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드러내는 데 한없이 부족한 언어 대신 형상을 주 무기로 삼아야겠다고 작정한 이후 두려움과 주저함은 그림 언저리를 계속 맴돈다. 힘 닿는대로 전시장을 돌아다니고, 시선을 사로잡는 작가가 있으면 키보드만 두드리면 나오는 무궁무진한 자료에 도록까지 그러모아 한참 빠져 지내고, 의아한 대목들을 명쾌하게 풀어주려는 외서가 있으면 또 한참을 매달려 읽으며 그리지 못하는 자신을 변명할 거리, 또는 그리지 않는 이유를 만들어내느라 분주하다.
허나 국내/국외 전시장을 드나들수록 마음에 드는 그림은 이상하게 점점 줄어들고, 책을 읽을수록 허기진 마음은 더 갈급해진다. 그림을 대하는 태도나, 그림을 감상하는 식견이나 왠지 모를 석연치않음이 계속 감지되기 때문이다. 서구 중심의 미술사 전개는 차치하더라도 거기서 우리 그림, 우리 작가들을 바라보는 제대로 된 시선을 만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벽에 낙서하듯, 온갖 더러운 속내를 모두 배설하듯 그렇게 ‘표현’한 작품들의 어느 대목에서 내가 감동해야 하느냐. 얼마에 팔렸고 그래서 얼마나 대단한지 호들갑 떠는 잔치에 왜 내가 같이 들떠야 하느냐. 도대체 어떤 작품을 좋은 작품이라고 볼 것이며, 좋은 작품은 어떤 사람에게서 나오는냐. 대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불혹을 한참 넘어 지천명이 코앞인데도 앞에 보이는 길은 질풍노도 청년의 앞길처럼 안개가 자욱하다.
지난 한 해 동안 읽은 책들을 살펴보니 거개가 영어로 된 책들이다. 영어공부가 목적은 아니었으나 대체로 관심있는 책들 중에는 번역되지 않았거나 번역되었더라도 영문이 읽기 편했다. 왜 그랬을까. 아직도, 아마 꽤 오랫동안 첨단의 것들은 우리가 아니라 영어로 된 것들에 있다는 생각이 작용했을 것이다. 얼마간 사실이라 하더라도 영어로 된 책들을 물리게 읽고 있으면 문득 서글프다. 그럴 때마다 종종 들춰보았던 것이 박영택의 글이다. 그의 명징하고 삿기 없이 글들은 종종 눈에 낀 티나 혀에 낀 백태를 제거하는 것마냥 시원한 구석이 있다. 현학적인 태도로 읽고 공부한 것들을 상찬하듯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몸소 겪고 만난 사람과 그를 둘러싼 사유, 그리고 오랜 시간 그가 공들인 미술 큐레이팅의 노고가 그의 심성을 대하는 것마냥 맑고 곱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도 왠지 믿고 만나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의 글이다.
자신의 일 이외에는 완전히 무심한, 심플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내가 만난 좋은 작가들의 공통점이다. 그들은 또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조차 극구 두려워하는 존재들이다. 완벽하게 자신을 던지지만 동시에 그 모든 일을 무로 돌려버릴 줄 아는 그들은 낙관도 절망도 없이 그 경계에서 평심을 유지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자신의 작업이 결국 주어진 삶에서 잠깐 인연을 맺는 일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것밖에는 잘하는 게 없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작업에 임하는 자들이다. 이런 무심함과 겸손함 속에서 결국 작업은 과하거나 넘치지 않고 신비주의나 허황한 예술지상주의로 전락하지 않으면서 정확하고 예리하게 몸을 내민다.”(p.81)
어떤 사람이 좋은 작가일까. 그런 건 미술 이론서에서 잘 일러주지 않는다. 사실은 그런 게 가장 궁금한 대목인데 말이다. 내가 그토록 수고를 들여 되고 싶은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이 나이에, 이 경력에, 이 순간에. 미디어를 수놓는 많은 작가들의 이야기가 포장되고 미화되면서 과연 그런 길이 나의 길일까,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내가 들여야 할 노오력은 또 얼마만큼일까 아득해진다. 세상과 절연하고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수도승의 삶은 더더군다나 나의 길과 아득히 멀다.
