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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드러내는 데 한없이 부족한 언어 대신 형상을 주 무기로 삼아야겠다고 작정한 이후 두려움과 주저함은 그림 언저리를 계속 맴돈다. 힘 닿는대로 전시장을 돌아다니고, 시선을 사로잡는 작가가 있으면 키보드만 두드리면 나오는 무궁무진한 자료에 도록까지 그러모아 한참 빠져 지내고, 의아한 대목들을 명쾌하게 풀어주려는 외서가 있으면 또 한참을 매달려 읽으며 그리지 못하는 자신을 변명할 거리, 또는 그리지 않는 이유를 만들어내느라 분주하다. 


허나 국내/국외 전시장을 드나들수록 마음에 드는 그림은 이상하게 점점 줄어들고, 책을 읽을수록 허기진 마음은 더 갈급해진다. 그림을 대하는 태도나, 그림을 감상하는 식견이나 왠지 모를 석연치않음이 계속 감지되기 때문이다. 서구 중심의 미술사 전개는 차치하더라도 거기서 우리 그림, 우리 작가들을 바라보는 제대로 된 시선을 만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벽에 낙서하듯, 온갖 더러운 속내를 모두 배설하듯 그렇게 ‘표현’한 작품들의 어느 대목에서 내가 감동해야 하느냐. 얼마에 팔렸고 그래서 얼마나 대단한지 호들갑 떠는 잔치에 왜 내가 같이 들떠야 하느냐. 도대체 어떤 작품을 좋은 작품이라고 볼 것이며, 좋은 작품은 어떤 사람에게서 나오는냐. 대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불혹을 한참 넘어 지천명이 코앞인데도 앞에 보이는 길은 질풍노도 청년의 앞길처럼 안개가 자욱하다. 


지난 한 해 동안 읽은 책들을 살펴보니 거개가 영어로 된 책들이다. 영어공부가 목적은 아니었으나 대체로 관심있는 책들 중에는 번역되지 않았거나 번역되었더라도 영문이 읽기 편했다. 왜 그랬을까. 아직도, 아마 꽤 오랫동안 첨단의 것들은 우리가 아니라 영어로 된 것들에 있다는 생각이 작용했을 것이다. 얼마간 사실이라 하더라도 영어로 된 책들을 물리게 읽고 있으면 문득 서글프다. 그럴 때마다 종종 들춰보았던 것이 박영택의 글이다. 그의 명징하고 삿기 없이 글들은 종종 눈에 낀 티나 혀에 낀 백태를 제거하는 것마냥 시원한 구석이 있다. 현학적인 태도로 읽고 공부한 것들을 상찬하듯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몸소 겪고 만난 사람과 그를 둘러싼 사유, 그리고 오랜 시간 그가 공들인 미술 큐레이팅의 노고가 그의 심성을 대하는 것마냥 맑고 곱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도 왠지 믿고 만나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의 글이다. 



자신의 일 이외에는 완전히 무심한, 심플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내가 만난 좋은 작가들의 공통점이다. 그들은 또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조차 극구 두려워하는 존재들이다. 완벽하게 자신을 던지지만 동시에 그 모든 일을 무로 돌려버릴 줄 아는 그들은 낙관도 절망도 없이 그 경계에서 평심을 유지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자신의 작업이 결국 주어진 삶에서 잠깐 인연을 맺는 일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것밖에는 잘하는 게 없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작업에 임하는 자들이다. 이런 무심함과 겸손함 속에서 결국 작업은 과하거나 넘치지 않고 신비주의나 허황한 예술지상주의로 전락하지 않으면서 정확하고 예리하게 몸을 내민다.”(p.81)


어떤 사람이 좋은 작가일까. 그런 건 미술 이론서에서 잘 일러주지 않는다. 사실은 그런 게 가장 궁금한 대목인데 말이다. 내가 그토록 수고를 들여 되고 싶은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이 나이에, 이 경력에, 이 순간에. 미디어를 수놓는 많은 작가들의 이야기가 포장되고 미화되면서 과연 그런 길이 나의 길일까,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내가 들여야 할 노오력은 또 얼마만큼일까 아득해진다. 세상과 절연하고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수도승의 삶은 더더군다나 나의 길과 아득히 멀다. 


작업실 타령을 하며 어떻게 하면 좀 더 크고 멋진 작업실을 가질 수 있을까 골몰할 때면 뭔가 주객이 전도된 죄책감이 밀려오지만 어쩌랴. 그게 지금의 나인걸. 양평이 좋을까, 가평이 좋을까. 속초가 좋을까, 양양이 좋을까. 좁아도 서울이 낫지 않을까. 언젠가 갖게 될 나만의 작업실을 꿈꾸며 작업실의 멋진 모습을 그려보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그랬던 생각이 부서진 건 실제로 작업실을 갖게 되면서이다. 아파트 건물 지하에 싸게 나온 빈 사무실을 덜컥 계약했는데 그곳은 결국 오랜 시간 남편과 나의 자전거 보관소가 되었다. 매달 나가는 비싼 월세가 아까웠지만 그 당시 나는 보고 싶고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작업실에 틀어박혀 그림만 하기엔 너무 분주했다. 아마도 나의 그림에 대한 열정은 거기까지 인가보다, 스스로 깨닫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1년 계약을 한 달 앞당겨 조기 퇴실하며 다시는 작업실 타령 같은 건 하지 말아야지 했는데, 박영택이 본 세속적인 작가들의 작업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는다는 사실에 오히려 위안 같은 걸 받았다고나 할까. 


온통 통유리로 마감한 작업실에는 아름다운 풍경이 그림을 대신해 들어차서 작가들은 그 풍경에 눌려 있다. 자연만한 그림이 어디 있을까? 그러다 보니 나무에 물 주고 화초에 비료 주며 정원을 가꾸는 일로 하루를 다 보내고 정작 그림은 손도 못 대보는 그런 작가도 있다. 주인 닮은 개들 역시 하루종일 풍경에 취해 몽롱하다. 그들은 아마도 풍경을 소유하고 있다는 데서 일종의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p.140)


박영택이 책에서 찾은 작가들의 작업실은 그런 작업실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궁벽한 시골, 가난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차가운 냉기가 정신을 번쩍나게 하는 그런 세상의 극단 같은 곳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감히 말하건데, 그런 작업실에서 고독을 마주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 못되니 나는 작가가 못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비약하진 않는다. 저마다의 삶과 처지가 있고 그 안에서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기 위해 나아가면 된다는 것으로 방향을 잡는다. 


