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혁명가의 신화 - 표트르 베르호벤스키

 

 

(중략)

표트르의 바쿠닌식 무정부주의는 그 시작(파괴)과 끝(건설)에 있어서 쉬갈료프적 도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인물 자체도 그 출발점에 있어서는 명실상부한 혁명가, 또 스타브로긴이 붙여준 별명대로 열광자’(эн- тузиаст: 상권, 379)로서 그 이름에 걸맞은 물리적 운동성과 대중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수완을 부여받았으며 원칙과 이론도 갖추고 있다.

 

 

스타브로긴, 당신은 미남입니다!() 당신은 끔찍한 귀족이에요. 귀족이 민주주의에 투신한다니, 이 얼마나 매혹적입니까!() 당신은 선구자고 당신은 태양이고 나는 당신의 버러지에 불과하단 말입니다.”(하권, 646)

쉬갈료프 같은 작자는 정말 많기도 많죠! 그러나 한 사람, 러시아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첫걸음을 얻어냈고, 첫걸음을 어떻게 내디딜지를 알고 있어요. 그 사람이 바로 나라고요.() 당신이 없으면 난 제로, 당신이 없으면 난 파리이고, 유리병 속에 든 이념이고, 아메리카 없는 콜럼버스입니다.”(하권, 647)

우리는 소리 높여 파괴를 외칠 겁니다.() 우리는 방화를 만연시킬 겁니다. 우리는 전설을 퍼뜨릴 겁니다.() 어쨌거나 혼돈이 시작될 겁니다! 이 세계에서 아직 본 적도 없는 그런 동요가 시작될 겁니다.”(하권, 650.)

당신은 신처럼 오만한 미남이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 희생양의 후광에 둘러싸인 <숨겨진> 존재입니다. 중요한 건 전설을 퍼뜨리는 것! 당신은 그들을 압도할 겁니다, 그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압도할 겁니다.() 그때가 오면 우리는 어떻게 석조건물을 건설할 것인가를 생각할 겁니다. 처음으로! 건설하는 건 우리입니다, 우리, 오직 우리뿐이죠!”(하권, 652)

(중략)

표트르는 애당초 대심문관과 같은 환상 텍스트가 아니라 현실 텍스트에서 창조된 인물이다. 따라서 그가 자신의 천년왕국, 지상낙원을 건설하기 위해서 내걸어야 할 역시 관념이 아니라 실체가 될 수밖에 없는데, 이 지상의 신이 계속 뻗대며 말을 듣지 않는다.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라는 욕망의 가장 근원적인 요소가 충족되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함께”, “공동으로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역시, 공통의 피-죗값(샤토프 살해)으로 민중(5인조)을 올가미처럼 묶어버리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수없이 반복되어 온 신화적 희생제의의 현실적, 정치적 표현이기도 하다. , ‘성스러움을 내세워 폭력을 정당화하고 또한 역설적이고 순환적으로 그 폭력을 통해 성스러움의 가치를 획득하는데, 이 경우 희생양은 가장 순수하면서도 가장 더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도식의 실현 과정은, ‘속화혹은 이 불가피하게 초래할 수밖에 없는바, 시종일관 웃음으로 점철돼 있다. 5인조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주저와 불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표트르의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부도덕성, 아니 무도덕성 때문에 혁명과 혁명가의 신화는 야비한 정치협잡과 치졸한 복수극으로 변모된다. 특히, 원칙의 실현이 되어야 할 혁명에 개인적인감정, 표트르 자신의 원한을 개입시킴으로써 탈신화화 작업, 웃음은 극에 달한다.

