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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일 계엄령 선포가 대한민국 국민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듯, 2016년 트럼프의 당선, 그리고 2021년 의사당 난입 사태는 미국 국민들, 특히나 지성을 자처하는 학자들에겐 메가톤급 충격이었으리라. 이에 하버드의 두 정치학과 교수가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그동안 민주주의를 자처했던, 혹은 먼저 민주주의를 성취했다고 여겨진 나라들이 어떻게, 누군가에 의해, 어떤 과정을 통해 민주주의가 무너지는지 조사하고 전제주의자를 가늠하는 리트머스지까지 만들었다. 2018년 “How Democracies Die”가 출간된 배경이다. 우리나라에선 2018년 초판이 나온 이래 무려 12쇄를 찍었다. 

















하지만 트럼프의 공세는 재임 성공 실패에 좌절하지 않았지. 더욱 거세지는 트럼프 일당들의 지지 기반과 낙후된 미국 선거제도의 역사, 그리고 그 왜곡된 역사로 인해 어떻게 한줌 되는 공화당 세력들이 과대표되어 미국 민주주의를 정체시키고 있는지 해부하는 책 “Tyranny of the Minority”를 2023년에 냈다. 아마도 트럼프 컴백을 목도하기 전이긴 했지만 먹구름처럼 몰려오는 세력들을 감지한 절박함이 담겨있다. 우리나라에선 2024년에 출간되었다. 
















두 책 다 나는 2024년 12월 3일 이후에 읽었다. 


원서를 읽고 영어로 토론하는 책 모임을 운영 중인데, 12월 3일 이후 아무 책도 읽을 수가 없어서 멘붕에 빠졌다가 이 두 책이 동앗줄이 되었다. 급하게 모임 공지를 하고 설 한 주를 빼면 거의 2주 간격으로 읽은 셈인데 반응이 뜨거웠다. 모임에 참석한 멤버 중에는 200여 년 가까이 지도에서 사라졌던 폴란드에서 온 사람도 있고, 미국의 ‘deep south’ 주 중 하나인 버지니아 출신, 아일랜드인, 아프리칸 아메리칸 등등 한국인보다는 외국인 비율이 더 높았다. 다들 탄핵과 체포 불응, 그 와중에 서부지법 난입사태를 겪으며 도대체 이 놀람의 끝은 어디인가에서 헤매고 있던 와중에 만난 책이라 너무도 반갑고 고맙고 어처구니없게도 ‘힘이 되었다’고 입을 모았다. 왜냐구? 우리만 그런 게 아니어서! 


"최근 미국 정치인들은 경쟁자를 적으로 여기고,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고, 선거 불복을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법원과 안보기구, 윤리위원회 등 민주주의의 제도적 완충장치를 허물어뜨리고 있다.”


저 문장에서 미국을 한국으로 바꾸어도 전혀 다르지 않다. 선거 결과를 부정하고, 선거 시스템을 부정하고, 사법기구를 흔들고, 자신 외에 모든 사람들을 바보 천치로 몰아가는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국경없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았던 칠레, 헝가리, 베네수엘라뿐만 아니라 멀쩡했던 민주당 지지자가 어떻게 군부 쿠데타와 손잡을 수 있는지(태국), 의사당에 난입한 폭도들을 두둔한 보수당이 얼마나 민주주의 퇴보에 결정타였는지(프랑스), 얼마나 집요하게 노예제로 살아남았던 남부 주들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갉아먹고 있는지가 영화보다 더 충격적이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은 어떻게 우연히 미친놈이 일으킨 소요사태가 아니라 건국 이래 끊임없이 정권 창출에 실패해온 (탄핵, 구속, 암살, 하야 등등) 저 수구 보수 집단이 제도적 틈을 이용해 벌이고 있는 마지막 발악 같은 것. 문제는 계엄령 선포보다 더 무서운 국힘의 탄핵 반대로 이어지면서 극우를 선동하고 있는 양태이며, 문제는 서부지법난입보다 그 이후에 그들을 두둔하고 나서는 저들이며, 문제는 저인망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파고들고 있는 저 반동 극우세력들이고, 문제는 기득권을 놓지 않기 위해서 눈과 귀를 가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 수구반동 언론과 작당한 놈들이다. 


