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스타브로긴과 신화화-탈신화화의 메커니즘: 영웅-주인공, 분신, 가면
4-1. <악령> 속의 스타브로긴: 인간의 가면을 쓴 ‘신-악마’
<악령>의 구성상 모든 논의는 스타브로긴에서 출발하거나 아니면 그에게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는 이 작품의 ‘알파이자 오메가’로서 그와 여타 인물 간의 관계는 주인공-영웅(원상)과 분신 관계의 신화적 도식을 근대적 틀에서 재현해낸다. 본원적 의미에서의 분신은 ‘웃음과 패러디’의 기능을 수행하면서(смеховой двойник, пародирующий двойник) 원상의 생존(부활)을 위해 대신 죽어주는 자이다. 따라서 주인공-영웅과 분신은 엄격한 가치론적 위계질서에 종속되며 주종관계 역시 명확히 규정된다.
이 도식에 따를 때 스타브로긴의 분신들의 희생은 표트르의 미학적 죽음까지 포함하여 궁극적으론 주인공-영웅의 부활을 예고함과 동시에 오직 이를 통해서만 ‘성스러움’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스타브로긴의 자살로 인해 재구축된 분신 신화의 도식은 상당히 왜곡되고 <악령>은 ‘성스러운[신의] 희극’(Divine Comedy)이 아니라 희화와 그로테스크로 점철된 비극이 된다. 그렇다면 문제는 구성적 층위가 아니라 미학적 층위인바, 스타브로긴의 형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신화가 아닌 소설 속에서 ‘신’을 창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신’은 그 본질상 ‘몸’(육체성)을 획득하는 순간 신성을 상실하는 반면 ‘몸’을 갖지 않으면 소설적 인물(인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보다 손쉬운 작업은 그 자체로 신성의 육화인 그리스도를 재현해내는 일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오랫동안 이 작업에 공을 들였고 그 성과인 므이시킨, 알료샤 등은 실패한 만큼이나 또한 성공적이었다. 그가 스타브로긴을 통해 이룩한 문학적 성취는 소설, 더욱이 정치와 혁명의 탈신화화를 다룬 극히 범속한 소설 속에서 ‘신’의 형상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스타브로긴 인생의 몇 장면>(?) 공연 포스터.)
더욱이 그 ‘신’은 목소리 따위가 아닌, 엄연히 살과 피를 가진 소설 속 인물이며 ‘악마성’의 현시를 통해 ‘신성’을 획득하는, 대단히 위험한 존재이다. 작가가 그의 유물론적 토대를 제거 내지는 은폐하는 방식은 키릴로프의 경우와는 정반대이다. 키릴로프에겐 아무것도 주지 않은 반면, 스타브로긴에겐 젊음과 아름다움, 건강함과 육체적 완력, 부와 세속적 지위 등 무한히 방탕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부여한다. 이렇게 그를 1860년대 러시아귀족사회가 낳은 패륜적 돌연변이로 만듦으로써 사회학적 동기화를 획득함은 물론 물질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롭도록 함으로써 더욱더 ‘시험’에만 몰두하도록 만든다. 그에게 연역적으로 접근한다면 명실상부한 고백록인 다리야에게 보내는 편지부터 짚어야 할 것이다.
나는 곳곳에서 내 힘을 시험해 봤습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알아보기 위해서’라면서 내게 그 일을 권했지요. 나 자신을 위한, 또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그 시험에서, 그 힘은 예나 지금이나 내 평생 동안 무한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당신의 눈앞에서 나는 당신 오빠의 따귀를 참아 냈습니다. 결혼사실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힘을 어디에 쓸 것인가? - 바로 이것만은 결코 알 수가 없었고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이 스위스에서 그렇게 격려를 해주었고 나 역시 그걸 믿었건만.(…) / 당신의 오빠는 내게, 대지와의 관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신도 상실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모든 목적을 상실한다고 말하더군요. 이 모든 것을 두고 끝없는 논쟁을 벌일 수도 있겠지만, 내게선 오직 한 푼의 관대함도 없이, 한 푼의 힘도 없이, 부정(否定) 하나만이 흘러나왔을 뿐입니다. 아니, 부정조차도 흘러나오지 못했지요. 모든 것이 언제나 미미하고 시들시들해집니다. (하권, 1041-1042)
각종 ‘시험’의 결과로 나타난 ‘부정’은 상태라기보다는 무한한 운동성을, 따라서 비존재와 무가 아니라 존재와 생성을 향한 강한 열망을 드러낸다. 시험-부정의 일환으로서 다수의 분신을 동시적으로 창조한 것도 천지창조의 메타포를 소설 텍스트에서 실현한 것으로 읽힌다. 단, 태초에 신이 자신의 모습에 근거하여(образ и подобие) 인간을 만든 것에 반해, 스타브로긴은 대상의 본질에 천착하여 자신의 ‘관념’을 그 틀 속에 집어넣고 형상-이름을 고착시키지만 정작 그 자신은 아예 형상-이름이 없는, 고로 추한 존재(безобразный-безобразный)이다.
여기서 끊임없는 움직임이 시작되는바, 이러한 내적 방황에는 분명히 레르몬토프적인 유산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레르몬토프-페초린이 극히 유아론적이며 또한 유아적으로 강력한 자아의 팽창으로 인해 괴로워했다면, 스타브로긴의 고뇌는 정반대로, 블랙홀과 같은 자아를 하나의 형상-이름으로 고착시킬 수 없는 데서 비롯된다. 타인에겐 무수한 이름을 지어주고 그것을 통째로 자기 것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순간 그 대상은 스타브로긴의 거대한 심연 속으로 집어삼켜지고 그는 또 다시 이름을 상실한다. 전부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 ‘신’이 지상에 왕림할 때는 어쨌거나 형상-이름을 빌려야 한다. 현실에서 그가 ‘참칭자 드미트리’(마리야 레뱌드키나의 폭로: 상권, 432)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스타브로긴의 다른 시험도 마찬가지이다. 파괴적인 열정의 시험(리자베타 투쉬나), 원시적 구원 가능성의 시험(마리야 레뱌드키나), 영원한 안정의 시험(다리야 샤토바) 등은 결과적으로 심연의 넓이와 깊이를 각인시킬 따름이다. 니체의 저 유명한 아포리즘,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네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네 안으로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 속의 괴물 및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공히 스타브로긴의 은유로 읽힌다. 심연이 남은 집어삼킬 수 있어도 자신은 집어삼킬 수 없듯 ‘신’은 타살은 해도, 또한 살해의 객체가 될 수는 있어도 자살은 하지 못한다.
물론, 스타브로긴은 자살로 삶을 마감하지만, 문제의 장면에서 작가는 키릴로프의 경우와는 달리 짧은 진술만 던져줌으로써 ‘인간의 가면을 쓴 신-악마’라는 그 신비스러운 정체성을 그대로 보존한다. 이를 위해서 이미 카트코프의 강압적 권유도 없었건만 그토록 공들여 쓴 「치혼의 암자에서」를 단행본 <악령>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일 터이다. 달리 말해 1922년까지 방치되었던 이 거친 원고에 스타브로긴의 비밀이 들어 있는 것이리라.
우라사와 나오키, <몬스터>의 요한입니다. 개인적 생각으론, <악령>의 스타브로긴과 싱크로율 99프로입니다ㅋㅋ 스타브로긴의 만화 버전이랄까요 ^^; (나오키의 <플루토>에서는 엡실론이 대략 요한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