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치혼의 암자에서와 스타브로긴: ‘-악마의 가면을 쓴 인간

 

 

치혼의 암자에서가 문제적인 것은 탈신화화된 주인공, 인간스타브로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고백-참회를 들어주는 자(confesser-confessor)가 아니라 고해자(confesser)이며 인간의 가면을 쓴 신-악마에서 -악마의 가면을 쓴 인간으로 내려선다. 심지어 저는 저 스스로 저 자신을 용서하고 싶습니다, 바로 이게 저의 주된 목적, 제 목적의 전부입니다!”(하권, 1093)라고 외치기도 한다. 물론 우리는 스타브로긴의 고백이라는 서류-문건’(документ)의 진정성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는데, 어떻든 이것은 명백히 고백-참회에 대한 신랄한 패러디이기 때문이다.

 

카뮈가 각색한 <악령>의 희곡 버전

 

 

하지만 바로 여기에 스타브로긴의 원죄, 십자가의 숙명(그의 이름 자체가 십자가를 의미한다)이 들어 있기도 한바, 그는 신-악마의 지위를 누리며 스스로를 위대한[크나큰] 의 주체로 만들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책형 앞에서 속죄하려는(redemption) 욕망과 그것을 거부하려는 욕망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악령에 들렸다 치유된 환자처럼 신의 은총을 바라는 것, 동시에 저 악령들의 수장으로서 돼지 떼와 더불어 파멸하기를 바라는 것, 둘 다 진실이며 또한 거짓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용서 및 속죄에의 욕망과 그것을 거부하는 내적인 척력 사이의 충돌, 형식적으론 고백()고백’(антиисповедь) 사이의 긴장이다. 이 고뇌를 치혼은 그 나름대로 간파한다.

 

이 기록은 죽도록 상처 입은 마음의 요구로부터 곧바로 나오는 것입니다 - 그렇게 이해해도 될까요?” [치혼]는 집요하게, 비상한 열의를 보이며 계속했다. “그래요, 이것은 참회이고 당신을 압도해버린, 참회의 자연스러운 요구입니다.() 범죄를 고백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뭣 때문에 참회를 부끄러워하십니까?() 당신은 자신의 심리 분석을 즐기는 것 같습니다, 사소한 것에 일일이 집착하고, 그저 당신에겐 있지도 않은 그런 무감각함을 뽐내며 독자들을 놀래려는 듯. 죄인이 재판관을 향해 오만한 도전을 던지는 게 아니고 뭡니까?” (하권, 1086-1087)

제가 뭘 견뎌내지 못하겠습니까? 그들의 증오를 겸허하게 견뎌내지 못하겠습니까?”

증오 하나만이 아닙니다.”

또 뭐가 있죠?”

그들의 웃음입니다.”()

됐어요, 어디 지적이나 해주시죠. 도대체 제 수기에서 정확히 저의 어떤 점이 우스꽝스럽다는 겁니까?()”

심지어 가장 위대한 참회의 형식 속에도 이미 뭔가 우스꽝스러운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럼 신부님께서는 오직 형식에서만, 문장에서만 우스꽝스러운 점을 발견하시는 겁니까?”()

그 본질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아름답지 못한 것이 죽일 겁니다.”()

뭐라고요? 아름답지 못한 것이라고요? 뭐가 아름답지 못하다는 겁니까?”

범죄입니다. 진실로 아름답지 못한 범죄가 있는 겁니다.()”(하권, 1090-1092)

 

거리낌 없이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 그것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뻔뻔함, 그러고서도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아집 등의 충돌 과정에서 수치’(стыд)의 감각이 생겨난다. 치혼이 암시하듯, 참회와 용서가 진정으로 아름다우려면 이 수치를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소위 대죄인’(ве- ликий грешник)이 수치심 없이 하느님의 품안에서 새로운 삶을 찾는다면 그야말로 후안무치한(бесстыжный) 행위임을 스타브로긴은 잘 알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감히 신조차도 용서하지 못할 죄인이라는 자신에 대한 선민의식과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신-그리스도에 대한 도전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다. 동시에 진실로 아름답지 못한 죄가 낳은 추의 감각, 그것에 대한 통렬한 인식이 개입돼 있다. 이렇게 복잡다단한 요소들이 빚어내는, 자기 분열을 야기할 만큼 치열한 내적 투쟁은 밖으로 표출되는 순간 자연스레 웃음’(우스꽝스러움)의 형상을 띨 수밖에 없다.

 

치혼 앞에서 스타브로긴이 보이는 신경질이고 초조한 태도는 물론이거니와 서류-문건을 둘러싼 일련의 정황이 모두 우스꽝스럽다. 루소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기도 하지만(하권, 1066) 신실한 참회와 위악적인 자기 해부 내지는 자기 과시적인 노출증 사이의 경계는 실로 애매한 것이다. 어떤 경우든 치혼의 암자에서의 스타브로긴은 18세기 계몽의 인간으로서 비교적 행복한 기만에 사로잡혀 있던 루소(실제 <고백> 속의 문학적 자아인 루소의 형상과는 상당히 구분되지만)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신의 가면을 벗은 그의 실체는 한낱 하는 일 없이 빌빌대고 돌아다니는 귀족 도련님”(샤토프의 말: 상권, 396), 무위와 권태에 허덕이며 유희의 욕망에 탐닉하는 28세의 귀족 청년일 따름이다. 이제 다시 <악령>의 플롯으로 돌아가자.

 

치혼의 예측대로 스타브로긴은 오로지 종잇장의 공표를 피하기위해 흡사 출구라도 찾듯 새로운 범죄 속으로 몸을 내던”(하권, 1099)진다. 모든 죄악은 작위의 죄와 부작위의 죄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점잖게, 즉 몹시 야비하게 행해진다. 이 모든 것이 종결된 후 다리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자살이 무한히 늘어선 기만의 대열 중 마지막 기만”(하권, 1043)이기에 자신은 결코 자살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고 말했다. 치혼의 암자에서를 곁들인다면, 자살은 수치웃음을 극복하지 못한 대가이며 신의 심판을 끝까지 거부하고 오롯이 그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의 표출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기만성에 관해서라면 스타브로긴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을 것이다. 실상 그의 -악마로서의 아우라는 물론이거니와 아무도 탓하지 말라, 나 스스로 한 일이다”(하권, 1045)라는 유서의 강렬함과는 별개로, 순전히 독자의 상상력으로 몫으로 남겨진 스타브로긴의 최후, 즉 자기 목을 매달 비단 노끈에 열심히 비누칠을 하고 망치로 벽에 못을 박는 모습은 가히 키릴로프의 최후만큼이나 희극적이다. 자살 이후에 남는 것도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아무리 붙여도 무의미한, 그저 목매단 시체일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설 속 인물로서 스타브로긴은 우스꽝스러움을 비롯한 온갖 파토스를 체화한 상태로 신화의 영역에 붙박인다. 탈신화화의 공격 끝에 한 마리의 추악하고 유치한 거미로 치환될지라도 어떻든 그가 누구 앞에 경배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적어도 끝까지 그러한 입장을 견지하고자 했던 유일한 자라는 사실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소설이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어야 마땅한 리얼리즘의 문법을 생각한다면 스타브로긴은 정녕 베르쟈예프의 말대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맹점이자 매혹이자 원죄였으며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십자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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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쓸 때 참조했더라면 좋았을 책입니다. 바쿠닌은 물론 그와 네차예프의 관계, 네차예프의 성격 등에 관한 얘기도 나옵니다.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대학 시절 숙제 목록 일순위였던 것 같은데요(^^;;) , 그가 쓴 도스토예프스키 전기도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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