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탈신화화와 새로운 신화의 창조
3-1. 샤토프의 혁명: 과연 토끼는 어디에?
샤토프의 사상적 편력은 그 나름의 자족성을 가지며 게르첸이 그를 위해 써주었다는 「빛나는 인물」(Светлая личность)의 신빙성 여부와는 별개로 젊은 혁명가로서의 그의 위상 역시 명백하다. 그는 “민중들 사이에서 자라나” 온갖 고통을 감수하면서 “박애, 평등,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했으며 민중은 바로 이 “대학생”을 기다려왔던 것이다(상권, 542-543). 여러 인물의 말도 증언해주듯 ‘과거의’ 샤토프는 민중을 등에 업고 경배할 ‘누구’를 찾아 헤맸던, 심지어 그 스스로 그 ‘누구’가 되고자 했던 ‘메시아-혁명가’였다. 그랬던 그가 이제 메시아의 도래를 꿈꾸는 광인으로 탈바꿈한다.
일견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가지 정체성은, 그러나,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생각한다면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표트르처럼 샤토프도 스타브로긴을 ‘누구’의 메타포로 받아들인다. 다만, 끊임없이 현실 정치의 맥락을 강조하는 표트르와는 달리, 그는 시공간적 초월성에 사로잡힌다. 더불어 이미 그 ‘누구’의 지위에 서길 포기하고 스타브로긴을 매개로 끊임없이 그 ‘누구’를 갈망하는데, 이 경우 믿음은 정녕 실재가 아니라 의지와 욕망의 대상, 즉 ‘토끼’이다.
샤토프는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 표독스럽게 웃었다. “‘토끼 소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토끼가 필요하다. 신을 믿기 위해서는 신이 필요하다.’ 당신은 이 말을 페테르부르크에서, 뒷발을 잡아서 토끼를 손에 넣으려 했던 노즈드료프처럼 말하곤 했다더군요.”
“아니죠, 노즈드료프는 벌써 토끼를 잡았다며 우쭐거렸었죠. 내친 김에 괜찮다면 무례한 질문을 하나 해도 될지.(…) 당신의 그 토끼는 잡혔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달아나고 있습니까?”
“감히 나한테 그런 말로 묻지 마시오, 다른 말로, 다른 말로 물어보란 말입니다!” 샤토프가 갑자기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렇다면 다른 말로 하죠!” 니콜라이 프세볼로도비치는 그를 준엄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오직 이걸 알고 싶습니다.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 아닙니까?”
“나는 러시아를 믿고 나는 러시아의 정교를 믿고… 나는 그리스도의 육신을 믿고… 나는 새로운 재림이 러시아에서 일어날 것을 믿고… 나는 또…” 샤토프는 거의 광적인 흥분에 들떠서 더듬거렸다.
“그럼 신은? 신은 말입니다?”
“나는… 나는 신을 믿게 될 겁니다.”(상권, 393)
샤토프의 슬라브주의 및 메시아주의는 맹목적인 국수주의와 선민의식의 극단적인 표현, 더욱이 오직 그의 머릿속에서만 생명력을 얻는 광증의 징후에 가깝다. 심지어 ‘신’조차도 믿음의 확고한 대상이 아니라 그의 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부유하는 ‘애처로운 신기루’, 즉 관념일 따름이다. 작가는 자신의 사상적, 전기적 편력을 상당 부분 샤토프에게 투사했지만 그를 영원히 ‘거대한 회의의 도가니’에서 헤매게 할 뿐 ‘호산나’를 선사하지는 못한 것이다. 실상 ‘혁명의 관념’을 ‘신의 관념’으로 대체했다고 해서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본질의 변화는 전혀 다른 차원, 즉 ‘관념’의 대립 쌍으로서의 ‘삶’ 속에서, 또 ‘관념인’이 아닌 그저 한 ‘인간’ 샤토프에게서 일어난다.
메시아-혁명가 샤토프와 메시아주의자 샤토프 사이에는 어떻든 환멸과 그로 인한 전향의 운동성이 들어 있다. 과연 그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스체판이 암시하듯(상권, 149) 그의 아내 마리(Marie)와 스타브로긴의 관계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대체로 샤토프는 스타브로긴 집안의 농노로서 농노해방과 더불어 자유인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이 집안에 예속돼 있다. 이러한 물리적 주종 관계는 관념적 층위의 논의보다 훨씬 앞서는 것이다. 감히 ‘주인나리’의 뺨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통렬한 아이러니를 담아 “노동을 통해 신을 얻어라”, “부를 버려라”(상권, 398)라고 촉구한들, 신분-계급의 장벽은 절대 허물어지지 않는다. 마리의 임신 및 출산은 분신(하인)이 원상-영웅에게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갖다 바치는 희생제의의 메타포로까지 읽힌다. 그로 인해 샤토프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관념의 여러 가능성이 초래하는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컸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기적, 진정한 구원이란 “그리스도가 러시아 땅에 재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가 자기의 품으로 돌아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는 일”일 것이다. 자연과 생명의 신비에 대한 그의 경탄(“두 인간이 있었는데 갑자기 세 번째 인간이, 더할 나위 없이 완전무결한 새로운 정신이 생겨난 겁니다.” 하권, 916-917)은 곧 작가의 차원의 발언으로 환원해도 무방할 것이다.
(크람스코이가 그린 임종 시의 도...키: 은근한 미소가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악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느닷없이 도래한 유토피아는 역시나 느닷없이 닥친 파국에 의해 순식간에 와해된다. 샤토프의 죽음 자체가 비극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악령>의 구성상 그는 스타브로긴의 분신으로서 불가피하게 마이너스 가치를 지녀야 했다. 가령, 스타브로긴이 ‘절세 미남’(неописаный красавец)에 부유한 귀족이어야 하는 만큼이나 샤토프는 추남에 농노여야 한다. 소설 텍스트에서 유달리 강조되는바, 작은 키에 짜부라진 듯 땅딸막한 몸집, 지나치게 넓은 어깨와 못생긴 얼굴, 어설픈 행동거지 등 작가는 샤토프를 통해 자신의 외모를 희극적으로 과장해놓았다.
문제는 그의 용모가 환멸을 느낀 메시아-혁명가(주인공-영웅)의 정체성에 부합하지도 않거니와 동정이라면 모를까 어떤 카리스마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점이다. 덧붙여 작가는 샤토프를 성스러움이 거세된 무의미한 폭력의 희생양으로 만듦으로써 애절한 휴먼드라마라면 모를까 숭고한 비극의 가능성을 차단해버린다. 말하자면 ‘혁명’(‘관념’)도 죽고, ‘인간’도 죽은 것이다.
어떤 공연에서는 이렇게 멀쩡하게(?) 생긴 배우가 샤토프 역을 맡은 모양인데요, 샤토프의 핵심은 (이 역시 지라르도 대략 지적했던 듯한데) 그가 추남이라는 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