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동지에는 팥떡을

 

 

 

 

 

역시 애동지에는 팥떡을 먹어야했나 봐요

연초부터 뭔가 형편 없더라고요 

이제라도 부랴부랴 팥떡을 주문했네요

동지가 다시 왔나, 아침인데 왜 이렇게 어두워요?

 

곤히 잠든 아이 몰래 밤새 눈이 펑펑 내리고

새벽 동장군이 그 눈을 꽁꽁 얼려버린 맑은 날

겨울 햇살이 꽁꽁 언 연노랑 미소를 날리자

백설기 오색송편 수수팥떡이 배달되었습니다

 

35년만에 추위라니, 뇌수마저 꽁꽁 얼어

낱말 하나 영감 한 톨 떠오르지 않네요

아이는 세상 행복해서 코로나 몰래 눈사람

만든대요, 눈보라 몰래 레고 사러 간대요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면, 한다 해도  

오늘 아주 맛있는 음식을 먹을 거랍니다

우선은 백설기 오색송편 수수팥떡부터

아, 오늘 안에 다 먹을 수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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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

 

 

 

 

 

 

1.

 

1995년초 겨울날, 아마 스무번째 생일날 

성당에 처음 가 보았다 저녁 미사 때였다

믿고자, 심지어 종교를 갖고자 했던 모양이다 

아 야속하신 하느님, 왜 저를 찾아주지 않으셨나요!

 

덕분에 정신과, 아니 교내 무료 상담센터에 다녔다

소설을 많이 썼다 대학문학상에 당선되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면도날과 사귀게 되었다

피가 흐를 때마다 염증을 걱정하는 내가 한심했다

나의 친구가 수면제를 잔뜩 먹고 배 아프다고

전화한 것이 그해 여름이었던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되뇌던 시절,

슬픔에게 안녕!하고 인사하던 시절이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고

모든 죄악에는 원흉이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기도 하다  

 

 

2.

 

몇년 뒤 모스크바대학 기숙사 화재로 

한 선배가 죽었고 장례미사가 겨울날 저녁

그 성당에서 있었고 나의 친구가 뼛가루보다

음침한 우울을 뒤집어 쓴 채 한 구석에 박혀 있었다 

신림동 성당은 레닌 도서관처럼 높고 웅장했다

우리는 레닌 도서관 앞 도스토옙스키 동상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엉거주춤 존재했던 것 같다

우리 머리 위로 모스크바 참새가 날아와 앉았다

 

아 야속하신 하느님, 왜 그러셨어요!

그 엄동설한에 저의 발바닥은 하느님을 찾아갔는데요 

죽은 그 선배는 매주 다녔을 텐데요

그 친구도 그날은 살아서 갔는데요

 

과연 모든 일에 꼭 원인이 있어야 하는가

모든 죄악에 꼭 원흉이 있어야 하는가

내 운명으로 도피하는 수밖에 없다

 

 

2021년 1월 5일

 

 

*

 

혈육들은 전화 한 통 문자 하나 없는 반면 비혈육들은 모두 문자를(심지어 돈까지) 보내온 것이 너무 웃긴다. / 노란장미 다섯 송이, 빨간 카네이션 두 가지.(?) 이래저래 깎아서 3만원. 쓰인 대로라면 4만 9천원이어야 하는데. 비교적 젊은 여성 사장이었는데, 작은 히터 하나 켜 두고 파카까지 걸친 채 오돌오돌 떨며 앉아 있었다. 수경재배 중인 '빅토리아'는 아이가 학교에서 가져온 것이다. 저것도 생명이라고 일주일에 한 번씩 물을 갈아주어야 한다, 그런 수고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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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5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괭이 2021-01-06 08:36   좋아요 0 | URL
‘산문시 장르‘도 아니고 뭣인지 저도 잘 모릅니다 -_-;; 시를 써 본적이 어릴 때 이후로는 없어서요, 그냥 쓰고 있습니다.

요즘은 스터디카페만 북적대나 봐요, 너무 웃긴 시국입니다 -_-;;
 

 

 

다리의 다의성

 

 

 

 

 

1.

 

2021년 1월 1일 아침 떡국은 환영받지 못했다

노른자와 흰자를 분리하여 지단까지 붙였음에도

늘 그렇듯, 정성을 요리가 아닌 딴 생각에 쏟은 까닭이다

 

 

2.

