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자들 환상문학전집 8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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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귄의 작품 중 워낙 알려진 작품이라(상도 많이 받고) 기대를 하고 보았는데 워낙 예스런 표지에 한 번 놀라고, 예스런 번역에 또 한 번 놀랐다. 잘 모르는(르 귄이 만들어낸) 단어와 개념이 많아 원서 대신 번역서를 일단 선택했는데, 다음에는 원서로 바로 갈까 하는 생각도 들고. 1974년에 발표된 소설. 인류의 공산주의 실험이 실패로 향하는 시기에 착취자와 피착취자, 아나키즘과 아키즘, 과거와 현재, 부분과 전체, 영속과 무한의 대비를 통해 지구인에게 고착화된 세계관을 뒤집는 거대한 헤인시리즈의 대표작. 옛 소련의 집단농장과 지금 현재 쿠바의 자발적 빈곤이 떠오른다. 어느 누구도 다시 그 시절로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배고픔을 참지 못한다. 과연 공동체를 위한 자발적 빈곤이 탐욕의 정점을 향해 치달아가고 있는 지구인들에게 가능할까. 여전히 공산주의는 의미있는 실험이며 앞으로도 보다 개선된 형태의, 보완된 공산주의 가능성을 희망하는 한 사람으로서 <The Dispossessed>는 현실감 있는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틈을 엿보게 해준다. 제아무리 낯설고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그나저나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뭘까? 교조화된 공산주의는 진정한 공산주의가 아니었나? 쿠바가 아직도 버틸 수 있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바가 되고 싶다고 나서는 나라는 없겠지? 우리보다 의료와 교육이 앞서지만 더운 여름철 선풍기 하나를 얻지 못해 줄을 서야 하는 곳이라면. 세계 제일 강대국에 사는 사람들이 의료보험이 없어 수술을 받기 위해 쿠바로 오지만 그곳에서 사는 것은 원치 않는 곳이라면.  출간된 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속에서 빛바랜 아나키즘을 쓸쓸하게 추억하지 않기를. 내 안의 트럼프, 내 안의 박근혜와 싸우는 것이 힘겨웠듯 앞으로 더한 내 안의 000과 대결해야 하는 지금. 헤인시리즈가 얼마 만큼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을지는 좀 더 여행해 보아야 알 것 같다.



우리에겐 그것밖에 없소. 오직 서로밖에. 여기 당신들은 보석을 보지만 거기서는 눈동자를 봐요. 그리고 그 눈 속에서 장려함을, 인간 영혼의 장려함을 보는 거요. 우리의 남자와 여자들은 자유롭기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자유롭소. 그리고 당시들 소우자들은 소유당하지. 모두들 감옥 속에 있어. 각각이 외롭게, 고립되어, 소유하고 있는 쓰레기더미와 함께. 당신들은 감옥에서 살고, 감옥에서 죽소. 내가 당신들 눈 속에서 볼 수 있는 건 그게 다요. 벽 말이야, 벽! (261)

반려 관계 역시 자발적으로 구성되는 연합이었다. 되어 가는 한에는 되어 가고, 되어 가지 않으면 그만두는 것이다. 그것은 제도가 아니라 기능이었다. 개인의식 외에 다른 구속력은 없었다.
막연한 기간의 약속일지라도 약속이 자발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오도의 사상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변화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한 그녀의 주장은 약속이나 맹세를 무효화시키는 듯 보엿지만, 사실은 그 자유야말로 약속을 의미있게 했다. 약속은 주어진 방향이요 선택의 자가 제한이었다. 아무 방향도 주어지지 않고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썬택하고 변화하는 자유는 쓸모없는 것이 될 것이다. 감옥에 있는 것처럼, 스스로가 만들어 낸 감옥, 어디로 가든 별다를 게 없는 미로 속에 있는 것처럼. 그래서 오도는 약속, 맹세, 성실이라는 개념을 자유의 복잡성에 있어 필수적인 것으로 보게 되었다. (280)

