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생전 처음 어떤 어리광도 없이 견딜 수 없는 것을 홀로 견뎌야 하는 어린애처럼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무엇인가를 견디고 있었다.”  <층>, 권여선


게으른 변명이지만 권여선이라는 작가를 이번에 처음 알았다. 좋은 인연을 쉬이 만나기가 어려워 한국 작가 찾는 수고를 들이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녀와의 우연한 만남은 ‘견뎌낸다는 것’ 혹은 ‘살아낸다는 것’에 대한 기억을 한달음에 불러들였다. 흔들리는 버스 차창에 부딪히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일어나지 못했던 기억, 몇년째 말없이 누워있는 젊은 아내에게 다정하게 입맞추며 병원에서 살던 한 남자의 얼굴, 보도블록 사이를 뚫고 가로등이 나무인 줄 알고 그 아래 옹기종기 피어나던 푸른 이파리들 같은 사소한 것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오랫동안 외면하고자 했던 슬픈 기억이 어느 날 느닷없이 말간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나고 만 것이다. 


나는 도시노동자다. 누구나 알 만한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대출금 갚느라 누군가의 욕망에 복무하는 삶을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노예 같은 일상을 부정하고자 거짓 행복을 돈주고 사는 소비를 애써 줄이지도 않는다. 가난으로 되돌아 가고 싶지 않아 밥그릇을 내동댕이치는 호기는 결코 부리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가난한 삶이 주는 영혼의 자유가 그리워 경계에서 초조하게 담배를 피워무는 신세다. 그런데 뭘까. 계속 저 너머를 보게 만드는 것은. <이모>의 경호(57세)가 죽기 전 했던 “그런데 그게 뭘까... 나를 살게 한... 그 고약한 게...”의 읊조림이 귓가에 맴돈다.


<이모>는 알류커플(알코올 중독자와 류머티즘 환자 커플)의 이야기를 다룬 <봄밤> 만큼이나 가슴을 저미게 하는 이야기다. 맏이로 태어난 죄로 평생 막내동생의 노름빚을 갚다가 사랑도, 일도, 인생도 모두 잃고 췌장암에 걸려 죽은 윤경호 씨. 지긋지긋한 가족의 굴레와 그에 대한 원망, 자조, 분노는 선연한 핏빛이 아니라 차갑고 건조한 회색빛 아래 묻혀있다. 삶이 그녀에게 가한 모든 악행에 대해 그녀는 ‘복수’가 아니라 ‘지지 않는 법’을 택했다. 그녀조차 새파란 나이에는 자신을 그저 좋아한다는 이유로 남학생의 손바닥에 담배불을 눌러끄지 않았던가. 자신의 온몸에 담배불을 비벼대는 운명이란 놈 앞에서 그녀는 ‘완벽한 자유’ - 저당잡히지 않고, 탓하지 않으며, 오롯이 고립을 견뎌내는 - 로 회심의 바디컷을 날리고 링 위에서 퇴장한다. 신형철의 말마따나 그녀는 삶에서 ‘승리’하진 못했지만 결코 지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독배나 예수의 처형처럼 졌지만 실패가 아닌, 초연함만이 가져갈 수 있는 쟁취다. 하지만 여전히 아프다. 엄마가 누워있던 7년 동안 그나마 있던 집이 날아가고, 밑 빠진 독에 물붓기처럼 버는 돈이 모두 흔적없이 빨려들어갈 적에 나는 그나마 엄마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삶의 악행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던 아버지는 분노를 배설할 출구를 찾아야 했고, 그 감정의 배설물을 매일 뒤집어 쓰는 건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난 ‘지지 않는 법’ 대신 ‘탈출’을 택했고, 다른 공간에서 삶을 지속하면서 간헐적인 배설만 견디면 되는 쪽을 선택했다.  