제도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이들의 땀과 피와 투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제도도 완벽하지 않다. 미국처럼 구멍 숭숭 뚤린 헌법으로 시작했지만 1811년부터 2014년까지 316번의 수정을 거친 노르웨이 헌법은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민주적인 나라가 되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을 신화화하며 헌법을 마치 신성불가침의 그것처렴 여긴 미국은 아직까지도 간접선거제도인 선거인단을 가진 거의 유일한 나라로 남아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가장 낙후된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우리나라는 그런 나라의 제도를 가지고 왔다. 민의를 대변하지 못하는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는 아직도 독소처럼 남아있다.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긴 했지만 위성정당을 만들면서 의미가 퇴색되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해야 하는 동전 던지기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우리편 아니면 적이 되는 이 제로섬 게임에서 양극화는 필연적 파국이 아닌가? 질문의 질문은 꼬리를 물지만 정치를 저들만의 리그로 접근하는 그 어떤 논리에 대해서도 나는 선을 긋고자 한다. 지금도 이 추위에 거리에 나서는 수많은 사람들과 피와 눈물로 전쟁의 잿더미에서 이만큼까지 우리가 누릴 수 있게 해준 먼저간 사람들의 노력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나중에 후대가 너는 그때 무엇을 했는가, 라고 물어보면 외면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책은 답을 주지 않는다. 위안과 희망을 줄 뿐이다. 책은 글에서 끝나지 않는다. 함께 이야기 나누고 공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 힘을 얻는다. 모인 사람들이 서로에서 고맙다는 말을 차고 넘치게 했다. 우리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어서.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고 느낄 수 있어서.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라고 여길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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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2-10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6년에 나온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를 2024년에 만나서 천천히 읽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이 물러간 뒤인 1945년부터 전두환을 끌어내린 1987년에 이르도록 제대로 뽑기(선거)를 한 바가 없는 발자취라고 느낍니다. 일본이 물러간 뒤에는 이승만이라는 우두머리가 나라힘을 거머쥐려고 막짓을 일삼았고, 그 뒤에 총칼로 자리를 꿰찬 박정희라는 꼭두머리는 차갑게 얼린 사슬나라를 이었습니다.

그런데 1987년부터 2024년에 이르는 여러 뽑기를 지켜보노라면, 막상 일꾼이 아닌 심부름꾼만 자리에 오르며 벼슬을 쥐었구나 싶어요. ‘일꾼’이란, 스스로 보금자리를 가꾸려고 살림을 지으려고 일으키는 즐거운 나날을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심부름꾼’이란, 남이 시키는 대로 고스란히 따라가는 허수아비입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는 여태까지 “국민의 심부름꾼”을 뽑는다고 여겼는데, 잘못 바라본 셈이었구나 싶더군요. ‘사람들(국민)’은 으레 왼오른으로 갈리거든요. 한 사람이라도 더 밀어준 사람이 많은 쪽이 시키는 대로 하는 심부름꾼만 뽑아 온 나머지, 1987년부터 2024년에 이르도록, 우리나라 모든 무리(정당)는 서로 싸우고 다투면서 ‘싸우는 두 무리가 똑같이 길미를 챙기는 얼거리(법)’를 슬금슬금 단단히 높여 왔다고 느낍니다.

‘인기투표’는 ‘좋아하는(팬덤)’ 또다른 허수아비로 기울어 버립니다. 오늘날 ‘국민투표’는 그저 ‘인기투표’에 갇혀서 허우적거립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일꾼뽑기’를 제대로 못 했습니다.

오늘날 이 나라에서는 아마 99%에 이르는 사람이 서울(도시)에 살 텐데, 서울(도시)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심부름꾼(정치인)을 더 많이 뽑고, 전라남도 같은 데는 서넛이나 너덧이나 대여섯 고을(군)을 묶어서 심부름꾼을 겨우 하나 뽑습니다. 그런데 전라남도 시골(군)은 너덧이나 대여섯을 묶어도 ‘서울에 있는 동 하나’보다도 작습니다. 그리고 전라남도에 있는 작은 시골 ‘군청’은 웬만한 도청이나 시청보다 크고 우람할 뿐 아니라, 벼슬아치(공무원)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제가 사는 전남 고흥은 고작 7만 안팎인 사람이 살지만, 벼슬아치가 2000이 넘습니다.

2024년 12월부터 2025년 2월까지 석 달 동안 우리나라에 우두머리(대통령)가 없습니다. 곧 방망이(법으로 철퇴)를 맞고서 사슬(감옥)로 집어넣을 텐데, 지난 석 달 동안 우두머리가 없더라도 나라는 멀쩡하게 돌아갑니다. 게다가 지난 석 달 동안 다른 심부름꾼(국회의원)이 무슨 심부름이나 일을 했는지 짚자면, 다들 아무 심부름도 일도 안 했다고 느낍니다.

나라가 어지러울수록 나라는 새길을 찾는다고 느껴요. 새말을 익히려면 그야말로 새마음이어야 합니다. 프랑스 옛말 “새 포도술은 새 자루에 담는다”는 이야기처럼, 우리도 새길을 찾아야 하기에 낯설거나 어지러운 나날을 보내는구나 싶어요. 그렇기에 이 어지러운 지난 석 달은 ‘막상 대통령과 국회의원과 장관과 총리 따위 하나도 없어도 나라는 멀쩡하구나. 아니, 오히려 대통령 따위는 아무도 없더라도 나라가 훨씬 잘 굴러가는구나. 그런 이들을 굳이 뽑아서 돈(일삯)을 허벌나게 줄 까닭이 없구나.’ 하고 배우는 나날이라고 여길 만하지 싶습니다.

책은 길(답)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책은 여러 가지 실마리와 발자국을 보여주지 싶습니다. 촘스키 님이 쓴 글과 책에도 나오듯,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은 똑같이 싸움꾼(전쟁범죄)이었고, 두 무리는 똑같이 붓(언론·광고)으로 그들 길미를 챙겨 왔습니다. 우리나라도 매한가지라고 느껴요.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는 말 그대로,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일하는 사람으로 서면서, 모든 자리를 ‘심부름꾼(국민의 대변자)’이 아닌 ‘일꾼’이 앉을 수 있도록 몽땅 물갈이를 하는 길을 스스로 생각해서 마련할 때이지 싶습니다.
 