나는 나 자신의 일 외의는 완벽한 무심함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 그렇게 무심하게 오로지 캔버스만 바라보고 그 안에서 형상만 생각하는 것은 나의 삶과 다르다. 나는 어느 순간 우리의 일상이 무너질 수 있는 정치적 현실에 민감하고, 이 나라를 벗어나 전 세계가 보이지 않는 전쟁을 극렬하게 치르고 있는 이 시대를 관통한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내가 하는 행위 속에서 그런 세계의 부조리의 의미를 담아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 


결코 두껍지 않은 책인데, 행간에는 학연과 지연으로 촘촘히 엮인 한국 화단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 무분별한 서구 양식의 수용으로 혼란한 동양 화단에 대한 지적, 우리가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서구의 풍경과 다른지 그걸 구체적으로 드러낸 작가들의 노력이 담겨있다. 여느 미술 감상서나 이론서에서 얻지 못한 대목을 얻는 고마움이 있다. 그래서 읽는 데 잠시 시간을 두고 곱씹어야 한다. 그래서 좋다. 아마 내가 그런 고민이 없었더라면 그런 대목들이 눈여겨지지 않았을지도. 하지만 그런 고민이 있었기에 그가 이런 작가들을 발굴해내려는 노고가 더욱 고맙고 애틋하게 다가왔는지도. 



좋은 그림은 이렇게 현실을 비현실과 만나게 해주는 동시에 사물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상투적이고 습관적인 시선과 감각을 예리하게 비틀어준다. 그리고 나를 성숙시킨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또한 두렵다. 거짓 세상에 맞서 화폭 안에다 자신의 삶의 진액을 쏟아붓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엄격하게 자신을 친친 동여매는 이 자기치유적, 자폐적 그림 그리기란 또 얼마나 허망하고 상처받기 쉬운가. 민감한 감수성과 집중력으로 자기자신을 소멸시켜가면서 회화를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와 존재의 의미, 정신의 정점에 육박하고자 하는 이 행위는 어느 면에서는 고립무원일 것이다.(p.168)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그 순간이 참 좋다. 가만히 들여다 보다가 그리면서 알게 되는 것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그림을 그리기 전에 나는 먼저 나를 위한 그림, 내가 더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는 노력의 과정에서 얻는 부산물 같은 이 그림을 있는 그대로 안아야할 것 같다. 되고 싶은 내가 미디어에 장식되는 작가는 아니니까.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 배워야 한다는 생각은 일찍이 버렸으나 확실하고 안전한 끈이 필요하지 않는가, 라는 현실적인 선택도 굳이 필요없다는 데 도달했다. 그렇다고 화면만 바라보며 자폐적 그림으로 극한적 몰입에 도달할 생각은 없다.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지 그 고민은 아마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겠지만. 


그림은 내 삶의 부산물이다. 내가 사는 삶이 더 중요하다. 그림을 통해 내 삶을 더욱 나답게 살 순 있어도 그림만을 위해 살진 못할 것 같다. 아니, 않을 것 같다. 일단 오늘까지는 그렇다. 생각이 바뀌면 다시 돌아와 적는 걸로. 



p.s. 사실 이 책은 박영택의 근작 <오직, 그림>이라는 책을 먼저 읽고 절판된 책을 중고서점에서 구입해 읽었다. 해외 명작들을 감상에 치우치지 않고 이론에 기대지도 않고 깊이 있게 읽어낸 게 좋아서 그가 다룬 한국작가들의 책을 찾다 발견한 책이다. 워낙 오래된 책이라 때늦은 감이 있지만 좋은 책은 시간이 지나도 좋다. 부디 그가 더 부지런히, 더 야먕있게 미술관련 책을 그치지 않고 써주길 바라는 바이다.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가?

그는 작가를 이야기하며 어떤 그림을 그리면 안되는지 단서를 남긴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각, 감정, 느낌, 감각이 고스란히 화면에 밀착되어 번져나간 그녀의 그림에는 화단의 유행이나 그럴듯한 방법론의 연출, 막연한 관념적 주제 대신 오로지 자기 안에서 그림을 뽑아내는 그녀만의 근성이 지독하게 수놓아져 있다.”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지, 그 막연하고도 막막한 주제 앞아서 손쉽게 따라할 수 있는 것은 기존의 작가들의 행적을 따라가는 것이다. 좋은 말로 하면 리서치이고, 나쁘게 말하면 답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작가들을 보고 배울 것인가. 내 주변에 익숙하고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대가들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런 대가들에게선 분명히 배울 점이 있다. 하지만 어떤 기준으로 대가들을 분류하는가. 서구 중심으로 이루어진 미술사에서 대가라고 일컬어지는 사람 중에 아시아계나 한국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내 주변의 작가들로 시야를 좁혀봐도 알려진 작가가 그에 걸맞는 작품을 하는지, 저 소동은 과연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나 자신으로 더욱 좁혀보면 아직 나의 재료를 찾아가는 과정이기에 이런 저런 시도들을 하고 있는데, 그 안에서 ‘말이 되게’ 해야하지 않는가, 라는 자기 검열은 자신 대신 누군가의 말과 글을 탐독하게 하게 관념들을 잇고 덧붙이는 과정으로 흐르게 되곤 한다. 


자기 자신을 더욱 치밀하게 들여다보기 보다는 여전히 책 속에서 답을 구하고 찾고 헤매고 또 그걸 반성한다고 쓰고 그걸 다시 부끄러워하는 일의 반복. 나도 진또배기 작가들처럼 오로지 자기 안에서 그림을 뽑아내는 근성으로 살아가고 싶다. 무심하게. 하지만 세상의 일들은 끊임없이 나에게 밀려들어오고 나는 그것을 해석하고 소화하느라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 머릿속 잡념을 지우는 일 중 하나가 그리는 일이다. 이제 그만 읽고 그만 떠들고 오로지 그리고 싶다. 현재로선 이상하게 어려운 일. 


마음이 흐려질 때마다 그가 젊은 작가들의 전시에 부쳐 썼던 글을 다시 꺼내 본다. 좀 길지만 옮겨와 본다. 



사실 좋은 작가란 생물학적인 나이나 경력에 좌우되기보다는 기존의 관습적이고 상투화된 시선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선, 낯선 감각을 안겨주는 그 지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미술 역시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문제고 결국 자신의 삶과 긴밀히 연동되어 있다. 결국 모든 작가들의 작업은 자기 자신의 현실적 삶, 자기 시대의 미술에 대한 인식 속에서 발아한다. 그러니 모든 작업은 당대의 소산이고 한 개인의 삶의 파생물이다. 그것이 바로 현대미술, 컨템포러리아트일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컨템포러리 아트를 제대로 하기는 참 어려운 일이고 쉽지는 않아 보인다. 기존의 익숙하고 관례화된 지배적 미술언어에서 벗어나 가능한 자신의 독자적인 감각, 안목으로 미술을 사유해보거나 자신의 구체적인 생활체험 속에서 미술을 길어 올리려는 시도가 그 길에 근접하는 일인 것 같다.