불성실하다고 해서 어떤 법적 도덕적 구속이 가해지지 않는 사회에서 순수하게 자발적으로 성실함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언제든 닥칠 수 있고 몇 년씩 이어질 수도 있는 이별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여 그 기간 동안 성실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일종의 도전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도전받는 것을 좋아하고, 역경 속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법이다. (281)

나의 세계, 나의 지구는 폐허입니다. 인간이라는 종이 망가뜨린 행성이죠. 우리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번식하고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싸워 댔고 죽었어요. 식욕도 폭력도 통제하지 않았죠. 적응하지 않았어요. 우리 자신을 파괴한 겁니다. 하지만 그 전에 세상을 먼저 파괴했죠. (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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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2-27 11: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바나에 한번 가야하는데 ㅎㅎ 동감이에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나뭇잎처럼 2021-12-27 16:05   좋아요 2 | URL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에 가서 신나게 몸도 흔들고요. ㅎㅎ 고맙습니다. ^^

persona 2021-12-27 12: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느끼기엔 원서도 예스러워요. ㅋㅋㅋ 저 올 초에 이거 원서로 읽다가 적응 못해서 아직 못 읽었어요. 완독 축하드립니다!^^

나뭇잎처럼 2021-12-27 16:07   좋아요 1 | URL
하. 그렇군요. 워낙 문장이 좋다는 칭찬이 많아서 .. 넘 기대했나봐요. ㅎㅎ 당대를 꿰뚫는 오늘의 SF의 심장은 어디에 있을까요? 부디 몇 줄 읊어주시면 따르겠나이다... 왠지 스티븐 호킹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그레이스 2021-12-27 13: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본주의적인 시선으로 보면 쿠바는 후진국이죠.
조금 더 뒤에 평가될 부분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책읽기가 바빠서 읽다가 멈췄는데 🍃처럼님 덕분에 기억이 났었요
다시 펼쳐야겠네요.
아무래도 책장파먹기를 해야할듯요^^
그런데 오늘도 배송될 책이 있다는...!

나뭇잎처럼 2021-12-27 16:12   좋아요 2 | URL
아무도 읽으라고 강요한 사람은 없는데 스스로 만든 책 무덤에 파묻혀서는 ㅋㅋㅋ 그쵸? 올해는 정말 조금씩, 천천히, 다시 한 번, 재독의 즐거움에나 빠져보자 했는데... 왜 자꾸 뭐가 오는 걸까요. 멀리서도 오고, 가까이서도 오고, 킨들서도 오고, 오더블에서도 오고... 인류의 미래가 어디에 있을까 궁금합니다. 쿠바가 되었든, 북유럽이 되었든. 부자들만 가는 화성에 인류가 미래가 있는 건 결코 아닐텐데 말입니다. 내 안의 탐욕을 바로보지 않는 한 인류의 미래를 희망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요. 올해도 열심히 파셨듯이, 내년에도 즐겁게 파먹기를 계속하시길요.^^ 여럿이 하면 좀 덜 외로운 거 같기도 하네요. ㅎㅎ

mini74 2021-12-27 13: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나뭇잎처럼님 넘 재미있어요. 동네 슈퍼가듯 아바나에 한 번 가야 하는데. 넘 멋진 첫 문장. 전 르 귄 소설이 어렵더라고요 ㅠㅠ

나뭇잎처럼 2021-12-27 16:20   좋아요 1 | URL
벌써 몇십 년 째 마음에 품고 있으니 동네 슈퍼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것도 맞는 거겠죠? ㅎㅎ 전 어렵다기보다 넘 직설적이어서 약간 놀랬어요. 문학이란 게 은유와 상징과 뭐 그런 좀 복잡하면서도 손에 가물가물하지만 두고두고 떠올려보면 뭔가 좀 다른 것 같고 하는 그런 맛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정공으로 치고 들어오시니까 프로파간다(?) 그런 느낌도 나고, 연설문(?)인가 싶을 때도 있고. 아직 작가의 극히 일부분의 작품을 읽은 상태가 뭐라 단정하긴 그렇지만 지난 수십년 동안 많은 SF 작품들에 양분을 제공하신 건 맞는 거 같아요. 그래서 오히려 익숙하게(좀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거 같고요. 일단 몇 권 더 가보려고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