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증적 성격의 꿈

 

 

 

 

 

 

아이가 다시 걷는 꿈을 꾼다, 매일 

 

 

*

 

 

눈뜨기 직전 노랑 주황 코스모스를 본다

꿈의 바깥, 코스모스가 진짜 노랑 주황이다 

멕시코산 노랑코스모스, 우주는 조화로워

다시 지긋이 감은 눈앞으로 파란색,

초록색 장미를 본다, 놀라워라!

 

루스커스는 시들지 않는다

촉촉하고 윤기나는 초록잎은

가지 끝에 물만 닿으면 마르지 않아,

루스커스야말로 불로초구나

 

루스커스의 불멸은, 그러므로  

유칼립스투스의 필멸에 견줄 만하다

 

유칼립투스는, 그 잎사귀는 기필코 마른다

끈끈한 점액질 초록 줄기에 동그란 블랙잭

튼튼한 갈색 줄기에 날렵하고 앙증맞은 파블로

부드러운 가지에 동글동글 빛바랜 꼬마 구니

흐느적대는 가지에 여유로운 동그라미 폴리안

초록 잎 속에 씨앗 같은 열매 품은 씨드 유카리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한반도까지 푸르디 푸른 윤기를 잃고 바싹바싹 말라가는 모습이 너무 좋아, 유칼립투스 가지들을  마끈으로 칭칭 동여매, 원목 책장 기둥에 대못 박고, 참수당한 아이의 동그랗고 상큼한 해골처럼, 초록초록 매달아 두고, 유칼립투스여, 너를 향한 사랑 감추지 않으려니, 불멸하시라!

 

장미라고 모두 향기가, 가시가 있지 않듯이  

파란색 장미는 세상에 없다, 세상의 파란색 

장미는 모두 염색 장미다, 세상의 초록색

장미는 염색도 없다, 아주 없다, 그러므로

 

사피엔스는 조화로운 코스모스를 완벽히

점령하는 데 실패했고, 마찬가지로

꿈에 논증적 성격을 부여하는 데 실패했고

논증이 불가능한 그 꿈에 덧붙여

 

*

 

꿈밖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또다른 악몽

아이는 오늘도 걷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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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2-03-06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아프네요...아이가 다시 걷게 되기를...봄이 오면서 아이가 건강히 회복되어 튼튼한 다리로 걷기를 바랍니다. 푸른괭이님, 부디 힘내세요.

푸른괭이 2022-03-06 18:25   좋아요 0 | URL
어휴, 어째저째 적응이 돼서 더 나빠지지만 않아도 감사합니다^_^
 

 

 

슬픈 잡식동물

 

 

 

 

 

나는 한 마리의 잡식동물

쉰 살을 코앞에 둔 잡식동물

슬픈 잡식동물, 슬퍼하는 잡식동물이다

 

동생의 소재가 궁금하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어딘가에 있기는 한 거냐, 동생아

 

얼굴과 손이 작아서 슬픈 짐승

눈구멍과 콧구멍이 커서 슬픈 짐승

잡식동물이라 더 슬픈 짐승

 

멜랑콜리아, 라는 말은 멜랑콜리하지 않다

멜랑콜리한 잡식동물이 슬픈 잡식동물이 되어

애도를 넘어 멜랑콜리아에 절여졌다

 

잡식동물 한 마리의 뼛가루가

찹쌀 경단이 되어 뒷산 산책로에 흩뿌려지다

오며 가며 토끼도 먹고 다람쥐도 먹고, 외롭지 않아

 

토끼와 다람쥐는 초식동물인데

나와 동생은 잡식동물, 잡식이라 슬픈

슬퍼하는, 그런 잡식동물

 

 

 

*

 

프로이트, <애도와 우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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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肝

 

 

 

 

오늘의 간은 얇고 넓다

그래도 끝이 뾰족한 것이 엄연한 간

정성껏 저민 퍽퍽한 잿빛 간에다

당면 가득한 핏빛 순대를 싸 먹는다

부르고뉴 와인맛은 모르지만

부르고뉴 와인빛 버건디 순대를 좋아한다  

 

그 녀석, 무례했지

없는 버르장머리 때문에 잔뜩 부어오른 핏빛간을 저며

부르고뉴 와인에 적셔 먹었지, 대장에 말아서 말이야

 

대장과 간은 가까워 전이가 불가피하다

원격조정은 필요없다, 간을 지켜, 간을!

코카서스 산맥에서 도망쳐 온 토끼처럼

제우스한테 혼쭐난 프로메테우스처럼, 간을!

다시는 용궁에 떨어지지 않도록

다시는 독수리한테 쪼이지 않도록, 간을!  

 

오늘의 간은 아무래도 너무 얇다

쌈 싸 먹기 딱 좋은 잎채소 모양의 간

간엽에 말린 핏빛 순대의 맛, 너무 좋아  

 

 

 

*

 

윤동주, <간>. / <양들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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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색깔, 영심이

 

 

 

 

 

지난 세기에 쌓은 카프카의

빨간 성을 허물고 잿빛 유형지로

실종, 노란 아메리카에 머물다

늦가을비에 소국 다발 들고

집으로 가는 길, 소송은 끝

 

샛노란 수술 빙 둘러

샛노랑 샛빨강 꽃잎이

다닥다닥 닥지닥지

꽃대도 튼튼하고 뾰족한 초록 잎도 싱그러운

이 소국의 이름은, 아, 너무 정겨워요! 

영심이

영심이랍니다, 그런데

 

카프카와 영심이라니

너무 어울리지 않네요

체코와 거창만큼이나

  

소국은 작지만 향기는 결코 작지 않아서

분리 수거가 필요하답니다

지난 세기에 나온 카프카의 성과

지난 주말에 나온 영심이는 죽고

향기만 따로 분리된 오늘은

입동, 변신이 완료되었군요

 

저와 카프카와 영심이를 적신 추적추적

늦가을비는 초겨울비였나 봅니다 

 

 

*

 

워낙 귀하신 몸이라 꽃집에 잘 안 들어온다고 한다. 투톤 소국 영심이

와인 빨강 너무 좋아, 샛노란 노랑과의 조합도 좋아,

내 묘사력이 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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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7일 화요일 

 

 

 

 

 

 

서울은 비가 주룩주룩 내려

권태의 아가리처럼 침침하고

그는 백신 맞고 강릉으로 떠나고

나는 빨간 푸에고 장미를 목 매달고

빛줄기가 빗줄기에 먹히는 오후다

 

아이야

우리는 핀란드로 가자

빨간 카네이션 얼굴로   

큼직한 갈매기를 때려주고

시나몬롤에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거야

조그만 방에 짐을 풀고

널따란 텃밭에 유칼립투스를 키우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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