(중략) 전체적으로는 수작업에 의지한 그리기가 여전히 압도적인 편이다. 그만큼 평면회화가 주는 매력이 크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동시에 다소 제한된 회화의 방법론에 머물 수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아울러 작업의 내용이 다소 관념화될 수 있다는 점, 시각적 효과가 우선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점, 그리고 다양한 매체의 사용이 곧바로 새로운 감각, 주제를 대체해주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 또한 기존의 매체사용과 다른 감수성으로 그것을 활용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능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부분이 좁고 정밀하게 포착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개념어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구체적인 체험, 경험에서 우러나는 그것을 진솔하게, 가능한 관습적인 제작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론에 의지해서 표현하고자 하면 되지 않을까?::


예술이란 특정한 체제 안에서 행해지는 제도적 산물이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개인의 체험의 문제'(홍명섭)이다. 그 구체적인 체험을 어떻게 시각화, 물질화시키느냐 하는 것이 작업의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 컨템포러리 아트, 일반적으로 현대미술이란 동일화되는 감성의 표준과 불화를 일으키는 일이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누구나 다 좋아하는 일반화된 아름다움에 대한 동질적 감성, 지배적 가치에 함몰되어 있으면서 창의적 예술, 현대미술을 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림은 우리의 일상적 비전과의 투쟁'(서동욱)이 된다. 가장 진보적인 이는 바로 예술적 사유를 창출하는 사람이고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 현대미술가가 된다. 삶에 변화를 초래할 이견이나 관점, 감각을 창출하는 일, 그러한 존재가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대미술이고 현대미술작가라는 것이다. 이처럼 미술에서의 현대적 개념이란 시각보다는 비판적 태도의 유무에 달려있다고 본다. 알다시피 오늘날 미술 작업은 비평의 수준이 되어 우리의 사유 방식에 영향을 끼치는 기능적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장식물을 만들거나 키치, 인테리어적인 차원의 사물을 공들여 제작하는 일, 멋지고 경이로움과 같은 시각적 효과를 만드는 재능의 세계와는 무척 다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평적 사유란 한 작품이 우리로 하여금 사물과 세계를 보는 눈을 새롭게 지각시키고 낯선 감각을 발아시키고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익숙한 감수성을 흔들어주는 그런 표면, 물성을 시각화시키고 구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 박영택



작가와 재료, 작가와 작업실 <예술가의 작업실>


장욱진은 말년에 할머니처럼 쪼그리고 앉아 좁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거장의 작업과 작업실에 대한 환상을 여지없이 깨뜨리는 장면이다. 크고 넓은, 전망까지 좋은 데다가 오픈 스튜디오를 해도 부끄럽지 않은 그럴듯한 작업실을 꿈꿔왔던 나에겐 더더군다나. 도대체 어떤 작업을 어떻게 하고 싶은가가 선행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자문을 만들게 하는 장면. 


대형작업을 선호하는 추세에 따라 작업실도 대형화되는 추세지만 그럴 수 있는 형편이 되는 작가는 드물다. 작업실이라는 것이 결국 작업의 질에 따라 결정되는 것인데, 그 작업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재료. 어떤 재료를 다루느냐는 곧 그 작가의 정체성이 된다. 누구는 고운 가루를, 누구는 단단한 돌을, 누구는 못을, 누구는 질퍽한 물감을, 누구는 철을, 누구는 볼펜으로 하도 그어 까맣게 그을린 것 같은 신문지를. 이번엔 작가가 선택한 재료와 그의 작업실을 찾는 책이다. 


그는 그렇게 작업실을 찾는 와중에 드문드문 곱씹을 만한 단서를 또 흘려놓는다. 


오랜 드로잉 훈련은 작가의 몸을 다른 몸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드로잉을 한다는 것은 대상과 세계를 파악하고 이를 조형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고도의 몸을 만드는 일이다. 그 몸이 되어야 비로소 그림이 가능하다. 여기서 두 가지가 요구된다. 하나는 주어진 대상을 정확히 읽고 감지할 수 있는 눈과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파악한 것을 고스란히 그려 낼 수 있는 손이다. 이 훈련된 손은 그러나 순간 타성화되기 쉽기에 작가들은 매번 그 손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버전이 떨어지는 손은 이내 도태된다. 그래서 마치 가수나 성우가 매번 목을 풀듯이 화가들 또한 손을 푼다. 고도의 훈련을 거쳐 매번 새로운 손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곧 죽은 손이 된다. 그때 그림도 함께 죽는다.(p. 103 이강일 편)



주어진 대상을 정확히 읽고 감지하는 건 눈에서 그치지 않는다. 마음이 더 작용한다. 훈련을 통해 기량을 높이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달성한 곳에서 스스로 관성화되지 않게 매순간 새롭게 갈아야 한다. 어찌보면 너무 어렵고 어찌보면 너무 당연한 이치다. 우리가 어떤 그림 앞에서 감동하는지를 떠올려보면. 


꽤 오랜시간 동양화에 대해서 그런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너무 정형화된 것 아닌가. 혁신이라는 것이 가능한 장르인가. 스승의 기술을 따르는 것을 예술이라 할 수 있을까. 짧은 시각이었다.


동양화 작업이란 오랜 세월 동안 동양인의 심미관을 반영해 온 불가피한 재료들로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동양인들의 세계관, 자연관 속에서 파생된 재료에 관한 사유였을 것이다. 자연을 존중하고 이치와 순리를 따르는 가운데 물과 바람과 시간 속에서 자연스레 발효되어 나오는 그런 그림. 따라서 전통 회화에서 재료가 무엇이며 어떻게 다루어졌는지, 그 성질과 의미를 헤아리지 못한다면 우리 그림의 성질, 특성 또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p. 183 정종미 편)


종이 위에 물감을 쌓아 올리는 서양화와 달리 종이에 스미는 먹으로 색을 표현하는 동양화가 가진 근본적으로 다른 태도에 대해 나는 무지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한국 전통 미술의 요체는 바로 그런 장시간의 발효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드러나는 아스라한 색감과 소박하고 무심하면서도 절묘한 격을 지닌 장식의 조화에 있다. 정종미의 작업은 오랜 세월 아래 눅눅히 절여진 색채, 바래고 흐려져 삭은 것들, 시간의 입김 아래 즙이 되고 가루가 되어 바스라지기 일보 직전인 것들이 지닌 기이한 매력에서 기인한다. 그것들은 살아 있는 인간에게 경이로움과 숭고함을 아찔하게 안긴다. (…) 아울러 그의 전통 회화는 동시대 현대미술처럼 아이디어나 언어, 개념의 현란한 유희가 아니라 인고의 세월 속에서 노동을 통하여 비로소 삶을 느끼고 예술에 이르게 했음을 상기시킨다. (p.200 정종미 편)


자신이 의도한 바를 명확하게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현대예술가에게 요구되는 덕목인 시대에, 작업의 기량이나 완성도보다는 얼마나 멋지게, 그럴 듯하게 철학적 배경이나 사유의 흔적을 언어화할 수 있는지가 성공하는 예술가를 나누는 잣대가 된 시대에, 그래서 작업보다는 오히려 그런 “articulation”을 중요하게 예술학교에서 가르치는 시대에, 그의 당연하고도 또 당연한 이야기는 그래서 더 오래 여운을 남긴다. 