세계를 드러내는 데 한없이 부족한 언어 대신 형상을 주 무기로 삼아야겠다고 작정한 이후 두려움과 주저함은 그림 언저리를 계속 맴돈다. 힘 닿는대로 전시장을 돌아다니고, 시선을 사로잡는 작가가 있으면 키보드만 두드리면 나오는 무궁무진한 자료에 도록까지 그러모아 한참 빠져 지내고, 의아한 대목들을 명쾌하게 풀어주려는 외서가 있으면 또 한참을 매달려 읽으며 그리지 못하는 자신을 변명할 거리, 또는 그리지 않는 이유를 만들어내느라 분주하다. 


허나 국내/국외 전시장을 드나들수록 마음에 드는 그림은 이상하게 점점 줄어들고, 책을 읽을수록 허기진 마음은 더 갈급해진다. 그림을 대하는 태도나, 그림을 감상하는 식견이나 왠지 모를 석연치않음이 계속 감지되기 때문이다. 서구 중심의 미술사 전개는 차치하더라도 거기서 우리 그림, 우리 작가들을 바라보는 제대로 된 시선을 만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벽에 낙서하듯, 온갖 더러운 속내를 모두 배설하듯 그렇게 ‘표현’한 작품들의 어느 대목에서 내가 감동해야 하느냐. 얼마에 팔렸고 그래서 얼마나 대단한지 호들갑 떠는 잔치에 왜 내가 같이 들떠야 하느냐. 도대체 어떤 작품을 좋은 작품이라고 볼 것이며, 좋은 작품은 어떤 사람에게서 나오는냐. 대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불혹을 한참 넘어 지천명이 코앞인데도 앞에 보이는 길은 질풍노도 청년의 앞길처럼 안개가 자욱하다. 


지난 한 해 동안 읽은 책들을 살펴보니 거개가 영어로 된 책들이다. 영어공부가 목적은 아니었으나 대체로 관심있는 책들 중에는 번역되지 않았거나 번역되었더라도 영문이 읽기 편했다. 왜 그랬을까. 아직도, 아마 꽤 오랫동안 첨단의 것들은 우리가 아니라 영어로 된 것들에 있다는 생각이 작용했을 것이다. 얼마간 사실이라 하더라도 영어로 된 책들을 물리게 읽고 있으면 문득 서글프다. 그럴 때마다 종종 들춰보았던 것이 박영택의 글이다. 그의 명징하고 삿기 없이 글들은 종종 눈에 낀 티나 혀에 낀 백태를 제거하는 것마냥 시원한 구석이 있다. 현학적인 태도로 읽고 공부한 것들을 상찬하듯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몸소 겪고 만난 사람과 그를 둘러싼 사유, 그리고 오랜 시간 그가 공들인 미술 큐레이팅의 노고가 그의 심성을 대하는 것마냥 맑고 곱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도 왠지 믿고 만나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의 글이다. 



자신의 일 이외에는 완전히 무심한, 심플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내가 만난 좋은 작가들의 공통점이다. 그들은 또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조차 극구 두려워하는 존재들이다. 완벽하게 자신을 던지지만 동시에 그 모든 일을 무로 돌려버릴 줄 아는 그들은 낙관도 절망도 없이 그 경계에서 평심을 유지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자신의 작업이 결국 주어진 삶에서 잠깐 인연을 맺는 일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것밖에는 잘하는 게 없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작업에 임하는 자들이다. 이런 무심함과 겸손함 속에서 결국 작업은 과하거나 넘치지 않고 신비주의나 허황한 예술지상주의로 전락하지 않으면서 정확하고 예리하게 몸을 내민다.”(p.81)


어떤 사람이 좋은 작가일까. 그런 건 미술 이론서에서 잘 일러주지 않는다. 사실은 그런 게 가장 궁금한 대목인데 말이다. 내가 그토록 수고를 들여 되고 싶은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이 나이에, 이 경력에, 이 순간에. 미디어를 수놓는 많은 작가들의 이야기가 포장되고 미화되면서 과연 그런 길이 나의 길일까,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내가 들여야 할 노오력은 또 얼마만큼일까 아득해진다. 세상과 절연하고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수도승의 삶은 더더군다나 나의 길과 아득히 멀다. 