 

'다리의 다의성'이라는 낱말 묶음이 떠올랐다

여기서 다리는 순전히 여자 다리를 말한다

여자의 신체 부위 중 유독 다리에만 미를 붙인다

'각선미'의 '각'과 '교각'의 '각'이 같은 한자라니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 왔어!" 

다리의 황량하고 음습한 깊이가 확인된다

 

다리는 야하고 귀엽고, 지적이고 육적이고, 감정적이고 이성적이고,

우아하고 천박하고, 조신하고 음란하고, 자극적이고 심드렁하고,

가늘고 굵고, 날렵하고 둔중하고, 데카당스하고 이데올로기적이고,

반의어 형용사의 나열을 무한대로 허용한다

 

다리는 여자의 다른 신체 부위보다 늦게 늙는 듯한데

태어나는 순간부터 닥치고 움직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앉거나 기거나 서거나 접거나 꼬거나 걷거나 뛰거나

심지어 남자의 특정 신체 부위를 감싸거나 매만지거나

아, 너무 진부해서 더 이상은 쓸 수가 없다!

 

여자 다리의 이러한 다의성은 자연스레

여자가 피우는 담배의 다의성과 만난다

다의적인 다리를 적정 분량 드러내거나 감춘 채

담배를 피우거나 손에 들거나 입에 물거나 아무튼

담배와 육체적인 접촉 중인 정황 역시 다의적이다 

그 역시 야하고 귀여울 뿐더러 매캐하고 청량하고,

몸과 마음에 해롭고 또 이롭고, 머저리고 모범생이고,

향긋하고 구리고, 속 트이고 속 쓰리고 등등 

 

담배의 다의성은 분량상 다음 연구 주제로 남겨둔다

 

 

3.

 

다의적인 다리와 다의적인 담배가 함께하는 이미지를 떠올리며

환영받지 못한 흰소 해의 첫 떡국에 대해, 달걀 지단에 생각했다 

이후의 비극은 모두 그 때문일 것이라고 미리 고해성사를 해둔다 

 

 

 

*

 

 

결혼식 예복으로 샀던 원피스와 자켓은 (살이 쪄서-_-;;) 버린 지 오래, 저 샌들 역시 몇 번 신지 않은 채 결국 버린 것 같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삼십대와 사십대의 차이가 크다. 오십대가 기대된다 -_-;; 아이의 빨간 애벌레 운동화와 통통다리 ㅋㅋ 세 살인지 네 살인지. 깁스한 건 확실히 네 살 여름인데... 저 무렵엔 결혼식도 많이 다녔나 보다. 앉아 있는 아이의 통통다리, 아으 동동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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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구의 위엄

 

 

 

 

 

12월의, 2020년의 마지막 월요일

아이를 긴급돌봄에 맡기는 나에게 어떤 절박감이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일상이 유지되는 것에 어떤 안도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오늘의 내가 걱정이고 내일의 내가 걱정이다

그래도 하늘은 맑고 아이는 밝다

KTX 타고 부산 가자고, 마스크만 잘 쓰면 된다고 한다

자기가 아직도 아픈 거냐고, 곧 회복되지 않느냐고 묻는다

아이도 아이 나름의 걱정이 있겠지만 지금은 살랑살랑 웃는다

 

오늘의 나와 오늘의 아이가 참으로 걱정이지만

관악구의 시계탑과 현수막은 내일도 모레도 건재하다

시계탑을 믿고자, 현수막을 믿고자, 믿음을 믿고자 한다

관악구청역 5513, 5511 버스는 곧 서울대 정문을 통과할 것이다  

버스도 버스 나름의 걱정이 있겠지만 지금은 무작정 달린다

 

아침 9시 29분 51초

지하 스터디카페에는 어떤 당위도, 어떤 낭만도 없다

중년 강사의 우울이나 무명 작가의 환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맛없는 커피는 달달한 맛에, 텁텁한 공기는 따뜻한 맛에 맛있고

책을 맡겨둘 사물함도 고맙지만 그렇다고 걱정 인형까지 생기는 건 아니다

잠은 더 많아지고 체모는 메마르고 관절에는 힘이 빠진다

 

나는 오늘의 내가 걱정이고 내일의 내가 걱정이다

그래도 마지막 월요일은 맑기만 하다

 

 

 

 

*

 

 

 

 

 

 

 

 

 

 

 

 

 

 

 

 

지금 나의 상황 때문인지, 계속 맴도는 말들.

