의, 보완된 공산주의 가능성을 희망하는 한 사람으로서 <The Dispossessed>는 현실감 있는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틈을 엿보게 해준다. 제아무리 낯설고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그나저나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뭘까? 교조화된 공산주의는 진정한 공산주의가 아니었나? 쿠바가 아직도 버틸 수 있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바가 되고 싶다고 나서는 나라는 없겠지? 우리보다 의료와 교육이 앞서지만 더운 여름철 선풍기 하나를 얻지 못해 줄을 서야 하는 곳이라면. 세계 제일 강대국에 사는 사람들이 의료보험이 없어 수술을 받기 위해 쿠바로 오지만 그곳에서 사는 것은 원치 않는 곳이라면.  출간된 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속에서 빛바랜 아나키즘을 쓸쓸하게 추억하지 않기를. 내 안의 트럼프, 내 안의 박근혜와 싸우는 것이 힘겨웠듯 앞으로 더한 내 안의 000과 대결해야 하는 지금. 헤인시리즈가 얼마 만큼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을지는 좀 더 여행해 보아야 알 것 같다.



우리에겐 그것밖에 없소. 오직 서로밖에. 여기 당신들은 보석을 보지만 거기서는 눈동자를 봐요. 그리고 그 눈 속에서 장려함을, 인간 영혼의 장려함을 보는 거요. 우리의 남자와 여자들은 자유롭기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자유롭소. 그리고 당시들 소우자들은 소유당하지. 모두들 감옥 속에 있어. 각각이 외롭게, 고립되어, 소유하고 있는 쓰레기더미와 함께. 당신들은 감옥에서 살고, 감옥에서 죽소. 내가 당신들 눈 속에서 볼 수 있는 건 그게 다요. 벽 말이야, 벽! (261)

반려 관계 역시 자발적으로 구성되는 연합이었다. 되어 가는 한에는 되어 가고, 되어 가지 않으면 그만두는 것이다. 그것은 제도가 아니라 기능이었다. 개인의식 외에 다른 구속력은 없었다.
막연한 기간의 약속일지라도 약속이 자발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오도의 사상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변화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한 그녀의 주장은 약속이나 맹세를 무효화시키는 듯 보엿지만, 사실은 그 자유야말로 약속을 의미있게 했다. 약속은 주어진 방향이요 선택의 자가 제한이었다. 아무 방향도 주어지지 않고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썬택하고 변화하는 자유는 쓸모없는 것이 될 것이다. 감옥에 있는 것처럼, 스스로가 만들어 낸 감옥, 어디로 가든 별다를 게 없는 미로 속에 있는 것처럼. 그래서 오도는 약속, 맹세, 성실이라는 개념을 자유의 복잡성에 있어 필수적인 것으로 보게 되었다. (280)

불성실하다고 해서 어떤 법적 도덕적 구속이 가해지지 않는 사회에서 순수하게 자발적으로 성실함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언제든 닥칠 수 있고 몇 년씩 이어질 수도 있는 이별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여 그 기간 동안 성실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일종의 도전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도전받는 것을 좋아하고, 역경 속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법이다. (281)

나의 세계, 나의 지구는 폐허입니다. 인간이라는 종이 망가뜨린 행성이죠. 우리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번식하고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싸워 댔고 죽었어요. 식욕도 폭력도 통제하지 않았죠. 적응하지 않았어요. 우리 자신을 파괴한 겁니다. 하지만 그 전에 세상을 먼저 파괴했죠. (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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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2-27 11: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바나에 한번 가야하는데 ㅎㅎ 동감이에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나뭇잎처럼 2021-12-27 16:05   좋아요 2 | URL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에 가서 신나게 몸도 흔들고요. ㅎㅎ 고맙습니다. ^^

persona 2021-12-27 12: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느끼기엔 원서도 예스러워요. ㅋㅋㅋ 저 올 초에 이거 원서로 읽다가 적응 못해서 아직 못 읽었어요. 완독 축하드립니다!^^

나뭇잎처럼 2021-12-27 16:07   좋아요 1 | URL
하. 그렇군요. 워낙 문장이 좋다는 칭찬이 많아서 .. 넘 기대했나봐요. ㅎㅎ 당대를 꿰뚫는 오늘의 SF의 심장은 어디에 있을까요? 부디 몇 줄 읊어주시면 따르겠나이다... 왠지 스티븐 호킹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그레이스 2021-12-27 13: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본주의적인 시선으로 보면 쿠바는 후진국이죠.
조금 더 뒤에 평가될 부분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책읽기가 바빠서 읽다가 멈췄는데 🍃처럼님 덕분에 기억이 났었요
다시 펼쳐야겠네요.
아무래도 책장파먹기를 해야할듯요^^
그런데 오늘도 배송될 책이 있다는...!

나뭇잎처럼 2021-12-27 16:12   좋아요 2 | URL
아무도 읽으라고 강요한 사람은 없는데 스스로 만든 책 무덤에 파묻혀서는 ㅋㅋㅋ 그쵸? 올해는 정말 조금씩, 천천히, 다시 한 번, 재독의 즐거움에나 빠져보자 했는데... 왜 자꾸 뭐가 오는 걸까요. 멀리서도 오고, 가까이서도 오고, 킨들서도 오고, 오더블에서도 오고... 인류의 미래가 어디에 있을까 궁금합니다. 쿠바가 되었든, 북유럽이 되었든. 부자들만 가는 화성에 인류가 미래가 있는 건 결코 아닐텐데 말입니다. 내 안의 탐욕을 바로보지 않는 한 인류의 미래를 희망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요. 올해도 열심히 파셨듯이, 내년에도 즐겁게 파먹기를 계속하시길요.^^ 여럿이 하면 좀 덜 외로운 거 같기도 하네요. ㅎㅎ

mini74 2021-12-27 13: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나뭇잎처럼님 넘 재미있어요. 동네 슈퍼가듯 아바나에 한 번 가야 하는데. 넘 멋진 첫 문장. 전 르 귄 소설이 어렵더라고요 ㅠㅠ