작업실 타령을 하며 어떻게 하면 좀 더 크고 멋진 작업실을 가질 수 있을까 골몰할 때면 뭔가 주객이 전도된 죄책감이 밀려오지만 어쩌랴. 그게 지금의 나인걸. 양평이 좋을까, 가평이 좋을까. 속초가 좋을까, 양양이 좋을까. 좁아도 서울이 낫지 않을까. 언젠가 갖게 될 나만의 작업실을 꿈꾸며 작업실의 멋진 모습을 그려보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그랬던 생각이 부서진 건 실제로 작업실을 갖게 되면서이다. 아파트 건물 지하에 싸게 나온 빈 사무실을 덜컥 계약했는데 그곳은 결국 오랜 시간 남편과 나의 자전거 보관소가 되었다. 매달 나가는 비싼 월세가 아까웠지만 그 당시 나는 보고 싶고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작업실에 틀어박혀 그림만 하기엔 너무 분주했다. 아마도 나의 그림에 대한 열정은 거기까지 인가보다, 스스로 깨닫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1년 계약을 한 달 앞당겨 조기 퇴실하며 다시는 작업실 타령 같은 건 하지 말아야지 했는데, 박영택이 본 세속적인 작가들의 작업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는다는 사실에 오히려 위안 같은 걸 받았다고나 할까. 


온통 통유리로 마감한 작업실에는 아름다운 풍경이 그림을 대신해 들어차서 작가들은 그 풍경에 눌려 있다. 자연만한 그림이 어디 있을까? 그러다 보니 나무에 물 주고 화초에 비료 주며 정원을 가꾸는 일로 하루를 다 보내고 정작 그림은 손도 못 대보는 그런 작가도 있다. 주인 닮은 개들 역시 하루종일 풍경에 취해 몽롱하다. 그들은 아마도 풍경을 소유하고 있다는 데서 일종의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p.140)


박영택이 책에서 찾은 작가들의 작업실은 그런 작업실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궁벽한 시골, 가난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차가운 냉기가 정신을 번쩍나게 하는 그런 세상의 극단 같은 곳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감히 말하건데, 그런 작업실에서 고독을 마주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 못되니 나는 작가가 못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비약하진 않는다. 저마다의 삶과 처지가 있고 그 안에서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기 위해 나아가면 된다는 것으로 방향을 잡는다. 


나는 나 자신의 일 외의는 완벽한 무심함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 그렇게 무심하게 오로지 캔버스만 바라보고 그 안에서 형상만 생각하는 것은 나의 삶과 다르다. 나는 어느 순간 우리의 일상이 무너질 수 있는 정치적 현실에 민감하고, 이 나라를 벗어나 전 세계가 보이지 않는 전쟁을 극렬하게 치르고 있는 이 시대를 관통한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내가 하는 행위 속에서 그런 세계의 부조리의 의미를 담아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 


결코 두껍지 않은 책인데, 행간에는 학연과 지연으로 촘촘히 엮인 한국 화단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 무분별한 서구 양식의 수용으로 혼란한 동양 화단에 대한 지적, 우리가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서구의 풍경과 다른지 그걸 구체적으로 드러낸 작가들의 노력이 담겨있다. 여느 미술 감상서나 이론서에서 얻지 못한 대목을 얻는 고마움이 있다. 그래서 읽는 데 잠시 시간을 두고 곱씹어야 한다. 그래서 좋다. 아마 내가 그런 고민이 없었더라면 그런 대목들이 눈여겨지지 않았을지도. 하지만 그런 고민이 있었기에 그가 이런 작가들을 발굴해내려는 노고가 더욱 고맙고 애틋하게 다가왔는지도. 



좋은 그림은 이렇게 현실을 비현실과 만나게 해주는 동시에 사물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상투적이고 습관적인 시선과 감각을 예리하게 비틀어준다. 그리고 나를 성숙시킨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또한 두렵다. 거짓 세상에 맞서 화폭 안에다 자신의 삶의 진액을 쏟아붓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엄격하게 자신을 친친 동여매는 이 자기치유적, 자폐적 그림 그리기란 또 얼마나 허망하고 상처받기 쉬운가. 민감한 감수성과 집중력으로 자기자신을 소멸시켜가면서 회화를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와 존재의 의미, 정신의 정점에 육박하고자 하는 이 행위는 어느 면에서는 고립무원일 것이다.(p.168)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그 순간이 참 좋다. 가만히 들여다 보다가 그리면서 알게 되는 것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그림을 그리기 전에 나는 먼저 나를 위한 그림, 내가 더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는 노력의 과정에서 얻는 부산물 같은 이 그림을 있는 그대로 안아야할 것 같다. 되고 싶은 내가 미디어에 장식되는 작가는 아니니까.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 배워야 한다는 생각은 일찍이 버렸으나 확실하고 안전한 끈이 필요하지 않는가, 라는 현실적인 선택도 굳이 필요없다는 데 도달했다. 그렇다고 화면만 바라보며 자폐적 그림으로 극한적 몰입에 도달할 생각은 없다.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지 그 고민은 아마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겠지만. 


그림은 내 삶의 부산물이다. 내가 사는 삶이 더 중요하다. 그림을 통해 내 삶을 더욱 나답게 살 순 있어도 그림만을 위해 살진 못할 것 같다. 아니, 않을 것 같다. 일단 오늘까지는 그렇다. 생각이 바뀌면 다시 돌아와 적는 걸로. 



p.s. 사실 이 책은 박영택의 근작 <오직, 그림>이라는 책을 먼저 읽고 절판된 책을 중고서점에서 구입해 읽었다. 해외 명작들을 감상에 치우치지 않고 이론에 기대지도 않고 깊이 있게 읽어낸 게 좋아서 그가 다룬 한국작가들의 책을 찾다 발견한 책이다. 워낙 오래된 책이라 때늦은 감이 있지만 좋은 책은 시간이 지나도 좋다. 부디 그가 더 부지런히, 더 야먕있게 미술관련 책을 그치지 않고 써주길 바라는 바이다.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가?