대상과 자신과 재료를 구별하지 않는 일, 그것들의 물성을 깨달아 가는 일, 거기에 인생을 부여하며 그것과 동화되어 가는 일, 우리의 선인들이 그러하였듯이 내 손끝에서 느껴져 이루어진 이 일들은 너무나 은밀하여서 말로는 다 할 수가 없다. (정종미의 작가노트 중에서)


정종미 편이 하도 구구절절 옳은 내용이라 지금은 절판된 그의 책 <우리 그림의 색과 칠>을 중고서점에서 구해 놓았다. 조금은 전문적으로 느껴지지만 새롭게 열린 동양화의 세계에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 같다. 


먹이 되었든, 철가루가 되었든, 자신에게 맞는 재료를 찾는 과정은 작가라면 필수적인 과정이다. 그것은 미학적 취향에 따른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역사 그리고 철학과 태도가 모두 어우러진 필연적인 결과이다. 재료를 찾는 과정은 서둘러서 될 것도 아니고, 이야기를 짜맞추기 하듯 덤벼들어서도 안 될 일인 것 같다. 차분히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끈질기게 찾다보면 너무도 자명한 자신의 재료를 만나게 될 거라 확신한다. 지금은 의도를 내려놓고 즐겁게 유랑하는 시기. 당연하게 집어들었던 유화물감이나 아크릴에서 벗어나 가루와 먹과 실 등 다양한 재료와 함께 노는 중이다. 먹의 풍부한 농담이 흑백사진의 풍부한 계조 표현과 닮아서 한창 흑백사진 찍기에 빠져있기도 하다. 





박영택의 글을 읽는 재미에 빠져 <테마로 보는 한국 현대미술>도 중고로 찾아놓았다. 뒤늦게 발견한 책들이라 그런지 절판된 책이 대부분이다. 뒷북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 어떤 예술서에서도 받지 못했던 영감과 깨달음을 얻고 있으니 당분간 이 사랑은 지속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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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캐피털리즘 - 서구를 넘어
이승현 지음 / 아트북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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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끝도 없는 읽을 목록을 얻었지만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의 눈으로 냉정하게 미술시장을 해부하고

예술을 예술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의 지평을 넓혔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새로운 시각으로 우리의 미술사를 기술해야 하는 의의를 얻은 것만으로

이 책은 너무도 큰 값어치를 한다. 




"서구 열강의 절대적인 힘의 우위 속에 나타난 문화의 일원화 현상으로 인해 각국의 미술사가 서구의 미술사조를 순차적으로 도입한 역사로 기술되면서 서구 모더니즘은 원본의 지위를, 주변국의 미술은 모방의 지위를 부여받게 됩니다.
근대 이후 서구 모더니즘 미술을 전 세계 사람들이 줄을 서서 보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원본을 직접 보고자 하는 열망의 표출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데 근대화 과정을 끝내고 서구와 동등해진 상태에서 자국의 미술사를 되돌아보면, 비로소 도입의 역사는 습작의 역사일 수밖에 없으며 서구를 도입했다는 사실이 자국 미술의 세계 미술에서의 위상 제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 P15

"서구 미술시장은 지난 100여 년 동안 소수의 고급정보를 쥔 사람들이 그 정보를 이용해서 작품을 먼저 구매하고 담합하고 작전을 벌이면서 유지되고 발전해 왔습니다. 서구 시장 중심 미술제도의 역사를 배우는 것은 화상과 화가, 컬렉터, 미술관과 이론가 등의 다양한 이해당사자들 간의 지속적이고 주도면밀한 담합과 작전의 노하우를 배우는 일입니다." - P21

아트페어가 주요한 판매 창구가 되면서 메이저 갤러리와 그들의 작가를 자국 내에서 판매하던 지역 갤러리 사이에 이해의 충돌이 발생하고 있으며, 이런 상황은 메이저 갤러리가 전 세계 주요 거점 도시에 직접 지점을 개설하면서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국제금융질서가 심판과 선수들이 함께 경기를 벌이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면 세계미술계는 서구 유명 미술관과 메이저 갤러리가 나눠주는 한정된 초대권을 받아야 그나마 함께 겨룰 기회라도 잡을 수 있는 그들만의 리그입니다. - P275

이분법에 근거한 서구 근대의 전형적인 물음은 주체의 동일성(identity)을 정의하면서 항상 타자의 문제를 초래했습니다. 서구 근대의 인간 중심주의는 동시대 철학과 현대물리학이 바라보는 인간과 세상, 나와 타자의 구분, 그리고 이들간의 타협 불가능한 적대관계를 낳고 있습니다. 반면 오늘날의 사상가와 과학자들의 해법은 모두 __인간이 아닌 모든 개별적인 대상을 존중하고 그 실재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__합니다. 그리고 주체와 객체, 인간과 비인간, 진리와 거짓, 선과 악과 같은 이분법적 사유를 배제한 이들의 사유는 이런 대립항들이 서구와 달리 연속성을 지닌 동아시아의 사유와 유사합니다. 육후이는 서구의 비극와 중국의 산수화에서 발견하는 미적 사유가 공히 이러한 대립의 해소를 향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 비극에서는 이 해소가 영웅의 의지나 용기로 이루어지는 것에 반해서, 중국의 산수화에서 대립의 편재는 회화의 역동성을 산출해서 오히려 도를 현시한다고 말합니다.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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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휘리릭 하는 편이라 그걸 장점이라 여기고 살았다.

글도 휘리릭, 일도 휘리릭.

남들보다 성질이 급해 남들보다 후딱 해치우는 게 회사에선 잘 통했다.


'한국 사람들은 참 빨리하는 걸 좋아해요. 하지만 그래서 다시 해야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면 결국 시간이 더 걸리게 되거든요. 한국사람들은 그걸 잘 모르는 거 같아요.'


언젠가 인도 출신 개발자가 한국 사람들과 일하는 소회를 밝히면서 했던 이야기다.

그 말에 참 공감하면서도 'Fail Fast'를 미덕으로 외치는 스타트업 정신에 한국인의 성미가 이상적으로 부합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다리도 무너지고, 아파트도 흘러내린다.

그건 또 성미 급한 한국인이 풀어야할 숙제다.


남들이 어떻게 선을 쳐야할지 주저하고 있을 때,

자신 있게 선을 긋는 걸 보고 누군가는 '타고난 화가'라는 칭호도 붙여주었다.

그림을 그리는 게 좋았지만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배우지' 못한 채 오래 시간이 흘렀다.

그림이라는 게 과연 배울 수 있는 것인지, 배우면 되는 것인지, 배워야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우유곽 하나를 '사실 그대로' 그린 그림을 보면서

왜 그렇게 그려야 하는지 갸우뚱했다.

사진 기술이 있는 시대에 복사에 가까운 재현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재현' 보다는 '해석'에 의미를 두세요." 

어떤 이는 그렇게 코치를 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훈련을 해보세요."

어떤 이는 그렇게 조언을 했다.