나뭇잎처럼 2021-12-27 16:20   좋아요 1 | URL
벌써 몇십 년 째 마음에 품고 있으니 동네 슈퍼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것도 맞는 거겠죠? ㅎㅎ 전 어렵다기보다 넘 직설적이어서 약간 놀랬어요. 문학이란 게 은유와 상징과 뭐 그런 좀 복잡하면서도 손에 가물가물하지만 두고두고 떠올려보면 뭔가 좀 다른 것 같고 하는 그런 맛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정공으로 치고 들어오시니까 프로파간다(?) 그런 느낌도 나고, 연설문(?)인가 싶을 때도 있고. 아직 작가의 극히 일부분의 작품을 읽은 상태가 뭐라 단정하긴 그렇지만 지난 수십년 동안 많은 SF 작품들에 양분을 제공하신 건 맞는 거 같아요. 그래서 오히려 익숙하게(좀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거 같고요. 일단 몇 권 더 가보려고요. ㅎㅎ
 
어둠의 왼손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1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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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남자, 혹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은 남은 인생의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어디서 어떻게 누군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갈지. 어슐라 K. 르 귄은 그 전제에 의문을 제기했다. 성은 과연 필요할까? 우리가 성의 결과라고 여겨지는 행동 중에서 사실 우리가 성에 기대한 결과는 얼마나 될까? 만약 성이 없거나 또는 양성을 가진 인간들에 대해 쓴다면? 그런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인류학자 아버지와 동화작가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 명문대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고 역사학자 교수가 된 남편을 만나 평생 세 아이를 두며 SF로 노벨상을 받는다면 제1순위로 꼽히는 작가가 그런 상상을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거라고 여기는 건 지나친 편의주의일 것이다. 그에게 게센인의 이야기가 찾아온 건 그의 말마따나 '그것이 다가올 길을 그가 준비했기' 때문이다. 책의 후반부를 압도하는 겨울 행성에서 빙하는 건너는 일은 그의 오래된 폴더 '겨울'이라는 곳에 오랫동안 쌓여있었다고 한다. 겨울의 혹독함에 대한 자료. 


작가는 서문에서 자신이 정작 하고 싶었던 질문은 (양성을 가진) 그 존재들은 정말로 우리와 그토록 다를까? 우리 성이 정말로 그토록 절실할까? 우리 성이 정말로 그렇게 명확히 정해져있고, 그토록 중요할까? 였다고 했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 '케메르' 상태에 대해서 자세히 밝혀 놓았다. 케메르는 (내가 이해한 직접적인 언어로 표현하자면) '발정기' 상태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포유류에서 나타나는 발정기. 발정기 이외의 시간에 게센인들은 성적 특이성이 발현되지 않는 '인간'으로 산다. 


게센의 사회는 그 일상적 기능에 있어서나 지속성에 있어서 성이 없다. 전 생애의 5분의 4기간 동안 이들이 성적으로 전혀 자극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17-35세의 모든 사람이 '출산에 묶일' 수 있다는 사실이 이곳에서는 다른 세계의 여성들처럼 생리적/육체적으로 완전히 출산에 '묶일' 일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아이들은 어머니나 아버지와 정신적-성적 관계가 없다. 상대의 동의 없는 성교나 강간은 없다. 다른 포유동물과 마찬가지로 성교는 상호 유인과 동의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른바 인간성에 대한 강자와 약자의 이분법, 즉 보호적/피보호적, 지배적/순종적, 주인/노예, 능동적/수동적 따위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게센인들은 타인을 남자나 여자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잠재적으로 양성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완전한 형태로도 갖고 있다.


남자는 자신의 남성다움을 남들이 주목해주길 원하며 여자는 자신의 여성다움이 인지되기를 원한다. 주목과 인지하는 방식이 얼마나 간접적이고 미묘한가는 상관이 없다. 하지만 겨울 행성에서는 그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는 오직 하나의 인격체로만 존중되고 판단된다. 그것은 소름끼치는 경험이다. 
실험을 행한 이들은 아마도 지속적인 성적 능력을 갖지 않은 인간이 지성적이고 창조적인 문화를 일으킬 수 있는가를 확인해보고 싶었을 가능성이 있다. 즉, 그들은 지나친 소모와 광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고대 헤인인들은 다른 포유류와는 달리 인간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지속적인 성적 능력과 조직화된 사회의 공격성이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전쟁을 순전히 남성의 배설 행위, 즉 대규모의 강간 행위로 보고, 그들의 실험에서 강간하는 남성성과 강간당하는 여성성을 영원히 제거하려 한 것일까? 

 

욕망도 부끄러움도 없는 이곳에서는, 제아무리 비정상이라 할지라도 남들로부터 따돌림받는 일은 없었다. 게센의 생활을 지배하는 것은 성이나 다른 인간적인 요소가 아니라 환경, 추운 세계이다. 이곳 사람들은 자신보다 더 잔인한 적을 가지고 있다. 



어슐라가 페미니스트 작가로 추앙받는 이유는 우리가 의식/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남녀성차, 그리고 그 성차에 대한 가치의 차등 부여, 그리고 나아가 보다 억압적인 우위에 놓인 남성성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양성적 인간이라는 개념을 통해 차분히, 새롭게 바라보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로 이루어진 세상. 


카르히데. 이곳에서 현재는 늘 원년이다. 이곳 사람들은 유일무이한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와 미래를 헤어려 나간다. 늘 원년을 사는 겨울 행성 주민들에게 진보보다 현재가 더 중요하다. 


카르히데인이 아이를 때리는 것은 본 적이 없다. 아이들을 대하는 부모의 부드러운 태도가 특히 인상 깊었다. 아주 정중하고, 효과적이며, 아이에 대한 소유욕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성' 본능이라 부르는 것과 다른 점은 아마도 그 무소유의 태도일 것이다. 


