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때 주변의 눈치가 보여 어쩔 수 없이 독서실을 다녀야했다.
유난히 밤잠이 많은 나는 9시까지 자율학습을 한 뒤 다시 독서실을 가야하는 게 정말 죽을 맛이었다.
내가 어느 정도로 밤잠이 많았냐 하면 초등학교 때 나의 소원이 9시에 나오는
"어린이 여러분 이제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입니다"라는 안내방송을 보는 것이었고,
27살이 되도록 1월 1일을 여는 보신각 종소리를 듣는 걸 한번도 성공해보지 못했다.
그러니 독서실에 가서 하는 일이라곤 정석이나 영어사전을 베고 자는 것이 거의 전부.
그런데 독서실을 다닌 지 일주일도 안 되어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독서실 옆 주산학원에 귀신이 나타나는 걸 한 여학생이 봤다는 것이다.
여자화장실을 가노라면 주산학원을 지나쳐야 하는데 창문으로 들여다보면
바닥이나 책상 위에 얼굴만 동동 떠 있는 여자귀신이 있다는 것이다.
한달쯤 지나자 귀신을 봤다는 목격자가 여럿 됐지만,
나야 원래 귀신을 안 믿는 터라 코웃음을 쳤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날 여느 때처럼 공부는 뒷전으로 늘어지게 자고 있다가, 찢어지는 비명소리에 깼다.
얼른 뛰쳐나가보니 여학생은 복도에 주저앉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내가 다가가자 다시 공포의 비명을 질렀다.
...
결국 그 소동으로 난 소원대로 독서실을 관둘 수 있었다.
우연히 주산학원 자물쇠가 고장난 걸 알고 독서실엔 가방만 내려놓은 뒤
주산학원 바닥에 드러누워 자거나 책상에 엎드려 자던 게 들통났으니 별 수 있나.
외가 내력상 유난히 흰 피부와 검은 옷을 즐겨입던 습관, 그리고 복도끝에만 어슴프레 등이 있던 관계로
지나가다 창문으로 언뜻 잠자는 날 본 여학생이 얼굴 동동 귀신이라는 말을 퍼뜨렸고,
난 내가 소문의 진원인 줄도 모르고 느긋이 주산학원 침실을 애용했으니 소문은 확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 덕분에 난 아직도 귀신을 믿지 않는다.