작업실 타령을 하며 어떻게 하면 좀 더 크고 멋진 작업실을 가질 수 있을까 골몰할 때면 뭔가 주객이 전도된 죄책감이 밀려오지만 어쩌랴. 그게 지금의 나인걸. 양평이 좋을까, 가평이 좋을까. 속초가 좋을까, 양양이 좋을까. 좁아도 서울이 낫지 않을까. 언젠가 갖게 될 나만의 작업실을 꿈꾸며 작업실의 멋진 모습을 그려보는 건 당연한 게 아닐까. 그랬던 생각이 부서진 건 실제로 작업실을 갖게 되면서이다. 아파트 건물 지하에 싸게 나온 빈 사무실을 덜컥 계약했는데 그곳은 결국 오랜 시간 남편과 나의 자전거 보관소가 되었다. 매달 나가는 비싼 월세가 아까웠지만 그 당시 나는 보고 싶고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작업실에 틀어박혀 그림만 하기엔 너무 분주했다. 아마도 나의 그림에 대한 열정은 거기까지 인가보다, 스스로 깨닫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1년 계약을 한 달 앞당겨 조기 퇴실하며 다시는 작업실 타령 같은 건 하지 말아야지 했는데, 박영택이 본 세속적인 작가들의 작업실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는다는 사실에 오히려 위안 같은 걸 받았다고나 할까.
온통 통유리로 마감한 작업실에는 아름다운 풍경이 그림을 대신해 들어차서 작가들은 그 풍경에 눌려 있다. 자연만한 그림이 어디 있을까? 그러다 보니 나무에 물 주고 화초에 비료 주며 정원을 가꾸는 일로 하루를 다 보내고 정작 그림은 손도 못 대보는 그런 작가도 있다. 주인 닮은 개들 역시 하루종일 풍경에 취해 몽롱하다. 그들은 아마도 풍경을 소유하고 있다는 데서 일종의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p.140)
박영택이 책에서 찾은 작가들의 작업실은 그런 작업실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궁벽한 시골, 가난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차가운 냉기가 정신을 번쩍나게 하는 그런 세상의 극단 같은 곳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감히 말하건데, 그런 작업실에서 고독을 마주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 못되니 나는 작가가 못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비약하진 않는다. 저마다의 삶과 처지가 있고 그 안에서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기 위해 나아가면 된다는 것으로 방향을 잡는다.
나는 나 자신의 일 외의는 완벽한 무심함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 그렇게 무심하게 오로지 캔버스만 바라보고 그 안에서 형상만 생각하는 것은 나의 삶과 다르다. 나는 어느 순간 우리의 일상이 무너질 수 있는 정치적 현실에 민감하고, 이 나라를 벗어나 전 세계가 보이지 않는 전쟁을 극렬하게 치르고 있는 이 시대를 관통한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내가 하는 행위 속에서 그런 세계의 부조리의 의미를 담아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
결코 두껍지 않은 책인데, 행간에는 학연과 지연으로 촘촘히 엮인 한국 화단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 무분별한 서구 양식의 수용으로 혼란한 동양 화단에 대한 지적, 우리가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서구의 풍경과 다른지 그걸 구체적으로 드러낸 작가들의 노력이 담겨있다. 여느 미술 감상서나 이론서에서 얻지 못한 대목을 얻는 고마움이 있다. 그래서 읽는 데 잠시 시간을 두고 곱씹어야 한다. 그래서 좋다. 아마 내가 그런 고민이 없었더라면 그런 대목들이 눈여겨지지 않았을지도. 하지만 그런 고민이 있었기에 그가 이런 작가들을 발굴해내려는 노고가 더욱 고맙고 애틋하게 다가왔는지도.
좋은 그림은 이렇게 현실을 비현실과 만나게 해주는 동시에 사물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상투적이고 습관적인 시선과 감각을 예리하게 비틀어준다. 그리고 나를 성숙시킨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또한 두렵다. 거짓 세상에 맞서 화폭 안에다 자신의 삶의 진액을 쏟아붓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엄격하게 자신을 친친 동여매는 이 자기치유적, 자폐적 그림 그리기란 또 얼마나 허망하고 상처받기 쉬운가. 민감한 감수성과 집중력으로 자기자신을 소멸시켜가면서 회화를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와 존재의 의미, 정신의 정점에 육박하고자 하는 이 행위는 어느 면에서는 고립무원일 것이다.(p.168)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그 순간이 참 좋다. 가만히 들여다 보다가 그리면서 알게 되는 것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그림을 그리기 전에 나는 먼저 나를 위한 그림, 내가 더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는 노력의 과정에서 얻는 부산물 같은 이 그림을 있는 그대로 안아야할 것 같다. 되고 싶은 내가 미디어에 장식되는 작가는 아니니까.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 배워야 한다는 생각은 일찍이 버렸으나 확실하고 안전한 끈이 필요하지 않는가, 라는 현실적인 선택도 굳이 필요없다는 데 도달했다. 그렇다고 화면만 바라보며 자폐적 그림으로 극한적 몰입에 도달할 생각은 없다.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지 그 고민은 아마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겠지만.
