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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3
헤르만 헤세 지음, 권혁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평점 :
오늘은 월요일
일주일에 한 번 사우나가 쉬는 날이다.
새로 산 목욕바구니 달랑거리며 갔다가 헛걸음치고 와서는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담갔다.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병이 있어
욕조 안에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두께의 책을 찾다가
여러 번 이사에도 방출당하지 않고 남아있던 <싯다르타>를 발견하곤
이거다 싶어 반갑게 들고 들어갔다.
헤세 책은 남은 게 하나도 없는 줄 알았는데.
고등학교 때 문예반 모집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적이 있다.
이런 저런 걸 묻는 면접에서 <데미안>을 읽었냐는 물음에
당당하게 읽었다고 (중학교 1학년 때) 대답했고,
몇 번 읽었냐는 물음에 (네?) 세 번 이상 읽지 않은 게 결격 사유였다.
아. 그런 책은 세 번 이상 읽어야 문예반에 들어가는구나.
흥,칫,뽕
뭐 그리 대단한 책도 아닌데.
중학교 때나 읽지 대학교 와서 헤세 읽는 사람은 못 봤던 것 같고.
더구나 성인이 되어서 헤세를 읽는 건 별로 상상을 하지 못했다.
<싯다르타>는 어느 날 우연히 정말 충동적으로 구매한 후에,
첫 장 한 장 들춰보지 않고 몇 년을 책장에서 묵었던 책이다.
늘 새로운 책들이 쏟아졌고,
읽는 속도는 사는 속도를 결코 이긴 적이 없었다.
그렇게 사놓고 손도 대지 않고 주기적 방출에 실려나간 책이 어디 한 둘인가.
하지만 욕조에서 손에 쥐기 좋다는 이유로
어찌어찌하여 살아남은 <싯다르타>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출근하지 않게 된 이후로
마음의 공허감이 메워지지 않았던 탓일까.
삶의 쳇바퀴 아래서 미뤄두고 나중을 기약하며 외면했던 문제들이
이제사 마음껏 물을 만난 고기처럼 퍼덕거리는 까닭일까.
자꾸만 예전에 잘 보지 않던 책들이 손에 잡힌다.
음식이 그러하듯 내 몸이 원하는 음식이 보약이듯
내가 원할 때 찾게 되는 책이 결국은 인생책이 되기 마련이다.
읽어야 해서 읽는 책만큼 재미없는 책이 있던가.
봐야 해서 봐야 하는 영화만큼 고역인 게 있던가.
작년인가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읽고 왈칵 눈물이 났다.
그 책이 나온 이십여 년 전 그 책을 읽었더라면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어느 순간 우연을 가장한 운명처럼 내게 오는 책이 있다.
이번엔 <싯다르타>가 그랬던 것 같다.
그는 고타마에게 부처, 그분의 보화와 신비는 가르침이 아니라 그가 깨달음의 순간에 체험한 형언할 수 없고 가르칠 수 없는 바로 그것이라고 말했다 - 바로 그것을 체험하고자 그는 길을 떠났으며, 막 그것을 체험하기 시작한 터였다. 이제 그는 자기 자신을 체험해야 했다. 사실 그는 오래전부터 자기 자신이 아트만이며, 브라만과 똑같이 영원한 본질에서 생겨났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유의 그물로 자신을 붙잡으려 했기 때문에 진정한 자신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육신도 분명 자기 자신이 아니었고 감각의 유희도 자기 자신이 아니었으며, 마찬가지로 사색, 오성, 습득한 지혜, 결론을 도출하고 이미 생각한 것에서 다른 생각을 자아내는 학습된 능력 역시 자기 자신이 아니었다. 그렇다. 이 사색의 세계 또한 여전히 차안의 세계에 있었고, 감각이라는 우연적인 자아를 죽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사유와 학습이라는 우연적인 자아를 살찌운다 한들 얻게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감각과 사유, 이 두 가지는 모두 좋은 것이었으며 그 배후에는 궁극적인 의미가 숨어 있었다. 그러므로 두 가지 모두 귀기울여 들어볼 가치가 있고, 함께 작용해야 했으며, 그 어느 것도 경시되어서는 안 되고 과대평가되어서도 안 되며, 두 가지 모두에게서 가장 내밀한 진리의 비밀스러운 소리를 들어야 했다.