천재적인 피카소의 드로잉을 봐도 우리나라 입시미술생보다 나은 게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나라 입시미술을 거친 미술생들은 해외 유수 미술대학 선발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그런 입시미술을 거치면서 미술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기도 한다. 


나는 지금도 수채화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 같은 게 있는데,

그건 초등학교 때 아무리 그려도 제 마음대로 잘 안그려졌던 기억 때문이다.

미술교육이 언어 이전의 중요한 교육으로 자리하고 있는 프랑스에서는 

일상의 체험을 이미지로 표현/창조하는 훈련이 바탕이기 때문에

나와 같은 트라우마를 겪는 아이들은 없어 보인다.


여튼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스케치북을 사서 휘리릭 그림을 그려보면서 '과연 이게 맞나?'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렇게 자기 멋대로 '휘리릭' 그리다보면 언젠가 '잘 그리게 되는' 그날이 올까?


사람들은 막연히 들리지 않는 영어를 계속 듣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영어가 들리게 된다고 하기도 한다. 수년 간 그렇게 해본 나로서는 그런 날은 오지 않는다, 가 답이다.

80퍼센트 이상 이해가 되는 스크립트를 완벽하게 딕테이션(받아쓰기) 할 수 있어야, 감히 말하건대, 영어가 '는다.' 엄청 빠른 속도로 말하는 미드나 속사포로 쏟아내는 뉴스를 들어봤자 리스닝이 그렇게 나아지지 않는다는 게 현재 나의 잠정적 결론이다.


영어동화가 되었든, 3-6세가 듣는 베드 타임 스토리든, 애니메이션이 되었든,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뭐 하나를 '씹어먹을 수 있어야' 영어라는 언어의 구조를 익히게 된다.


별 하나짜리 어려운 단어를 아무리 많이 알아도

영어로 말하다보면 시제, 인칭, 단복수가 막 엉겨서 나오기 마련이다.

왜? 구조가, 패턴이, 실사용법이 익혀지지 않았으니.


책도 막연히 많이 읽다보면 어느 순간 '문리'가 트이는 순간이 있다고들 한다.

난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다섯 수레를 읽든, 만 권을 읽든, 

'휘리릭' 읽으면 말짱 꽝이다, 라고 생각한다.


나의 스승(?) 닐 게이먼은 말한다. 

보통 사람처럼 읽지 말고, 작가처럼 읽는 방법에 대해.

잠깐 들었던 문학창작교수는 말했다.

그냥 읽지 말고 '씹어먹을 것처럼' 읽으라고.


난생 처음 산 스케치북에 '휘리릭' 그린 그림을 들고 갔다가

난생 처음 어린 친구한테 '꾸중'을 들었다.

이렇게 그리시면 80년을 그려도 안된다고.


손가락 하나를 한 시간 동안 그려보고,

복잡한 형태를 세 시간 동안 그려보고,

한 가지 주제를 다섯 시간 동안 그려보라고.

그렇게 정밀하게 그리고 나면 세상을 보는 관찰력이 달라질 거라고.


영어나, 글이나, 그림이나,

그렇게 천천히 시간을 들여야 들리고 보이고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렇게 흘깃 훔쳐본 것을 가지고,

안다고 '착각'하거나 이렇다, 저렇다, 판단했던 것들에 대해 미안해진다.


명석한 판단력은

비곤한 자료를 가지고 성급하게 결론 내리는 것이 아닐텐데,

지금껏 빠르게 파악하고, 빠르게 실행하는 걸 미덕이라 여기며,

그렇지 못한 사람(동거인)을 핍박하고 살아왔던 것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


뭐, 그렇다고 성질이 한순간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오늘도 한 장 차분히 그림을 그리며

조금씩 나아지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이렇게 차분히 정밀하게 그리다보면

나아지는 순간이 있을까?


이것도 근거 없는 막연한 기대감은 아닐까?


나는 과연 무엇을 보았는가?



잘 보기 위해 그린다.

드로잉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와 여러 가지 훈련법들에 대해 나름 체계적으로 기술한 책. 초기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








존 러스킨에 대한 기대감으로 엄청 고대하며 산 책인데, 좀 고루하고 답답해서 금세 싫증이 났다. 요즘 감각에 맞지 않아서인지, 내 성미가 급해서인지, 아니면 고상한 척 이야기하는 게 싫어서였는지 잘 모르겠다.











여전히 드로잉은 필체나 스타일처럼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이라고 믿는다. 해서 마스터들이 각각 어떻게 자신만의 방식을 발전시켰는지 정밀하게 들여다보는 건 유의미한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도움이 되었던 책.









인간의 몸을 다양한 화가들이 어떻게 다양하게 해석하고 그렸는지, 훌륭한 도판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책. 그저 그림만 좋은 게 아니라 몸에 대한 분명한 주제의식으로 작가들을 엮은 편집이 훌륭한 책이다.





'나뭇잎처럼'이란 나의 아이디처럼 평생 나뭇잎과 나무를 늘 잘 그리고 싶었는데, 그래서 너무나 소중했던 책. 그림교육을 업으로 삼고 있는 저자라 차분차분 앉아서 학생을 가르쳐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친숙한 기분이 들었다. 날 초짜인 나 같은 사람이 보기 딱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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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1-25 15: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러스킨이 살던 시대로부터 너무 멀리 와있죠?
저는 러스킨의 미술평론보다는 사상에 더 끌려요^^

나뭇잎처럼 2022-01-25 21:23   좋아요 2 | URL
저도 러스킨의 사상에 끌려 덥썩 집었는데 가만가만 듣다보니 그 시대에 앉아서 들었으면 몸을 배배 꼬았을 거 같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제가 러스킨의 사상을 받아들이기엔 이미 너무 세속적이 되어서인지, 고분고분한 학생이 아니어선지.. ㅎㅎ 학생의 자유도를 최대한 고려해주는 선생님이 좋더라구요. 되게 엄한 선생님이셨을 거 같아요 ㅋㅋ

mini74 2022-01-25 22: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피카소가 옛작업실 갔다가 노숙자를 만났는데 아는 사람, 쓰레기통? 에서 종이 하나 골라서 휘리릭 뭐 하나 대강 그리더니 이걸로 집이나 하나 사라며 줬다는 일화가 생각나요. 그 휘리릭 뒤엔 엄청난 기본기가 있더라고요. 나뭇잎처럼님 글 공감하며 읽었어요 ~~

나뭇잎처럼 2022-01-27 09:34   좋아요 1 | URL
왜 고수들은 동선에 쓸데없는 게 하나도 없잖아요? 할머니들은 요리도 툭툭, 선수들은 낭비하는 동작이 없죠. 그래서 후루룩, 휘리릭 하는 걸 ‘멋있다‘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문제는 고수도 아니면서 후루룩, 휘리릭 하려다 어설프게 끝나는 경우가 많은 거죠. 저도 쓱쓱 했는데 우와 하고 싶은데 ㅎㅎ 그럴려면 낙숫물로 바위에 새길 만큼의 훈련이 필요한 거겠죠? 뭐 그렇게 꿈쩍도 안할 것 같은 걸 조금씩 해가면서 눈금이 하나씩 바뀌는 걸 보는 게 재미있기도 해요. 영어도, 그림도, 읽고 쓰는 것도...ㅎㅎ
 

곰브리치 화려한 도판을 다정하게 손으로 쓸며 찰진 영어문장을 감질나게 씹어먹던 중 드는 의문.