“어쩌면 기억이란 매번 말과 시간을 통과할 때마다 살금살금 움직이고 자리를 바꾸도록 구성되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했던 <이모>의 ‘나’는 글을 쓰는(스스로는 글을 공부한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이제 막 등단한 새내기 소설가인 <역광>의 ‘그녀’도 글을 쓰는 사람이다. <카메라>에서 우연이라는 가혹한 장난에 무력한 인물들이 스러지고, 당할 적에 ‘글’을 쓴다는 사람들은 모종의 반란을 준비한다. 신의 영역인 ‘우연’ 앞에는 해석하려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필연’이 존재하지만 그 사이에는 반드시 ‘오해’란 녀석이 자생한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나의 총합이지만 ‘내가 기억하는 나’가 타인이 기억하는 나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난 글을 쓰는 사람이란 자신의 오감에 ‘닥쳐오는’ 것들을 두고, 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여긴다. 


중요한 건 자신의 눈 앞에 닥쳐오는 것들이 결국은 ‘오해’라는 것을 아느냐, 모르느냐에서 갈림길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일단 <이모>의 ‘나’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최대한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 이모의 삶을 전달한다. <역광>의 ‘그녀’는 한층 더 자신에게 몰입한 나르시스트이다. 그녀는 사람들의 “어법과 목소리, 걸음걸이, 인사를 하는 제스처와 식사를 하는 속도에 이르기까지 낱낱의 특징을 관찰하고 탐색”하며, 그들이 내비친 “인색한 단서를 통해 그들이 그녀에게 신인지 악마인지 알아내려” 하고, “자신이 상상한 내용의 오류와 적중률을 계산하면 어떤 식으로든 인간학의 지식이 수립되리라고 믿는” 확신범이다. 자신만이 누군가의 결핍을 이해하고 그 사람도 당연히 내 결핍을 이해할 수 있으리란 확신 또는 헛된 희망에 사로잡힌 아픈 사람.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자신의 해석이 ‘오해’일 수 있다는 걸 아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링 위에서 경기를 리드할지, 끌려갈지 나누는 분수령이 되는 것처럼, 자신의 ‘확신’이 ‘병적인 것’이냐, 아니냐를 아는 것이 성숙을 나누는 기준점이 된다. 그렇다고 성숙이 지상과제냐, 그런 건 또 아니다. 우린 모두 흠결 많은 존재일 뿐이고, 자신의 흠결도, 타인의 흠결도 넉넉히 끌어안는 것이 흠결이 없는 것보다 백배 낫다. 다만 확신이 어긋나는 순간, 또는 확신이 미끄러져 내려오는 순간, 매달릴 것이냐, 선선히 보내줄 것이냐는 선택이 늘 우리 앞에 놓여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과거라는 건 말입니다. 무서운 타자이고 이방인입니다. 과거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도 수정이 안 되는 끔직한 오탈자, 씻을 수 없는 얼룩, 아무리 발버둥쳐도 제거할 수 없는 요지부동의 이물질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기억이 그렇게 엄청난 융통성을 발휘하도록 진화했는지 모릅니다.” <역광>, 권여선


권여선, 그녀는 오해하는 자들을 나무라지 않는다. 우리는 삶이라는 놀이터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오해하고 어긋나고 술래잡히고 술래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징징대지 않는 것. 견디는 것의 숭고함만큼은 전편을 통해 선명하게 보여준다. 비록 <역광>의 새내기 소설가의 무력한 다짐을 빌리긴 하지만 “누군가에게 질투나 원한을 품을 수 있고 그에게 닥친 불행에 쾌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것을 그토록 천하게 표현하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고, 예술가로서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도 한다. 어쩌면 예민한 자들이 지고가야 할 숙명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애이불비(哀而不悲). 그녀가 신문과 나눈 인터뷰 글을 읽고 적잖히 위안이 됐다. 내가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되리란 기대를 품고 글을 쓰는 게 전혀 틀린 선택은 아니라는 위안. 