카르히데와 오르고레인은 불화한다. 그곳 사람들은 시기하고, 질투하고, 다투고, 반목한다. 하지만 그것이 극단적으로 응축되어 표출되는 '전쟁'이란 단어는 없다. 강자와 약자의 이분법, 그로 인한 착취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생각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전쟁을 남성의 배설 행위, 대규모의 강간 행위로 보아 게센인들에게 그런 유전적 실험을 감행했을 거라고 추측하는 주인공의 의문에 작가는 이미 답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랫동안 회사에서 닉네임을 '우르술라'로 썼다. 마르케스가 <백년 동안의 고독>을 써서 잘난척하는 영미 편집자들에게 퍽큐를 날리며 '소설이란 무엇인가'로 수백년을 머리 싸맨 사람들을 한방에 날려버린, 그 소설 속의 대모 같은 주인공, 그 우르술라에서 따왔다. 많고 많은 직원들 중에서 존, 메리, 마이클은 A, B, C로 구분해서 부를 정도로 차고 넘쳤지만 우르술라는 유일무이했다. 나는 그것을 자부심으로 여겼다. 


하지만 왜 우르술라인지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간혹 외국인 중에 Mermaid? 하고 묻는 이가 더러 있었다. <인어공주>에 나오는 백발마녀의 이름인가 보았다. 디즈니 인어공주는 본 적이 없어 놉, 이라고 답하며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를 운운하면, 아, 아 알겠다는 듯 눈을 흐렸다. 난 모르는 책이고, 알고 싶지도 않고, 그래 너 책 좋아하는구나, 알겠어 너 문학소녀라는 거, 정도로 알 듯한 표정. 난 굳이 묻지 않았는데, 그 책이 왜 영미권 최고의 소설로 꼽히는지, 어떻게 작가가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그 잘난 영미문학 크리틱들을 넉다운 시켰는지 설명해주었다. 더러는 혹 관심을 보이기도 하고, 더러는 '자자, 이제 회의하자'라는 눈길로 내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아무렴, 아이스 브레이킹하기로 이만한 주제가 없지. 아이스 브레이킹은 그쯤에서 끝내는 게 가장 아름답고.


한국인들은 '우.르.술.라' 네 음절, 외국인들은 '어ㄹ.슐.라' 삼 음절로 내 이름을 발음했다. 하지만 숫적으로 한국인이 많았기 때문에 외국인들도 '우르술라님'하고 오음절로 발음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어슐라 K. 르 귄을 몰랐다. 만약 그녀를 알았다면 One more 어슐라 르 귄이 얼마나 SF의 대모인지 침이 마르게 설명을 했을텐데. 안타깝다. 


'SF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친구에게 말한 후 무지를 혹독하게 질책 받은 다음 그 말은 삼갔다. '무협지처럼 스토리가 너무 패턴화되어 있다'는 말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영원의 끝>으로 쏙 들어갔다. 테드 창의 단편들을 읽다가 너무 매혹되어 흥분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번역본은 끝내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테드 창의 단편들을 영문으로 읽다가 눈이 침침해졌다. 그렇게 나의 SF 경력(?)은 노루 꼬리보다도 짧다. 


어슐라의 책에 손을 대기로 마음을 먹은 건 그녀가 번역한 노자의 <도덕경>을 필사하고 부터다.  그녀의 아버지가 평소 즐겨 읽었던 책으로 어느 날 책 한 구절을 끄적이는 걸 보고 뭐하시냐고 묻자 자기 장례식에 쓸 문구라고 대답한 아버지를 따라 그녀도 <도덕경>을 평생 벗으로 삼았고 그녀의 장례식에 쓸 구절도 이미 다 정해놓았다. 바로 그 도덕경에서. <도덕경> 영문본은 차고 넘치는 데 조금씩 미묘한 문구의 차이가 있어서 뭐가 뭔지 조금씩 헷갈릴 때도 많고, 어떤 표현이 더 좋은 표현인지 잘 확신이 안서는 경우도 많다. 한글 번역본이야 어릴 적 읽었지만 그 번역도 그리 명확하진 않다고 읽을 때도 느꼈던 것 같다. 


세상이 좋아져 공책 한 바닥에 오른편에는 영문, 왼편에는 한문을 적고 의미의 공백과 격차를 나름의 두 언어 사이에서 나름의 상상력을 동원해 메꾼다. 하나의 언어에 의지해 상상했을 때보다 좀 더 편안함을 느낀다. 어쩌면 한글, 영어, 한문 세 가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맞겠지. 그런 어슐라가 쓴 SF. 완전 끌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시작한 그녀의 책이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장바구니에는 벌써 그녀의 다음 책이 담겨있고... 나는 주문 버튼을 누르고... 전집 말고 한 권씩 사자고 스스로를 달래고... 그러고 있다.





우리 사이에 이렇게 우정을 확신하게 된 것은 조금 전에 우리 사이의 성적 긴장을 진정시키는 대신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한 덕분인 듯했다. 추방된 우리에게 우정은 절실했으며, 그간의 험난한 여행의 밤과 낮을 견디며 잘 확인된 우정을 이제는 사랑이라 불러도 좋았다. 하지만 사랑은 우리 사이의 차이점에서 생긴 것이지 유사점이나 닮음에서 싹튼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랑은 갈라진 우리를 이어주는 다리, 유일한 다리였다. 


지구에서 낳아 에큐멘이란 연합체의 특사로 카르히데에 파견된 겐리 아이. 그는 그곳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믿어주는 에스트라벤을 만나 카르히데가 에큐멘과 협력하도록 애쓴다. 결국 천신만고 끝에 에스트라벤과 함께 차가운 겨울 행성 카르히데, 그 중에서도 빙원을 함께 건너 목적을 이루고자 애쓴다. 두 사람이 나눈 건 우정이었을까, 사랑이었을까. 빈약한 지구인의 상상력으로는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된 탄탄한 다리를 이를 단어가 없다. 우정 또는 사랑. 우정은 동성, 사랑은 이성? 아마도 카르히데 사람들이 부르는 '사랑'과 지금 이 시대 지구인이 부르는 '사랑'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지 않을까 예측할 뿐이다.


사실 이 책을 읽기 훨씬 전에 구상해 놓은 걸 한 번 써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에 대한 전혀 다른 관념을 갖고 살아가는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의 사람들에 대해서. 일단 어슐라 전작 읽기를 마친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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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2-06 19: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르 귄 전작주의 시작!
응원합니다. 따라갈게요 페이퍼라도.^^
전집 말고 단행본으로 한 권 한 권 사는 거
재미나지요. 그게 더 좋더라구요 때때로 자주.