6000년전부터 시작해 기원전 3500년전 화려하게 꽃을 피운 메소포타미아 미술은 어디에?

대략 기원전 800년전, 400년 남짓 전성기를 구가한 그리스 미술에 대한 과도한 지면 배분의 배경은?


예술사만큼 제국의 역사관을 고스란히 투영한 역사가 없구나. 

승리자에 의해 고스란히 도둑맞은 유물을 해석하기 위해 동원한 온갖 이야기.


그러면 아시아 미술은? 동아시아, 그것도 한국 미술은 어디에?


잰슨의 <서양미술사>와 조중걸의 <서양예술사>, 그리고 정말 읽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를 늘어놓고 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하는 교차읽기.

여기서 도움받는 것이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그리고 따끈따끈한 신간 <최초의 역사 수메르>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지금 항공으로 <메소포타미아>가 날아오고 있다. 그게 오면 마음에 드는 유물들을 따라 그려볼 생각이다. 지금 아쉬운 대로 인터넷에서 찾은 그림들을 따라 그리는 것처럼.















갑자기 생각나는 교차읽기의 추억. 

어린시절 개가식 도서관이 아닐 적에 관련 주제의 책들을 늘어놓고 보는 걸 좋아한 나는 늘 도서관 사서 아저씨와 실갱이를 벌여야 했다. 사서 아저씨는 책은 한 권씩 차례로 봐야 하는 거라고 타일렀고, 나는 같은 주제의 책을 늘어놓고 봐야 한다고 우겼다. 아저씨는 급기야 ‘버릇없이’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고 나를 윽박질렀고, 나는 눈을 부릅뜨고 부당함을 고발했다. 지금도 도서관 비탈을 내려오며 씩씩거리며 어디 신문에라도 투고를 할 생각에 머릿속으로 부당함을 기술하던 흥분이 생각난다. 


아니, 왜? 책을 늘어놓고 보면 안되는 법이 있단 말인가?

책 마다 관점이 다르고 한 시대를 기술하는 내용이 서로 다른데 보완하면서 읽는 것이 대체 뭐가 문제인가? 한 책을 끝까지 읽고 난 다음에 다른 책을 읽어야 한다는 법은 대체 누가 만든 건데?!!!


여튼 그래서…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에 따르면,

현 시점까지 이어지는 역사의 내러티브


1. 문명의 탄생(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2. 고대(그리스와 로마)

3. 암흑시대(그리스도교의 부상)

4. 부활: 르네상스와 개혁

5. 계몽(탐혐과 과학)

6. 혁명(민주주의, 산업, 기술)

7. 민족국가의 부상: 제국을 향한 투쟁

8. 제1, 2차 세계대전

9. 냉전

10.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승리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내러티브


1.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2. 이슬람의 탄생

3. 칼리프조: 보편적 통일체를 향하여

4. 분영: 술탄 제국의 시대

5. 재앙: 침략자들과 몽골족

6. 부활: 3대 제국의 시대

7. 서양의 동양 침투

8. 개혁운동

9. 세속 근대주의자들의 승리

10. 이슬람주의의 반발


우리가 흔히중동이라고 부르는 지역은누군가의 관점 내포한 단어다. 누군가에게는 동쪽이 누군가에게는 서쪽일 있으니. 


기원전 550 무렵 페르시아 제국 건설. 조로아스터교가 그리스도 1000 이들의 메인 종교였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선악 판단의 선택을 내릴 아니라 그들의 모든 선적이 우주적인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철학. 선한 이는 스스로의 선택, 혼자 힘으로 하늘나라에 올라갈 있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종교의 조각상이나 상항화, 상징물을 모두 거부, 이후 이슬람 종교미술에서는 구상화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성향이 드러난다. (동방박사 사람은 조로아스터교 사제들)


페르시아 전쟁. 

페르시아 관점에서 봤을 그리스를하기 위해 원정. 문명 사이의 중대한 충돌이 아니었다. 다리우스 황제는 상징적인 공물로 병과 상자를 원했지만 그리스인이 거부. 아주 서쪽 가장자리로 원정갔으나 실패. 


이후 150 , 알렉산더 대왕이 역으로 쳐들어와 페르시아와 전쟁. 가끔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를 정복했다고 하지만 그가 실제로 정복한 것은 페르시아였고, 그때는 이미 페르시아가세계 정복한 뒤였다.”


그리스를 설명하기 위해 이집트를, 로마를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를, 그런 식이다. 메소포타미아는? 페르시아는? 예술사의 영역에서 그토록 화려한 예술적 성취를 이룬, 심지어 더 오랜 기간 ‘같잖은’ 도시국가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들의 자취는 그들의 미술사에 매우 박하게 기술되어 있다.


심지어 예술사 기술이 ‘세계관의 반영’이라는 철학적 명제와 다르게 개별 작품들에 대한 선형적 설명을 시도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때 가장 의지하게 되는 책이 조중걸의 서양예술사다.
















동시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삶의 한 중간에서 삶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뱅뱅 도는 지구에 살면서 뜨고 지는 해 같은 건 없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물 속의 고기가 물 밖을 상상하지 못하듯,

타인의 굶주림보다 손 끝에 박힌 가시가 더 애처로운 게 인간이다.


인간이 어딘가에 머물러 살기 시작할 때부터

그들은 뭔가를 그렸다. 

구석기인과 신석기인들이 그린 그림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스 미술과 로마 미술 사이에도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의식하느냐에 따라

당대의 예술가는 작품 속에 자신들의 불안과 공포,

바람과 희망, 설명할 수 없는 공허와 호기심, 그리고 새로운 도전 같은 걸 

끊임없이 투영했다.


6000년 전에 시작해 기원전 3500년 경에 꽃을 피우는 메소포타미아 미술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대신 그리스가 인류 문화의 꽃이자 원천처럼 여기고 있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의 영향이다. 우리는 근대가 몰락한 현대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근대주의적 사고로 역사와 세계를 해석한다. 물질이 변화해도 인간의 의식이 변화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구석기에서 신석기에 이르는 과정은 르네상스에서 현대에 이르는 과정과 꼭 닮았다. 해서 고대미술을 탐구하는 것은 가장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작이다. 각 시대는 우열 없이 병렬된다. 인본주의와 자연주의가 더 우월하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그것은 여러 세계관 중 하나의 세계관일 뿐이다. 


왜 구석기인들의 자연주의가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극적인 추상으로 변경되었을까.

이 책은 그 탐구의 여정을 촘촘히 담는다.


.

.

.

진중권은 어쩌다 그렇게 됐을까.