“만약 제 인생에 술과 소설이 없었다면 제 결벽주의적인 성향이나 호불호가 분명한 성격 등에 비춰볼 때 매우 까다롭고 편협한 인간이 됐을 확률이 높아요. 술을 마시면 제가 하는 짓을 모르니 어쩔 수 없이 겸손해지고 상대방에 대한 이해나 배려의 폭도 넓어진 거죠. 또 제가 이른바 점점 ‘착한’ 소설을 쓰게 된 것도 나이가 든 이유도 있지만 아마 글을 써오면서 순화된 면도 분명히 있을 거예요. 언어 자체가 주는 교정의 힘이 분명히 있거든요. 아마 글을 쓰지 않았으면 저는 더 괴팍한 사람이 됐을 거예요.”  <경향신문> 


분명, 결핍을 가진 사람 눈에는 결핍이 더 잘 보인다. <봄밤>의 가슴 시린 알류커플 수환과 영경처럼. “그가 조용히 등을 내밀어 그녀를 업었을 때 그녀는 취한 와중에도 자신에게 돌아올 행운의 몫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의아해했다.” 서로의 결핍을 확인하는 순간 서로의 곁을 내어주는 일은 그토록 자연스럽다. 비록 그 확인이 모종의 오해 또는 착각이라 할지라도. <역광>의 ‘그녀’가 자신의 결핍으로 ‘위현’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면, <봄밤>의 알류커플은 자신들의 결핍을 하나도 남김없이 털어내주는 것으로 사랑을 완성한다. 그들의 사랑이 절절하게 다가오는 것은 결핍조차도 서로에게 내어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 때문이다. “요양원 사람들은 수환이 죽었을 때 자신들이 연락 두절인 영경에서 품었던 단단한 적의가 푹 끓인 무처럼 물러져 깊은 동정과 연민으로 바뀐 것을 느꼈다. 영경의 온전치 못한 정신이 수환을 보낼 때까지 죽을 힘을 다해 견뎠다는 것을, 그리고 수환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죽어버렸다는 것을, 늙은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도대체 그 ‘없음’을 사랑하게 되는 인간 감정의 연원은 어디일까. 자신의 결핍을 최대한 인정받고자 하는 이기적 욕구인가, 아니면 이 또한 이웃을 사랑하라는 신이 주신 고귀한 능력인가. 관계라는 교환시스템에서 대가를 바란 ‘내어줌’은 이기적 욕구라 불러도 억울하지 않을 것이다. 기꺼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 그제서야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종종 우스갯소리로 ‘한이 많아서’라고 스스로 놀리는 나는 내 안의 결핍으로 인해 누군가의 결핍을 읽어내는 게 빠른 편이다(물론 나의 착각에). 참으로 불가해한 사실은 그 결핍이 크면 클수록 광속으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러한 광증은 사소한 단서에서 시작한 오해와 착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알류커플보다는 <역광>의 ‘그녀’에 더 가까운 편인데, 그래서 ‘위현’이 저런 말을 내뱉었을 때(결국은 ‘그녀’의 내부에서 들려온 소리) 그만 떨리고 말았다.


““강도처럼 내게서 차분한 체념과 적요를 빼앗으려는 당신은 누굽니까? 은은한 알코올 냄새를 풍기면서 내 곁을 맴돌고 내 뒤를 따르는, 새파랗게 젊은 주정뱅이 아가씨는 대체 누굽니까? 신도 없는데 이런 나쁜 친절은 어디서 온 겁니까?” 그리고 그는 무엇을 기다리는 듯 아니면 뭔가를 음미하는 듯 잠시 그녀의 냄새를 맡았다.” <역광>, 권여선


나는 여전히 내 안의 결핍을 두고 괜찮다, 괜찮다, 쓰다듬어 줄 손길이 그리운 거다. 신기한 듯 작은 손을 어루만지며, 그냥 그렇게 생겨서 참 이쁘다고 했던 엄마가 눈물나게 보고 싶은 거다. 권여선, 나는 오늘 그녀에게서 나의 고통이, 나의 슬픔이, 나의 주저함이, 나의 초조함이, 나의 흠결이, 다 괜찮다는 다독임을 받았다. 내가 글을 쓰고 싶은 건 이런 다독임이 너무나 고마운 줄 알기 때문이고, 누군가에게 그런 다독임을 줄 수 있길 바라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등을 보이며 거절할 지라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