그림은 내 삶의 부산물이다. 내가 사는 삶이 더 중요하다. 그림을 통해 내 삶을 더욱 나답게 살 순 있어도 그림만을 위해 살진 못할 것 같다. 아니, 않을 것 같다. 일단 오늘까지는 그렇다. 생각이 바뀌면 다시 돌아와 적는 걸로.
p.s. 사실 이 책은 박영택의 근작 <오직, 그림>이라는 책을 먼저 읽고 절판된 책을 중고서점에서 구입해 읽었다. 해외 명작들을 감상에 치우치지 않고 이론에 기대지도 않고 깊이 있게 읽어낸 게 좋아서 그가 다룬 한국작가들의 책을 찾다 발견한 책이다. 워낙 오래된 책이라 때늦은 감이 있지만 좋은 책은 시간이 지나도 좋다. 부디 그가 더 부지런히, 더 야먕있게 미술관련 책을 그치지 않고 써주길 바라는 바이다.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가?
그는 작가를 이야기하며 어떤 그림을 그리면 안되는지 단서를 남긴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각, 감정, 느낌, 감각이 고스란히 화면에 밀착되어 번져나간 그녀의 그림에는 화단의 유행이나 그럴듯한 방법론의 연출, 막연한 관념적 주제 대신 오로지 자기 안에서 그림을 뽑아내는 그녀만의 근성이 지독하게 수놓아져 있다.”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지, 그 막연하고도 막막한 주제 앞아서 손쉽게 따라할 수 있는 것은 기존의 작가들의 행적을 따라가는 것이다. 좋은 말로 하면 리서치이고, 나쁘게 말하면 답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작가들을 보고 배울 것인가. 내 주변에 익숙하고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대가들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런 대가들에게선 분명히 배울 점이 있다. 하지만 어떤 기준으로 대가들을 분류하는가. 서구 중심으로 이루어진 미술사에서 대가라고 일컬어지는 사람 중에 아시아계나 한국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내 주변의 작가들로 시야를 좁혀봐도 알려진 작가가 그에 걸맞는 작품을 하는지, 저 소동은 과연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나 자신으로 더욱 좁혀보면 아직 나의 재료를 찾아가는 과정이기에 이런 저런 시도들을 하고 있는데, 그 안에서 ‘말이 되게’ 해야하지 않는가, 라는 자기 검열은 자신 대신 누군가의 말과 글을 탐독하게 하게 관념들을 잇고 덧붙이는 과정으로 흐르게 되곤 한다.
자기 자신을 더욱 치밀하게 들여다보기 보다는 여전히 책 속에서 답을 구하고 찾고 헤매고 또 그걸 반성한다고 쓰고 그걸 다시 부끄러워하는 일의 반복. 나도 진또배기 작가들처럼 오로지 자기 안에서 그림을 뽑아내는 근성으로 살아가고 싶다. 무심하게. 하지만 세상의 일들은 끊임없이 나에게 밀려들어오고 나는 그것을 해석하고 소화하느라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 머릿속 잡념을 지우는 일 중 하나가 그리는 일이다. 이제 그만 읽고 그만 떠들고 오로지 그리고 싶다. 현재로선 이상하게 어려운 일.
마음이 흐려질 때마다 그가 젊은 작가들의 전시에 부쳐 썼던 글을 다시 꺼내 본다. 좀 길지만 옮겨와 본다.
사실 좋은 작가란 생물학적인 나이나 경력에 좌우되기보다는 기존의 관습적이고 상투화된 시선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선, 낯선 감각을 안겨주는 그 지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미술 역시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문제고 결국 자신의 삶과 긴밀히 연동되어 있다. 결국 모든 작가들의 작업은 자기 자신의 현실적 삶, 자기 시대의 미술에 대한 인식 속에서 발아한다. 그러니 모든 작업은 당대의 소산이고 한 개인의 삶의 파생물이다. 그것이 바로 현대미술, 컨템포러리아트일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컨템포러리 아트를 제대로 하기는 참 어려운 일이고 쉽지는 않아 보인다. 기존의 익숙하고 관례화된 지배적 미술언어에서 벗어나 가능한 자신의 독자적인 감각, 안목으로 미술을 사유해보거나 자신의 구체적인 생활체험 속에서 미술을 길어 올리려는 시도가 그 길에 근접하는 일인 것 같다.