나뭇잎처럼 2021-12-07 09:37   좋아요 4 | URL
전집을 사지 않다보니 책장이 좀 들쭉날쭉하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 저만의 일관성 같은 게 느껴지죠. 전작 표지를 예쁘게 뽑았더라구요. 구매욕을 자극해요. 이래저래 원하는 대로 사들이다가 결국 퍼즐 맞추듯이 다 꿰어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ㅎㅎ

러블리땡 2021-12-06 20:3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 궁금해졌어요 장바구니 담아갑니다ㅎㅎ

나뭇잎처럼 2021-12-07 09:39   좋아요 3 | URL
저도 많이 궁금해져서 급 불을 당기는 중입니다. ‘일종의 사고실험‘이라고 했던 말이 잘 들어맞는 거 같아요. 두 번째 책은 <빼앗긴 자들>. 요건 또 어떤 실험일지!

mini74 2021-12-06 23: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방탄이 어슐러 단편을 언급하면서 아이들이 관심을 많이 가지더라도요. 전작읽기! 응원합니다 ~

나뭇잎처럼 2021-12-07 09:36   좋아요 3 | URL
아 맞아요. 저도 뉴욕타임스 기사 읽다가 https://www.nytimes.com/2021/11/04/opinion/graeber-wengrow-dawn-of-everything-history.html <The Dawn of Everything: A New History of Humanity> 저자가 어슐러의 단편 <The Ones Who Walk Away From Omelas>란 단편 인용하는 거 보고 아마존에서 찾아보니 리뷰에 온통 BTS 이야기더라구요. BTS 노래는 1도 모르는데 그랬었었던거였더라구요. ㅎㅎㅎ 영면에 드신 어슐러 여사가 반가워하시려나. ㅎㅎ 따끈따끈한 다음 책이 도착했네요. 고고~~

서니데이 2022-01-07 20: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뭇잎처럼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과 기분 좋은 금요일 되세요.^^
(사진 속 노트의 손글씨가 예뻐요. 부럽습니다.^^)

나뭇잎처럼 2022-01-08 10:40   좋아요 2 | URL
아. 좋은 소식 가장 먼저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풍성한 주말이 될 거 같아요.^^. 자판을 치고 살아도 한 자 한 자 종이에 적는 맛이 다른 거 같아요. 뭔가 진짜로 읽고 어딘가에 새기는 기분. ㅎㅎ 서니데이님도 좋은 주말 되세요^^

thkang1001 2022-01-07 21: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뭇잎처럼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나뭇잎처럼 2022-01-08 10:4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쓴 지 좀 된 글인데 이렇게 소환되니 반갑네요. Thkang1001님도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주말 되세요. 전 우리 강아지랑 제주도 가는 중이에요. 새벽에 목포에 내려와 거기서 배타고 가요. 소풍가는 아이처럼 설레네요. 고맙습니다^^

thkang1001 2022-01-08 1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뭇잎처럼님! 감사합니다!
 
싯다르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3
헤르만 헤세 지음, 권혁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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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월요일

일주일에 한 번 사우나가 쉬는 날이다.

새로 산 목욕바구니 달랑거리며 갔다가 헛걸음치고 와서는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담갔다.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병이 있어

욕조 안에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두께의 책을 찾다가

여러 번 이사에도 방출당하지 않고 남아있던 <싯다르타>를 발견하곤 

이거다 싶어 반갑게 들고 들어갔다.


헤세 책은 남은 게 하나도 없는 줄 알았는데.


고등학교 때 문예반 모집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적이 있다.

이런 저런 걸 묻는 면접에서 <데미안>을 읽었냐는 물음에 

당당하게 읽었다고 (중학교 1학년 때) 대답했고,

몇 번 읽었냐는 물음에 (네?) 세 번 이상 읽지 않은 게 결격 사유였다.


아. 그런 책은 세 번 이상 읽어야 문예반에 들어가는구나.


흥,칫,뽕


뭐 그리 대단한 책도 아닌데.

중학교 때나 읽지 대학교 와서 헤세 읽는 사람은 못 봤던 것 같고.

더구나 성인이 되어서 헤세를 읽는 건 별로 상상을 하지 못했다.


<싯다르타>는 어느 날 우연히 정말 충동적으로 구매한 후에,

첫 장 한 장 들춰보지 않고 몇 년을 책장에서 묵었던 책이다.

늘 새로운 책들이 쏟아졌고,

읽는 속도는 사는 속도를 결코 이긴 적이 없었다.

그렇게 사놓고 손도 대지 않고 주기적 방출에 실려나간 책이 어디 한 둘인가.


하지만 욕조에서 손에 쥐기 좋다는 이유로

어찌어찌하여 살아남은 <싯다르타>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출근하지 않게 된 이후로

마음의 공허감이 메워지지 않았던 탓일까.

삶의 쳇바퀴 아래서 미뤄두고 나중을 기약하며 외면했던 문제들이

이제사 마음껏 물을 만난 고기처럼 퍼덕거리는 까닭일까.

자꾸만 예전에 잘 보지 않던 책들이 손에 잡힌다.


음식이 그러하듯 내 몸이 원하는 음식이 보약이듯

내가 원할 때 찾게 되는 책이 결국은 인생책이 되기 마련이다.

읽어야 해서 읽는 책만큼 재미없는 책이 있던가.

봐야 해서 봐야 하는 영화만큼 고역인 게 있던가.


작년인가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읽고 왈칵 눈물이 났다.

그 책이 나온 이십여 년 전 그 책을 읽었더라면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어느 순간 우연을 가장한 운명처럼 내게 오는 책이 있다.

이번엔 <싯다르타>가 그랬던 것 같다.