그는 작가를 이야기하며 어떤 그림을 그리면 안되는지 단서를 남긴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각, 감정, 느낌, 감각이 고스란히 화면에 밀착되어 번져나간 그녀의 그림에는 화단의 유행이나 그럴듯한 방법론의 연출, 막연한 관념적 주제 대신 오로지 자기 안에서 그림을 뽑아내는 그녀만의 근성이 지독하게 수놓아져 있다.”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지, 그 막연하고도 막막한 주제 앞아서 손쉽게 따라할 수 있는 것은 기존의 작가들의 행적을 따라가는 것이다. 좋은 말로 하면 리서치이고, 나쁘게 말하면 답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작가들을 보고 배울 것인가. 내 주변에 익숙하고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대가들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런 대가들에게선 분명히 배울 점이 있다. 하지만 어떤 기준으로 대가들을 분류하는가. 서구 중심으로 이루어진 미술사에서 대가라고 일컬어지는 사람 중에 아시아계나 한국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내 주변의 작가들로 시야를 좁혀봐도 알려진 작가가 그에 걸맞는 작품을 하는지, 저 소동은 과연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나 자신으로 더욱 좁혀보면 아직 나의 재료를 찾아가는 과정이기에 이런 저런 시도들을 하고 있는데, 그 안에서 ‘말이 되게’ 해야하지 않는가, 라는 자기 검열은 자신 대신 누군가의 말과 글을 탐독하게 하게 관념들을 잇고 덧붙이는 과정으로 흐르게 되곤 한다. 


자기 자신을 더욱 치밀하게 들여다보기 보다는 여전히 책 속에서 답을 구하고 찾고 헤매고 또 그걸 반성한다고 쓰고 그걸 다시 부끄러워하는 일의 반복. 나도 진또배기 작가들처럼 오로지 자기 안에서 그림을 뽑아내는 근성으로 살아가고 싶다. 무심하게. 하지만 세상의 일들은 끊임없이 나에게 밀려들어오고 나는 그것을 해석하고 소화하느라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 머릿속 잡념을 지우는 일 중 하나가 그리는 일이다. 이제 그만 읽고 그만 떠들고 오로지 그리고 싶다. 현재로선 이상하게 어려운 일. 


마음이 흐려질 때마다 그가 젊은 작가들의 전시에 부쳐 썼던 글을 다시 꺼내 본다. 좀 길지만 옮겨와 본다. 



사실 좋은 작가란 생물학적인 나이나 경력에 좌우되기보다는 기존의 관습적이고 상투화된 시선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선, 낯선 감각을 안겨주는 그 지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미술 역시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문제고 결국 자신의 삶과 긴밀히 연동되어 있다. 결국 모든 작가들의 작업은 자기 자신의 현실적 삶, 자기 시대의 미술에 대한 인식 속에서 발아한다. 그러니 모든 작업은 당대의 소산이고 한 개인의 삶의 파생물이다. 그것이 바로 현대미술, 컨템포러리아트일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컨템포러리 아트를 제대로 하기는 참 어려운 일이고 쉽지는 않아 보인다. 기존의 익숙하고 관례화된 지배적 미술언어에서 벗어나 가능한 자신의 독자적인 감각, 안목으로 미술을 사유해보거나 자신의 구체적인 생활체험 속에서 미술을 길어 올리려는 시도가 그 길에 근접하는 일인 것 같다.


(중략) 전체적으로는 수작업에 의지한 그리기가 여전히 압도적인 편이다. 그만큼 평면회화가 주는 매력이 크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동시에 다소 제한된 회화의 방법론에 머물 수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아울러 작업의 내용이 다소 관념화될 수 있다는 점, 시각적 효과가 우선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점, 그리고 다양한 매체의 사용이 곧바로 새로운 감각, 주제를 대체해주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 또한 기존의 매체사용과 다른 감수성으로 그것을 활용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능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부분이 좁고 정밀하게 포착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개념어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구체적인 체험, 경험에서 우러나는 그것을 진솔하게, 가능한 관습적인 제작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론에 의지해서 표현하고자 하면 되지 않을까?::