 

"나는 오늘의 내가 걱정이고, 내일의 내가 걱정이다. 그래도 하늘은 맑다. / (...) 그녀들 또한 나처럼 무엇인가, 걱정해야 할 것들이 있겠지만, 오늘은 춤을 춘다."

 

불과 알약 한 알을 줄였을 따름인데 일주일만에 현저한(!) 변화를 보이는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하기 힘들다^^; 경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이한테 독-약(파르마콘)을 먹였구나, 하.

 

 

 

 

 

 

 

 

 

 

 

 

 

 

 

 

<도봉구의 대립> 다시 읽으니 '성과 속' 같기도 하다^^; '그'는 (의사-짝퉁^^;) 그리스도인지. 아무튼 이번 시집, 몇 편 안 실렸지만, 오래 전 <생년월일>, <정오의 희망곡> 같은 싱거운(-그렇게 읽혔던) 시들에 비하면 넘나 신난다 ㅋ

 

"우리는 죄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자입니다 여러분!"

(...)

"지옥의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는 춤을 추었다. (...) 천국의 문을 열고 그는 광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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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세계에서 우주 가기

 

 

 

 

 

생활 세계에서 우주보다 낯설고 먼 과거에 다녀왔다

거창에는 나의 유년이 없다 그곳에는 거창이 있다

부산에도 나의 소년은 없다 그곳에는 부산이 있다

서울에도 나의 청년은 없다, 새삼스러울 것 없이 서울만 있다

익숙한 곳이 시간의 덮개를 뒤집어쓴 채 한없이 낯설다

우주에는 빈집만, 비닐하우스만 덩그러니 한 채 있다

 

오늘의 오소리감투와 간은 꿀맛이었다

그런데도 아이는 철저하게 튀김만 탐닉했다

오징어, 새우, 김말이에 고구마까지

이런 날도 있다

아이는 싸구려 튀김이 그리웠던 것이다

나는 그동안 아이를 너무 몰랐다  

 

생활 세계에 살면서 관념 세계에 놀러 다녔다

그것이 '푸른괭이'에게 잘 어울렸다 

세계의 우울이 바로 옆에 있었다

빈집이 차는 동안 세계의 우울이 울고 있었다 

불안에 떨며 환멸로 넘어가 권태가 될 참이었다

그러지 마, 내가 놀아줄게

아침 햇살 같은 웃음과

너무 한낮의 연애 같은 포옹과 

동짓날 밤의 정사 같은 열정으로

흥, 순거짓말쟁이, 까르르!

 

낡은 우주 셔틀 타고 푸른괭이의 빈집에 놀러오세요

빈집이라 빈방이 많아요, 빈방 채우는 재미가 쏠쏠해요

다 차면 하나씩 태워요, 비닐하우스를, 헛간을, 뒷간을

불길이 활활 치솟으면 생활 세계로 돌아오는 거예요 

의기양양하게 또 의기소침하게

자존심도 세우고 자존감과 자신감도 갖고서,

반의어는 실은 동의어, 적어도 유의어임을 알 수 있네요

 

아이는 내일 아침에 참치김치볶음밥이 먹고 싶다고 했다

치킨 스튜는 싫다고, 오늘 밤에는 도넛 터널을 질주하는 꿈을 꿀지도 모른다

아이를 위해 생활 세계에서 우주를 다녀올 소담한 꼬마 셔틀을 준비해야겠다  

 

 

 

 

 

 

*

 

어젯밤에 썼는데(그러고 박상순 시를 읽고) 세상에 공짜가 없어 또 늦잠을 자버렸다 -_-;

 

 

 

 

 

 

 

 

 

 

 

 

 

 

 

 

 

- 이장욱, <생활 세계에서 춘천 가기>, <세계의 우울> 

- <잠입자>의 '멧돼지'는 дикообраз: 산미치광이, 호저, porcupine. 찾아보니 애버랜드에도 있구나, 헉. 생긴 것과는 달리 초식!인 이 녀석과 남편이 모스크바에서 쇠사슬에 묶인 모습인 채로 있는 것을 봤다는 '그리즐리 베어'에 대해 써야겠다.  

- 헛간을 태우다(하루키) / 비닐하우스를 태우다(이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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