미움이, 증오가 그의 눈을 멀게 한 것일까. 아니면 그냥 그렇게 원래 그런 관종이었을까.


아주 아주 오래 전 그에게 원고를 청탁한 적이 있다.

일부러 아주 아주 넉넉한 시간을 두고 청탁했으나 그런 노력도 무색하게 그는 약속을 ‘까먹었다.’

마감이 임박해서야 상황을 묻는 나에게 그는 일언반구 미안하다는 말 없이 자신이 요즘 얼마나 바쁜지 핑계를 늘어놓고 ‘그렇게 됐어요.’라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의 뻔뻔스러운 후안무치에 혀를 내둘렀다. 결국 듣지 못한 사과 한 마디가 그렇게 애석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학자의 눈으로 본 서양미술사는 또 어떻게 해체를 할까 하는 순수한 호기심에 빠른 배송을 선택했다.


제대로 된 미술사는 어디서 공부할 수 있을까?

미술사는 세계사와 미학, 철학, 그리고 과학과 인지론까지 모두 섭렵해야 제대로 쓸 수 있는 영역인 것 같다. 단편적인 작품에 대한 설명으로 미술사 또는 예술사를 기술하는 것은 불가항력이다. 더구나 승자 관점으로 기술되기 일쑤인 ‘역사’를 약자, 소수자, 비기득권자 관점으로 기술하는 책을 만나는 건?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열심히 뒤지고 있지만 잘 나서지 않는다. 한국미술사를 아마존에서 뒤져야 하는 현실. 한국정치사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학을 떠나야 했던 그 시절과 무엇이 다를까….


예술사만큼 강력한 정복자의 세계관이 투영된 역사도 없는 것 같다.

흑인 노예를 정당화하기 위해 흑인들이 얼마나 우생학적으로 열등하고, 그들이 역사에서 ‘죄’를 지었는지, 그 죄의 결과로 왜 피부가 검게 그을렸는지 설명하는 데 열을 올리는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원류라고 생각하는 그리스 조각 앞에서 너무도 생생한 이교도 신을 만나고는 죄다 부서버렸다. 하지만 그들의 만행보다 페르시아의 만행을 부각시키는 데 더 심혈을 기울였지. 


그리스 예술을 정점에 두고 바라보면 로마의 예술을 설명할 때 '야만적'이라는 형용사를 들이댄다. 양식 사이의 우열을 가리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조야한 시각이다. 구석기와 르네상스, 신석기와 현대미술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이 나은 시도다. 


예술은 늘 그 시대의 모순을 돌파하며,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시도에 의해 역사를 썼고, 승자 위주의 혹은 진보론적 역사관은 예술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철저히 위배된다. 서구인이 가진 예술사에 대한 허구성을 낱낱이 파헤친 책은 없나?

없으면 써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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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1-04 17: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학오딧세이로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된 저 ㅠㅠ 조영남을 두둔하기 위해 출간한 책엔 온갖 정의로운 문장들이 가득한데 ㅠㅠ 왜 그럴까요 요즘 ㅠㅠ

그레이스 2022-01-04 17:16   좋아요 2 | URL
저도 그 책 읽었어요 ㅠ

나뭇잎처럼 2022-01-04 20:18   좋아요 2 | URL
저두 롱롱타임어고우에 들여 잼나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내용은 기억이 ㅋㅋ) 좋은 기억 때문에 머릿속 책갈피에 찜해 두었던 저자인데... 뭘까요. 그 사람. 왜 그런 걸까요? 무엇이 그의 정신을 그토록 파괴했을까요? 어떤 결핍이 그를 그토록 관심에 목마른 종자로 만들었을까요? 예술과 시대정신이 직결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텐데, 그에게 시대정신은 과연 무엇일까요?

초란공 2022-01-04 21: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조중걸이란 저자분은 처음 봅니다. 역작이네요. 관심이 필요한 분이라고 하시니 최근에 <죄와벌>에서 본 문장이 생각났어요. ˝그럼 날 버리지 않을 거야, 소냐?˝, ˝날 버리지마. 소냐, 버리지 않을 거지?˝ 혹은 ˝각자 자기 식대로 사는 거고, 자신을 가장 잘 속일 줄 아는 사람이 누구보다 즐겁게 사는 법이오.하하˝ 하는 대사요...^^;; 그분에게는 소냐가 필요한듯 합니다.

나뭇잎처럼 2022-01-05 10:5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관심을 거두어 말려죽이는 게 그분을 위한 최선책일듯요. 미학에만 집중하실 수 있게. 그게 더 생계에 보탬이 되는 일 아닐까요. 요즘 미술에 관심도 높아지는 추세인데. 가까이 계시면 전언 좀 해주세요. ㅎㅎ 자신을 속이면 자신은 알잖아요. 자기가 속이고 있다는 걸. 자신이 속이는 줄도 모르게 속이는 건 그냥 바보? ㅎㅎㅎ 건

2022-01-08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08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0 1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매일매일 2023-04-03 15: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막 좋은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 바로 나뭇잎처럼님의 이 글입니다. 좋은 책은 경험 상 다음 커리큘럼을 설정하게 해줍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혹시 저작은 없으신지요?

나뭇잎처럼 2023-04-06 19:08   좋아요 0 | URL
과찬입니다. 좋은 책은 끊임없는 다음 독서 목록을 낳지요. 한 권을 쓰기 위해서는 수백 권을 읽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읽지 않은 이상 기능적으로 문맹이라고요. 제가 보기엔 수백 권도 그리 많은 것 같진 않은 것 같습니다. 다할 수 있는 최선을 한 다음, 스스로의 부족함을 기꺼이 인정할 수 있을 때, 그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기 전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ㅎㅎ;
 

We are all inclined to be quick with the verdict that ‘things do not look like that’. We have a curious habit of thinking that nature must always look like the pictures we are accustomed to.


We are all inclined to accept conventional forms or colors as the only correct ones.


Look at the world as if we had just arrived from another planet on a voyage of discovery and were seeing it for the first time, we may find that things are apt to have the most surprising colours. Now painters sometimes feel as if they were on such a voyage of discovery.


There is no greater obstacle to the enjoyment of great works of art than our unwillingness to discard habits and prejudices.


OBJECTS MADE BY HUMAN BEINGS FOR HUMAN BEINGS


Anybody who has ever tried to arrange a bunch of flowers, to shuffle and shift the colors, to add a little here and take away there, has experienced this strange sensation of balancing forms and colors without being able to tell exactly what kind of harmony it is he is trying to achieve.


In every such case, however trivial, we may feel that a shade too much or too little upsets the balance and that there is only one relationship which is as it should be. 


He may suffer agonies over this problem. He may ponder about it in sleepless nights; he may stand in front of his picture all day trying to add a touch of color here or there and rubbing it out agin, though you an I might not have noticed the difference either way. But once he has succeeded we all feel that he has achieved something to which nothing could be added, something which is right - an example of perfection in our very imperfect world.