예술이란 특정한 체제 안에서 행해지는 제도적 산물이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개인의 체험의 문제'(홍명섭)이다. 그 구체적인 체험을 어떻게 시각화, 물질화시키느냐 하는 것이 작업의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 컨템포러리 아트, 일반적으로 현대미술이란 동일화되는 감성의 표준과 불화를 일으키는 일이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누구나 다 좋아하는 일반화된 아름다움에 대한 동질적 감성, 지배적 가치에 함몰되어 있으면서 창의적 예술, 현대미술을 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림은 우리의 일상적 비전과의 투쟁'(서동욱)이 된다. 가장 진보적인 이는 바로 예술적 사유를 창출하는 사람이고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 현대미술가가 된다. 삶에 변화를 초래할 이견이나 관점, 감각을 창출하는 일, 그러한 존재가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대미술이고 현대미술작가라는 것이다. 이처럼 미술에서의 현대적 개념이란 시각보다는 비판적 태도의 유무에 달려있다고 본다. 알다시피 오늘날 미술 작업은 비평의 수준이 되어 우리의 사유 방식에 영향을 끼치는 기능적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장식물을 만들거나 키치, 인테리어적인 차원의 사물을 공들여 제작하는 일, 멋지고 경이로움과 같은 시각적 효과를 만드는 재능의 세계와는 무척 다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평적 사유란 한 작품이 우리로 하여금 사물과 세계를 보는 눈을 새롭게 지각시키고 낯선 감각을 발아시키고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익숙한 감수성을 흔들어주는 그런 표면, 물성을 시각화시키고 구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 박영택



작가와 재료, 작가와 작업실 <예술가의 작업실>


장욱진은 말년에 할머니처럼 쪼그리고 앉아 좁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거장의 작업과 작업실에 대한 환상을 여지없이 깨뜨리는 장면이다. 크고 넓은, 전망까지 좋은 데다가 오픈 스튜디오를 해도 부끄럽지 않은 그럴듯한 작업실을 꿈꿔왔던 나에겐 더더군다나. 도대체 어떤 작업을 어떻게 하고 싶은가가 선행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자문을 만들게 하는 장면. 


대형작업을 선호하는 추세에 따라 작업실도 대형화되는 추세지만 그럴 수 있는 형편이 되는 작가는 드물다. 작업실이라는 것이 결국 작업의 질에 따라 결정되는 것인데, 그 작업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재료. 어떤 재료를 다루느냐는 곧 그 작가의 정체성이 된다. 누구는 고운 가루를, 누구는 단단한 돌을, 누구는 못을, 누구는 질퍽한 물감을, 누구는 철을, 누구는 볼펜으로 하도 그어 까맣게 그을린 것 같은 신문지를. 이번엔 작가가 선택한 재료와 그의 작업실을 찾는 책이다. 


그는 그렇게 작업실을 찾는 와중에 드문드문 곱씹을 만한 단서를 또 흘려놓는다. 


오랜 드로잉 훈련은 작가의 몸을 다른 몸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드로잉을 한다는 것은 대상과 세계를 파악하고 이를 조형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고도의 몸을 만드는 일이다. 그 몸이 되어야 비로소 그림이 가능하다. 여기서 두 가지가 요구된다. 하나는 주어진 대상을 정확히 읽고 감지할 수 있는 눈과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파악한 것을 고스란히 그려 낼 수 있는 손이다. 이 훈련된 손은 그러나 순간 타성화되기 쉽기에 작가들은 매번 그 손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버전이 떨어지는 손은 이내 도태된다. 그래서 마치 가수나 성우가 매번 목을 풀듯이 화가들 또한 손을 푼다. 고도의 훈련을 거쳐 매번 새로운 손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곧 죽은 손이 된다. 그때 그림도 함께 죽는다.(p. 103 이강일 편)



주어진 대상을 정확히 읽고 감지하는 건 눈에서 그치지 않는다. 마음이 더 작용한다. 훈련을 통해 기량을 높이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달성한 곳에서 스스로 관성화되지 않게 매순간 새롭게 갈아야 한다. 어찌보면 너무 어렵고 어찌보면 너무 당연한 이치다. 우리가 어떤 그림 앞에서 감동하는지를 떠올려보면. 


꽤 오랜시간 동양화에 대해서 그런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너무 정형화된 것 아닌가. 혁신이라는 것이 가능한 장르인가. 스승의 기술을 따르는 것을 예술이라 할 수 있을까. 짧은 시각이었다.


동양화 작업이란 오랜 세월 동안 동양인의 심미관을 반영해 온 불가피한 재료들로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동양인들의 세계관, 자연관 속에서 파생된 재료에 관한 사유였을 것이다. 자연을 존중하고 이치와 순리를 따르는 가운데 물과 바람과 시간 속에서 자연스레 발효되어 나오는 그런 그림. 따라서 전통 회화에서 재료가 무엇이며 어떻게 다루어졌는지, 그 성질과 의미를 헤아리지 못한다면 우리 그림의 성질, 특성 또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p. 183 정종미 편)


종이 위에 물감을 쌓아 올리는 서양화와 달리 종이에 스미는 먹으로 색을 표현하는 동양화가 가진 근본적으로 다른 태도에 대해 나는 무지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한국 전통 미술의 요체는 바로 그런 장시간의 발효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드러나는 아스라한 색감과 소박하고 무심하면서도 절묘한 격을 지닌 장식의 조화에 있다. 정종미의 작업은 오랜 세월 아래 눅눅히 절여진 색채, 바래고 흐려져 삭은 것들, 시간의 입김 아래 즙이 되고 가루가 되어 바스라지기 일보 직전인 것들이 지닌 기이한 매력에서 기인한다. 그것들은 살아 있는 인간에게 경이로움과 숭고함을 아찔하게 안긴다. (…) 아울러 그의 전통 회화는 동시대 현대미술처럼 아이디어나 언어, 개념의 현란한 유희가 아니라 인고의 세월 속에서 노동을 통하여 비로소 삶을 느끼고 예술에 이르게 했음을 상기시킨다. (p.200 정종미 편)