 

 

실상 표트르가 하필이면 샤토프를 지목한 것에는 신화적 제의의 정치적 실현과는 무관한, 보다 치명적인 이유가 있다. 그는 키릴로프의 폭로대로(하권, 946) 샤토프가 제네바에서 자기 뺨에 침을 뱉었던 일을, 그 모욕을 잊지 못했던 것이다. 표트르가 자신의 원형인 네차예프와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것도 이 지점이다. 그는 제 손으로 샤토프에게 총을 쏘고 시신에 돌을 매달아 수장하는 일도 직접 한다. 이 장면 속의 표트르는 이반 왕자-을 찾아 헤매던 혁명가도, 열광자도 아닌 치사하고 못된 살인자, 그렇기에 우스꽝스러운 광대일 뿐이다. 광대의 손에 맡겨진 혁명 역시 카니발적 소동, 키릴로프의 말을 빌자면 악마의 보드빌’(дьяволов во- девиль: 하권, 956)일 뿐이다. 이로써 표트르는 그 자신의 고백대로 사회주의가 아닌 협잡꾼”(하권, 649)으로 판명되고, 그가 스타브로긴 앞에서 토로한 관념도 진정성이 결여된 광적인 요설로 전락한다.

 

물론 그는 어딜 가든 배신과 밀고를 일삼고 유령’ 5인조를 만들어내며 승승장구할 것이다. 출혈의 정도가 어느 소설보다도 더 심한 <악령>이기에, 그의 생존은 유난히 두드러진다. 그는 자신의 피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지만(키릴로프에게 손가락을 깨물려 상처를 동여맨 게 전부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텍스트에서는 가장 참혹한 죽음인 미학적 죽음을 선고받는다. 이는 각종 미명 하에 혼돈과 파괴를 일삼았던 어설픈 니힐리스트들에게 내린 작가 나름의 사형 선고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구체적인 타도의 대상으로 삼은 권력, 그리고 등에 업고자 한 민중의 실체는 어떠한가.

 

2-3. 권력의 횡포? 대중의 반역 

 

지방 권력의 대표 격인 신임 현지사 안드레이 안토노비치 폰 렘브케는 좀처럼 유형화화기 힘든, 상당히 특이한 인물이다. 독일인이라는 점에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지만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통상적인 의미의 권력자에게는 걸맞지 않은, 다분히 자폐적이고 유아적인, 심지어 환상적인그의 성격(종이 접기, 소설 창작, 꽃 꺾기 등)이다. 그의 정치적 행보가 대체로 맥락을 결여하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다. 가령, 스체판을 좌익용공분자로 몰아 그의 집을 수색하고 물품을 차압한 것은 블룸의 개인적인 착오가 빚어낸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었다. 쉬피굴린 공장 사태 역시 오해로 점철돼 있다.

 

 

모자를 벗어라그는 숨을 헐떡이며 거의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릎을 꿇어!” 그는 예기치 못하게, 그 자신으로서도 전혀 예기치 못한 째지는 소리를 질렀는데, 그 예기치 못함 속에 어쩌면 뒤이어 나타난 사건의 결말 자체가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 “해적들!” 그는 훨씬 더 째지는 듯한, 훨씬 더 터무니없는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고, 그의 목소리는 탁 끊기고 말았다.() / “맙소사!” 군중들 사이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청년은 성호를 긋기 시작했고 서너 명은 정말로 무릎을 꿇으려고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완전히 한 덩어리가 되어서 세 걸음 정도 앞으로 움직이더니, 갑자기 모두들 한꺼번에 웅성대기 시작했다. “각하, 사십을 주기로 했는데관리인이네 놈은 찍소리도 하지 말라고 해서어쩌고저쩌고, 하여간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 안드레이 안토노비치는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꽃다발은 아직도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매질을 해라!”(하권, 684-685)

 

 