(중략) 전체적으로는 수작업에 의지한 그리기가 여전히 압도적인 편이다. 그만큼 평면회화가 주는 매력이 크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동시에 다소 제한된 회화의 방법론에 머물 수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아울러 작업의 내용이 다소 관념화될 수 있다는 점, 시각적 효과가 우선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점, 그리고 다양한 매체의 사용이 곧바로 새로운 감각, 주제를 대체해주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 또한 기존의 매체사용과 다른 감수성으로 그것을 활용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가능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부분이 좁고 정밀하게 포착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개념어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구체적인 체험, 경험에서 우러나는 그것을 진솔하게, 가능한 관습적인 제작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론에 의지해서 표현하고자 하면 되지 않을까?::
예술이란 특정한 체제 안에서 행해지는 제도적 산물이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개인의 체험의 문제'(홍명섭)이다. 그 구체적인 체험을 어떻게 시각화, 물질화시키느냐 하는 것이 작업의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 컨템포러리 아트, 일반적으로 현대미술이란 동일화되는 감성의 표준과 불화를 일으키는 일이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누구나 다 좋아하는 일반화된 아름다움에 대한 동질적 감성, 지배적 가치에 함몰되어 있으면서 창의적 예술, 현대미술을 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림은 우리의 일상적 비전과의 투쟁'(서동욱)이 된다. 가장 진보적인 이는 바로 예술적 사유를 창출하는 사람이고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 현대미술가가 된다. 삶에 변화를 초래할 이견이나 관점, 감각을 창출하는 일, 그러한 존재가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대미술이고 현대미술작가라는 것이다. 이처럼 미술에서의 현대적 개념이란 시각보다는 비판적 태도의 유무에 달려있다고 본다. 알다시피 오늘날 미술 작업은 비평의 수준이 되어 우리의 사유 방식에 영향을 끼치는 기능적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장식물을 만들거나 키치, 인테리어적인 차원의 사물을 공들여 제작하는 일, 멋지고 경이로움과 같은 시각적 효과를 만드는 재능의 세계와는 무척 다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평적 사유란 한 작품이 우리로 하여금 사물과 세계를 보는 눈을 새롭게 지각시키고 낯선 감각을 발아시키고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익숙한 감수성을 흔들어주는 그런 표면, 물성을 시각화시키고 구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 박영택
작가와 재료, 작가와 작업실 <예술가의 작업실>
장욱진은 말년에 할머니처럼 쪼그리고 앉아 좁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거장의 작업과 작업실에 대한 환상을 여지없이 깨뜨리는 장면이다. 크고 넓은, 전망까지 좋은 데다가 오픈 스튜디오를 해도 부끄럽지 않은 그럴듯한 작업실을 꿈꿔왔던 나에겐 더더군다나. 도대체 어떤 작업을 어떻게 하고 싶은가가 선행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자문을 만들게 하는 장면.
대형작업을 선호하는 추세에 따라 작업실도 대형화되는 추세지만 그럴 수 있는 형편이 되는 작가는 드물다. 작업실이라는 것이 결국 작업의 질에 따라 결정되는 것인데, 그 작업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재료. 어떤 재료를 다루느냐는 곧 그 작가의 정체성이 된다. 누구는 고운 가루를, 누구는 단단한 돌을, 누구는 못을, 누구는 질퍽한 물감을, 누구는 철을, 누구는 볼펜으로 하도 그어 까맣게 그을린 것 같은 신문지를. 이번엔 작가가 선택한 재료와 그의 작업실을 찾는 책이다.
그는 그렇게 작업실을 찾는 와중에 드문드문 곱씹을 만한 단서를 또 흘려놓는다.
오랜 드로잉 훈련은 작가의 몸을 다른 몸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드로잉을 한다는 것은 대상과 세계를 파악하고 이를 조형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고도의 몸을 만드는 일이다. 그 몸이 되어야 비로소 그림이 가능하다. 여기서 두 가지가 요구된다. 하나는 주어진 대상을 정확히 읽고 감지할 수 있는 눈과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파악한 것을 고스란히 그려 낼 수 있는 손이다. 이 훈련된 손은 그러나 순간 타성화되기 쉽기에 작가들은 매번 그 손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버전이 떨어지는 손은 이내 도태된다. 그래서 마치 가수나 성우가 매번 목을 풀듯이 화가들 또한 손을 푼다. 고도의 훈련을 거쳐 매번 새로운 손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곧 죽은 손이 된다. 그때 그림도 함께 죽는다.(p. 103 이강일 편)
주어진 대상을 정확히 읽고 감지하는 건 눈에서 그치지 않는다. 마음이 더 작용한다. 훈련을 통해 기량을 높이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달성한 곳에서 스스로 관성화되지 않게 매순간 새롭게 갈아야 한다. 어찌보면 너무 어렵고 어찌보면 너무 당연한 이치다. 우리가 어떤 그림 앞에서 감동하는지를 떠올려보면.