자신이 의도한 바를 명확하게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현대예술가에게 요구되는 덕목인 시대에, 작업의 기량이나 완성도보다는 얼마나 멋지게, 그럴 듯하게 철학적 배경이나 사유의 흔적을 언어화할 수 있는지가 성공하는 예술가를 나누는 잣대가 된 시대에, 그래서 작업보다는 오히려 그런 “articulation”을 중요하게 예술학교에서 가르치는 시대에, 그의 당연하고도 또 당연한 이야기는 그래서 더 오래 여운을 남긴다. 


대상과 자신과 재료를 구별하지 않는 일, 그것들의 물성을 깨달아 가는 일, 거기에 인생을 부여하며 그것과 동화되어 가는 일, 우리의 선인들이 그러하였듯이 내 손끝에서 느껴져 이루어진 이 일들은 너무나 은밀하여서 말로는 다 할 수가 없다. (정종미의 작가노트 중에서)


정종미 편이 하도 구구절절 옳은 내용이라 지금은 절판된 그의 책 <우리 그림의 색과 칠>을 중고서점에서 구해 놓았다. 조금은 전문적으로 느껴지지만 새롭게 열린 동양화의 세계에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 같다. 


먹이 되었든, 철가루가 되었든, 자신에게 맞는 재료를 찾는 과정은 작가라면 필수적인 과정이다. 그것은 미학적 취향에 따른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역사 그리고 철학과 태도가 모두 어우러진 필연적인 결과이다. 재료를 찾는 과정은 서둘러서 될 것도 아니고, 이야기를 짜맞추기 하듯 덤벼들어서도 안 될 일인 것 같다. 차분히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끈질기게 찾다보면 너무도 자명한 자신의 재료를 만나게 될 거라 확신한다. 지금은 의도를 내려놓고 즐겁게 유랑하는 시기. 당연하게 집어들었던 유화물감이나 아크릴에서 벗어나 가루와 먹과 실 등 다양한 재료와 함께 노는 중이다. 먹의 풍부한 농담이 흑백사진의 풍부한 계조 표현과 닮아서 한창 흑백사진 찍기에 빠져있기도 하다. 





박영택의 글을 읽는 재미에 빠져 <테마로 보는 한국 현대미술>도 중고로 찾아놓았다. 뒤늦게 발견한 책들이라 그런지 절판된 책이 대부분이다. 뒷북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 어떤 예술서에서도 받지 못했던 영감과 깨달음을 얻고 있으니 당분간 이 사랑은 지속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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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Paperback)
밀란 쿤데라 지음 / HarperPerennial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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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개가 웃어!“


우리 무명이를 보는 사람들의 낯설지 않은 반응이다.

무명이는 정말 웃는다. 


순수한 열정으로 테니스 공을 쫒아 달려가서는 내 앞에 툭, 떨구고 다시 던져달라며 환하게 웃는다.

나는 그 어처구니 없는 환한 미소에 완벽하게 무장해제된다.


마음껏 달릴 수 없는 집안에서는 공놀이 몇 번에 금방 시들해지곤 하지만, 경계 없는 잔디밭에선 풀어놓은 말처럼 뛸 때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말 그대로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질 때까지 놀아도 지치지 않는다. 똑같이 웃는다. 바람에 실린 꽃향기를 맡느라 잠시 하늘을 향해 코를 킁킁 거리기도 하고, 애써 가져온 공을 친구가 뺏어가도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너무 뛰어서 숨이 찰 때는 잠시 혀를 내밀고 숨을 고르기도 하지만, 공놀이만큼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아, 있다. 고기. 고기라면 공 따위는 던져버리고 고기 앞으로 가, 가 되는구나. 하지만 고기 조차도 이기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사람이다. 함께 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고기 따위도 안중에 없다. 한창 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껴서 자신도 놀아야 하는 우리 무명이는 고기로 유인해도 꿈쩍하지 않는다. 고기보다 좋은 게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거라나? 순서로 치면 공 > 고기 > 사람인 셈이다. 정확히 말하면 함께하고 싶은 사람. 무명이는 그렇게 견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그대로 행동한다. 


인간만이 사랑의 의미를 두고 갑론일박을 벌인다.