그는 고타마에게 부처, 그분의 보화와 신비는 가르침이 아니라 그가 깨달음의 순간에 체험한 형언할 수 없고 가르칠 수 없는 바로 그것이라고 말했다 - 바로 그것을 체험하고자 그는 길을 떠났으며, 막 그것을 체험하기 시작한 터였다. 이제 그는 자기 자신을 체험해야 했다. 사실 그는 오래전부터 자기 자신이 아트만이며, 브라만과 똑같이 영원한 본질에서 생겨났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유의 그물로 자신을 붙잡으려 했기 때문에 진정한 자신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육신도 분명 자기 자신이 아니었고 감각의 유희도 자기 자신이 아니었으며, 마찬가지로 사색, 오성, 습득한 지혜, 결론을 도출하고 이미 생각한 것에서 다른 생각을 자아내는 학습된 능력 역시 자기 자신이 아니었다. 그렇다. 이 사색의 세계 또한 여전히 차안의 세계에 있었고, 감각이라는 우연적인 자아를 죽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사유와 학습이라는 우연적인 자아를 살찌운다 한들 얻게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감각과 사유, 이 두 가지는 모두 좋은 것이었으며 그 배후에는 궁극적인 의미가 숨어 있었다. 그러므로 두 가지 모두 귀기울여 들어볼 가치가 있고, 함께 작용해야 했으며, 그 어느 것도 경시되어서는 안 되고 과대평가되어서도 안 되며, 두 가지 모두에게서 가장 내밀한 진리의 비밀스러운 소리를 들어야 했다. 



깨달음은 가르칠 수 없다는 말을 이렇게 길게 하고 있다.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불성에 닿는 일은 자신이라는 재료, 인생이라는 시간, 경험이라는 통로를 통해 자각, 스스로 깨우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걸. 


새로 시작하면서 스스로 다짐한 몇 가지가 있다.


- 남들이 일해라, 절해라 하는 걸 귀담아 듣지 않기

- 몸의 감각을 우선할 것. 책으로 먼저 배우지 말 것

- 안다고 느껴지는 느낌을 경계할 것. 아는 것 같은 착각에 쉽게 굴복하지 말 것.

- 다.시.는. (안다고 떠드는 이들한테) 말리지 말 것.

- 무턱대고 따라하지 말 것.

- 내면의 불안을 응시할 것.

- 막막해지는 순간을 기꺼이 껴안을 것.

- 기쁨으로 넘실거리는 일에 몰두할 것.

- 해야하는 일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할 것. 

- 적당히 읽을 것.


인생은 두 번 살게 되는 것 같다.

한 번은 배운대로. 한 번은 살고 싶은 대로.


싯다르타도 사문이 되기 위해 집을 나서지만 늙은 스승 밑에서 배우다가

결국 자신의 길을 떠나고, 고타마를 만나지만 그의 밑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온전히 던져 배우는 길을 택한다.


욕망과 탐욕과 환희를 모두 경험한 후에야 

도반이자 스승이자 벗인 뱃사공을 만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맞는다.

그리고 강물을 통해 배우고 경험하고 깨닫는다.


싯다르트가 말했다. "어쩌면 당신은 깨달음을 구하는 데 지나치게 매달리는 것은 아닐까요? 구도에 너무 전념한 나머지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어째서 그렇다는 건가요?" 고빈다가 물었다.

"구도하는 사람이 흔히 겪는 일입니다. 그런 사람의 눈은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것만 보게 되고, 그래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며 아무것도 마음속에 들이지 못하는 법이죠. 늘 자신이 축구하는 것만 생각하고, 하나의 목표를 정해놓고는 그 목표에만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추구한다는 것은 하나의 목표를 갖는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찾아낸다는 것은 자유로운 상태, 열린 상태, 어떤 목표도 갖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깨달음도 달성해야 하는 목표처럼 습관처럼 달려들면 요원하단 얘기다. 그저 뱃사공처럼 강물을 오래 바라보고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그러듯이 자신의 온 감각에 목적성을 두지 않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 



운동삼아 했던 일들을 멈추고 오늘부터 크리야요가를 시작했다.

<요가난다>를 읽고 크리야요가가 대체 뭔가 알아봤는데 우리나라에는 정식으로 크리아요가를 가르치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어찌어찌하여 알게 된 분으로부터 크리야요가를 위한 호흡법을 배웠고, 크리야요가 명상법 같은 걸 알게 되었다.


내용은 간단하다.

I am not the mind. I am not even the mind.

들숨과 날숨에 속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평상시에도 그렇게 되뇌이면 좋다고 하는 데 

무거운 머리가 몇분 동안의 명상만으로 에너지를 회복하는 기분이 든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듯

그렇게 해서라도 잠시나마 자아를 소멸시키는 원리인지.


요가 관련 책을 탐독하는 것보다

짧게 나마 내 몸과 내 호흡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 훨씬 좋다.

배우고 익히는 것은 좋으나 배움이라는 습관에 빠져

스스로 생각하고 경험하는 감각을 놓칠 때

쉽게 관성의 쳇바퀴에서 자유의 기쁨을 잃고 만다.


헤세는 이 책을 굉장히 고통스럽게 썼다고 전한다.

스스로 나락에 빠졌다가 다시 회복하는 과정을 '체험'해야 했던 것일까.

평생 헤세는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마음의 평화를 얻었을까. 

어쩌면 <싯다르타>는 그가 이루지 못한 마음의 평화를 역설적으로 상징하는 작품은 아닐까.

<싯다르타>는 과연 헤세의 작품일까.

오랫동안 윤회를 거듭하던 어느 중생이 헤세를 통해 간증한 이야기는 아닐까.


아. 다시 또 머리가 무거워진다.