꽤 오랜시간 동양화에 대해서 그런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너무 정형화된 것 아닌가. 혁신이라는 것이 가능한 장르인가. 스승의 기술을 따르는 것을 예술이라 할 수 있을까. 짧은 시각이었다.
동양화 작업이란 오랜 세월 동안 동양인의 심미관을 반영해 온 불가피한 재료들로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동양인들의 세계관, 자연관 속에서 파생된 재료에 관한 사유였을 것이다. 자연을 존중하고 이치와 순리를 따르는 가운데 물과 바람과 시간 속에서 자연스레 발효되어 나오는 그런 그림. 따라서 전통 회화에서 재료가 무엇이며 어떻게 다루어졌는지, 그 성질과 의미를 헤아리지 못한다면 우리 그림의 성질, 특성 또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p. 183 정종미 편)
종이 위에 물감을 쌓아 올리는 서양화와 달리 종이에 스미는 먹으로 색을 표현하는 동양화가 가진 근본적으로 다른 태도에 대해 나는 무지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한국 전통 미술의 요체는 바로 그런 장시간의 발효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드러나는 아스라한 색감과 소박하고 무심하면서도 절묘한 격을 지닌 장식의 조화에 있다. 정종미의 작업은 오랜 세월 아래 눅눅히 절여진 색채, 바래고 흐려져 삭은 것들, 시간의 입김 아래 즙이 되고 가루가 되어 바스라지기 일보 직전인 것들이 지닌 기이한 매력에서 기인한다. 그것들은 살아 있는 인간에게 경이로움과 숭고함을 아찔하게 안긴다. (…) 아울러 그의 전통 회화는 동시대 현대미술처럼 아이디어나 언어, 개념의 현란한 유희가 아니라 인고의 세월 속에서 노동을 통하여 비로소 삶을 느끼고 예술에 이르게 했음을 상기시킨다. (p.200 정종미 편)
자신이 의도한 바를 명확하게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현대예술가에게 요구되는 덕목인 시대에, 작업의 기량이나 완성도보다는 얼마나 멋지게, 그럴 듯하게 철학적 배경이나 사유의 흔적을 언어화할 수 있는지가 성공하는 예술가를 나누는 잣대가 된 시대에, 그래서 작업보다는 오히려 그런 “articulation”을 중요하게 예술학교에서 가르치는 시대에, 그의 당연하고도 또 당연한 이야기는 그래서 더 오래 여운을 남긴다.
대상과 자신과 재료를 구별하지 않는 일, 그것들의 물성을 깨달아 가는 일, 거기에 인생을 부여하며 그것과 동화되어 가는 일, 우리의 선인들이 그러하였듯이 내 손끝에서 느껴져 이루어진 이 일들은 너무나 은밀하여서 말로는 다 할 수가 없다. (정종미의 작가노트 중에서)
정종미 편이 하도 구구절절 옳은 내용이라 지금은 절판된 그의 책 <우리 그림의 색과 칠>을 중고서점에서 구해 놓았다. 조금은 전문적으로 느껴지지만 새롭게 열린 동양화의 세계에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 같다.
먹이 되었든, 철가루가 되었든, 자신에게 맞는 재료를 찾는 과정은 작가라면 필수적인 과정이다. 그것은 미학적 취향에 따른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역사 그리고 철학과 태도가 모두 어우러진 필연적인 결과이다. 재료를 찾는 과정은 서둘러서 될 것도 아니고, 이야기를 짜맞추기 하듯 덤벼들어서도 안 될 일인 것 같다. 차분히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끈질기게 찾다보면 너무도 자명한 자신의 재료를 만나게 될 거라 확신한다. 지금은 의도를 내려놓고 즐겁게 유랑하는 시기. 당연하게 집어들었던 유화물감이나 아크릴에서 벗어나 가루와 먹과 실 등 다양한 재료와 함께 노는 중이다. 먹의 풍부한 농담이 흑백사진의 풍부한 계조 표현과 닮아서 한창 흑백사진 찍기에 빠져있기도 하다.
박영택의 글을 읽는 재미에 빠져 <테마로 보는 한국 현대미술>도 중고로 찾아놓았다. 뒤늦게 발견한 책들이라 그런지 절판된 책이 대부분이다. 뒷북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 어떤 예술서에서도 받지 못했던 영감과 깨달음을 얻고 있으니 당분간 이 사랑은 지속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