One never finishes learning about art. There are always new things to discover. It is infinitely better not to know anything about art than to have the kind of half-knowledge which makes for snobbishness.



TASTE CAN BE DEVELOPED


To talk cleverly about art is not very difficult because the words critics use have been employed in so many different contexts that they have lost all precision. But to look at a picture with fresh eyes and to venture on a voyage of discovery into is a far more difficult but also a much more rewarding task. There is no telling what one might bring home from such a journey.




10년 전쯤인가. 


뉴욕 어느 서점에선가 도판이 좋아(미술책은 역시 Phaidon) 굳이 무거운 가방에 하나 더 얹어 산 것이 곰브리치의 미술이야기(The Story of Art). 대문자 A를 쓰는 Art 같은 건 없다고 멋지게 포문을 여는 이야기답게 이 책은 일반 대중, 그것도 예술에 대해 잘난 체 하는 것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을 위해 전문용어를 최대한 자제하여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쓰여진 글이다. 그렇게 많이 소개하는 작품과 작가들 중에 여성작가와 여성작가의 작품이 극히 드물다는 게 함정이긴 하지만. 이 책을 굳이 이제서야 펴든 이유는 뭘까. 아니 펴들게 되었던 이유는? 정말 마음이 가라앉지 않으면 절대 허투로 읽지 않겠다는 결기였던 것일까. 어느 날 문득 펴든 문장은 영어라는 것이 믿기지 않게 모국어처럼 친하게 다가왔다. 아마도 내가 무척이나 관심이 있는 주제여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10년 전보다 영어 실력이 조금이나마 향상되어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그냥 딱 지금 내가 너무도 읽고 싶은 책이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곰브리치가 말한 것처럼 ‘최대한 쉽게’ 쓰여져서 그런 지도 ㅎㅎㅎ. 이미 그 책을 살 적에도 몇 줄 읽어보고 이 정도면 읽는 데 크게 무리 없겠다 싶어 샀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물론 그렇게 산 많은 책들 중에 먼지를 쓰고 앉아있다가 소리없이 방출된 아이들도 여럿 있긴 하지만. 


결론은 지금이라는 것.


미술에 관한 책은 늘 관심 속 중앙에 자리 하고 있지만 개인적인 시각으로 누구나 아는 그림을 그저 그럴 듯하게 이야기하는 책들을 늘 경계해왔다. 그래서 그나마 읽었던 책 중에 가장 손꼽는 책이 조중걸의 <근대미술><중세미술><고대미술><현대미술> 시리즈. 예술이 세계관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는 이 책은 미술사책이자 철학책에 더 가까운 책이다. ‘형이상학적 해명’이란 부제가 이를 뒷받침한다. 아직 해외 미술사가들의 연구를 많이 읽진 못했으나 ‘형이상학적 해명’을 바탕으로 고대부터 현대까지 집요하게 판 책은 거의 유일무의하지 않나 싶다. 미국 맥그로힐 출판사에서 미술 교과서로 쓰고 싶다고 계약 중인 걸로 안다. 서양예술사(미술사, 음악사, 문학사)와 수학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인생의 오랜 시간을 신대륙과 구대륙의 미술관 근처에서 맴돈 작가만이 쓸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늦게나마 곰브리치를 시작한 이유는.


미술사에서 가려진 여성의 시각, 역할, 지위, 의미 등을 다각도로 살펴보기 위해 기존의 시각을 정확히 알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불현듯 들어서다. 지금 열심히 바다 건너 오고 있는 <A Companion to Feminist Art>를 영접하기 위한 밑작업이랄까. 손바닥만 한 책이지만 50년 넘게 고전으로 칭송받는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를 시작하기 위해서라도. 


이미 곰브리치 책을 좀 삐뚤게 보기 위해 읽는 것 같은 생각도 없지 않지만 예술에 대한 스노비즘을 거부하며, 어떻게 하면 편견에 근거해 판단하는 것을 배격하고, 이제 막 우주선을 타고 지구에 내린 생명체처럼 신선한 눈으로 작품 나아가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필요한지 역설하는 그의 얘기에 조용히 물개박수를 치지 않을 수는 없다. 


사보지도 않고,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서서 000미술관, 000와 함께하는 미술관 기행 같은 류의 책들은, 잠깐 잠깐씩 들춰보는 것만으로도 강한 거부감을 일으킨다. 하지만 곰브리치 말마따나 예술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하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전혀 다른 맥락에 놓인(맥락이 없으면 설명이 불가능한) 작품들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게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그저 ‘유추’할 따름. 그나마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으로. 아주 적은 지식의 양으로.


겨울이 추워 다행이다. 

꼼짝 없이 의자에 착석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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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emy 2021-12-26 14: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Chapter 27 에서 드디어 여성 작가,
Käthe Kollwitz 나옵니다.

이 책은 역사를 가로질러 온갖 visual art pieces 를
소개하고 보여줌으로서 우리들을
예술의 세상으로 초대하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책의 반 이상이 사진이라서 이 책이 좋습니다.

그래서 Gombrich 가 한 말은 그저 이 책의
첫 번째, 두 번째 Sentences 만 생각날 뿐!
″There really is no such thing as Art.
There are only artists.″


나뭇잎처럼 2021-12-26 19:29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첫 문장에 환한 따뜻한 노란색 형광펜을 칠해두었죠. ㅎㅎ 도판이 많아 책은 두꺼워도 읽는 속도가 붙어 좋아요. 아주 아주 좋은 건 전체하지 않으려고 굉장히 노력했다는 생각이 드는 거요. 덕분에 따뜻하고 풍요로운 연말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초란공 2021-12-26 1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오늘 책정리하다가 이 책을 ‘발굴‘했는데요^^;; 책이 무거워서 이제 들고다니지도 못하겠어요...ㅜㅜ

나뭇잎처럼 2021-12-26 19:29   좋아요 1 | URL
하하. 그렇게 오래 간직하셨다는 건 언젠가 이어질 인연이라는 뜻일 거예요. ㅎㅎ 저도 한 10년 이고 지고 다니다가 이제사 클릭! 이제사 만날 인연이었던 거죠. ^^

초란공 2021-12-26 19:40   좋아요 1 | URL
아 그렇군요. 판매된 7백만 부 중 하나의 인연으로요! ^^;

나뭇잎처럼 2021-12-26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살 적만 해도 6백만 부였는데요 ;;;;; ㅎㅎ

persona 2021-12-26 2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조그마한 책으로 가지고 있는데 어째 계속 읽다 말다 읽다말다 하게 되는 거 같아요. 언젠간 저도 완독하고 싶네요. ㅎㅎㅎ

나뭇잎처럼 2021-12-27 16:20   좋아요 1 | URL
저자가 말한 것처럼 도판이 없는 건 언급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도판이 핵심인 거 같아요. 도판을 실물로 보면 더욱 좋겠지요. 읽어서 상상하는 건 아쉬운 일이죠. 완독보다는 미술관 완주를 꿈꾸어 봅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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