다시 또 반신욕을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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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1-15 20: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 번은 배운대로. 한 번은 살고 샆은 대로. 나뭇잎처럼님의 마음가짐이 느껴집니다.저도 그렇게 살고 싶네요

나뭇잎처럼 2021-11-16 09:12   좋아요 1 | URL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싶은 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질 때가 있어요. 일단은 배운 걸 다 토해내야 할 거 같아요. ˝Unlearning˝ 이 요즘 제 화두입니다. 이래라, 저래라 하는 말들에 너무 휘둘리며 살아온 거 같아요. ˝OOO 하는 O가지 방법˝ 같은 리스티클이 왜 클릭률이 높을까 생각해보면 다들 쉽게 가려고... 빨리 해답을 얻고 싶어서... 불안한 심리를 이용한 얄팍한 접근이 아닌가 생각 들어요. 천천히 느긋하게. 책도 천천히 느긋하게 읽고, 천천히 느긋하게 바라보는 것. 싯다르타가 강물을 통해서 배운 게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인생을 그렇게 서두르며 살 필요가 없는데 왜 그렇게 일분일초 아까워하며 서둘렀는지. 몸에 묵은 나쁜 습관들 해독하는 게 살고 싶은 대로 살기 위한 첫 번째 관문 같다는 생각이 드는 아침입니다. ㅎㅎ

프레이야 2021-11-15 21: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는 것 같은 착각의 순간을 알아채고 경계하라는 내용의 말이 와닿네요. 저도 경계해야 된다고 평소 느끼는 말이에요. 님 리뷰 마지막 부분에서 어떤 작품은 작가가 쓴 게 아니라 자연적으로 쓰인 거 같다고 말한 브룬디쉬가 생각납니다. 정말 신내림하여 쓴 듯 말이죠.
앗 브룬디쉬는 누구냐고요? 영화 북샵에 나온
진지한 남자입니다 ^^ 그리고 기쁨으로 넘실거리는 일에 몰두할 것,도 공감해요.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다음에 크리야요가 하시는 이야기 좀 더 페이퍼 써 주세요 ^^

나뭇잎처럼 2021-11-16 09:19   좋아요 2 | URL
읽는 걸 아는 걸로 착각하던 때가 있었어요. 읽으면 왠지 아는 것 같잖아요. 선생님이 칠판에서 수학문제 푸는 거 보고 있으면 나도 풀 수 있을 것 같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읽는 거랑 아는 건 별로 상관 없더라고요. 오히려 읽어서 아는 척하게 되는 게 심각한 문제였던 거죠. 안다고 착각하고. 아예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과 아는 것 같은데, 라고 느끼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죠. 겸손과 오만 사이 같은 크나큰 차이. 알고 싶은 욕망과 자신을 돌아보는 것 사이의 발란스를 찾지 못하면 어느 순간 배가 기우뚱하듯이 위태로워지는 것 같아요..
영화 북샵은 못봤는데 멋진 남자가 나오는 모양입니다. ㅎㅎ 어느 순간 쓰지 않으면 모두 사라지잖아요. 우주가 나를 통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제가 그 길을 제대로 열여주지 않으면 모두 먼지처럼 사라지죠. <빅 매직>에서 엘리자베스 길버트가 그걸 아주 멋지게 표현했더군요. 정말 기적 같은 일화를 소개하면서. 크리야요가 연속 100일 하기 2일차입니다. 느낌 좀 올라오면 유용한 얘기 들려드릴게요.^^

새파랑 2021-11-15 21: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앗 저는 헤세를 성인이 되어서 읽었는데 😅 싯타르타 읽고 와 감탄했던 기억이 있는데 한번 더 읽어봐야 될거 같아요 ㅋ 저도 깨달음을 좀 얻고 싶네요 ^^
뭐든지 지나치게 매달리는건 안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뭇잎처럼 2021-11-16 09:27   좋아요 3 | URL
일단 시작하면 뭐든 중독되는 성향이라 뭐든 지나치게 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게 화근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얻은 것도 있지만 그래서 잃은 것도 많거든요. 힘을 빼고 유유히 흘러가는 걸 배워야 할 거 같아요. (태극권?)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뭘 알고 헤세를 읽었을까 싶어요. 그때 읽었던 <부활>이 정말 부활일까. 고전은 성인이 되어야 읽을 수 있는 게 아닐까. 그거 쓰느라 한 평생 걸렸을 텐데 우리도 얼마큼은 살아야 읽어낼 수 있는 게 아닐까. 예전에 읽었던, 혹은 읽다 말았던 고전 이제 다시 시작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ㅎㅎ

다락방 2021-12-07 10: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크리야 요가는 나뭇입처럼 님의 글에서 처음 접하네요. 저도 프레이야 님 말씀처럼, 크리야 요가 이야기 좀 더 자주 써주시길 바랍니다.
:)

나뭇잎처럼 2021-12-09 11:33   좋아요 2 | URL
헤헤. 제가 뭐 그렇게 알려드릴 형편은 못되지만 일단 매일매일 해보고 말씀드릴게요. 매일하는 게 쉽지 않네요. 하면 좋은 걸 아는데 매일 하는 건 아직 인이 박히지 않은 일인입니다. 뭐가 되었든 잠시 숨을 고르고 가만히 침잠하는 거. 요즘 같은 세상에서 점점 희귀해지는 기술이죠. 가만히 가만히. 조용히 조용히. 점점 더 아래로. 아래로. 늘숨과 날숨을 바라보며...

그레이스 2021-12-09 16: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나뭇잎처럼 2021-12-10 09:29   좋아요 2 | URL
우앙. 너무 조으네요. ㅎㅎ 적립금도 주시고. 알차게 써야겠습니다. 축하해주셔서 감사해요.^

mini74 2021-12-09 16: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뭇잎처럼님 저도 축하드려요 *^^*

나뭇잎처럼 2021-12-10 09:30   좋아요 2 | URL
넘. 감사해요. 미니님처럼 부지런하지도 못했는데 앞으로 더 분주해지라는 뜻으로 알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ㅋㅋ

쎄인트saint 2021-12-09 17: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선정 축하드립니다~!!