그리고 저들의 생각으로 동물의 생각을 읽어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철학자와 늑대>의 저자 마크 롤랜즈는 인간은 시간을 직선으로 파악하고 개(또는 늑대)는 일직선이 아닌 원을 그린다고 추측한다. 우리는 시간의 화살에 매이길 거부하며 끊임없이 일탈을 꿈꾸며 행복을 바라지만 늑대는 각 순간들이 그 자체로 완전하다고 본다고 가정한다. 브레닌(그가 개인 줄 알고 입양한 늑대)에게 물어보지 않았으니 그저 관찰한 것으로 추론할 뿐이다. 거기에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이 등장하고, 니체의 영원회귀를 소설의 도입부에 떡 하니 가져다 놓은 쿤데라가 연결된다. 그리고 쿤데라에게 명성과 부를 안겨준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마지막 장은 ‘카레닌의 미소’다. (카레닌은 남자 주인공 토마스가 자신에 대한 사랑 또는 집착을 희석시킬 요량으로 테레사에게 선물한 개. 테레사는 그에게 두 사람이 처음 만날 때 그녀가 들고 있던 책 <안나 카레니나>의 ‘카레니나’에서 따온 이름을 붙이고 싶어하지만 토마스는 그렇게 생긴 개에게, 여자 이름을 붙일 수 없다며 카레니나의 남편 성을 따라 ‘카레닌’으로 명명할 것을 주장한다.) 


자신의 약함으로 자신보다 강한 토마스를 길들이고, 테레사가 없으면 죽을 것 같은 감정을 감히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생각했던 토마스는 끊임없이 다른 여자와 관계한다. 네 명의 남녀가 사랑을 둘러싼 끊없는 모험을 펼치고 난 후 그들은 카레닌과 똑같이 평등하게 맞이하는 건 결국 죽음이다. 그리고 그들이 펼친 사랑이라는 모험은 테레사와 카레닌, 정확히 말하면 카레닌이 테레사를 향한 사랑 앞에서 다들 조금씩 모자라 보인다. 결국 완전한 사랑이란 복잡한 감정과 생각, 계산과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로운 개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가. 나는 모른다. 카레닌에게 물어보지 않았으니. 다만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서도 테레사를 보고 미소지을 수 있는 카레닌을 떠올리며 눈시울이 붉어질 뿐이다. 


“브레닌은 나에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계산이 실패할 때 남는 내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계획했던 모든 것들이 좌절되고, 거짓으로 지껄이던 말들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을 때 말이다. 결국 끝에 가서는 철저하게 운만 남는다. 그리고 신들은 운을 주었을 때처럼 언제든지 앗아 갈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운마저도 다했을 때 남겨질 나 자신이다.”

- <철학자와 늑대> 중에서 


자발적 실종을 선택한 작가 쿤데라의 영면 소식은 아직 접하지 못했다. 29년생, 94세가 훌쩍 넘은 나이일텐데, 건강과 안부가 궁금하다. 평생 도청과 감시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선택한 망명, 그리고 알려지지 않았으나 비교적 최근에 이뤄진 국적 회복, 프랑스 문화 권력과 애증의 관계, 작은 언어를 쓰는 나라의 사람으로써 큰 언어를 쓰는 나라의 언어로 세계 독자와 만난 그가 보여주었던 거대한 문학의 세계. 카프카는 자신의 작품을 독일어로 썼다. 쿤데라는 체코어로 쓰다가 나중에는 프랑스어로 발표하기도 했다.(그것이 화근이 되긴 했지만) 그리고 자신의 검수를 거치지 않은 번역본에 대해 선을 그었다. 번역에 의해 그의 문체는 장중한 바로크체에서 간결한 미니멀리즘을 오고갔기 때문이다. 


그런 우여곡절 많은 그의 글을 영어로 읽었다. 체코어나 프랑스어를 읽고 쓰지 못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솔직히 수십 년 전 읽었던 한글본과 너무 다른 소설이었다. (내가 달라진 건가?) 영어가 가진 간결함이 그의 문체와 제법 어울리는 듯했다. 뭔가 말단 부분이 깎여나간 메타 언어로서의 번역 언어가 주는 중간지대 느낌이 오히려 편했다고 할까. 과연 내가 과거에 읽은 그 책이 이 책이 맞나 싶을 정도로 몰입해서, 열광하면서, 무릎을 치며 읽었다. (읽기 쉬워서 그랬나?) 프랑스어로 읽으면 어떤 맛이 날까 궁금해졌다. 하지만 영어공부도 힘든데 프랑스어까지는 좀… 작작하라며 스스로를 말렸다. 잠깐만…. 영어 좀 수월해지고 나면, 그러고도 힘이 남아있으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궁금해지면 그때 만나자. 


오늘 아침 신나게 공놀이하고 온 무명이가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천사처럼 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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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는 왜 차크라를 공부할까 - 오래된 지혜 차크라와 현대 심리학의 만남
박미라 지음 / 나무를심는사람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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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도 과학이고, 요가도 과학이다. 모호했던 차크라 개념을 정신생리학, 융의 분석심리학, 윌버의 통합심리학의 렌즈로 줌 인&아웃하며 균형잡힌 차크라 이해를 돕는다. 이보다 좋은 차크라 입문서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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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ve New World (Paperback) - 『멋진 신세계』 원서 Vintage Classics 360
Aldous, Huxley 지음 / Vintage New Ed edition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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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가미와 프리섹스의 대립항은 좀 구식이나 여전히 유효한 질문(고통과 문제가 사라진 사회는 과연 행복할까? 등)을 곱씹어 볼 만한 고전. 평면적(특히 여자인 경우)이거나 단순한 인물 묘사는 시대적 한계라고 해두자. 하지만 그 시대에 지금과 놀랄 만큼 유사한 사회를 생각한 건 놀랍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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