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앤더슨 영화 대사는 좀 빠른 편이다. 리스닝이 된다고 조금만 자막을 소홀히 보면 상관관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생긴다. 섬세하게 직조해놓은 구조를 최대한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하려다 보니 빚어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풀리지 않다가 나오면서 이해가 되는 대목도 있고, 다시 봐도 결국 왜 그랬지?에 대해 뚜렷한 답변을 어디서도 구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래서 이번에도 다시 봤다. <프렌치 디스패치>. 첫 번째 봤을 때는 자막 올라가면서 코끝이 찡했는데, 두 번째 봤을 때는 왈칵 울음이 터져 옷소매로 계속 눈두덩이를 훔쳐야 했다. 바로 뒤에서 젊은 연인(영화 속 티모시 샬라메와 함께 나왔던 커플 같은) 중 여자가 “뭐야, 이게. 뭐가 눈물이 난다는 거야. 나 참.”이라고 성질을 내자 “영화를 보는 관점은 다 다를 수 있으니까.” 남자가 여자를 달랬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옷소매로 눈물을 찍어냈는데, 결국 자막이 다 올라가고 난 다음에도 훌쩍거리는 나를 자리에서 쫓아낸 것은 “영화 끝났습니다. 나가주세요.”라고 말하는 영화관 직원의 퉁명스런 외침이었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라는 유쾌한 영화를 보고 마지막 장면에서 정말 느닷없이 눈물이 또로록 흘렀다. 옆에서 같이 보던 남편을 보자 왠만해선 별로 반응도 없는 사람이 같이 또로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폐간하는 잡지의 마지막 사진을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니. 그 사진이라니. 아무 것도 아닌 그 장면에 울 수 있는 사람은 우리 둘일 거라고 위안을 삼았다. 이제 그 책은 다시 볼 수 없으니. 아마 앤더슨의 영화는 계속 볼 수 있을지 몰라도 앤더슨이 만든 그 책은 다시 볼 수 없을 테니. 어쩌면 그 책을 보며 마음을 졸이고, 마음을 부풀리고, 조용히 떨고, 조용히 사무치는 사람들도 이젠 다시 볼 수 없을테니. 사라지는 모든 것을 위한 조사라고나 할까. 나는 그렇게 눈물로 사라지는 것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프렌치 디스패치>를 봐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시사인> 기사였고, <물음을 위한 물음>이란 책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매 결정한 것도 <시사인> 기사였다. <물음을 위한 물음>은 갈무리에서 나왔다. <녹색평론>은 1년 휴간을 선언했다. 나는 <시사인>과 <뉴욕타임스>를 정기구독한다. 갈무리는 응원하지만 모든 책을 사진 않고, <녹색평론>은 종종 도서관에서 본다. <파리리뷰>에 열광하고, <뉴요커> writer’s voice에 설레고, <BBC> 북클럽을 고대하며 한 달에 한 번 업데이트를 기다린다. 넷플릭스와 유튜브, 그리고 왓차까지 충실하게 서브스크립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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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것들에는 이유가 있다.
그래도 <프렌치 디스패치> 스크린 플레이 책을 주문했다. 아마존에서 직접 받을 수 있지만 그냥 알라딘으로 주문했다. 내 책장에는 정기적 방출에도 꿋꿋이 살아있는 <개들의 섬> 영문본 스크린 플레이 책과 번역본이 모두 꽂혀있다. 어디서 <프렌치 디스패치>를 번역해 낼진 모르겠지만 한 줄 한 줄 형광펜으로 밑줄 그으며 읽을 예정이다. <개들의 섬>은 다시 읽어도 참 새롭다. <프렌치 디스패치>도 꼼꼼하게 다시 읽어야지. 보고, 또 보고, 읽고 또 읽고. 모든 대사가 내 몸에 꼭꼭 박히도록. 웨스 앤더슨이 <뉴요커>를 탐독하며 그랬던 것처럼.
Try to make it seem that you wrote it that way on purpose.
<프렌치 디스패치> 편집장이 작가들에게 주문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