나뭇잎처럼 2021-12-10 09:31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달인분의 축하를 받으니 더 황송하네요. ㅎㅎ

thkang1001 2021-12-09 18: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뭇잎처럼님! 이달의 리뷰에 선정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나뭇잎처럼 2021-12-10 09:31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살다보니 또 이런 날도 있네요 ㅋㅋ

서니데이 2021-12-09 21: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나뭇잎처럼 2021-12-10 09:34   좋아요 3 | URL
하하. 책을 사랑하시는 분들의 축하를 들으니 더욱 기쁘네요. 점점 멸종하는 세계에서 살아남은 소수민족인으로서 기쁨으로 감사를 받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새파랑 2021-12-09 21: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나뭇잎처럼님 축하드립니다~!! 이 리뷰 재미있게 읽었어요 ^^

나뭇잎처럼 2021-12-10 09:35   좋아요 3 | URL
새파랑님이 추천해주셔서 선정되었나 보네요. ㅎㅎ 새파랑님 전작읽기 잘 되고 계시죠? 기쁨으로 책의 바다를 멋지게 항해하시기 바랄게요. 고맙습니다. ^^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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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처음 어떤 어리광도 없이 견딜 수 없는 것을 홀로 견뎌야 하는 어린애처럼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무엇인가를 견디고 있었다.”  <층>, 권여선


게으른 변명이지만 권여선이라는 작가를 이번에 처음 알았다. 좋은 인연을 쉬이 만나기가 어려워 한국 작가 찾는 수고를 들이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녀와의 우연한 만남은 ‘견뎌낸다는 것’ 혹은 ‘살아낸다는 것’에 대한 기억을 한달음에 불러들였다. 흔들리는 버스 차창에 부딪히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일어나지 못했던 기억, 몇년째 말없이 누워있는 젊은 아내에게 다정하게 입맞추며 병원에서 살던 한 남자의 얼굴, 보도블록 사이를 뚫고 가로등이 나무인 줄 알고 그 아래 옹기종기 피어나던 푸른 이파리들 같은 사소한 것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오랫동안 외면하고자 했던 슬픈 기억이 어느 날 느닷없이 말간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나고 만 것이다. 


나는 도시노동자다. 누구나 알 만한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대출금 갚느라 누군가의 욕망에 복무하는 삶을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노예 같은 일상을 부정하고자 거짓 행복을 돈주고 사는 소비를 애써 줄이지도 않는다. 가난으로 되돌아 가고 싶지 않아 밥그릇을 내동댕이치는 호기는 결코 부리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가난한 삶이 주는 영혼의 자유가 그리워 경계에서 초조하게 담배를 피워무는 신세다. 그런데 뭘까. 계속 저 너머를 보게 만드는 것은. <이모>의 경호(57세)가 죽기 전 했던 “그런데 그게 뭘까... 나를 살게 한... 그 고약한 게...”의 읊조림이 귓가에 맴돈다.


<이모>는 알류커플(알코올 중독자와 류머티즘 환자 커플)의 이야기를 다룬 <봄밤> 만큼이나 가슴을 저미게 하는 이야기다. 맏이로 태어난 죄로 평생 막내동생의 노름빚을 갚다가 사랑도, 일도, 인생도 모두 잃고 췌장암에 걸려 죽은 윤경호 씨. 지긋지긋한 가족의 굴레와 그에 대한 원망, 자조, 분노는 선연한 핏빛이 아니라 차갑고 건조한 회색빛 아래 묻혀있다. 삶이 그녀에게 가한 모든 악행에 대해 그녀는 ‘복수’가 아니라 ‘지지 않는 법’을 택했다. 그녀조차 새파란 나이에는 자신을 그저 좋아한다는 이유로 남학생의 손바닥에 담배불을 눌러끄지 않았던가. 자신의 온몸에 담배불을 비벼대는 운명이란 놈 앞에서 그녀는 ‘완벽한 자유’ - 저당잡히지 않고, 탓하지 않으며, 오롯이 고립을 견뎌내는 - 로 회심의 바디컷을 날리고 링 위에서 퇴장한다. 신형철의 말마따나 그녀는 삶에서 ‘승리’하진 못했지만 결코 지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독배나 예수의 처형처럼 졌지만 실패가 아닌, 초연함만이 가져갈 수 있는 쟁취다. 하지만 여전히 아프다. 엄마가 누워있던 7년 동안 그나마 있던 집이 날아가고, 밑 빠진 독에 물붓기처럼 버는 돈이 모두 흔적없이 빨려들어갈 적에 나는 그나마 엄마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삶의 악행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던 아버지는 분노를 배설할 출구를 찾아야 했고, 그 감정의 배설물을 매일 뒤집어 쓰는 건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난 ‘지지 않는 법’ 대신 ‘탈출’을 택했고, 다른 공간에서 삶을 지속하면서 간헐적인 배설만 견디면 되는 쪽을 선택했다.  


“어쩌면 기억이란 매번 말과 시간을 통과할 때마다 살금살금 움직이고 자리를 바꾸도록 구성되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했던 <이모>의 ‘나’는 글을 쓰는(스스로는 글을 공부한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이제 막 등단한 새내기 소설가인 <역광>의 ‘그녀’도 글을 쓰는 사람이다. <카메라>에서 우연이라는 가혹한 장난에 무력한 인물들이 스러지고, 당할 적에 ‘글’을 쓴다는 사람들은 모종의 반란을 준비한다. 신의 영역인 ‘우연’ 앞에는 해석하려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필연’이 존재하지만 그 사이에는 반드시 ‘오해’란 녀석이 자생한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나의 총합이지만 ‘내가 기억하는 나’가 타인이 기억하는 나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난 글을 쓰는 사람이란 자신의 오감에 ‘닥쳐오는’ 것들을 두고, 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여긴다. 


중요한 건 자신의 눈 앞에 닥쳐오는 것들이 결국은 ‘오해’라는 것을 아느냐, 모르느냐에서 갈림길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일단 <이모>의 ‘나’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최대한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 이모의 삶을 전달한다. <역광>의 ‘그녀’는 한층 더 자신에게 몰입한 나르시스트이다. 그녀는 사람들의 “어법과 목소리, 걸음걸이, 인사를 하는 제스처와 식사를 하는 속도에 이르기까지 낱낱의 특징을 관찰하고 탐색”하며, 그들이 내비친 “인색한 단서를 통해 그들이 그녀에게 신인지 악마인지 알아내려” 하고, “자신이 상상한 내용의 오류와 적중률을 계산하면 어떤 식으로든 인간학의 지식이 수립되리라고 믿는” 확신범이다. 자신만이 누군가의 결핍을 이해하고 그 사람도 당연히 내 결핍을 이해할 수 있으리란 확신 또는 헛된 희망에 사로잡힌 아픈 사람.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자신의 해석이 ‘오해’일 수 있다는 걸 아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링 위에서 경기를 리드할지, 끌려갈지 나누는 분수령이 되는 것처럼, 자신의 ‘확신’이 ‘병적인 것’이냐, 아니냐를 아는 것이 성숙을 나누는 기준점이 된다. 그렇다고 성숙이 지상과제냐, 그런 건 또 아니다. 우린 모두 흠결 많은 존재일 뿐이고, 자신의 흠결도, 타인의 흠결도 넉넉히 끌어안는 것이 흠결이 없는 것보다 백배 낫다. 다만 확신이 어긋나는 순간, 또는 확신이 미끄러져 내려오는 순간, 매달릴 것이냐, 선선히 보내줄 것이냐는 선택이 늘 우리 앞에 놓여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과거라는 건 말입니다. 무서운 타자이고 이방인입니다. 과거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도 수정이 안 되는 끔직한 오탈자, 씻을 수 없는 얼룩, 아무리 발버둥쳐도 제거할 수 없는 요지부동의 이물질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기억이 그렇게 엄청난 융통성을 발휘하도록 진화했는지 모릅니다.” <역광>, 권여선