깨달음은 가르칠 수 없다는 말을 이렇게 길게 하고 있다.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불성에 닿는 일은 자신이라는 재료, 인생이라는 시간, 경험이라는 통로를 통해 자각, 스스로 깨우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걸.
새로 시작하면서 스스로 다짐한 몇 가지가 있다.
- 남들이 일해라, 절해라 하는 걸 귀담아 듣지 않기
- 몸의 감각을 우선할 것. 책으로 먼저 배우지 말 것
- 안다고 느껴지는 느낌을 경계할 것. 아는 것 같은 착각에 쉽게 굴복하지 말 것.
- 다.시.는. (안다고 떠드는 이들한테) 말리지 말 것.
- 무턱대고 따라하지 말 것.
- 내면의 불안을 응시할 것.
- 막막해지는 순간을 기꺼이 껴안을 것.
- 기쁨으로 넘실거리는 일에 몰두할 것.
- 해야하는 일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할 것.
- 적당히 읽을 것.
인생은 두 번 살게 되는 것 같다.
한 번은 배운대로. 한 번은 살고 싶은 대로.
싯다르타도 사문이 되기 위해 집을 나서지만 늙은 스승 밑에서 배우다가
결국 자신의 길을 떠나고, 고타마를 만나지만 그의 밑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온전히 던져 배우는 길을 택한다.
욕망과 탐욕과 환희를 모두 경험한 후에야
도반이자 스승이자 벗인 뱃사공을 만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맞는다.
그리고 강물을 통해 배우고 경험하고 깨닫는다.
싯다르트가 말했다. "어쩌면 당신은 깨달음을 구하는 데 지나치게 매달리는 것은 아닐까요? 구도에 너무 전념한 나머지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어째서 그렇다는 건가요?" 고빈다가 물었다.
"구도하는 사람이 흔히 겪는 일입니다. 그런 사람의 눈은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것만 보게 되고, 그래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며 아무것도 마음속에 들이지 못하는 법이죠. 늘 자신이 축구하는 것만 생각하고, 하나의 목표를 정해놓고는 그 목표에만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추구한다는 것은 하나의 목표를 갖는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찾아낸다는 것은 자유로운 상태, 열린 상태, 어떤 목표도 갖지 않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깨달음도 달성해야 하는 목표처럼 습관처럼 달려들면 요원하단 얘기다. 그저 뱃사공처럼 강물을 오래 바라보고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그러듯이 자신의 온 감각에 목적성을 두지 않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
운동삼아 했던 일들을 멈추고 오늘부터 크리야요가를 시작했다.
<요가난다>를 읽고 크리야요가가 대체 뭔가 알아봤는데 우리나라에는 정식으로 크리아요가를 가르치는 곳은 없는 것 같다. 어찌어찌하여 알게 된 분으로부터 크리야요가를 위한 호흡법을 배웠고, 크리야요가 명상법 같은 걸 알게 되었다.
내용은 간단하다.
I am not the mind. I am not even the mind.
들숨과 날숨에 속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평상시에도 그렇게 되뇌이면 좋다고 하는 데
무거운 머리가 몇분 동안의 명상만으로 에너지를 회복하는 기분이 든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듯
그렇게 해서라도 잠시나마 자아를 소멸시키는 원리인지.
요가 관련 책을 탐독하는 것보다
짧게 나마 내 몸과 내 호흡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 훨씬 좋다.
배우고 익히는 것은 좋으나 배움이라는 습관에 빠져
스스로 생각하고 경험하는 감각을 놓칠 때
쉽게 관성의 쳇바퀴에서 자유의 기쁨을 잃고 만다.
헤세는 이 책을 굉장히 고통스럽게 썼다고 전한다.
스스로 나락에 빠졌다가 다시 회복하는 과정을 '체험'해야 했던 것일까.
평생 헤세는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마음의 평화를 얻었을까.
어쩌면 <싯다르타>는 그가 이루지 못한 마음의 평화를 역설적으로 상징하는 작품은 아닐까.
<싯다르타>는 과연 헤세의 작품일까.
오랫동안 윤회를 거듭하던 어느 중생이 헤세를 통해 간증한 이야기는 아닐까.
아. 다시 또 머리가 무거워진다.
다시 또 반신욕을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