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읽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 되고 있다. 큰맘 먹고 성능을 높인 다초점 렌즈는 계속 고쳐써야 하고, 시린 눈은 세상을 투명하게 투과하지 못한다. 몇번이나 눈을 깜빡거린 후에야 다시 놓쳤던 문단을 찾아 글줄 사이를 더듬는다. 잠시, 읽는 것이 사라지고 난 다음을 생각하니 체념의 한숨이 흘러나온다. 읽지 못하는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목소리를 봉사하겠다고 한 생각은 결국 내게 필요한 것이 될까. 마음이 부산스럽고 지나간 기억들이 제멋대로 머릿속에서 튀어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윌리엄 트레버에게 손길이 간다. 그의 고요한 체념과 받아들임이 처방처럼 느껴져서일까. 소란스럽던 마음과 머릿속이 잠시나마 고요와 평화로 차오른다. 번역소설은 원문으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도 잠시 접어놓는다. 그의 영어문장은 결이 너무 섬세해서 조금 뒤죽박죽이어도 누군가 애써 우리말로 바꿔준 걸 읽는 게 그나마 낫다. 그저 언어나 문장 너머에 있는 뭔가를 더 상상하고 그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언젠가 <파리 리뷰>에 실렸던 그의 인터뷰 기사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기차역까지 친절하게 마중나와 있던 그의 인품과 인터뷰 내내 흐르던 그의 다정함. 요란하지 않고 과하지도 않은(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성품에 따뜻한 눈동자만 맑게 빛날 것 같은 사람. 너무 애써 전업작가가 되려고 몸부림치는 것 같지 않게 느껴졌던 건 그가 꽤 괜찮은 광고회사를 다니면서 틈틈이 글을 썼기 때문이었을까. 30대 중반이 넘어서야 전업작가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게 담담한 그의 대답만큼이나 그의 이력이 참 ‘답다’는 생각을 했었다. 결국은 나이들고 병들고 죽는다. 이별하는 순간 가장 우아하게 보이는 커플처럼, 쇠락을 앞둔 노인의 스러짐이 아름답길 소망하는 건 지나친 욕심일까. 천천히 놓아버리고 내려놓고 내려오는 길을 담담히 걸을 수 있을까. 가물해지는 기억을 위해서라도 그의 글을 다시, 또 다시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