화자의 진술대로 그저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 다른 누구도 아닌 장군 나리”(하권, 671)에게 직접 얘기를 해보려고 몰려든 선량한 시민이 경찰 당국 및 이미 정신 이상의 조짐까지 보이는 현지사의 의식 속에서 졸지에 해적혹은 폭도로 등극한다. 셰익스피어의 코미디나 로맨스에서나 가능할 법한 역할 혼동’(qui pro quo) 내지는 자가당착이 실제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 결과가 뜻밖에도, 발랄하고 경쾌한 해피엔드가 아니라 처참한 유혈사태일 수 있음은 역사가 증명해주기도 한다. 물론, 쉬피굴린 사태는 혁명에 대한 어떤 표상도 없는 질박한 개개인의 집합으로서의 민중과 얼빠진 권력의 우스꽝스러운 충돌에서 끝난다. 실상 희극이든 비극이든 플롯 생성의 원동력은 오해인바, 율리야 렘브케의 파국도 그녀의 허영심과 공명심, 무엇보다도, 화자가 수차례에 걸쳐 강조하는바, 오랜 세월 동안 미혼의 굴욕을 견뎌야 했던 그녀의 보상심리가 만들어낸 자기 환상의 산물이다. 어떤 경우든 렘브케 부처는 타도해야 할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동정해야줘야 할 중년부부일 따름이다.

 

 

표트르의 혁명에 동참한 5인조(럄신, 리푸친, 비르긴스키, 쉬갈료프, 톨카첸코), 레뱌드킨, 에르켈 역시도, 쉬갈료프를 예외로, 혁명의 신화를 통째로 뒤집기 위해 창조된 인물들처럼 보인다. 비르긴스키가 거사를 전후하여 수시로 내뱉은 말대로 이건 아니다!”(Не то!) 어쨌거나 표트르가 단시간에 결성한 어중이떠중이와 애송이 집단, 밀린 품삯을 받는 것 외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민중이 혁명의 주역이 된다. 여기에, 시대착오적인 자긍심과 옹졸한 불안 사이를 오가는, ‘진보 진영감상적 퇴물스체판 베르호벤스키와 허영에 들뜬, ‘온건파내지는 중도성향의 속물 작가 카르마지노프가 얼떨결에 합세한다. 저속한 호기심에 사로잡혀 매순간 스캔들을 갈망하는 익명의 군중들의 존재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중략)

 

 

전반적으로 <악령>이 문제 삼는 것은 니힐리즘이나 당시 러시아의 현실 정치가 아니라 정치-혁명의 논리가 갖고 있는 본질적인 오류이다. ‘관념인간의 변증법은 너무도 복잡다단하여, 좀처럼 특정 이데올로기의 특정 실현으로 환원되지 못한다. 이 문제를 풀어감에 있어 도스토예프스키는 정공법을 택하여 정치-혁명의 과정을 그려냈지만, 동시에 그것과 맞닿은 또 다른 차원을 선보인다. ‘지상낙원, 참으로 역설인데, ‘지상에서 불가능하다면, 지상의 존재가 꿈꿀 수 있는 유일한 지상낙원은 결국 몽상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진정한, 하지만 또 진정으로 기만적인, 그렇기에 애처로운 혁명은 이제 <악령>의 두 광인의 정신 속에서 일어난다.

 

 

 

 

 

러시아에서 최근에 만든 티브이 시리즈 <악령>의 몇 장면들입니다. 저도 아직 다 못 봤는데요, 중간, 계단 옆에 서 있는 금발의 남자가 스타브로긴입니다. 완죤 마음에 안 들어요...ㅠ.ㅠ

 

 

 

 

 

 

 

좀 멋쩍지만, <악령>에서 나왔다고 할 수도 있는 제 소설도 떠올려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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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3-12-01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 티브이 시리즈 <악령> 어디서 보신거죠?ㅠㅠ

푸른괭이 2013-12-02 10:29   좋아요 0 | URL
유투브 검색하면 어지간한 건 다 뜹니다. <악령> 옛날 버전과 최신 버전, <죄와 벌> 두 버전, <백치> 두 버전, <카라마조프> 최신 버전, 심지어 <도스토예프스키>(그가 주인공인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몽땅 다 보실 수 있습니다...^^;; 단, 자막이 없다는...ㅠ.ㅠ

; 2013-12-15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검색제목을 뭐라고 쳐야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