권여선, 그녀는 오해하는 자들을 나무라지 않는다. 우리는 삶이라는 놀이터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오해하고 어긋나고 술래잡히고 술래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징징대지 않는 것. 견디는 것의 숭고함만큼은 전편을 통해 선명하게 보여준다. 비록 <역광>의 새내기 소설가의 무력한 다짐을 빌리긴 하지만 “누군가에게 질투나 원한을 품을 수 있고 그에게 닥친 불행에 쾌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것을 그토록 천하게 표현하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고, 예술가로서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도 한다. 어쩌면 예민한 자들이 지고가야 할 숙명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애이불비(哀而不悲). 그녀가 신문과 나눈 인터뷰 글을 읽고 적잖히 위안이 됐다. 내가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되리란 기대를 품고 글을 쓰는 게 전혀 틀린 선택은 아니라는 위안. 


“만약 제 인생에 술과 소설이 없었다면 제 결벽주의적인 성향이나 호불호가 분명한 성격 등에 비춰볼 때 매우 까다롭고 편협한 인간이 됐을 확률이 높아요. 술을 마시면 제가 하는 짓을 모르니 어쩔 수 없이 겸손해지고 상대방에 대한 이해나 배려의 폭도 넓어진 거죠. 또 제가 이른바 점점 ‘착한’ 소설을 쓰게 된 것도 나이가 든 이유도 있지만 아마 글을 써오면서 순화된 면도 분명히 있을 거예요. 언어 자체가 주는 교정의 힘이 분명히 있거든요. 아마 글을 쓰지 않았으면 저는 더 괴팍한 사람이 됐을 거예요.”  <경향신문> 


분명, 결핍을 가진 사람 눈에는 결핍이 더 잘 보인다. <봄밤>의 가슴 시린 알류커플 수환과 영경처럼. “그가 조용히 등을 내밀어 그녀를 업었을 때 그녀는 취한 와중에도 자신에게 돌아올 행운의 몫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의아해했다.” 서로의 결핍을 확인하는 순간 서로의 곁을 내어주는 일은 그토록 자연스럽다. 비록 그 확인이 모종의 오해 또는 착각이라 할지라도. <역광>의 ‘그녀’가 자신의 결핍으로 ‘위현’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면, <봄밤>의 알류커플은 자신들의 결핍을 하나도 남김없이 털어내주는 것으로 사랑을 완성한다. 그들의 사랑이 절절하게 다가오는 것은 결핍조차도 서로에게 내어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 때문이다. “요양원 사람들은 수환이 죽었을 때 자신들이 연락 두절인 영경에서 품었던 단단한 적의가 푹 끓인 무처럼 물러져 깊은 동정과 연민으로 바뀐 것을 느꼈다. 영경의 온전치 못한 정신이 수환을 보낼 때까지 죽을 힘을 다해 견뎠다는 것을, 그리고 수환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죽어버렸다는 것을, 늙은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도대체 그 ‘없음’을 사랑하게 되는 인간 감정의 연원은 어디일까. 자신의 결핍을 최대한 인정받고자 하는 이기적 욕구인가, 아니면 이 또한 이웃을 사랑하라는 신이 주신 고귀한 능력인가. 관계라는 교환시스템에서 대가를 바란 ‘내어줌’은 이기적 욕구라 불러도 억울하지 않을 것이다. 기꺼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 그제서야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종종 우스갯소리로 ‘한이 많아서’라고 스스로 놀리는 나는 내 안의 결핍으로 인해 누군가의 결핍을 읽어내는 게 빠른 편이다(물론 나의 착각에). 참으로 불가해한 사실은 그 결핍이 크면 클수록 광속으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러한 광증은 사소한 단서에서 시작한 오해와 착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알류커플보다는 <역광>의 ‘그녀’에 더 가까운 편인데, 그래서 ‘위현’이 저런 말을 내뱉었을 때(결국은 ‘그녀’의 내부에서 들려온 소리) 그만 떨리고 말았다.


““강도처럼 내게서 차분한 체념과 적요를 빼앗으려는 당신은 누굽니까? 은은한 알코올 냄새를 풍기면서 내 곁을 맴돌고 내 뒤를 따르는, 새파랗게 젊은 주정뱅이 아가씨는 대체 누굽니까? 신도 없는데 이런 나쁜 친절은 어디서 온 겁니까?” 그리고 그는 무엇을 기다리는 듯 아니면 뭔가를 음미하는 듯 잠시 그녀의 냄새를 맡았다.” <역광>, 권여선


나는 여전히 내 안의 결핍을 두고 괜찮다, 괜찮다, 쓰다듬어 줄 손길이 그리운 거다. 신기한 듯 작은 손을 어루만지며, 그냥 그렇게 생겨서 참 이쁘다고 했던 엄마가 눈물나게 보고 싶은 거다. 권여선, 나는 오늘 그녀에게서 나의 고통이, 나의 슬픔이, 나의 주저함이, 나의 초조함이, 나의 흠결이, 다 괜찮다는 다독임을 받았다. 내가 글을 쓰고 싶은 건 이런 다독임이 너무나 고마운 줄 알기 때문이고, 누군가에게 그런 다독임을 줄 수 있길 바라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등을 보이며 거절할 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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